조만식(1883-1950)
조만식(1883-1950)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1남 2녀 중 독자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백 섬을 수확하였고, 서당에서 가르치던 향반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김경건이었다. 6세가 되던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병약한 가운데 아버지가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히게 하여
의리와 곧은 절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평양으로 이주한 후 아버지가 위탁판매업인 물산 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 되었는데
그도 15살이 되던 해 평양에서 포목상을 경영하였고,
한정교와 동업하여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아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이 났다.
1895년에 부모의 권유로 두 살 연상의 박 씨와 결혼하였고,
조칠숭이 태어나 지적장애인으로 26세에 요절하였다.
박 씨와 사별한 1902년에 이의식과 재혼하였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대동강 중류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 마을로 피난하여 생활하던 중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한정교의 전도로
크리스토교에 귀의했고,
그와 함께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척한
72칸의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
1905년 초 장대현교회에서 개최한 신년사경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아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그해,
23살의 늦은 나이에 조만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M. 베어드 (배위량) 선교사가 세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켜서 여러 번 벌을 받으면서
금주령을 내린 베어드 선교사와 박자중 교사로부터 크게 감동하였고,
평양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의 강연과 안창호의 연설을 들고
실력만이 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확신하여 5년 과정을 3년에 마쳤다.
주위에서 교사가 되길 제안하였으나
조만식은 1908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김성수와 백남훈과 함께 공부하였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간디전을 읽은 후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며,
복장이나 삶의 형태까지 간디를 따라 하여 한국의 간디라고 불렸다.
조만식이 도일하기 2년 전인 1906년 4월에 황성 YMCA 총무 필립 L. 질렛 (길례태) 선교사가 일본 도쿄를 방문한 후 그해 8월에 YMCA 부총무 김정식을 도쿄에 파송하여
그해 11월에 간다구(新田區) 미도시로초(美士代町)에 있는 도쿄 일본 YMCA 회관 2층 사무실을 빌려 황성 YMCA 분회가 발족되었다.
1907년 8월에 일본 YMCA회관에서 나와서
도쿄 간다구 오가와마치 (오늘날 니시오가와마치 西和賀町) 2정목 7번지의
일반 가옥을 임대하여 전용공간을 마련하고, 도쿄 조선 YMCA로 격상되었다.
도일하던 1908년에 조만식은 도쿄 조선 YMCA에 참석하였고,
YMCA 김정식 총무가 인도하는 예배에도 출석하였다.
도쿄 조선 유학생교회 영수
평양에서 방문한 정익노 장로의 제안대로 도쿄 조선 유학생교회를 세우기로 하여
도쿄 조선 YMCA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한석진 목사가 1909년 10월에 도쿄에 도착했다.
조만식을 비롯하여 김정식, 오순형, 김현수, 장원배, 장혜순, 백남훈, 김석영, 장강진, 김낙영,
이인장, 임병일, 함석은(혹은 함석안), 김석보, 이용창, 김홍양 등 1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석진 목사의 인도로 1909년 10월에 도쿄 조선 유학생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날 참석한 대부분 유학생은 메이지 가쿠인 유학생이었고,
위의 학교가 장로교 계통의 선교 학교였으므로 장로교인으로 보인다.
한석진 목사는 3명의 영수와 4명의 집사를 세웠다.
조만식은 김정식과 오순형과 함께 영수가 되었다.
김현수, 장원배, 장혜순, 백남훈은 집사로 취임하였다.
1달간 파송 받았던 한석진 목사는 그해 말인 1909년 12월이 되어서야 귀국하였다.
한석진 목사의 귀국 후 영수였던 조만식은 그와 함께 영수로 임명된 김정식과 오순형과 함께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조만식은 1910년에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그해 여름 잠시 고향을 방문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자 분노를 느꼈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격정을 참았다.
1911년 겨울에 출신 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
전라도 출신의 송진우와 경기도 출신의 안재홍과 힘을 합해 하나로 묶어
‘조선 유학생친목회’로 통합하였다.
그런데 창립 몇 달 만에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1913년 가을에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로 발족하였고,
2.8 독립선언의 디딤돌이 되었다.
1910년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된 재한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가 도쿄 조선인 유학생교회에 보낼 선교사 파송을 의논하였고,
재한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가 열린 그달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대한 예수교 장로교 독노회가 도쿄 조선 유학생교회에 박영일 장로를
전도인으로 4개월 동안만 파송하기로 가결하였고,
제주와 해삼위와 함께 일본에 3,000원을 지급하기로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일본 선교비가 얼마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석진 목사의 후임으로 박영일 장로가 1910년 10월을 전후하여 도쿄에 도착했다. 한석진 목사 재임 때처럼 박영일 장로가 인도하는 주일 아침 예배와 낮 예배와 저녁 예배를 도왔고,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기도회도 도왔다.
4개월간 사역한 박영일 장로는 1911년 1월이나 2월에 도쿄를 떠났다.
박영일 장로의 귀국 후 영수였던 조만식은
그와 함께 영수로 임명된 김정식과 오순형과 함께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1911년의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박영일 장로를 전도인으로 3개월 연장하여 다시 파송하였다. 그는 그해 7월 초에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공부하던 조선 유학생은 4백 명 정도였다.
이 중 1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여 매 주일 아침, 낮, 저녁에 각각 예배를 드렸고,
수요일 저녁에 기도회로 모였다.
허정일과 김영섭 외 6, 7명의 감리교인 출신의 조선 유학생이 1911년 여름에
유학생 감독부 사무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조만식 등 도쿄 유학생교회 직원이 1911년 7월 초에 긴급하게 모였다.
직원회는 도쿄 조선 유학생교회가 조직될 때
감리교 출신 조선 유학생이 한 명뿐이었으므로
그의 동의를 얻어 장로교회로 시작하였음을 확인하였고,
조선 유학생이 공부하는 동안 예배를 드리면 되고, 특정 교단을 고집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초교파적으로 장로 교인과 감리 교인이 합동해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직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와 미국 남, 북 감리교 선교 연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 처리해 주라고 요청했다.
그즈음 대구에서 사역하던 해리 브루언 (부해리) 선교사가 도쿄를 여행하던 길에 도쿄 조선인 유학생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교회가 장로교식 예배를 중단하고, 감리교 출신의 유학생과 합하여 예배드리도록 당부하였다.
이런 와중에 박영일 장로가 뜻밖에 병을 얻어 부득이
1911년 8월 말이나 9월 초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11년 9월경 158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매 주일 드린 평균 헌금은 1원이었다.
지난 1년간 수입금은 391원 50전이었는데 지출금도 위의 금액과 같았다.
박영일 장로의 귀국 후 영수였던 조만식은 그와 함께 영수로 임명된
김정식과 오순형과 함께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연합교회 설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1912년 6월 박영일 장로의 후임으로 임종순 장로를 도쿄에 파송하였다.
귀국
조만식은 1913년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의 영수 사역은 3년 가량이었다.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투옥되어 학교가 유지하기조차 힘든 시기에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였으며,
1915년에 교장이 되었다.
1919년에 삼일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상해로 망명하려던 중 체포되어
1년간 평양에서 옥고를 치른 후 가석방되어 다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가 키운 제자 중 월남하여 서북 개신교인의 구심점이 된
한경직 목사와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있다.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한 후
1921년에 조만식은 평양 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였고, 그해 산정현교회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22년 7월 평양에서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쳤고,
세이소쿠 영어학교 동문 김성수의 지지를 받아 1922년 12월 7일에 동아일보가 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1922년 11월에 실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이상재를 대표로 하고
조만식 등 47명이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를 만들어 대학을 세우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숭인중학교 교장을 맡아 지내다가 일제에 의해 1926년에 강제 사임 당하였다.
1927년 2월에 신간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서 평양지회장을 맡아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어 절대 독립을 추구하면서 민족 실력양성 운동을 주도하였다.
체력 향상을 위하여 1930년 평양에서 창립한 관서체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7월 만주에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 조선인을 학살하자
‘재만 동포 옹호동맹’을 중심으로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를 보호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가 해산된 후 11년간 재임한 평양 기독교청년회 총무직을 사임하고
1932년에 조만식은 서울로 가서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경영난을 수습하고,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을 펼쳤다.
1934년 5월에 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세워진 국학연구단체인 진단학회 찬조위원으로 가입하여 지원하였고, 1936년 평양에서 ‘을지문덕 장군 수보회’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앙양하였으며,
이즈음 백선행 기념관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을 세웠다.
중일전쟁 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43년에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강행하자 반대하다 구속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문을 닫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1945년 8월 해방된 후 조만식은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과
평남 인민 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그해 11월에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 운동과 모스크바 3상 회의가 결의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에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조만식이 1946년 1월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평양방송이
그와 북괴 간첩 김삼룡과 이주하의 교환을 제의하였는데
그해 10월에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직전 공산군이 평양을 철수하면서
그를 처형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조만식(1883-1950)|작성자 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