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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시집> 해설
긍정의 힘, 생명의 힘
시인 :박윤배
1.
시를 쓰는 일이 인간의 갈등과 모순을 카타르시스로 유도하는 작업이다. 라고 할 때 산고의 산물인 한편의 시는 장작 주체인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지를 한권의 시집을 통해 살펴보는 것도 읽는 자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기왕이면 내가 삶의 부분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학적 접근을 시인이 해내고 있다면 더욱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번에 첫 시집을 내는 이정희의 약력을 보니 경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2008년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말 그대로 햇병아리 시인이다. 이때 햇병아리라 함은 얼마나 신선한가? 또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말이므로 곡해 없이 받아들여져야 마땅할 것이다. 모래알이 깔린 봄날 흙의 마당을 걸어 다니는 햇병아리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는 이번 시집을 읽어줄 독자들의 관심이 매우 중요하다. 대략 이정희의 살아온 족적과 시의 모태가 될 알 속 양분, 노른자의 성분에는 시골의 서정이 들어있다. 함부로 나서지도 못하는 성격일 것이며, 전통가계의 교육과 가족적 정서를 그대로 드러냄에 정감이 있으며, 그렇다고 남과 잘 어울리는 인간형은 아닌 차분하고 깨끗한 심성의 소유자임을 시 몇 편을 읽으면 대번에 드러난다. 이를 촌스러움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뛰어난 처세술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대 도시인의 삶의 한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정받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조금은 걸릴 뿐,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개성적인 시의 길을 열어가는 모습을, 햇병아리 시인의 이 시집을 읽은 독자들은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감에서 그의 시편을 들여다보면, 시인의 인간적인 성품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철들어 자신을 감싸안기 시작하며
처음한 일은 그를 찾는 일
거울 같아서 차마 마주 못보고 외면했던 얼굴
목에 가시로 걸려 있었다
병가를 하루 내고 찾아간 그
군에 간 사람 대신 고향집 주소만 들고 왔다
몇 달 후 만난 그
예전의 어둠은 간 곳이 없고
환한 밝음에 나 오히려 주눅들었다
결국 오래 못가 떠밀리듯 헤어지던 날
그가 잡아주는 택시에 오르며
불현듯 저 손 한 번
잡아봤으면 하는데
차는 출발했다
그렇게 그날 밤은 고요히 잤는데
이튿날 아침 상 앞에서 솟구치는 울음
놀란 식구들 뒤로하고 작은방으로 왔지만
밤새도록 고였던 울음들 그치질 않았고
그렇게 이틀을 울고 난 후로는
어떤 이별에도 눈물이 솟지 않았다
-「마른 눈물」전문
시인 이정희의 시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삶의 색깔과 모양이 덧칠되지 않고 그대로 생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미 등단한 많은 시인들이 빗대어 표현하기의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비해 그는 어떤 색의 렌즈도 없이 동그랗게 뜬눈으로 대상과 체험을 읽는다. 위 시에서 한때 자신의 많은 눈물을 마르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대학 다닐 때 알았던 이성(어쩌면 마음의 문을 열어준)과의 관계를 떠올려 진솔한 고백의 방식으로 눈물을 그려낸 시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대충 이렇다 대상인 남자가 군엘 갔고 그 소식이 궁금해서 그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고 자신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철들어 자신을 감싸안기 시작하며/처음한 일은 그를 찾는 일//의 표현은 혼자의 외로움을 알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거울 같아서 차마 마주 못보고 외면했던 얼굴/목에 가시로 걸려 있었다 //의 의미는 아래 연의 일부 //예전의 어둠은 간 곳이 없고/환한 밝음에 나 오히려 주눅 들었다//에서 밝히고 있는 듯 어두운 성격이 둘이 같았다는 이야기임을 시의 내용상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군 생활을 통해 밝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대를 얼마 뒤에야 만나게 되고 주눅이 들고야 만 자신은 떠밀리듯 택시를 타고 돌아와서 아침밥상에서 물러나며 이틀을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눈물이 다 말랐다는 비약된 이야기인데, 시가 될까? 고민도 되지만 너무 솔직한 표현에 어떤 또 다른 재미가 느껴진다. 남의 비밀을 엿 본 것처럼, 그런 시를 읽다보면 어떤 비밀을 훔쳐봤다는 재미가 솔솔 생겨난다. 어쩌면 이 시를 쓰고 나서 이정희 시인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서 멈추고 보면, 억지 꾸밈이 없는 시를 요즘 만나기 힘든바, 다소 신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눈물이 이때 마른 관계로 지금은 많이 밝아지기도 했을 것이다. 조근 조근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얼굴의 그가 들려주는 과거사들 중 가족을 다룬 옛 기억과 현재의 이야기가 담긴 시 몇 편을 더 보면 시인 이정희가 어떤 색의 붓을 들고, 삶의 그림을 그리려드는지 알 수 있다. 살아온 배경과 현재의 모습이, 미래를 짐작하게 하는 근본정신의 바탕일 수도 있을 것이므로
겨울 아랫방 시렁에
새끼줄로 가지런히
매달려 있는 메주덩이들
경주 이씨 39대손
백자洞 상한氏 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박한 얼굴들
-「가족」전문
그가 자라온 배경이란 바로 위 시 안에 짐작을 넘어 성장기의 가계도로 그려놓고 있다. 자란 곳은 경북 청송의 어느 곳 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시렁에 매달린 메주들을 연상해보라, 다정함과 닮은꼴로 나란히 걸려서 곰팡내를 피우는 저 겨울의 맛은 그의 내면에 깔린 시적 정서인 것이며, 소탈하고 조금은 내성적일 꺼 같은 그가 또 다른, 보이지는 않지만 삶에 대한 억척성도 분명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여하든 그렇게 자란 그가 다시 엄마가 되고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갑자기 궁금하다. 시집 여기저기서 발췌해 보면
숲 속 들어가 찬찬히 잎을 보자
성적 하나로만 판단하여
부드럽게 늘어지는 버드나무를
꼿꼿한 싸리나무 되라
나, 나무라기라도 한건 아닌지
-「밤중에」일부
드라마 보는 내게 남편이
얘기한다
말도 안 되고 시간 낭비시키는
드라마보다
교양과 상식 넓히는
시사 다큐를 보라고
그래도 난 꿋꿋이 본다
꾹꾹 밟아 가슴에 담았다가
다음날부터 조금씩 아껴가며 꺼내본다
메마른 일상 사이사이
먹먹한 가슴에 섬세하게 떨리던
고수* 눈빛 하나 붙잡고
그렇게 일주일을
촉촉하게 견딘다
* 영화 배우의 이름
-「고마운 위로」전문
무색무취로
표 없이 곁에 있다가
에누리 없는 현실에
나 꼬르륵 숨넘어가면
달려와서 등 두드려
숨 틔워 주는 사람
-「남편이란」전문
난 지 19개월 된 딸
기저귀에 똥 싸는 똥강아지
물이나 우유를 엎지르고는
수건이든 옷가지든
보이는 대로 들고 와
휘적휘적 훔쳐놓고
책 찢는 걸 야단치면
찢어진 부분 옆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딴청부리고
큰 맘 먹고 산 영어 테잎의 속은
고 말랑한 손가락으로
망설임 없이 쫙쫙
세트 모두 빼 놓는다
그 똥강아지 오늘은
저녁 이부자리를 구르며 장난치다가
아직은 풋내나는 발음
엄마 ‘샤앙해’라고 하는
-「우리 집 똥강아지」전문
거개의 삶이 그러하듯, 평범한 우리네 삶의 보편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의 일기들이 그에게 시가 되고 있다. 생활의 기록이며 두 딸이 있는 듯 보이는 엄마로서의 삶은, 여느 부모들이나 다름없다. 아이를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고 공부하라 윽박지르던 자신을 반성하며 아이의 생각숲에 시선을 들이미는 친철함을 보인 시, 「밤중에」가 그러하고, 남편의 충고는 내일의 숙제로 미루고 드라마에 빠진 주부적 나른한 일상적 행동을 노래한「고마운 위로」가 그러하다. 남편의 //에누리 없는 현실에/나 꼬르륵 넘어가면 // 숨 틔워 주는 값지고 소중한 존재로서의 남편과 살고 있는 그리고 「우리집 똥강아지」가 들려주는 풋내 나는 발음에 감동하는 한 여자의 일상적 삶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특별한 눈을 가졌거나 상상의 발랄함으로 자신의 세계를 노래하는 요즘 시단의 주류의 시들에 비하면 참 이렇게 진솔함이 또 감동이 된다는 생각에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곱씹어 보면 그 감동의 바탕에 순수함이 묻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범하기보다 어쩌면 솔직함이 바로 시인 이정희가 지닌 매력이 아닐까? 시골에서 자란 그가 당시 국립대학을 나오기까지 성실하게 학업에 임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며 그를 키워낸 부모님 또한 대단히 열린 사고를 지닌 훌륭한 가계의 수장이었음에 해설자인 본인 또한 시골출신이어서 한때 부모님의 상을 떠올려보는데 무리가 없다. 어려웠던 생활은 그의 「자취생 일기」 연작 편에도 드러나고 있으며, 이 시집을 내는 그 배경의 남편에게 시인 이정희는 그의 성품으로 봐서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지 싶은 생각이 든다.
2.
이정희 첫 시집 『모래를 밴 여자』의 시집 전반의 정신의 맥락은 크게 두 개로 나눠져 있다. 하나는 현실에 대한 “긍정의 힘”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을 바탕으로 하긴 하지만 “생명의 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시적 대상,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신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내면을 바라보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나 아닌 주변 이야기로 시를 엮고 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 이던 남의 이야기 이던 간에 따뜻한 긍정의 호흡으로 다가서고 있음에 평화로운 전율이 느껴진다.
먼저 시집 1부에서 “긍정의 힘”이 미치고 있는 시들을 살펴보면 「정식이 아줌마」,「딸기코 천씨 아저씨」,「명밭골 너럭바위」,「 겨울소묘」,「 가을여행」이 그러하다.
새벽 청과 시장
눈 비비며 트럭 몰고 나간
남편이 짠해
따끈한 소문도 그냥 들고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간다
-「정식이 아줌마」일부
위 시「정식이 아줌마」에서는 아파트의 삶에서 이집 저집 마실 다니는 좀 수다스럽다면 정확한 표현일까. 소문을 몰고 다니는 한 여성(아줌마)의 일면을 그려내고 있다. 별 다른 정의를 내리지 않고 남의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벽과 벽으로 둘러싸인 현실에서 어쩌면 여성의 내면 심리상 위 제하의 여인이 갖는 심리적 요인이 더러는 수긍이 가기도 한다. 남편의 직업이며 아이들의 교육문제들을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하는 것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으며 결국엔 자신 남편의 힘든 모습 앞에 숙연해지는 “정식이 아줌마”는 재미있는 인물이다.
볼품없는 외모에 까막눈이라
믿을 건 돈밖에 없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가랑잎 같은 돈보다
따뜻한 살붙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딸기코 천씨 아저씨」일부
위 시 「딸기코 천씨 아저씨」또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에 소문처럼 떠다니는 타인의 이야기이다. 농촌마을의 혼자 살며 구두쇠로 살림을 일으키던 한 사내가 좋은 배필을 만나게 되었는데, 같이 사는 여자한테도 금전적 배려를 하지 않아 결국엔 여자가 떠나고 나서야 다시 혼자 된 쓸쓸함에 후회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저녁 무렵 허적허적 골목으로 들어서는
떠난 줄 알았던 새신랑
장모님 할 말 있소
예단 양복 안 받을 테니 거기에 더 보태어
저 사람 눈 수술시켜주소
-「명밭골 너럭바위」일부
위 시「명밭골 너럭바위」에서 나타내고 있는 한 사내 또한 훗날 전설이 될 만한 한 사람의 일담이다. 가난한 삶의 편린이 배어나는 농촌사회의 배경에서 혼례에 관한 이야기이며, 한 남자의 따듯한 마음과 마을의 너럭바위를 대비 시키는 이야기 형태의 긴 시이다. 아마도 시인 이정희의 대표작으로 보이는 이 시는, 그의 삶의 실제 배경이 명밭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풍토의 정서가 그의 눈이 되어 시집 전편에 수놓아져 있다.
싸리비 흔적 없는 시멘트 바닥 위
잊지 않고 딱지 치는 저 아이들
먼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대 이으며
도시의 추위를 뒤집고 있다
-「겨울소묘」일부
그런 그의 성장기에 보고 들었던 소문들이 이제는 도시공간으로 이동되어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위 시 「겨울소묘」인데 시안에 나타난 아이들은 딱지를 치고 있는 아이들이다. 딱지라는 매개물이 과거를 현재로 옮겨놓는데 이곳이 싸리비자국 남아 있지 않은 아파트 시멘트 바닥 위이다. 이만하면 시인의 눈은 겨울 소묘를 제대로 한 것.
어떤 비바람에도 내려앉지 않을
봉분 앞 환한 햇살 아래서
노부부 사진을 찍는다
살짝 팔짱을 끼고
-「 가을여행」일부
“가을”이 주는 이미지를 통해 나이든 사람(노후의 생),즉 부부가 천마총(무덤)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늦게나마 팔짱을 끼는 것을 시인 이정희는 시 안에서 재현해 내고 있다. 이렇듯 주변 삶들이 그의 렌즈를 통과하면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다. 그리고 어둡고 습하고 추운 이야기 일지라도 “긍정의 힘”을 얻게 되는데, 이는 이정희의 시 세계가, 삶을 응시하는 눈빛이, 그가 지향하는 바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 아닐까.
“긍정”이란 알고 보면 빛이다. 그 빛이 빛으로 인식되기까지는 어둠이 배경에 남아있기에 더 빛나는 것이다. 한 편의 시안에서 나타난 긍정은, 시인의 몸과 정신이 “부정”을 삼켜냈기에 가능한 한 현상이다. 긍정의 돌다리는 결국 새운 생명으로 연결될 때 그의 시는 더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시안에 등장하는 사물들에 시인은 나름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의미 손길로 만져줄 때 생명을 얻는 사물들은 훨훨 날개를 달게 되리라.
아롱아롱
일렁이는 마음 달래려
연둣빛 깊어가는
동네 한 바퀴 휘돌고 와
멸치 한 접시로 점심을 먹는데
접시에 담긴 멸치놈들
불쑥 나보고
자기 놀던 물빛 좀
가보고 오란다
-「봄 날」전문
연두빛 봄날이다. 미음이 일렁인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와 멸치를 접시위에서 만난다. 이미 죽어 말라버린 몸의 멸치가 말 건네는 봄이다. 죽은 멸치가 제 놈이 놀던 물빛 좀 보고 오라니! 그러나 이것이 시이다. 시인에게 다가올 훗날의 봄에는 죽은 멸치의 유언조차도 읽겠다. 치열한 시인의 의식과 “생명”이 만나게 되면 이처럼 값진 비유를 얻는 것. 앞서 보았던 이야기시는 그 정신과 분위기만 챙겨들고 줄거리는 산문가에게 미련 없이 주어야 한다.
찐감자 같이 순박한
중국집 배달원 李君
하루에도 서너 번씩 손바닥을 쥤다폈다
손금은 육 개월마다 변한다던 할머니
이즈음의 성공줄 손금 배달통을 움켜쥐다
꼭대기까지 뻗쳤다
자 이제 시작이다 - 결의에 찬 李君
그릇 찾아 돌아오는 길에
미용학원 수강증을 끊고
자기 이름 덧씌울 간판 찾는다
-「위하여」전문
위 시 「위하여」는 생명력이 있는 시이다, 그 이유는 발상이 엉뚱함에 있기에, 이미 사실을 넘어선 사실의 상을 그려놓았기에 재미있다. 중언부언이 없다. 희망차다. 표현의 억지스러움도 없다. 결국엔 좋은 상상이 생명력 있는 시를 낳는 것을 시인은 위 두 편「봄 날」「위하여」를 앞으로의 시 쓰기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3.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햇병아리는 뼈를 키우고 내장도 키우고 또 알을 낳아 상상의 세계를 넓혀 간다. 아마 이정희 시인이 인간들이 동굴생활 을 할 때 태어났다면 수렵을 떠나며 장정들이 남겨둔 동굴의 식구들에게 조근조근 이야기로 마음을 달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골생활에 묻어있는 이야기이며, 오래전 살아낸 이야기들, 시간 가는 사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해가는 「쉰밥 」도 직관으로 읽어낸다. 사람들과의 어울림에도 서툴던 그녀, 감포의 데이트 흙 묻은 구두의 진흙 닦아주던 사람에게 감동되었던 이야기며 「95. 한남역. 여름 」에서는 //자석요* 하나에 전부를 건/ 꼬불한 언덕길 한남동의 속사정은/오줌에 지려진 뒷골목 담벼락보다 더 초라한데//그 비탈 그 고개 너머로 불쑥 솟아오른 서울타워는//혼자서만 당당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소위 다단계로 넘나들던 골목길도 시 속 이야기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 이후의 시들은 변해야 할 것이다. 한번 시라는 곳에 발이 빠지면 평생 그 길을 걸어가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 시이고 보면, 상처가 시의 시작은 될 수 있으나 그 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보이지 않던 진정한 창작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 이왕이면 자기만의 독특한 상징과 비유를 갖춘 생명력 있는 시를 써야 한다. 자신 들여다보는 그의 시집 표제의 시를 보자
오늘밤도 뒤척인다
어떤 식으로 몸을 뉘어도
배겨오긴 마찬가지
유리병 속
헐렁하게 담겨있는 알약들처럼
기우는 대로 쏠리는 것들
깔깔하고 예민한 모래알들
여태껏 살아오며 삼켰던 생채기들
맺히고 영글어서
티눈 같은 모래알 됐다
그 모래 한 알 한 알에 갇혀 있던 울음들
이젠
밖으로 보내달라며 찌른다
-「모래를 밴 여자」전문
어쩌면 모래를 밴 여자는 바로 자신이던가 아니면 지고지순한 정신일진데 몸 안에 모래를 가둔 자루 같은 몸이 어딘들 편하겠는가. 겨울 눈 내린 비탈길 설해방지함 속 모래가 그러하듯, 이리저리 뒤척여도 티눈처럼 밖으로 새어나가려는 내면의 몸부림이 //유리병 속 / 헐렁하게 담겨있는 알약들처럼//으로 비유되면서 모래가 기우는 데로 쏠리더라도 잘 견디어낼 탄탄한 “시의 자루”를 시인 이정희는 모질게 꿈꾸고 있다. 질기고 튼튼한 가죽을 갖는 일이 고통일 지라도 수천의 언어를 쓸어 담는 작업이, 또한 시 쓰는 일이 “그 모래 한 알 한 알에 갇혀 있던 울음들”사막의 목마름과 같은 속성을 어떻게 형상화된 이미지로 조탁해 내야 할지는, 첫 시집 이후의 숙제가 될 것이다. 진솔하게 표현한 체험적인 시들을 넌지시 엿보는 동안은 흥미로웠으며 마음이 평화로웠다. 시인 이정희는 결이 매우 맑아서 더욱 아름다운 시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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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