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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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뇌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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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머라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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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일 서울간다고.. 그 동안 고마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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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슨소리하노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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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이라고 알지? 걔가 지금 서울에서 일하고 있데. |
나 걔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해서 돈 벌꺼구.. |
돈 벌어서 오디션봐서 가수할꺼야. 나 응원 해줘야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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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으며 말하는 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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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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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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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버릇 처럼 말해오던 그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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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그냥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한두번 서울간다는 말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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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하겠다는 말. 그냥 장난처럼 흘려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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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순자의 노래도 들어본 춘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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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가수 귀빵뱅이 오만대는 후려도 될 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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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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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그런건 바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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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순수하고 이렇게 착한 순자의 이쁜 모습이 좋았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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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엔 눈빛이 틀리다는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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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제 정말 순자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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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TV에서 미미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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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로 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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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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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모르는 뜨거운게 가슴 속에서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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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에서 뭔가 흐를 듯 말 듯.. 춘길이 바라보는 세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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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갇혀버린 듯 흐물거리는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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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이 모든게 떨어질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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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라보고 있는 순자의 얼굴도 영원히 떨어질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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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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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눈물을 흐르지 않게 하려고 고개를 하늘로 올리는 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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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도 편하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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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춘길 앞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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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하늘로 향해 있는 춘길의 눈을 마주치기 위해 춘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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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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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춘길에게 입맞춤을 선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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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에게도 순자에게도 첫키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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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이나 나이를 먹었지만 처음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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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뽀뽀는 몇번 해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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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가 자고 있을때 순자의 볼에 살짝 하는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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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춘길이 군대 간다고 했을때 순자가 볼에 살짝 해준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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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 입술과 입술이 나누는 키스는 이번이 처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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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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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키스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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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키스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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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와이리 짭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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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달콤하다 카든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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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와이리 짭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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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순자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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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아무말 없이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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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조켔다...기냥.. 이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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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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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소시장에서 부터 검게 변하던 구름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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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천둥소리와 함께 조금씩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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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뒤엔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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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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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가 사준 과자봉지안에 비가 새어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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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과자봉지안에 손을 너어 과자를 꺼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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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과자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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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아삭 거리며 씹혀야할 과자가 오물오물 녹아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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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가슴도 눈물에 녹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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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눈물도 비에 녹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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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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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 니는 왜 우노?... 니도 슬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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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하늘은 대답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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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를 불러도 대답이 없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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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그렇게 춘길의 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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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가 떠난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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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춘길은 병걸린 병아리마냥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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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와 어무이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나중에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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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순자가 서울로 떠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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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가 순자를 좋아하고 있는건 온동네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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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와 어무이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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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마을사람들은 둘이 나중에 결혼할꺼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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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서울에서 먹고 살꺼라며 떠나버린 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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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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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가 줄어버린 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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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도 눈치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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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춘길에겐 혼자 있는게 나을꺼란 생각에 아무도 근처에 가질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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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부모들도 당연히 눈치가 있었다. 그래서 춘길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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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형인 춘식이 형도 동생을 그냥 놔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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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막내동생 춘혜도 오빠의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아무 말 걸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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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구석에 있는 축구공을 꺼내어 벽을 향해 차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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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까지만 해도 동네 친구들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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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같이 공 찰때면 그렇게 재미있을때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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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하나 둘 전학가고 하더니 이젠 모두 다 떠나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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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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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좋았다. 순자가 남아있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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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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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순자마저 떠나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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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혼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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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버려져버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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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오랜시간 동안 공을 찾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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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춘길의 취미는 축구다. 평소에 운동신경이 뛰어나 웬만한 운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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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하는 편이였지만, 축구 만큼은 오랬동안 빠져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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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찰때면 기분이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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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 찬 공이 춘길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할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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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대의 그물을 뒤흔들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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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몰아 열심히 뛸때면 모든 걸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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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차는 걸 좋아하던 춘길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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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네집 식구가 된지 얼마 안된 땡칠이에게 공을 차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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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칠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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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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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 서울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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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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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결심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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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칠이는 공을 못 찬다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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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에겐 같이 공을 차줄 친구가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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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동무가 되어줄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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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순자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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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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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네 모든 식구가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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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일인지 춘길이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반찬도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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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식사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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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반찬이건만, 춘길은 숟가락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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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못한 춘식이가 한마디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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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밥상 앞에서 제사지내나? 퍼뜩 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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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는 신경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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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자기 형한테 말하는 버릇하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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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춘혜의 말에 온 가족의 시선이 춘혜에게 집중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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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밥 맛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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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한 눈빛을 느낀 사춘기 소녀 춘혜는 서둘러 밥그릇에 머리를 쳐박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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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춘길은 결심한 말을 내 뱉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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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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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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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 서울갈랍니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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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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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공해가 돌아오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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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라. 니 서울 보내 줄 돈이 어딧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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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줘도 된다.. 내 혼자 갈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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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만해바라. 다리 몽디를 뽀사삘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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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하나도 겁 안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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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땅이 얼마나 넓은 곳인데 자기를 찾겠다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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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군대 있을때 외박나가서 느껴본 도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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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강원도 촌동네라고 그랬는데도 그렇게 넓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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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크다던 서울은 얼마나 크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춘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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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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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를 찾으러가는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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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처음부터 아무 욕심도 없었고 되고 싶은거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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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순자만을 위해 살아온 춘길의 인생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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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가 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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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도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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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야 기다려라. 춘길이가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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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밭일하러 나가고 조용한 춘길이네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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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의 문이 열리며 춘길이가 살금살금 집 구석을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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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엔 자기 몸통만한 가방을 끼고서 마당 한가운데 선 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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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려있는 안방문틈으로 춘길이네 가족사진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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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가방을 옆에 던지더니 대뜸 절을 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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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어무이..히야 춘혜야. 사나이 이춘길이.. |
꼭 순자만나가.. 성공해가..결혼도 하고.. 그래가 돌아오겠심니더. |
잘계시소.. 죄송합니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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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벌떡일어나 가방을 들고서 뒤돌아서다가 다시 집을 향해 돌아서는 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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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고 말하는걸로는 뭔가 전해지지 못 할꺼라고 생각한 춘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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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 있는 전화번호부 첫장을 주욱 찢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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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면에다가 어설픈 필체로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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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요. 어무니요. 행님아. 그리고 춘혜야. |
나 성공해가 돌아오께요. 기다리시요. |
아부지 일 조심해가 하시고요. 어무이도 쉬엄쉬엄하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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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님아. |
행님이 우리집안 물리받아야지. 내는 더 성공해가 오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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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혜야. |
오빠한테 댐비지말고 공부열심히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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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정도면 개안체??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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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띄우며 종이를 전화기 밑에 끼어두고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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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옴겨 마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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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춘길의 뇌리속에 떠오르는게 있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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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에게 늘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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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돈이 문제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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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서도 돈 없으면 지내기 어려울꺼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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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야 아는 친구 있으니까 먹고 잘 걱정은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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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사정이 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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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는게 없는 상황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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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돈이 조금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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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평소 자기가 모아두었던 돼지저금통을 들고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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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어보니 꽤 돈이 되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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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고기 두세번 사먹을 수 있을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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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생 지낼껀데 이거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 춘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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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누렁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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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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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편지를 적어 꼽아두었던 전화기로 다시 다가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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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편지를 꺼내어 밑에다 뭔가 끄적이길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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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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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이는 내가 절대 안가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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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 역시 내는 천재다. 이라면 다른 놈이 훔쳐간지 알겠지? 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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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이는 멍청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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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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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간다!! 잘있거라!! 촌동네여!! 내는 서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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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떠나자니 뭔가 서글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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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길은 그 동안 있었던 가족들과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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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아파서 대신 밭 갈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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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칠이가 없어져서 땡칠이 대신 밤새 집지키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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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식이 행님이랑 춘미랑 춘혜랑 같이 성냥으로 장난치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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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네 무덤 다 태워먹어서 아부지가 파출소 끌려가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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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미 서울로 대학간다고 엉엉 울던 어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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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혜 얼라때 업고 댕기면서 축구하다가 춘혜 떨어진거 모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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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밟았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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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리 좋은 기억들은 아니라고 느끼는 춘길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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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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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에 땡칠이 잡겠다던 아부지 말리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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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기억에 미치자 땡칠이를 바라보던 춘길의 눈빛이 빛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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