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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예감
마차가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서희는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 '마음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모를 일이야.' 서희는 눈을 감는다. 뭉게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근심은 벌써 달포 가까이 서희를 어지럽혀온 터이긴 했다. 실상 정체를 전혀 모른다 할 수만도 없는 근심인 것이다. '서두는 게야.' 얄팍한 입술을 굳게 다무는 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마음이 그럴 때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 보다 결연히 단안을 내려야 한다는 것, 이미 내디딘 걸음이 비틀거려서는 안 될 것이며... 서희에게는 모든 일이 뜻대로 어김없이 아니 예상 이상으로 된 것이 사실이다. 다만 마무리가 남아 있을 뿐, 강남으로 가는 제비처럼 날면 되는 것이다. 자식 둘을 앞세우고 날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허한가. 때때로 마음 밑바닥에서 거슬러오르는 설렁한 냉바람은 무슨 까닭인가. 전신을 떨 게 하는 춥고 적막한 바람앞에 그냥 주저 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그 까닭을 서희가 왜 모르겠는가. 내내 외면해 왔었다. 보이지 않게 가로질러진 벽을 서희는 무던히도 둔하게 느끼지 않는 듯 외면해 왔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과연 길상은 처자와 더불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인력거에 흔들리면서 서희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길상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내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두 자식의 끈질긴 핏줄을 설마 외면하기야 할라구. 다짐했으나 대단히 자신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가야 해.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 아니냐. 십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아니 십오 년 동안 이를 갈았다. 원한에 맺힌 세월을, 원한대로였다면,' 원한대로였다면 밤낮으로 이를 갈아 이빨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간다! 돌아가서 조가놈! 홍가 그 계집! 마지막 살에 붙인 내의까지 벗게 할 테다! 내 소망은 바로 눈앞에 와 있어. 내 주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서희의 양볼이 파아랗게 질린다. 증오와 저주의 바다다. 조준구와 홍씨의 두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연속적으로 최참판댁을 엄습해 왔었던 불운의 씨앗들이 두 물기둥 둘레에서 맴을 돈다. '어찌 너희들이 넘보았느냐. 어찌 너희들이 강탈하였느냐. 어찌 너희들이 감히 오욕을 끼얹을 수 있었더란 말이냐. 나는 돌아간다! 그이가 돌아가지 않는대도 나는 돌아간다! 그것은 애초부터 말없는 약속이 아니었더냐?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이제 내 원한은 그이의 원한이 아니며 그이의 돌아갈 이유도 아닌 것을 안다. 왜? 왜? 왜 내 원한이 그이 원한이 아니란 말이냐! 남이니까, 내 혈육이 아니니까.' 서희 심중에 경풍이 인다. 자기 뜻한 대로 자기 소망대로,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이는 어릴 적의 그 경풍이다. 양볼은 더욱더 푸르게 질린다. '내 인내는 그이를 위한 인내가 아니었다.' 숨을 돌리듯 서희는 자신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무조건이 있을 수 없는.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풍을 잠재운 것이다. 판단. 서희의 소망과 서희의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이상 길상은 길상 자신을 잃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대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 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파아랗게 질렸던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평정으로 돌아간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별안간 인력거가 전후로 강하게 흔들렸다. "무시기! 어째 이럽매!" 차부 천서방이 고함을 질렀다. "아아니! 뭣이 어째?"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뒤쫓아 울렸다. "어째 가는 인력거 앞에 달기드는 기야!" "달기들어? 이게 성한 사람이야? 가는 사람을 디려받고서 무슨 개수작이지?" "앙이 이 간나아! 사람으 잡아묵는당이? 꿈꾸다 나왔니야!" "간나아랑이! 어디다 대구 함부르, 이놈아! 눈깔이 멀었냐! 네놈 눈에 내가 간나아로 보이니?" 여자가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려는 기색이다. "이거, 이거! 하 참, 기가 차서 말으 못하겠다이." 여자 팔을 뿌리치는 모양이다. "아 모두들 보았잲앴음? 이 안깐이 덤벼들었지비?" 구경꾼이 모여든 것이다. 와글와글 소리가 요란하다.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내 가만히 안 둘 것인데 아아, 글쎄 이게 뒤질려고 이래? 응? 가는 사람을 디려받아 놓고 뭐 어째? 너! 너 다리몽댕이 성할 줄 아냐?" "이거 참말입지, 마른하늘 울잴까?" "천서방, 시간 없네." 인력거 안에서 서희가 말했다. "옛꼬망. 내 니르 죽이주잲은 거 고맙기 생각하랑이." 천서방이 인력거 손잡이를 드는데 "곱게 갈 줄 아냐? 사람을 치어놓고 욕설까지, 가긴 어디루 가아!" 인력거가 또 흔들린다. "이 쌍간나아! 비키지 못하니야!" "쌍간나아? 어느놈 집구석의 종놈인지 모르겠다만 자손 대대로 종질할 이놈아!" "가는 차에 뛰어들고서리 미친 지랄 혼자 한답매." "천서방, 안 가고 뭘 하는 게야." "이 간나가 못 가게서리 막지 앙이합매까?" 비로소 서희는 인력거의 가리개를 젖힌다. 예상한 대로 악쓰는 여자는 송애였다. "거기 좀 비켜줄 수 없겠느냐?" "뭐라구요?" 송애 입가에 경련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비켜줄 수 없겠느냐 했느니라." 똑바로 송애를 쳐다본다. 구경꾼들의 눈이 일제히 서희에게 쏠린다. 투명한 얼음 조각이다. 푸르고 아름다운 비수의 날이다. 그리고 고귀한 학 한 마리. 구경꾼들은 다음 벌어질 광경에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송애는 잠시 비틀거리듯,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비켜줄 수 없다면요? 어쩌시겠어요 마님." "..."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마님." 구경꾼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거기서는 친일파로 명이 나신 모양인데 이쪽에도 고래 심줄만큼이나 튼튼한 뒷줄이 있답니다. 하늘 밑에 머리 둔 사람이 어디 당신네들뿐인 줄 아셨소?" 계속 지키는 서희 침묵이 송애에겐 기분 나쁘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치고 욕설까지 하고 그냥 보낼 순 없어요. 나두 왜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니까요." "무시기, 저 안깐 왜헌병 여편네라?" "지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음?" "저게 객줏집 양딸 앙입매까?" 구경꾼들 속에서 숙덕거리는 소리. "송애야! 너 그러면 못쓴다아?" 드디어 구경꾼 속에서 큰소리 하나가 튀어올랐다.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그럴 수 있냐? 아까부터 내 보고 있었다. 부딪친 건 너 쪽이란 말이야. 일부러 찍자를 부리자 하는 건데 아서, 아서. 사람이 그럼 못써 못쓴단 말이야." "뭐라구요?" 송애가 인력거 손잡이를 움켜쥔 채 돌아본다. 거간 권서방이다. "그렇답매! 증거가 있다이! 본 사람이 있는 기야!" 살았다 싶었던지 천서방이 소리지르고 송애도 소리지른다. "남의 일 참견 말아요!" "사람 변할라니 잠시, 너도 이젠 막돼먹었구나, 야아!" "창자에서 소리가 꼬갈꼬갈 나는 가난뱅이 살판나겠네? 돈푼이나 좋이 받겠구먼." 하다가 그쪽은 내버려두고 "아무튼 그냥은 못 가! 땅에 엎디어 빌어도, 뭐 쌍간나아라구? 이 새끼야! 끌고 다니면 무법천지냐? 경찰서에 가서, 거기 가서 따지자!" 경찰서에 가자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애를 먹이자는 것이었는데 인력거에서 서희가 내려섰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진다. 옥색 자미사의 춘추 두루마기, 미색 장갑을 끼었고 순백색 치맛자락이 물결친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행복하리라 오해하는 뭇 사람들에게 바수어서 나누어주는, 가령 지금의 이런 경우다. 서희에게 집중되는 뭇 시선들은 바수어서 나누어 가진 일순의 작은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과 흥미와 동경과, 자아, 그러면은 다음 어떠한 광경이 벌어져서 구경꾼들을 흡족하게 해줄 것인가. 미인은 노상 무대 위의 희극배우요 익살꾼은 무대 위의 광대다. "타지." 나직한 음성이다. "타는 게야." 송애는 당황하고 구경꾼들은 의아해한다. "마침 그쪽, 영사관으로 가는 길이니 타고 가는 게야. 왜헌병 부인께서 걸어가 되겠느냐?" 송애는 풀이 콱 죽으면서 낭패한 기색을 드러낸다. "내가 왜 타요?" 뒷걸음질을 친다. "내 발 있으니 걸어가겠소." 인력거 손잡이를 슬그머니 놓는다. "하 참, 아니꼬와서..." 길가에 침을 뱉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응? 여보세요! 권간지 거간인지 하는 아저씨!" 하고 몸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권서방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허허허 하고 웃는다. "되게 걸렸답매." 누군가의 말에 구경꾼들도 웃는다. "마님. 타시옵게나." 해서 인력거는 떠나고, 송애는 권서방에게 시비를 건다. 그것은 건성이며 일종의 무안수세인데, "막돼먹었다구? 내가 막돼먹어선 누구 할애빌 붙어먹었나?" 오 년 간의 험악했던 생활을 들내어놓는다. "온당한 여자가 길가에서 가는 사람을 잡고 시빌 해?" 권서방은 시비 상대가 안 되는 것을 깨닫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럼, 그럼. 시비하게 생겼지비. 헌병나리 가물댁 아입매?" "밟혀죽어도 말 못한단 말이요!" "무시레, 인력거 떡 타고시리 가잲구서?" "아암! 친일파보다 헌병나리 가물댁이 높다이. 송사하면 어길 것입매." 여기저기서 야유가 날아온다. 그러나 송애는 얼굴도 붉히지 않는다. "비켜요, 비켜!" 구경꾼들을 헤치고 송애는 나간다. 뒤통술 치듯이 날아오는 웃음 소리.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찢어져!" "되게 영광이겠궁, 왜헌병 가물댁이랑이. 허허헛, 허허헛헛..." 망신을 주기 위한 것이 도리어 자기쪽에서 당하고 말았다. 타고 다니는 양반만 사람이지 걸어 다니는 우리네 상것들은 사람 아니냐 까지는 좋았는데 일본의 헌병 나으리 여편네에서 들통이 난 것이다. 울림장을 영 잘못 놓은 것이다. 왜헌병 여편네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오 년 전에 객줏집을 떠난 송애는 김두수를 따라 봉천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김두수는 귀찮은 짐짝을 버리듯 송애를 떨어뜨리고 떠났는데 떠나면서 두칠이라는 사내를 면대시켜주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두칠이 동생이 송앨 돌봐줄 테니까, 알았어?" 그러고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송애는 지금도 김두수의 그 웃음 소리만은 기억하고 있다. 두칠이가 처음 송애를 데려간 곳은 카페였다. 송애는 많이 울었다. 그러나 김두수가 떠날 때 이미 버림받은 것을 예감하였고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던 송애는 한편 카페라는 화려하고 새로운 분위기에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다. 봉천은 용정에 비하여 말할 수 없이 큰 도시였으며 한때 여진의 서울이었던만큼 신구 건물이 그득히 들어찼고 그 도시를 수없이 오가는 행인 속에 잘나고 멋진 여자들도 많았다. 처음부터 송애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그러나 울었던 것이다. 얼굴이 반반했던 송애는 카페 여급으로 출발하여 전전한 곳은 다 그렇고 그런 장소였는데, 그렇고 그런 장소에서의 오 년은 수치심 없는, 자포자기한 세상을 우습게 보는, 뻔뻔스럽고 거칠고 배짱 하나 대단하여 교활하고 가학적인 한 여자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사내라면 모두 같은 개, 그 개의 본성을 이용하여 여자는 적당히 울궈내면 된다는 신조도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소의 돈을 모으긴 했다. 최근에 와서 일본 헌병 하나를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자가 송애에게 반하기는 반한 모양인지 술집에는 나가지 못하게 하고 생활비랍시고 돈을 갖다주곤 했으나 결혼한 것도 아니며 결혼의 약속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술집에 나가지 않고 빈둥빈둥 놀 게 된 송애는 사내가 오지 않는 밤이면 자연 이일 저일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는데, '집을 하나 살까? 이 돈 가지구? 어림도 없다. 이 봉천바닥에 이 돈 가지고 살 집이 어디 있어. 그 새끼는 걷어차고 어디 중국놈 하나 잡아볼까?' 돌아누워 보지만 하릴없이 낮잠만 자다 보니 밤은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아니야. 가만 있자... 용정 같으면? 살 수 있을 게야. 그러면 내가 용정에 간단 말이야? 아니지. 사서 세를 내면 되지 않겠어? 돈 더 벌어서 그것 팔아 보태고 하면은 큰 집 마련이 어려울 것 없지. 그리고 요리집을 차리는 거야. 내 보란 듯이, 송애는 죽지 않았다고.' 공상은 공상을 낳아 드디어 결론을 내린 송애는 마음이 달떴다. 있는 대로 다 끼고 차고 걸치고서 용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지랄 같은 말을 했지. 최가 계집이 친일파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영사관에 볼일이 있어 가는 거야 빈말은 아닐 것이고 필시 웃대가리나 상대하지 피래미 같은 거야, 그래 내가 거기 갔더라면 내 꼴이 머가 되누. 나 땜에 그 새끼도 혼짝날 건데, 흥!'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아득하다. 아득할 뿐만 아니라 최서희에게 보복하리라는 계획도 없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심술이 났던 것이다. 저기 길서상회 인력거 간다는 행인의 말에 어디 한번 곯려주자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인력거 안의 사람이 길상인지 서흰지, 어느쪽이거니 생각하고서. 왜헌병의 여편네라 한 것도 순간적인 착오였다. 그러면 일본 헌병의 여편네란 어떤 것이냐. 제일 밑바닥 색주가보다 못한 것이 일본인하고 사는 조선 여자다. 그것도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웃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구경꾼도 없는 호젓한 길을 거니는 송애, 아무리 수치심을 잃고 배짱 하나 두둑해졌다지만 다른 곳 아닌 용정에서 그것도 긁어 부스럼, 처량하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모르겠다. 웃으려면 웃으래지. 조롱하고 욕하고, 그 이상 지들이 뭘 해? 욕이 살을 뜯고 들어가나? 이미 난 들내놓은 계집이야. 싯누런 상판들 하구서 구경이랍시고 모여든 꼴이라니, 막돼먹었건 온당찮건 그래도 난 네놈들보담은 배가 부르단 말이야. 웃어? 이 새끼들아! 웃고 싶은 건 나야, 나아! 지게 지고 서 있던 놈, 보퉁이 이고 서 있던 년들, 그래 인력거 타고 가는 년은 친일을 해도 좋고 걸어 다니는 나 같은 년은 왜놈 계집년이니 죽일 년이다 그거지? 흥! 웃기지 마라. 인력거 타고 다니는 년은 갖다바치지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나는 이 나는 왜놈을 뺏겨먹는다 이거야. 병신같이 늙은 놈! 햇볕에 쭈구리고 앉아서 어느놈이 술이나 안사주는가, 어디 흥정거리나 없는가 하고 궁리나 할 일이지 주제넘게 뭐 그러면 못쓴다구? 못쓰기는 옛날 옛적에 못쓰게 됐다! 못쓰게 안 됐으면 지가 밥 먹여주어? 옷 입혀주어? 흥!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사람 한평생, 에라 모르겠다. 수 틀리면 이곳에서 날라버리면 그만, 내 답답할 것 한푼 없다구. 이 세상에 그것 달린 놈이 있는 한 밥 먹을 수 있고 옷 입을 수 있는 내 신세가 좀 좋으냐! 흥! 비단옷에 잇밥 먹기론 최가 계집이나 나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꿀릴 게 뭐 있누? 좋아하네 죽네 사네 그거 다 말짱, 말짱, 헛거라구.' 속으로 쫑알거려보는 것이지만 심란하기론 마찬가지다. 여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명색뿐인 여관, 방 한구석에 뎅그렇게 놓인 가방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수염 자국이 까실까실한 왜헌병 나까지의 체취가 되살아난다. 여관방에 나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었으면 싶어진다. 봉천에 있는 자가 올 리도 만무하건만, 악질로 소문이 나 있지만 여자에겐 숙맥인 나까지였다. 구석진 여관방의 벌거숭이 전등이 생각난다. 그 벌거숭이 전등 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까지를 상상해본다. 가슴에 쓰러져서 한바탕 울어버릴까? 아니야 실컷 아양을 떨고 즐거운 밤을 보내는 거야. '미친년! 나까지 그 새끼하곤 머리카락 파뿌리 되도록 살 것 같애? 미친년! 그런 것 기대했던 것은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야. 왜놈이고 되놈이고, 아무라도 좋다 이거야. 살다가 송장 되면 버려주는 놈 있다면 말이야. 김두수! 그 죽일 놈! 어디서 뒤졌나? 개처럼 뒤진 것 아냐? 뒤져도 그놈이 옳은 죽음은 못했을 거야. 악독한 놈! 아마 그놈이 윤이병을 죽였을 게야. 김가놈이 윤가놈을 죽였다면? 흐흐흐... 그건 썩 잘한 일이지. 그랬다면 말이야. 아암, 잘한 일이구말구, 그 쥐새끼같은 놈 땜에 나도 김두수한테 당한 게야. 다 뒈져라! 다 뒈져! 김길상이 그 개새끼! 모두 개새끼다! 사내놈은 왜놈 나까지놈도 개새끼야. 모두 다아, 세상의 사내놈들 다아!' 이름도 기억에 없는 사내들 얼굴이 눈앞에 풀쑥 솟았다간 자맥질하듯 사라지고 솟곤 한다. '미친년, 여기다 꼬딱지만한 집은 사놔 뭘 하누. 집이고 대궐이고 공연한 미친 지랄이지.' 송애는 얼굴을 숙이고 풀이 죽어서 여관에 들어선다. 이 무렵 서희는 여사집 내실에 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용정촌에 거류하는 일본인 상류층 부인네들이 모임을 갖고 회식하는 날이다. 비공식적인 친목회라고나 할까. 막강한 국력을 업고 이곳에 와 있는 일본의 관공리와 거상의 부인네들, 든든한 존재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적막하기로 말한다면 이들이다. 아무리 국력이 막강하다 하여도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용정에서 일본인 수효를 능가하는 조선인들의 사상은 배일 일변도, 일인을 백안시하기론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시시로 이는 정세의 불안과 유언비어의 범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 숫자상으로 볼 때 간도 전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칠백여 명, 그 반수인 삼백사오십 명이 용정에 있는데 남녀가 반반이다. 이 반수를 차지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소위 작부, 창부 중에서도 아주 저질의 계집들이다. 여러 해 전 일본이 용정촌에다 임시 파출소를 설치하면서부터 관공서를 따라 어중이떠중이가 밀려들었을 때 이들을 겨냥하여 기생작부들이 몰려왔었고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일본인 관민들은 자연 이들에게 의존할 수박에 없었는데 그 천하고 음탕한 언동은 조선인들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후 임시 파출소가 없어지고 대신 영사관이 생기면서 일인들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자국인들의 유치 작전으로 여러 가지 토목 공사를 영사관이 일으켜 다시 일인들은 증가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역시 여자들의 대다수는 창부들이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소수인 양갓집 부녀들의 외로움도 외로움이거니와 용정땅의 주민들은 고의적이든 아니든 이들 양갓집 부녀들까지 비천한 창부로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북극의 겨울은 길고 모든 것이 낯설은 풍물 속에 거의 밀폐되다시피한 몇몇의 부녀들이 모임을 갖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열 명이 못 되는 이들 회원 중 유일한 조선 여자가 서희였다. 회원 중에는 이미 이곳을 떠난 사람도 있었고, 용정에 있는 사람 중 두 명이 불참하여 다섯 명의 여자가 지금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서희는 이 모임에 참석한다. 이같은 공개적인 친일 행동은 서희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헌병장교의 처는 영사부인과 마찬가지로 양복 차림의 젊은 여자다. 갸름한 얼굴에 코가 길었다. 또 한 여자는 이마가 좁고 살결은 희었으나 무턱이다 싶게 생겼는데 곡물과 잡화 무역을 하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 여자는 황매 빛깔에 연두빛의 잔무늬가 있는, 지리맨 바탕의 기모노 그리고 연갈색과 남색이 얽섞인 하오리를 걸쳐입고 있었으며 상당히 세련되고 교양있는 분위기를 가졌다. 이들 중에서 연장자인 듯 우중충한 회색 계통의 기모노 하오리에 남색 오비를 맨여자는 우편 국장 마누라였고. "그렇게 해주어서 우리 여자들 입장에선 좋긴 좋지만요."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까르르 웃고 나서 다시, "조선 여자는 일본 남자하고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그건 틀립니다아. 일본 남자하고 결혼 안 하는게 아니에요, 일본 남자가 조선 여자하군 안 하는 거지요." 코가 긴 헌병 장교의 처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럴까? 그러면 일본 여자는 조선 남자하고 결혼하는 사례가 더러 있던데, 그러고 보면 이거 불명예 아니유? 남자의 정조관이 여자보다 훨씬 높다 그 얘기가 되니 말예요. 호호홋..." 코 긴 여자 말이 막힌다. 그러나 "그, 그야 첩으론 데리고 사는 일이 흔히 있겠지요만 여자야 어디 첩을 거느리고 살 수 있나요?" 자기 한말이 우스웠던지 호호호오하고 웃는다. "술집이나 유곽의 여자 얘기겠지요. 나는 양갓집 딸의 경우, 일본 남자와 결혼하는 일이란 거의 없지 않느냐는 거예요." 서희는 노상에서 행패를 부리던 송애 생각을 한다. 일본 헌병 나으리의 여편네라고 뽐내는 송애, 그 자리에서는 철저하게 묵살했으나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그런데 또 이곳에 와서 송애 말과 관련 있는 얘기를 듣게 되니 이래저래 착잡하다. "그거야 뭐 일본의 경우도 그렇지요. 양갓집 여자가 조선 남잘 따라 사는 건 아니지 않아요?" "내가 듣기엔 그렇지 않아요. 조선 남자는 화류계의 여자를 처로 맞이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거예요." "아아니, 쯔무라상.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당신 일본 여잔데 그래 일본 여잘 그리 깎아내리기예요?" "깎아내린다는 것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어머, 알고 보니 쯔무라상 당신 조선인 편이구먼. 그것 좀 곤란한 얘기 아녜요? 차라리 아이누족 편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실실 웃는다. 아이누족이란 일본에서 가장 이단시되고 혐오하는 일본 북방에 사는 종족이다. 서희는 그 모욕을 감내하고 앉아 있다. "도시 그런 것에 관심한다는 게 우스워요." "하여간 일본 여자의 경우가 비율이 높다... 그보다는 조선 여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 중얼거리는데 "아아니 이분이, 집요하군요. 쯔무라상 당신 총독부에 보고서라도 내시겠어요, 아니면 그 문제 가지고 박사 논문이라도 쓰시겠어요?" "박사 논문 안 될 것도 없지만..." 쯔무라 양행의 안주인은 깔깔거리고 웃다가 서희를 향해 "오꾸사마(부인)." 군계 속의 일학처럼 앉아 있던 서희 "네." "오꾸사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선 여성의 입장에서..." 영사 마누라, 정확히 영사대리의 마누라는 아까부터 우편국장댁과 열심히 그들 집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서희는 웃고 만다. "나는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꾸사마의 견핼 듣고 싶군요." "글쎄요... 보호받는 사람의 심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적개감...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자의 정조관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이?" "글쎄요. 수치겠지요. 그보다 더한 수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반대의 경우라면? 일본이 조선같은 처지라면요?" "우리 나라에선 타민족에 대한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까, 뭐라 말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역시," "역시?" "그럴 경우에도 수치로 생각하겠지요." "양쪽의 경우 다아?" "글쎄요. 내가 조선 여자 전부의 입장에서 말하긴 어렵지요. 그렇지만 옛날에 중국 왕족에게 시집가는 경우에도 그건 죽으라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여겼으니까." "그야 이역만리 부모형젤 떠나서 가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살아 이별은 죽음보담은 나은 게 상식 아니겠소? 임진왜란 때도 많은 조선 여자들은 그 수치심 때문에 자결을 했으니까요." 코 긴 여자 입에서 이때 "시다다까," "시다다까모노입니까?" 서희가 미소지으면 말했을 때 여자는 낯을 붉힌다. '시다다까'라 할 적에는 강하다는 뜻이 되지만 '시다다까모노'라 할 것 같으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할 사람을 면전에 두고 할 말은 못 된다. 여자는 서희가 온유하게 웃으며 찔렀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사실 코 긴 여자는 모노라는 말까지 붙이려다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상대가 이민족이란 점이 중요하다 그거로군요. 그렇담 자존심일까요? 우월감은 가졌을 리 없겠고..." "피의 순수 때문인 겝니다. 듣자니까 일본서는 사촌끼리도 혼인을 한다지만 조선에서 사촌은 커녕 남이라도 성씨가 같으면 혼인 못하지요. 일본에 비하여 성씨도 얼마 되지 않는데도,"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 조카가 조도전대학 사학과에 다녀요. 수재지요. 그 아이 말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혼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를 섞어서 조선인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중국은 워낙이 인구가 많아 어렵겠지만 조선쯤이야 가능한 일이라나요? 서양 역사에서 보면 알레기산다 대왕도 그 땅을 정복하면은 그 땅에서 반드시 제 나라 남녀를 데려가서 씨를 뿌렸다는 거예요." 이건 또 지독한 얘기다. "그렇게 될까요? 통치는 받지만 한 민족이 말살이야 되겠어요?" 서희는 흥분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연연한 연분홍 저고리의 순백색 치마, 볼을 쓸어보는 그의 흰손에 심해 같은 비취 쌍가락지가 눈에 스민다. 코가 긴 여자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 말 뜻은 나도 알겠지만 민족의 순수한 것을 따지자면 우리 일본같이 순수한 민족도 드물 거 아니겠어요? 왜냐하면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사방이 바다예요, 해서 일찍이 외적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거든요. 그런 순수한 나라도 조그마한 섬나라이지만 세계 도처에 식민지가 있고, 구태여 피 섞지 않아도 잘만 해나가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피부빛이 씨커먼 인도인하고 영국인이 피 섞겠어요?" 우편국장댁말고 모두 여학교는 나온 처지여서 일단은 유식하다. "아무튼 정복을 당한 나라는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순 없지요. 그 학생은 인도적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내 조카는 멀리 내다본 거 아닐까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학문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불만이에요. 멀리보다 당장이 문제거든, 좀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우리가 지금 지배하는 처진가요? 이곳에서 조선인들이 판을 치고, 마치 우리가 지배당하는 꼴 아니에요? 반일분자는 가차없이 색출해야해요. 우환덩어리지 뭡니까?" 이때 "그만들 두어요. 여자들이 무슨, 정치적 얘긴 필요 없어." 영사부인이 서희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얘기라도 안 하면, 노가미상 가문 자랑을 들어야 하니까? 안 그래요? 오꾸사마." 쯔무라 양행 안주인 말에 모두 깔깔 웃는다. "내가 무슨 자랑을 했다구..." 우편국장댁이 멋쩍게 웃는다. "아 참! 사이상." 코가 긴 여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꾸사마가 아닌 사이상 하고 부른다. "네." "조선 사람 욕해서 미안해요." "패장은 말이 없지요." 태연스럽게 서희는 여자 눈을 본다. "일전에 말예요, 나 누굴 만났는데 혹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 "김두수라는 사람 아시죠?" "네 알아요." 역시 태연자약이다. "어떻게 아시지요?" "만난 일은 없어요. 말로, 잘 알지요." 엄격해진 서희 눈빛이 여자를 당황하게 한다. "글쎄, 좀 이상한 얘길 한 것 같았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이번에는 서릿발 같은 웃음이 지나간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못한다. "혹 만나게 되면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내가 한번 만나잔다구요. 도움이 됐으면 싶지만 그 사람 부친에 대해 할 얘기도 있다구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이 일본 여자 귀에는 그저 심상한 얘기로 들렸지만 그것은 김두수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인 것이다. "전하지요. 회령에 자주 가니깐," "회령에 있나요?" 서희는 알면서 묻는다. "그곳에서, 지금은 순사부장이에요." "출세했군요." "그 사람 처지로선 그렇지도 않나봐요. 자유롭게 일선에서 뛰고 싶은 모양이죠?" 돌아오는 인력거 속에서 서희는 나직하게 웃는다. 하하하하... 나직이 소리내어 웃는다. '오늘은 송사리들이 꽤나 나를 번거롭게 했다.' 서희는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웃는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모서리가 다 깎여버린 능숙한 태도는 그 옛날의 윤씨부인을 연상케한다. 이날 밤 길상은 서희의 얼굴을 피하면서 말했다. "나 내일 하얼빈에 가겠소." "거긴 뭣하시려구요." "상가를 한 번 둘러보구... 전부터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번에는 서희 쪽에서 길상을 외면한다. 두 사람 사이에 굳게 뚜껑을 닫아놓고 지낸 일을 길상이 처음으로 건드린 것이다.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얼빈의 상가를 둘러볼 필요는 없다. 억지라면 억지였고 나는 가는 것에 반대라는 의사 표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희가 느낀 것은 길상의 고민이다. 결정적인 일이라면 억지를 쓰지 않을 것이며 의사 표시 같은 것 할 사람이 아니다. 뜨거운 것이 서희 목에 치밀었다. 일종의 안도, 안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감정 속에 냉혹한 판단이 밀려든다. '아니다. 고민이란 진작부터 있어왔던 것, 저이는 결정을 내리려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말이 길상의 입에서 나왔다. "송선생이 그곳에 와 있는 모양인데, 김생원 유품을 가져왔다는 얘기니까 가보기는 가보아야겠소." "송선생이 이곳에는 왜 못 오십니까?" "그쪽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오." 침묵이 계속된다. 서로의 얼굴은 가면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가면 뒤에는 의지의 싸움이 불꽃을 튀긴다. 서희에게는 쓰러지려는 마음이 십분의 일, 그 십분의 일을 두려워하여 싸운다. 길상은 반반이다. 그러나 서희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그에게는 반반 이외 방황이 있었다. 북국의 바람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숨막히는 사진의 벌판이 바닥을 넓히고 있었다. 마음의 바닥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서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길상이 힐끗 쳐다본다. "헌병 장교 이와자끼의 처가 김두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어떻게?" 재빠른 반응이 나타난다.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면서 얘기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한번 오라고, 부친 얘기도 있으니까 만나거든 그리 전하라 했습니다." "잘했소."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서희는 한숨을 깨물고 "저문데 주무시지요."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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