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연서원(龍淵書院)
조선 세종 때 명신(名臣) 학파(鶴) 이예(李)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 청대(淸臺) 권상일 선생과 고을 사림의 공의(公議)로 영조 13년(1737) 울산부(蔚山府) 서오리(西五里) 은월봉(隱月峯) 아래, 황용연(黃龍淵) 위에 용연사(龍淵祠)를 창건(創建)하여 매년 11월 16일 향사(享祀)하여 왔으나, 영조 16년(1740) 경신(庚申) 화재로 소실되고 정조(正祖) 6년(1782) 11월 10일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로 이건(移建)하여 사호(祠號)를 석계사(石溪祠)라 개제(改題)하였다. 철종 11년(1860) 3월 향도사림(鄉道士林)의 공의(公議)로 석계서원(石溪書院)으로 승원(陞院) 하였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월진문회에서는 1998년 2월 향유(儒)들의 공의(公議)를 얻어 용연사 옛 터에 서원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1월 묘우(廟宇)와 강당 동서재, 내· 외삼문을 준공하고, 동년 3월 12일 상충묘(尙忠廟)에 충숙공(忠肅公) 학파(鶴坡) 이선생의 위패를 봉안하니 용연사가 창건된지 268년 만이다. 원액(院額)은 용연서원(龍淵書院)이라 하고, 묘우(廟宇)는 상충묘(尙忠廟), 강당(講堂)은 양성당(養誠堂), 동재(東齋)는 명성재(明誠齋), 서재(西齋)는 온고재(溫古齋), 내삼문(內三門)은 선인문(宣仁門), 외삼문(外三門)은 추인문(追仁門)이라 명명하였다. 1편에 3년)에 고 용연서원 앞마당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시조(始祖) 충숙공(忠肅公) 학파(鶴坡) 이선생(李先生)의 이력을 기록한 비(碑)로써 2003년 6월 중순 전 성균관 전의(成均館 典儀) 강양향교 전교(江陽鄕校 典校) 합천(陜川) 이상학(李相學) 선생께서 찬(撰)하여 2004년 10월 16일 세웠다.
2. 석계서원(石溪書院)
석계서원은 본래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 은월봉(隱月峯) 아래 있었던 구 용연사(舊 龍淵祠)를 철훼(撤毁)하고 영조 16년(1740) 경신(庚申) 화재로 소실되어 울주군 웅촌면 석계리 현지(現地)에 중건(重建)한 뒤 철종 11년(1860) 3월 하순 정일(丁日)에 향도사림(鄕道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서원으로 격상되었고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를 봉향(奉享)하고 있다. 묘우(廟宇)를 상충(尙忠), 당(堂)을 경수(敬守), 재(齋)를 치지(致知), 문(門)을 필동(必東)이라 하였다. 사인(士人) 최석신(崔錫信)이 묘액(廟額)을 쓰고 판서(判書) 이익회(李翊會)가 당재액(堂齋額)을 썼다. 또 도호부사(都護府使) 이충익(李忠)이 원액(院額)을 쓰고 후손 정찬(珽燦)이 문액(門額)을 썼다.
고종(高宗) 무진년(戊辰年)(1868)에 방금(邦禁:국가의 서원 금지령)으로 철거되었으나 광무(光武) 4년(1902년)에 후손들이 구지(舊址)에 설단(設壇)하여 치제(致祭)하고 을묘년(乙卯年 1915)에 경수당(敬守堂)과 필동문(必東門)을 축조(築造)하였다. 재장(齋長) 1인, 유사(有司) 2인, 고자(庫子) 1인을 두고 매년 구월 중양절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