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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의 노예인 대통령![]() 5공 비리의 근원은 대통령 중심제 하의 全斗煥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도대체 어떤 자리인지 全씨도 그 얼굴을 알지 못하는 친족이 주변의 아첨에 의해 갑자기 실력자로 둔갑하고, 그의 아호 밑에 수백억원을 가져다 준 기업인들은 『자발적으로 냈다』고 말하고 있다. 5공 비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대통령직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 는 독재체제하의 대통령이었던 관계로 全씨는 모든 잘못의 책임도 독점해야 할 판이다. 권력의 독점은 세상이 바뀌자 책임의 독점으로 변질되었다. 통치사료에 나타난 全대통령은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다. 옛날 청와대 일정표를 보면 朴正熙 대통령은 가끔 공백을 두어 명상을 하든지 책을 읽는 여유를 가져었다. 全대통령은 의전수석비서관이 정해준 일정표를 따라 잠자는 8시간을 빼고 하루 16시간씩 근무했다는 평이다. 김병훈(金炳薰) 의전 수석은 일정표를 짤 때 각 수석 비서관실로 들어오는 대통령 면담 요청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했다고 한다. 「의전수석이 대통령의 수문장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의 일정은 1년분의 틀이 미리 정해진다. 장래 3개월간의 일정은 거의 정해지고, 장래 1개월간의 일정은 단 30분의 여유도 낼 수 없을 만큼 확정된다고 한다. 의전 관례상 대통령이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 외국 원수나 외무장관, 신임·퇴임 대사의 인사 6·25 참전국의 국방장관 등이 그런 이들이다. 자동케이스에 속하는 이런 면담과 예정된 행사·회의의 틈 사이에 비일상적인 보고나 결재 계획을 잡는 것이다. 全대통령의 오전 일과는 오전 9시부터 시작됐다. 全대통령은 일 욕심이 많아 오전 7시30분부터 관계자들을 불러 보고를 받는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대통령의 점심 시간은 보통 2시간이지만 2층의 내실로 올라가 1시간쯤 낮잠을 잘 여유도 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은 사람을 만나는 일로 시종한다. 全대통령은 어느날 의전 수석에게 『내가 무슨 무쇠덩어리 인가. 나도 좀 쉬어야지, 일정대로 하다가 보니까 밥 먹을 틈이 없어?』 라고 짜증을 부린 일도 있다. 그는 또 『대통령이란 것은 의전수석이 시키는대로 하는 자리지』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全대통령이 취임 직후 경호실장에게도 알리지 않고 의전 수석만 데리고 강원도 탄광촌을 헬기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착륙할 때 탄가루가 날아 검은 먼지를 뒤집어썼다. 의전수석이 『미리 알리지 않아 물을 뿌리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이 사람아. 그래서 불시에 온 것 아닌가. 이 가뭄에 물을 뿌리면 내가 욕을 먹잖아』 이럴 때까지는 좋았는데, 대통령을 맞이해줄 파출소장조차 없었다. 全대통령은 『어디로 가지?』라고 물었고 의전 수석도 지리를 잘 모르는지라 『어디로 가시렵니까?』하고 되물어야 했다. 그냥 돌아가기도 뭣하고 해서 그 동네의 가장 나이 많은 노파를 찾아갔는데, 대통령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해도 『누구시더라?』하고 몰라보는 것이었다. 모처럼의 행차인데 한 일은 없고, 신문에 낼 기사도 없고 해서 그 뒤로는 이런 식의 불시 출장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관료 경직성이 全씨 괴롭혀 全대통령은 지방출장 중에 두부찌개를 맛있게 먹고 나서 『나는 두부찌개를 좋아한다』는 인사치레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그 뒤에 全대통령이 지방시찰을 가면 밥상에 늘 두부찌개가 나왔다고 한다. 全대통령도 질렸는지 어느날 『왜 두부찌개만 내 놓느냐』 고 불평을 했고 그 뒤 식단이 바뀌더란 것이다. 대통령이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일이 집행된다는 것이 대통령중심제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全대통령도 그런 영향력을 인식하고 현장확인을 통해 그런 관심방향을 행정조직에 보여주려고 했다. 대통령이 포장마차를 찾으면 포장마차 단속이 완화되고, 가뭄현장에 나타난 뒤에는 양수기가 대폭 지원되며, 청진동 골목에 빗자루를 들고 아침청소 하러 나타나면 한동안 거리가 깨끗해졌다. 이러한 관료의 경직성은 대통령의 선의를 왜곡시키고, 그에 따른 비난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빗기도 했다. 1983년 9월1일 아침에 全대통령은 작업복차림으로 서울 청진동 골목에 나타나 주민들과 함께 빗자루질을 했다. 그날 밤 9시 뉴스에 한 텔리비전 방송국은 이 장면과 함께 全대통령이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굳은 자세로 앉아있는 주민들에게 일장훈시를 하는 한가한 장면을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바로 그 뒷뉴스가 2백69명이 떼죽음한 KAL 007 피격사건이었다. 지난해 초 한 부장판사는 국군보안사가 기소한 간첩사건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했었다. 얼마 뒤 법조계에는 『全대통령이 대노했다』는 소문이 쪽 퍼져 그 부장판사는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국군보안사에서 이 재판결과를 보고한 자리에서 全대통령이 역정을 냈다는 소문이 법조계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고 아마도 그 뒤의 다른 간첩사건 형량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全대통령이 대통령직의 영향력을 이용하며 수사와 인권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면, 아마도 고문의 풍토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全씨는 자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인식하고서도 인간본연의 권리에 패한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지 못했고, 그 쪽으로 관료 조직을 돌려놓지 못했었다. 둑 위에 홀로 선 사람 朴, 全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은 영광의 자리이긴 하지만 즐거운 자리는 아니다』 통치사료 당당 비서관이었던 최재욱(崔在旭)의원은 『밤늦게까지 일을 본 뒤 대 통령이 혼자서 2층의 내실로 퇴근하는 뒷모습을 보면 그렇게 쓸쓸해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시내로 나가서 친구들과 술마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마음 턱 놓고 이야기 할 상대도 없이 쓸쓸하게 물러나는 것을 보면 무슨 재미로 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지난 86년 11월에 金日成 사망설이 보고되었을 때 다른 장관·참모들은 즐거워했는데 全대통령은 웃지 않았다고 한다. 『대응책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웃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 이 자리에서 全대통령은 『휴전선의 대남방송은 원래 거짓말만 전문으로 하는 것이니 거기에 너무 혼을 빼앗기지 말고 심리전쪽으로 생각하라』고 당부했었다고 한다. 朴正熙대통령은 『한강 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는 둑 위에서 보아야 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둑 위에 홀로 선 사람」 이다. 시야가 넓은 만큼 무한책임에 따른 심리적 부담도 엄청나다. 이 부담감이 대통령을 부지런하게 만들기도 독선적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애국자가 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한 수석비서관출신은 『대통령의 책임감과 총리의 책임감은 천지차이다. 총리는 책임지고 물러나면 되고, 때로는 대통령에게 떠넘기면 되지만,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어느 대통령이라도 역사에 대한 책임이란 말을 즐겨 쓰는데, 대통령이 되면 그 위로는 국민과 하늘밖에 없는 지라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악독한 대통령이라도 자나깨나 나라 걱정하게 돼 있다. 가뭄 때 대통령의 입술이 터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수석비서관 출신 인사는 『바보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도 수재가 된다. 끊임없이 나라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지식은 비례하는 법인데 대통령의 단독 아이디어에 의해 국가정책이 성큼 진전되는 수가 있다. 이는 대통령이 가장 골똘히 국정을 생각해온 결과다』고 했다. 서로 잘 통하는 정상들 통치사료에 의하면 지난 83년 5월에 중공민항기가 납치돼 춘천에 착륙했을 때 소집된 비상대책 회의에서 全 대통령은 이런 처리지침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이 사건을 중공과의 관계개선에 활용하라. 승객들을 데려 가기 위해서 그 쪽에서 굽히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으니 잘 대우하여 외교의 길을 트라』 1983년 9월12일(현지 시간)에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KAL007 점보기를 격추한 소련에 대한 규탄결의안이 처리되고 있었다. 서방측 공동결의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안이 통과되려면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중 9개국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서방측은 8개국의 지지를 확보 한 표가 부족했다. 이때 全斗煥대통령은 어느 행사장에 있었다. 외무부장관을 통해서 요르단의 지지만 받으면 결의안이 통과되겠다는 긴급보고를 받은 全 대통령은 며칠 전 방한했다가 중공으로 간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주한 영국대사를 찾았다. 영국 외무부의 중계로 후세인 국왕에게 全대통령의 부탁이 전해졌고, 국왕은 즉시 유엔본부의 요르단 대표에게 서방측 결의안 지지를 지시했다. 당시의 신문들은 「찬성인지 반대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발언을 끝낸 요르단.』 대사에게 노란쪽지의 긴급전문이 전해졌다. 요르단 대표는 찬성하는 나라는 손을 들라는 의장의 선언에 맞추어 손을 들었고, 결의안은 찬성 9, 반대 2, 기권 4로 통과되었다」 고 보도하였다. 나라와 이념은 다르지만 각국의 정상들은 「강둑 위에 홀로 선 지도자」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서로 잘 이해하며 정상회담은 거개가 좋은 분위기라고 한다. 이런 대화록이 몇십 년 뒤 공개되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한다. 全대통령이 인간적으로 터놓고 교유했던 지도자는 나카소네, 레이건, 얼마 전 사망한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하크 등이었다. 지난 83년 1월에 한국에 왔던 나카소네는 全대통령과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열심히 배워온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는 등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었다. 나카소네 수상은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 을 하러 떠나기 전에는 全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전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고 돌아와서는 회담내용을 알려주기도 했다. 정상회담에선 상대방에게 『우리나라의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상의하는 등 결식을 가리지 않고 진담을 하기도 한다. 지난 봄 全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닉슨 전 대통령은 『이제부터는 좀 당할 것이요』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007 피격과 극비 정보 통치사료는 국가의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알려주고 국가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정부기관이 이에 대처하는 메카니즘을 이해하게 해주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현직 대통령 혼자만의 교과서이다. 통치사료는 KAL 007피격 사건과 같은 긴급상황의 전개과정을 소상히 기록해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3년 9월1일 아침에 全대통령은 아침 청소캠페인에 참석했다가 張世東 경호실장으로부터 KAL기 실종 보고를 받았다. 제1보는 폭발 또는 격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오전 8시부터 한국과 미국 정부의 각 정부기관은 긴밀한 협조체제에 들어갔다. 안기부와 미 CIA, 외교채널, 연합사를 통한 군사조직, 교통부 채널 등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군조직을 통한 정보가 가장 정확했었다고 한다. 다른 채널로는 007이 사할린에 강제착륙 당했다는 보고가 대통령에게까지 올라 왔으나, 연합사를 통해 들어온 미군 정보는 시종일관 격추 쪽이었다. 이날 미군측이 연합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제공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007의 항적도였다. 이날 정오 무렵, 그러니까 007이 격추된 지 약 9시간 뒤에 팩시밀리로 들어온 이 항적도에는 007이 알라스카를 벗어나면서부터 항로를 이탈, 북쪽으로 기울면서 캄차카와 사할린 상공을 지나간 과정이 그려져 있었다. 캄차카로 들어가기 직전에 베링해 상공에서 007이 완만하게 좌회전한 흔적(이것은 007이 관성항법장치를 쓰지 않고 비행했다는 증거다)도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이 항적도를 대한항공 운항관리자와 조종사에게 보여주어 해석을 구하기도 했었다. 이 항적도의 존재는 미국정부안에 지금껏 비밀로 돼 있다. 미국정부는 『우리는 007의 항로이탈을 추적, 경고할 수 있는 레이다시설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공식입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면 007의 사고를 방조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미국의 레이다가 007을 시종일관 추적했음을 입증하는 이 항적도를 한국으로 보낸 것은 비상시의 한미협조 관계가 굉장히 긴밀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盧대통령 만들기 작전 통치사료에는 케이시 미국 ClA 부장이 지난 84년 봄과 85년 봄 두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 노신영(盧信永) 및 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을 만난 뒤 全대통령을 예방한 상황도 적혀 있다. 케이시 부장은 정치적 메시지를 가져온 게 아니고 대통령에게 전략브리핑을 해 주기 위해 왔었다고 한다. 미국의 전문가팀이 해주는 이 최고기밀의 브리핑은 주로 북한과 그 주변의 군사상황 에 관한 것인데. 한국내 핵배치 상황도 대통령한테만 알려준다고 한다. 핵 배치상황을 알 수 있는 고위층은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全대통령이 숱한 비난 속에서도 그의 재임기간중에는 권력핵심부의 내 분을 막고, 처음부터 점찍어 두었던 육사 동기생을 후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인간관리술 덕분이었다. 진의종(陳懿鍾)총리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全대통령은 『나올 때까지 총리직을 떼면 안된다. 떼면 죽을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총리직에 있다는 것이 환자의 투병의지를 키울 뿐 아니라 의료진의 관심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간파한 것이 全씨였다. 張世東씨는 『내분이 없었던 것은 全대통령이 부하들의 업무 한계를 분명히 해주어 서로 월권을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안기부, 보안사, 경찰의 3대 정보 채널도 잘 조정하여 정보의 독점에 따른, 잡음도 별로 없었다. 경호실장의 역할도 축소시켰다. 張世東, 安賢泰씨도 경호실장 시절에는 그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군부와 대통령과의 비공식 채널로서 경호실장이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다. 예컨대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경호실장을 통해서 하는 식이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는 경호실이 정치자금의 모금 창구였다는 얘기도 있으나 경호실이 현실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으면서 車智澈과 金載圭가 권력 암투를 벌여 10·26사건까지 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全씨는 권력핵심부의 관리에서 朴대통령보다 나았다는 평이다. 통치사료에는 全대통령과 그 핵심 참모들이 권력의 누수현상을 걱정했음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단임기간이 끝나갈 때는 후계자에게 권력이 쏠리기 시작하여 효율적인 통치가 어렵게 되리라고 예상하였다. 너무 일찍 후계자를 부상시키면 全대통령이 약화되고 너무 늦추면 후계자가 국민지지를 모으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全대통령의 한 핵심 참모는 全대통령 과 후계자의 권력 곡선을 그라프로 표시하며 후계자를 확실히 밝히는 타이밍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全대통령이 처음부터 盧泰愚씨를 후계자로 지목, 그런 코스를 밟도록 경력관리를 시켰다는 것이 여권 핵심 인사들의 견해다. 대장으로 전역시킨 뒤 정무장관, 체육부장판, 내무부장관을 지내게 하고,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국제적인 활동을 하게 했으며 12대 국회에 전국구 의원으로 등장시킨 뒤 민정당 대표로 임명 정치의 계절에서 각광을 받는 무대 중심부로 옮겨 놓은 것이란 해석이다. 盧대통령은 지난 86년에 자신을 견제하는 청와대 비서진에 대해 『세상이 바뀌면 일개 비서관이 각하를 어떻게 보호하겠어?』라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이 말투에서 기자들은 全. 盧 두사람 사이의 묵계가 굳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역사의 법정이 된 청문회 지난 11월 초순의 5공비리 청문회는 역사의 법정이었다. 야당국회의원이 전 안기부장을 앉혀놓고 피의자 신문하듯 했다. 「돌대가리」 「너 따위」 「뭐야?」 등등의 욕설을 듣고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버티고 앉아 있었던 것은 1년여 전까지만 해도 국회의원들을 입건, 연행, 연금, 미행할 수 있었던 막강한 안기부장이었다. 민주당의 노무현(盧武鉉)의원은 安賢泰 전 경호실장이 경호실법에 관해 대답을 잘 하지 못하자 『당신의 고유업무에 관한 법률도 모르다니…. 당신네들은 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알 필요도 없었지요? 절대권력으로 밀고 나가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당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법 때문입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모든 정치·사회 문제를 법률로써 해결하려고 했던 5공화국의 권력자가 바로 그 법률 앞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민정당의 한 의원은 『5 공화국 시절에는 검찰이 권력의 의지에 따라 수사만 시작하면 어떤 혐의든 캐내서 구속시킬 수 있다는 인상을 보여 주었다. 全 전 대통령 주변을 수사하는 검찰은 과거의 그런 행태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물증이 별로 나타나지 않아 사실상 기소하기가 어려운데도 그렇게 처리했다가는 옛날엔 야당한테 잘도 하더니, 하는 비판을 받지 않을까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법에 걸려는 분위기다』 고 걱정하기도 했다. 5공화국의 상징적 인물을 둘러싼 청문회를 연3일간 보는 사이에 모든 국민들은 민주화의 결과를 확인하였고 『정말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10·26사건 재판에서 金載圭에게 사형확정판결을 내렸던 대법원의 한 대법관은 『법정에서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느냐』고 했다지만 텔리비젼 화면에서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번 청문회는 입증했다. 이제 역사의 거친 손은 全斗煥씨와 그의 친족·측근을 향해서 포위망을 압축시키고 있다. 그들이 그토륵 애용하였던 「법대로의 원칙」은 부메랑처럼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 全씨는 「역사의 평가」에 기대하며 오늘의 고통을 참는다고 했는데, 적어도 지금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다. 한 측근은 『全斗煥씨의 역사적 역할은 민주화에의 거름일 것이다』고 했다. 문제는 거름 역할을 하려면 스스로 썩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06&C_CC=AC |
첫댓글 다소 개인적인소견이 포함 되었으나 객관적인 사료라 생각이 되어 올립니다. "역사의 평가"가 이제는 이루어져야 하고 전사모가 앞장서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