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벽선(黃檗禪)의 원류(源流)
황벽희운의 선사상 연구
1. 序言
1). 연구의 동기 및 목적
불교의 사상 이외에 달리 선불교의 정신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중국인들의 생활종교로 만든 것이 그대로 선불교의 정신이다.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의 수행과 정각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들 각자가 근원적인 불성을 자각(自覺)하여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로 자기 자신의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망념과 근심, 걱정,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여유 있게 일상생활을 유희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1)
중국에서의 선(禪)의 본격적 시작은 일반적으로 6세기 초 보리달마(菩提達摩) 2) 가 도래한 이후로 본다. 이것은 물론 후대 선문(禪門)에서 전등설(傳燈說)을 수립하면서 중국선종(中國禪宗)의 초조(初祖)를 보리달마(菩提達摩)로 잡는 데에 근거한 주장이다. 실제 현존하는 자료로 볼 때 가장 초기의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종파(宗派)는 도신(道信) 3) 에서 홍인(弘忍) 4) 과 신수(神秀) 5) 로 이어지는 동산법문(東山法門) 6) 이다. 동산법문의 선법(禪法)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부르는 것인데, 동산법문의 일행삼매는 좌선간심(坐禪看心) 혹은 좌선관심(坐禪觀心)의 수행법(修行法) 7) 을 말한다.
신회(神會) 8) 는 신수(神秀)의 선법을 점교(漸敎) 9) 라고 비난하고 혜능 10) 의 선법을 남종돈교(南宗頓敎)라고 부르며, 돈교(頓敎) 11) 야말로 불조(佛祖)가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정법(正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회의 주장대로 남종돈교(南宗頓敎)가 정법(正法)으로 공공연히 인정받게 되는 것은 신회의 문하(門下)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조(馬祖) 12) 와 석두(石頭) 13) 의 문하(門下)가 중국선(中國禪)의 천하를 평정한 당말(唐末)에 와서이다. 그리하여 남종돈교(南宗頓敎)인 혜능의 선법은 마침내 조사선(祖師禪) 14) 이라는 형태의 중국선(中國禪)을 완성해냈던 것이다. 즉 혜능이 중국선(中國禪)의 개창자라면 그 선법을 완성시킨 것은 마조와 석두 문하의 선승(禪僧)들이었다.
『육조단경(六祖壇經)』 돈황본(燉煌本) 15) 을 통하여 혜능의 선법을 살펴보면, 먼저 주목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한번 듣고 말끝에 곧 깨닫는다[一聞言下便悟]’라고 하는 말이다. ‘말끝에 곧 깨닫는다[言下便悟]’ 16) 라는 말은 혜능이 자신의 깨달음의 경험을 진술하는 부분에 나타나고 또 혜능이 제자들을 깨닫게 하는 부분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한 마디로 『단경』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사건은 모두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형태로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곧 견성(見性) 즉 자성(自性)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말끝에 바로 자성을 알아차린다는 선법(禪法)은 혜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서 이후 중국 조사선(祖師禪)의 큰 특징이 되어서, 어록(語錄)과 전등록(傳燈錄)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말끝에 문득 깨닫고 보면 만법은 하나의 자성(自性)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환상(幻想)일 뿐이다. 이처럼 만법(萬法)을 한 성품의 나툼으로 보고 모두를 평등하다고 하는 불이법(不二法)은, 뒤에 마조(馬祖)에 이르면 일체유심(一切唯心)의 일심법(一心法)으로 확립되게 된다.
혜능의 이러한 언하변오(言下便悟), 돈오돈수(頓悟頓修) 17) 의 선법은 이후 중국선(中國禪)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마조(馬祖)와 석두(石頭)의 문하에서 조사선(祖師禪)으로 꽃을 피우고,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 18) 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혜능(慧能)을 계승한 전성기의 중국선종(中國禪宗) 가운데 마조계(馬祖系)의 중심인물인 마조(馬祖),백장(百丈) 19) ,황벽(黃檗),임제(臨濟) 20) 등 사가(四家)의 어록(語錄)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이들이 펼친 선법(禪法)을 살펴보면 마조는 돈오돈수(頓悟頓修) 21) 인 혜능의 선법을 돈오불수(頓悟不修) 22) 로 보다 철저히 하고, 번뇌즉보리(煩惱卽是菩提) 23) 라는 혜능의 불이법(不二法)인 반야바라밀법(般若波羅蜜法)을 행주좌와(行住坐臥), 24) 견문각지(見聞覺知) 25) 에 나타나는 만법(萬法)은 일심(一心)의 작용이라고 하는 일심법(一心法)으로 확립시키고, 좌선간심(坐禪看心)을 대신하여 상당시중(上堂示衆)과 문답(問答)에 의한 공부 방법을 일반화(一般化)함으로써, 혜능이 문을 연 중국 조사선(祖師禪)의 명실상부한 완성자가 된다. 백장은 마조가 완성한 조사선을 이어받아 삼구투과(三句透過) 26) 등의 다양한 방편을 개발하고, 한편으로는 제도적인 면에서 새로 선원(禪院)을 건립하여 종래 율원(律院)에서 거주하던 선승(禪僧)들을 독립시키고 선원(禪院)에는 불당(佛堂) 대신에 법당(法堂)을 두어 상당시중(上堂示衆)과 문답(問答)의 제도를 확고히 했다. 황벽이 특히 강조한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심체시공(心體是空)이라는 일심법(一心法)과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분별상(分別相)을 쫓지 말라는 무심(無心)의 가르침이었다. 임제는 소극적인 무심(無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견문각지(見聞覺知), 어묵동정(語黙動靜) 27) 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성(自性)을 파악하라고 강조한다. 모든 경우에 항상 활발히 살아 움직이는 이 자성(自性)을 임제는 ‘보고 듣는 것’이니 ‘보고 듣는 사람’이니 ‘참사람’이니 하는 등으로 불러서 어떠한 불교적 테두리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선(禪)을 펼친다.
이러한 중국선의 사상적 전성기를 9세기를 전후한 조사선(祖師禪)으로 볼 수 있는데, 조사선에서 중요한 인물 중에 한사람이 바로 임제의현(臨濟義玄)일 것이다. 당(唐)말기에서 송대(宋代)에 이르는 시기에 선종은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커다란 선림(禪林)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중 간화선으로 발전하는 임제종(臨濟宗)의 종조가 임제의현이고 그의 스승이 바로 황벽희운(黃檗希運)이다. 후대에 임제를 필두로 그의 스승인 황벽희운, 마조도일(馬祖道一),백장해회(百丈懷海)를 한 집안으로 해서 임제종의 종통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들의 어록을 묶어 사가어록(四家語錄)을 편찬하게 되고 이중 황벽의 어록이 본 논문 연구의 중심이 될 전심법요(傳心法要)이다.
2). 연구의 범위
마조 이후의 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 강렬한 생활의 체취에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광막한 중국의 대지가 탄생시킨 인간의 종교이다. 인도 이래의 신비한 명상이나 산에 살며 도를 닦는 은둔성은 이 시기에 이르면 완전히 승화되어 버린다. 평이하고 새로운 생활실천에 의한 일상생활 속의 선을 주장하면서 예전의 어떠한 종파나 사상과도 다른 생활불교라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실제로 만일 중국선의 사상이라든가 논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체계의 논리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행동에 철저한 것이며, 그러한 작용 외에 사유의 형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목적적인 수행도 아니며 그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것이 되는 것이며 진리는 밖에서 구해지는 것도, 안에서 이상화 되는 것도 아니며 일상생활 속에서 기운차게 작용하여 그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은 위에서 개략적으로 제시한 중국선종 및 조사선에 관하여 많은 先學들이 이미 쌓아온 연구실적인 선사상의 발전과정에 대한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황벽희운의 선사상의 성격과 특징을 검토하고 아울러 현재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선(禪) 28) 이 송(宋)대의 간화선(看話禪) 29) 을 계승한 것이라면 당말(唐末)과 송초(宋初)까지의 조사선(祖師禪)은 그것이 발생한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조사선의 중심에 서 있는 황벽희운의 如法한 수행법은 어떠한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제시하는지를 면밀하게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황벽은 한국에서 성철스님의 1981년 조계종 종정 법어로 내린 “산은 산, 물은 물” 30) 이라는 표현이 유명한데 31) 이것이 완릉록(宛陵錄)에 있는 표현이며, 32) 흔히 선종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 33) 이라는 표현도 전심법요에 처음 등장한다. 황벽이라는 인물이 선가에서는 단순히 임제의 스승으로서만 알려져 있지만 1908년에 범어사에서 편집된 선문촬요(禪門撮要) 34) 에서도 제자인 임제의 임제록(臨濟錄)보다 황벽의 전심법요가 실려 있고, 또, 공안집 중에는 벽암록(碧巖錄) 35) 에 ‘황벽주조한(黃檗酒糟漢)’ 36) 이,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7) 에는 ‘황벽형의(黃檗形儀)’ 38) 의 공안이 실려 있어 간화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벽어록의 모음집인 전심법요·완릉록의 분량만 보더라도 마조어록 보다 양이 많고 인용되어져 있는 경전들도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등의 대승경전과 달마와 혜능의 사상도 언급되어져 있어 황벽에 대한 독립적인 선사상 연구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가 행하는 간화선의 뿌리인 조사선사상과 수행법을 황벽희운(黃檗希運)이라는 인물의 행화와 사상을 통하여 알아보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禪에서 말하는 수행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가르침인 여러 가지 방법과 방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정법을 여법하고 여실하게 수행하고 불법정신의 지혜와 자비심으로 무량한 공덕을 구족 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일체 중생의 심병과 선병을 치료하고 구제하는 원력을 실행(回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법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참선 수행하는 사람은 번뇌 망념을 끊으려고 수행하고, 열반의 경지나 깨달음을 체득하려고 수행을 한다. 번뇌 망념이 없는 일념의 그 마음이 깨달음의 경지이며 도를 실행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중생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도를 추구하려고만 한다. 불성은 천진하여 본래 그대로 원만한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고 있는데, 또 다시 어떤 수행의 인연을 맺고 수리하고 조작하여 도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즉 일체중생이 본래 청정한 진여자성인 불성을 구족하고 있지만, 心意識의 번뇌 망념으로 뒤덮여져 있어 진여불성의 지혜작용을 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법의 수행과 참선수행은 이러한 불성사상의 본질적인 문제와 반야지혜의 가르침과 불법의 대의를 철저하게 잘 알아야 올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다. 39)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수행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 인 것이다.
또 본 논문에서는 대정장(大正藏)48권에 있는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와 황벽산단제선사완릉록(黃檗山斷際禪師宛陵錄)으로 주 텍스트로 하고 희운에 관한 자료들도 대정장 것을 모본으로 할 것이다. 황벽의 선사상으로는 심성관(心性觀)인 ‘일심(一心)’과 증오관(證悟觀)인 ‘무심(無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심’과 ‘무심’은 달마 이래로 많은 선승들이 자주 사용했던 문구로, 이전에 사용되어진 문구들과 황벽이 사용한 예(例)를 비교해서 어떻게 황벽에 이어져 발전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황벽의 여법하고 여실한 수행구조와 수행법과 제도방법에 대해서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황벽선의 계승과 발전으로 황벽희운 이후선의 전개를 논 해보고자 한다.
2. 黃壁禪의 사회 및 사상적인 배경
1)黃壁希運의 生涯
황벽희운(黃蘗希運 ?-850)은 복주(福州) 민현(閩縣) 40) 출신으로 속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호는 황벽(黃檗)이고 이름은 희운(希運)이다. 출생한 연대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어려서 신동이라 불리더니 홍주 황벽산(洪州 黃蘗山) 41) 으로 출가하였다. 출가한 곳과 오래 주석하여 수행한 곳이 황벽산(黃檗山)이었기에 황벽이라 불렀으며 황벽의 명칭은 황벽나무 42) 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휘(法諱)는 희운(希運)이고 탑호(塔號)는 광업(廣業)이었다.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당시 왕인 선종(宣宗)이 황벽의 입적 후 내린 시호이다. 선종이 어린 시절 출가했었을 때 황벽에게 뺨 맞은 일을 기억하여 거친 행동을 한 사문이라 하여 ‘추행사문(麁行沙門)’이라 호를 주려했다. 하지만 배휴 43) 가 황벽이 왕의 ‘삼계윤회’를 끊어주기 위해 뺨을 세대 때렸다는 뜻이라 간청하여 ‘단제(斷際)’라는 호를 내렸다. 44)
그의 전기는 조당집(祖堂集; 952)권16, 송고승전(宋高僧傳; 988)권20,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1004)권9,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1029)권8, 오등회원(五燈會元11) 1253)권4,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1267)권2․3, 지월록(指月錄; 1602)권9 등에 단편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다르게 실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초기 문헌인 조당집과 경덕전등록(이하 전등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초기 문헌인 조당집과 경덕전등록(이하 전등록)이라고 할 수 있고 본 논문에서도 조당집과 전등록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고찰한다.
황벽은 키가 7척이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므로 육주(肉珠)라는 별명이 있었다. 조당집에는 황벽이 활달한 천성을 갖고 있고 사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았고, 45) 전등록에는 음성이 낭낭하며, 의지가 깊고 맑았다고 되어 있다. 46) 황벽선사는 백장회해의 문하에 들어가 백장의 법을 이었다. 황벽의 법계는 조계혜능 - 남악회양 - 마조도일 - 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의현으로 이어졌다. 그는 젊어서 향리(鄕里) 복주 황벽산 반야당(현 萬福寺)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 강서로 나와 백장회해(百丈懷海;720∼814)를 만나면서 인가(印可)를 받고, 후에 홍주(洪州)근처 고안현(高案縣) 황벽산(黃檗山) 축봉(鷲峯)에서 법을 폈다.
조당집(祖堂集)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처음에 천태산(天台山)에서 행각을 한 내용에 대한 것은 동일하다. 희운이 도반 몇 명과 함께 천태산으로 가는 길에 어떤 스님과 만나 길동무가 되어 어느 개울에 이르렀다. 마침 장마로 물이 넘치고 있었는데 그 스님이 같이 건너자고 재촉 하길래, 선사는 “건너려면 혼자 건너라”고 했더니 그 스님은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가 저쪽 언덕에서 손을 흔들며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이에 선사는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 도적놈아! 애초에 내가 너의 정체를 몰랐던 것이 한이다. 진작 알았다면 다리를 꺽어 놓았을 것을” 그때 그 스님이 탄복하며 “대승의 법기(法器)이니, 나로선 미칠 바가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 47)
이와 같은 언급에서 보면 황벽이 출가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록 이후에는 조당집과 전등록이 조금 다른데, 전등록은 이어 바로 마조와의 기연이 등장하고, 조당집에는 백장에게 가기 전에 한 노파에게 가르침을 받는 기연이 등장한다. 황벽이 출가하여 유행하던 중 어느 날 서울(京闕)에 들어가 한 노파의 집에서 공양을 받았다. 그때 선사는 자신이 아는 견해를 모두 털어놓으니 노파는 미묘한 진리의 관문을 제시하여 일러주었다. 선사는 이 말에 의해 법에 대해 의심하던 바가 풀리게 되었고, 노파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자 “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는 몸이어서, 법의 그릇이 아니니, 내가 들으니 지금 강서성의 백장대사가 선림의 스승으로 봉우리에 우뚝 솟았으니 그리로 가서 배우시오. 스님은 훗날 사람들을 일깨울 스승이 될 사람이니 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48) 라는 말을 듣고 백장에게 찾아가 제자가 된다. 마침내 선사는 백장에게 가서 법을 묻고 들으며 이로부터 거기에 머물러 여러 해를 지냈다.
황벽이 백장을 만나 ‘옛날부터 전해지는 종승을 어떻게 가르쳐 보이십니까?’란 질문에 백장이 침묵하자 ‘뒷사람들에게 끊기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9) 라고 답해 인가를 받는 부분은 조당집과 전등록이 같지만 전등록에는 다음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어느 날 선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백장이 어디에 갔다 오는지를 물었다.
이에 황벽이 말했다.
“대웅산(일명 百丈山)에 가서 버섯을 땄습니다.”
백장이 물었다.
“거기서 호랑이를 보았는가.”
이 말에 선사는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백장은 도끼를 들고 호랑이를 잡으려는 시늉을 하였다. 이 때 황벽이 달려들어 먼저 한 대 내리치자 백장은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 법회자리에서 백장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대웅산 기슭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있으니 대중은 조심하시오. 나는 오늘 그놈한테 한 번 물렸소.” 50) 이는 백장이 황벽 선사의 작풍의 맹렬함을 호랑이에다 비유한 것이며 자기의 법을 이었음을 대중에게 알린 것이다. 나중에 홍주 황벽산 대안사에 옮겨 주석하니 현현한 법을 배우고자 하는 무리가 앞을 다투어 몰려왔다. 후에 다른 지방에 가서도 이 황벽산을 몹시 좋아했으므로 선사를 황벽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황벽희운선사의 시호인 단제(斷際)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제(斷際)라는 시호는 당(唐) 대중(大中) 4년(850) 배휴의 주청에 의해 당의 제16대 황제 선종(宣宗)이 내린 시호이다. 이 시호(諡號)의 배경에는 선종황제의 어린 시절과 황벽희운선사의 호방한 선풍과 개성이 전해지고 있다. 後에 선종이 된 사미가 염관제안(鹽官齊安) 51) 선사의 회상에 있을 때, 황벽희운 선사는 수좌(首座)로 있었다. 어느 날 황벽이 불전(佛前)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선종 사미가 다가와서 물었다.
“선은 불이나 법이나 승을 통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스님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십니까? 이렇게 일부러 경건한 행동을 지어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황벽선사께서 대답하였다.
“나는 불법승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라. 다만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종 사미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경건하게 보일 필요가 있습니까?”
황벽선사는 이 사미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그러자 선종 사미가 응수했다.
“어째서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황벽선사는 다시 한 번 선종 사미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말했다.
“너는 네가 서 있는 곳을 아느냐? 나는 너를 위해 무례나 공손함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시간이 없다.”
선종 사미는 나중에 황제가 된 후 이 과격한 황벽선사와의 일을 떠올리며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사문이라는 호를 내렸다. 당시 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배휴가 이 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내 선종에게 다시 주청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라는 시호(諡號)로 개호(改號)하게끔 만들었든 것이다. 52) 불우한 은신시절을 선가에서 보낸 선종은 이후에 무종의 폐불로 인한 불교의 낙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임제종의 시조인 의현은 황벽의 제자로서 독자적인 선풍을 날렸지만 그 사상적인 형성은 황벽의 지도에 의한 것이기에 황벽희운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임제의 선사상이 전심법요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상당법문에서 “내가 20년 동안 황벽의 문하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불법의 적적한 대의를 묻자, 세 번 모두 화상의 주장자를 맞았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운 쑥으로 어루만져주는 것과 같았다” 53) 라고 하고 있어서 스승인 황벽에 대한 깊은 존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황벽의 법을 이었다는 증거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임제가 황벽의 처소에 머물다 그를 하직하고 떠나려 할 때 황벽이 전법의 표시로 신물을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황벽이 문득 치자 선사가 잡고 한 손바닥으로 치니 황벽이 크게 웃고는 시자를 불러 일렀다. “백장선사의 선판(禪板) 54) 과 궤안(机安) 55) 을 가져 오너라”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시자야 불을 가져 오너라” 황벽이 말했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너는 다만 가져가기만 하라, 이후 천하인들의 혀 끝에서 나도는 말들을 막아버릴 것이다.” 56)
황벽이 전법의 표시로 선판과 궤안을 전하려는 것을 임제가 그런 증명은 필요 없으니 태워버리겠다는 의미로 불도 함께 가져오라 하고 있다. 외형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임제의 사상이 나타났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선판은 백장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벽암록의 68칙에 의하면 백장의 선판이 황벽에게 전해졌고, 주장자와 불자는 앙산(仰山) 57) 에게로 전해졌다한다. 58)
또 선사의 회상에는 거사로서 법을 통한 배휴라는 이가 있었다. 그가 “회창(會昌) 2년 59) , 종릉(鍾陵) 60) 에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산중으로부터 고을로 영접하여 용흥사(龍興寺)에 머무시도록 하고, 아침저녁으로 도(道)를 물었다. 대중(大中) 2년 61) 완릉(宛陵) 62) 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다시 가서 예로써 영접하여 개원사 63) 에 편안히 안거하시도록 하고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 물러 나와서 기록하였지만 열 가운데에 하나 둘밖에 얻지 못하였다.” 64) 라고 『傳心法要』서문에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글로 적어 두었다가 거의 10년 만인 대중(大中) 11년(857) 황벽희운 선사의 설법을 편찬하여 천하에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때는 이미 배휴는 관직에서 물러나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10여 년 전 강남(江南)에서 들었던 황벽선사의 법문을 가슴속 깊이 새겨둔 내용들로 선사의 법어(法語)를 편집하여 동문(同門)의 선승(禪僧)들에게 열람시킨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책이 오늘날 마음의 사상에 관한 중국선종의 대표적인 선어록(禪語錄)으로 전해지는 『전심법요』와 『완릉록』이다.
또『傳心法要』 배휴의 서문에는 황벽을 조계 65) 의 적손 66) 이요 백장회해(百丈懷海 67) 의 사법제자이며 서당지장(西堂地藏) 68) 의 조카라는 표현을 써서 조계의 적통임을 밝혔다. 전심법요의 기록자인 배휴의 서문에서의 황벽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가 최상승법 69) 을 지니고 문자의 인장(印)을 떠났다고 하고 황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씀은 간단하고 이치가 곧으며, 그 도가 준엄하고 그 행이 높았다. 그래서 사방에서 배우려는 무리가 산을 향하여 좇아와서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왕래하는 대중들이 항상 천여 명에 이르렀다.” 70) 배휴 자신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황벽에게 법을 물어 기억해 보면 열에 하나 둘밖에는 얻지 못하였다하여 그에 대한 평가와 존경을 담고 있다. 황벽의 선이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전심법요의 기록자인 배휴 와의 인연 때문이다.
『傳燈錄』권12에 수록된 배휴의 장(章)을 통해서 황벽선사와 배휴의 만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황벽선사는 황벽산의 대안정사(大安精舍)에서 이름을 숨기고 대중 속에서 숨어서 살며 절 안의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배휴가 이 절을 찾아와 향을 사루어 불전(佛殿)에 참배하고 벽화를 감상했다. 배휴는 그 절의 주사(主事)에게 물었다.
“저 그림은 누구의 초상화입니까?”
주사(主事)가 대답하였다.
“고승의 초상입니다.”
배휴가 물었다.
“영정(影幀)은 여기 있는데 고승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사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배휴가 다시 물었다.
“이 절에는 참선하는 스님이 없습니까?”
주사가 말했다.
“요즘 어느 스님이 와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데 그 스님이 참선을 하는 스님인 듯 합니다.”
배휴가 말했다.
“한번 뵐 수 있을 까요?”
주사의 안내로 황벽스님을 처음 상면한 배휴가 기쁜 마음으로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말했다.
“제가 좀 전에 여러 스님들께 물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여러 스님들이 대답을 아끼셨습니다. 상인(上人)께서 스님들을 대신하여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이에 황벽스님께서 허락하니, 배휴가 앞에서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물었다.
“영정은 여기 있습니다만 고승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벽스님께서 소리 높여 말했다.
“배휴!”
배휴가 “예” 하고 대답하자 황벽스님께서 말했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순간 배휴는 심법(心法)의 종지(宗旨)를 깨달았는데 마치 둥근 구슬을 얻은 것과 같았다. 배휴가 감격하여 말했다.
“스님께서는 참으로 선지식이십니다.”
황벽선사는 묵묵히 침묵할 뿐이었다. 주변의 대중들도 모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배휴는 제자의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자신이 집무하는 고을로 황벽선사를 모셔서 공양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황벽선사는 거듭 사양하였다. 배휴는 다시금 황벽선사를 황벽산에 주석하시게 하고서 선의 대의를 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몸소 황벽산에 올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들었다. 71)
배휴가 쓴 황벽희운의 법어집인『傳心法要』의 내용은 주로 일심법에 대한 것들이다. 곧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니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일 때에도 이 마음이 늘지 않는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이어서 차이가 없음이 마치 허공이 섞임도 무너짐도 없는 것 같다. 또 둥근 해가 천하를 비치는데 비칠 때에는 광명이 천하에 두루 하나 허공은 밝아지지 않고, 해가 저문 뒤엔 어두움이 천하에 두루 하나 허공은 어두워지지 않는다. 밝고 어두운 겉모양은 서로 뒤바뀌지만 허공의 성품은 확연히 변통치 않는 것과 같이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그렇다.
이 본래 청정한 마음은 항상 뚜렷이 밝고 두루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자기 마음으로 그릇 알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정묘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한다. 팔만사천 법문은 팔만사천 번뇌에 대하여 교화하고 이끄는 문이지만, 본래는 한 법도 없다. 그것을 여의면 법이요, 여읜 줄은 아는 것은 부처이니, 온갖 번뇌를 여의기만 하면 얻을 법이 없다. 불(佛)이라 하는 것은 본래 없던 것이 새롭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일심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곧 불인 것이다. 사람은 부처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일심에 생겨난 파랑인 모든 염상을 없애면 곧 부처라는 의미인 것이다.
『宛陵錄』은 선사와 배휴 및 기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특히 돈오의 방법으로서 공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서 공안이 황벽선사에서부터 이미 특수한 참구법으로 쓰여 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외에도 선사의 행장에서 시주물만 받고 공부하지 않는다 하여 팔백·천 대중을 쫓아 버리며, 또 “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선사가 없다는 말이니라.(不道無禪 祇道無師)”고 힐난하는 등 직접적인 말씀으로 당시 선객에게 질책하심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스님의 행장은, 육조혜능으로부터 남악회양 → 마조도일 → 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선맥으로 부터 알 수 있듯이 한국 불교의 정신적 흐름을 형성한 본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황벽의 행장에서 볼 수 있듯이 괴기스러울 정도의 당당함과 무서운 기개, 격렬한 방법으로 임제와 후학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선사는 당 선종 대중(大中) 3년(850) 천화 하였다.
2). 사회적인 배경
안록산과 사사명 난(755~763)의 전후 9년간의 큰 난리로 마침내 당의 태평성대는 흔들리기 시작하여 정치・경제・군사・외교는 물론 사상・종교・문화의 모든 것을 크게 변화 시킨다. 오랜 전통을 가진 문벌귀족의 권위는 약화되어 중앙에서는 환관들이 전횡을 일삼고, 지방에서는 호족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古典의 전통에 대한 도전 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달마와 혜가로부터 일어난 선(禪)이 본격적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이와 같은 사회의 변화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인도에서 전래된 선이 신비한 습선이나 삼매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적인 중국인의 종교로서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9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선종의 성립을 이끌고 주도한 중심인물은 江西의 馬祖(709~788)와 湖南의 石頭(700~790)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강남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무대로 하여 당시 차츰차츰 실력을 증강시키고 있던 이 지방 절도사들의 귀의 아래 독자적인 불교노선을 확장시켰으므로 ‘강서와 호남의 二大士’로 불리 운다. 강서와 호남, 요컨대 강호라는 호칭은 오랜 전통을 지닌 장안과 낙양의 불교에 대응하는 말로 지방의 불교, 세속 및 대중의 종교로서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인도불교라는 빌려온 옷을 걸치고 있던 종래의 불교도에 대응하여 그들은 그것을 훌훌 벗어 던져버린 듯한 적나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산뜻함을 지니고 있었다. 72)
또, 당대 후기가 되면서 사회경제의 변혁에 수반되어 생긴 영주층에서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자가 많았는데 이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배휴이다. 배휴는 당대 유명한 승려들과 교류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하택종(荷澤宗)의 전통을 잇는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과, 홍주종(洪州宗)의 전통을 잇는 황벽(?~850)과의 교류일 것이다. 이것은 배휴의 저술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종밀의 원각경약소(圓覺經略疏)의 서(序), 화엄원인론(華嚴原人論)의 서,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서문과 종밀의 비명을 썼고, 알다시피 황벽의 전심법요를 기록하고 서(序)도 썼다. 이외에 청량국사 징관(澄觀; 738~839)26)의 비명과 대달(大達)국사 무업(無業; 760-821)의 비명도 썼고 본인 역시 불법에 조예가 깊어 권발보제심문(勸發菩提心文)과 종밀에게 법을 묻고 들은 내용을 편집한 배휴습의문(裵休拾遺文), 규봉답배상국종취상(圭峰答裵相國宗趣狀)등의 저술도 있다. 73)
위에서 보듯이 배휴는 하택의 뒤를 이은 종밀의 사상과 임제종으로 이어지는 황벽의 사상 두 가지를 모두 배운 사람으로 흔히 남종이라고 불려지는 선의 모든 면을 섭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배휴는 종밀과의 관계에 대하여 “나와 대사는 법으로는 형제가 되고 의(義)로는 교우가 되고, 은(恩)으로는 선지식이고, 교(敎)로는 내호(內護), 외호(外護)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자세함을 알아서 서(序)를 쓸 수가 있었을 뿐이며, 다른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74)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배휴는 항상 선사의 경계 안에 노닐면서 선사의 현결(顯訣)을 받았다” 75) 고 말하고 있다. 배휴의 종밀에 대한 평가는 그가 집필한 선원제전집도서의 서문에 있다.
우리 스님과 같은 자는 불일(佛日)을 떠받들고 그 빛을 구석구석 비쳐서 모든 의심을 제거해 버리고, 불심(佛心)에 순응하여 널리 대비를 내려서 영원토록 이익을 입게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가르침을 널리 편 교주가 되고, 우리 스님은 그 가르침을 회통(會通)시킨 사람이 되니, 근본과 지말(枝末)이 서로 부합하고 원근이 서로 비춘다. 가히 일대시교(一代時敎)의 일을 다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76)
배휴는 종밀을 부처님과 대등한 관계까지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밀이 입적하고 나서 그는 선법이 완전히 다른 황벽을 만나 귀의하게 된다. 전등록을 보면 규봉이 선과 교를 해박하게 통달하여 배휴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희운에게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는 마음과 같을 수는 없었다. 77) 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배휴가 종밀에게서 받지 못한 실천적인 감화를 황벽에게서 받았음을 보이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배휴가 희운에게 문답한 내용으로 전심법요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이 그 자신이 종밀등과 같은 학문적 식견이 높은 승려들과의 교류로 교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당대 말기에 또 하나의 정치・군사・경제・사회・종교적인 큰 사건으로 황벽(?~850)의 만년에 발생한 三武一宗의 법난의 하나로 손꼽히는 會昌의 폐불사건(845~847)은 이미 차츰 쇠퇴하고 있던 당 말 불교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선종만은 이것을 계기로 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원래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도교와 불교의 대결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하강하는 당왕조의 중앙세력을 일거에 만회하려고 하는 정치・군사・경제상의 고육책이었다. 이미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이래 문제의 매듭을 풀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던 정부 내의 정쟁과 이것에 결부된 외국세력의 침략과 노략질을 계기로 하여 일시에 표면화한 것에 불과하며 이 후 중앙정부의 대책이 없음을 틈타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이것을 이용한 호족의 봉기도 있어 당조 300년의 종언은 이미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종(武宗;814~846)은 회창 5년(845) 8월에 조칙을 내리는데, 이때 파괴시킨 유명사원은 4600여 개소, 무명사원은 4만여 개, 환속한 승려는 26만 5백명, 몰수된 전답은 수천만 경(頃), 양세호(兩稅戶)로 바뀐 사원 소속의 노비는 15만 명이나 되었다. 78)
이 시대를 살고 있던 황벽도 역시 파불을 겪었다. 전술 한데로 배휴가 파불 이전인 회창2년(842) 종릉(鐘陵) 관찰사로 부임한 뒤 황벽을 홍주(洪州) 용흥사(龍興寺)로 모셔와서, 845년 파불을 겪고 대중2년(848)년에 완릉(宛陵) 관찰사로 옮기기까지 희운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현존하는 자료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파불 이후에도 배휴에게 법을 설했음을 보아, 주위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해 나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불의 법난 속에서 어떻게 선종은 오히려 융성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인가. 이 이유는 먼저 선종은 선승들의 행화를 보면, 경전이나 불상 같은 불교의 외부적인 시설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파괴되고 난 뒤에도 수행을 하는데 제약이 없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79) 고 하는 백장청규에서 보이듯이 선가 자체에서 독자적인 계율을 제정해서 인도불교나 학파불교와 달리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북쪽의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 거점을 둔 도시형의 교학불교가 큰 타격을 받았음에 비하여 강남의 불교는 지역적으로 도시와 멀고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파불의 피해가 적었다.
그리고 국가, 귀족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종파는 타격이 심했고, 서민과 함께 보조를 맞췄던 종파는 그 피해가 적었다. 또한 선종은 표의문자인 중국의 한문에 의해서 직관적 성격을 표현함으로써 대중화에 성공하였다. 가령 인도의 언어는 복잡한 문법과 추상적인 사고의 도구로 적합한 언어인데 비해, 한문은 내면의 직관적인 깨달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좋은 표의 문자로써 간결하고 직접적인 걸 좋아하는 중국인의 성향에 맞았다. 또한 이러한 언어들이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어렵지 않아 적합했다. 게다가 선종의 가르침은 커다란 배움이나 깊은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선종은 파불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전환기를 갖고, 오히려 일체의 형식과 교리에 걸리지 않는 선불교의 정신을 펼칠 수 있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선종의 유행이 단순히 파불이라는 위기 상황을 이용했다는 것 보다 수, 와 당나라의 전성기에 성숙한 불교가 중국 안 밖의 사회변동에 의해 몇 번의 변화를 거처 번영할 것은 번영하고, 쇠락할 것은 쇠락한 것으로 다른 종파는 거기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80)
3) 사상적인 배경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지만, 중국에 전래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불교라 하면 단연 중국 선종(禪宗)을 꼽는다. 그 까닭은 중국의 선종이 인도의 선(禪)에 비하여 그만큼 독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처음 선이 전래된 것은 불교의 전래와 때를 같이한다. 그러나 전래 초기 중국의 불교는 선(禪) 보다는 주로 교학(敎學)에 치중하여서 교학(敎學)의 면에서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거쳐, 삼론(三論),천태(天台),화엄(華嚴),법상(法相) 등 여러 종파가 성립되면서 교학(敎學)의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중국에서의 선(禪)의 본격적 시작은 일반적으로 6세기 초 보리달마(菩提達摩)가 도래한 이후로 본다. 이것은 물론 후대 선문(禪門)에서 전등설(傳燈說)을 수립하면서 중국선종(中國禪宗)의 초조(初祖)를 보리달마(菩提達摩)로 잡는 데에 근거한 주장이다. 실제 현존하는 자료로 볼 때 가장 초기의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종파(宗派)는 도신(道信)에서 홍인(弘忍)으로 이어지는 동산법문(東山法門)이며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의 북종(北宗)과 육조혜능문파에서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의 남종으로 이어진다.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선법(禪法)과 북종은 좌선수행(坐禪修行)을 통하여 점차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선법은 곧 남종(南宗) 혜능(慧能)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에 의하여 점수법(漸修法)의 사선(邪禪)으로 규정되어 부정되게 된다. 즉 신회는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말로 특징지워지는 혜능의 새로운 선법을 돈교(頓敎)라 하며, 돈교야말로 정법(正法)이고 그 이전까지의 점수(漸修)에 의한 깨달음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회의 주장대로 남종돈교(南宗頓敎)가 정법(正法)으로 공공연히 인정받게 되는 것은 신회의 문하(門下)에 의해서가 아니라 9세기를 전후하여 강서(江西)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과 호남(湖南)의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으로 이어져 그들 문하(門下)가 중국선(中國禪)의 천하를 평정한 당말(唐末)에 와서이다. 그리하여 남종돈교(南宗頓敎)인 혜능의 선법은 마침내 조사선(祖師禪)이라는 형태의 중국선을 완성해냈던 것이다. 즉 혜능이 중국선(中國禪)의 개창자라면 그 선법을 완성시킨 것은 마조와 석두 문하의 선승(禪僧)들이었다.
조사선이란 불도의 최고 경지인 깨달음을 석존이 아니라 조사라는 용어 그 자체를 직접 부처의 경지로 보고 주장한 선이다. 물론 이런 종의 구분은 후대에 의미구분을 위해 나뉜 것이지, 당시에 종파 개념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혜능(慧能)을 계승한 전성기의 중국선종(中國禪宗) 가운데 마조계(馬祖系) 조사선의 선법(禪法)을 살펴보면 마조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 혜능의 선법을 돈오불수(頓悟不修)로 보다 철저히 하고, 또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혜능의 불이법(不二法)인 반야바라밀법(般若波羅蜜法)을 행주좌와(行住坐臥),견문각지(見聞覺知)에 나타나는 만법(萬法)의 일심(一心) 작용이라고 하는 일심법(一心法)으로 확립시키고, 좌선간심(坐禪看心)을 대신하여 상당시중(上堂示衆)과 문답(問答)에 의한 공부방법을 일반화(一般化)함으로써, 혜능이 문을 연 중국 조사선(祖師禪)의 명실상부한 완성자가 된다. 그리고 백장, 황벽으로 이어져 오면서 백장은 제도적인 면에서 새로 선원(禪院)을 건립하여 종래 율원(律院)에서 거주하던 선승(禪僧)들을 독립시키고 선원(禪院)에는 불당(佛堂) 대신에 법당(法堂)을 두어 상당시중(上堂示衆)과 문답(問答)의 제도를 확고히 했으며 황벽이 특히 강조한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심체시공(心體是空)이라는 일심법(一心法)과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분별상(分別相)을 쫓지 말라는 무심(無心)의 가르침이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황벽의 선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스승인 백장과 마조의 사상인 심성관(心性觀 )과 증오관(證俉觀)이랄 수 있겠다.
마조(馬祖)의 선(禪)
중국선종의 전개를 살펴보면 혜능 이전의 선자(禪者)들은 주로 진성(眞性)이 망상(妄想)에 덮혀 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중생심(衆生心)의 입장에서 사망귀진(捨妄歸眞)의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혜능 이후 조사선의 선자(禪者)들은 일심(一心)에 나타나는 일체는 개진[一切皆眞]이라는 불이적(不二的) 성심(聖心)의 입장에서 불오염(不汚染)에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혜능 이전에는 좌선수행(坐禪修行)을 통하여 사망귀진(捨妄歸眞)하여 견성(見性)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면, 혜능 이후에는 언하(言下)에 돈오(頓悟)하여 견성(見性)하고 바른 지견(知見)을 갖추어 어긋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혹한 입장에서는 진망(眞妄)을 구별하므로 사망귀진(捨妄歸眞)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점수법(漸修法)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깨달아 자성(自性)을 본다면 만법(萬法)은 다만 자성(自性)의 소생(所生)일 뿐 무이(無二)이므로 진망(眞妄)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성(自性)을 보는 입장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일 뿐 점차(漸次)로 닦아 나아간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혜능이 이처럼 자성(自性)의 근원성(根源性)과 유일성(唯一性)을 강조하여 자성일원론(自性一元論)의 입장에 선 이후로, 그를 계승한 남종(南宗)의 조사선(祖師禪)도 마찬가지로 불이적(不二的) 일원적(一元的) 입장을 나타내게 된다. 마조(馬祖)의 일심(一心), 황벽(黃檗)의 일진법계(一眞法界), 임제(臨濟)의 일무위진인(一無位眞人) 등이 모두 일원론적 입장에 서있다.
당시에는 마조와 더불어 같은 혜능의 제자인 청원행사(靑原行思; 671~738)에게 법을 받은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 호남(湖南)에서 법을 폈는데, 강서와 호남, 두 지역을 합쳐 강호라고 불렀으며51) 당시 이 지역은 중국의 중앙에서 보면 남방의 변방이었는데, 마조에서부터 임제· 위앙종, 석두 문하에서 조동·운문·법안종이 등장해 5가가 형성되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혜능(慧能)까지만 해도 깨달음의 대상은 진성(眞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하여 심(心)보다는 성(性)에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마조의 관심은 성(性)이 아니라 심(心)에 있다. 마조의 선(禪)을 특징짓는 구절이 심지법문(心地法門)․즉심시불(卽心是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등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마조가 성(性) 보다는 심(心)에 대하여 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마조의 관심이 심(心)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性) 보다는 심(心)을 주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마조선(馬祖禪)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마조 이하 조사선(祖師禪)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조는 일심(一心) 가운데의 진성(眞性)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일심(一心) 전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혜능까지의 조사들과는 다른 새로운 특징을 나타낸다. 마조가 이처럼 성(性)을 심(心)으로 대치한 의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철저한 일원적(一元的) 자세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혜능이 자성(自性) 일원(一元)을 말하고 있더라도 성(性)에는 여전히 상대되는 의미로서 상(相)이 있기 때문에, 혜능의 자성 일원은 철저한 일원적 자세는 아니다. 그러나 심(心)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의미를 가지므로 가장 포괄적이며, 따라서 심일원(心一元)은 상대(相對)가 없는 가장 철저한 일원(一元)이다. 그러므로 마조가 철저한 일원적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곧 철저히 깨달은 자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곧 그 선법이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처럼 깨달은 자의 입장에 서서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견성(頓悟見性) 81) 을 말하는 조사선(祖師禪)이 성립하는 것이다.
‘즉심시불’이라는 용어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82) 에 “그러므로 너희가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면, 이 마음이 곧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따라 부처를 지어가는 까닭에 이 마음이 부처인 것이다” 83) 라 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또한 보지(寶誌)의 대승찬(大乘讚), 부대사(傅大士)의 심왕명(心王銘), 조계대사전(曹溪大師傳)에도 나와 있고, 법해(法海), 우두혜충(牛頭慧忠), 사공산본적(司空山本寂), 석두희천(石頭希遷)도 이 말을 즐겨 썼다. 84) 특히, 이 ‘즉심시불’이라는 말은 동시대의 하택신회도 사용하고 있어서 ‘오직 불심을 가리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여 마음을 불성으로 표현했다. 하택은 당시 북종을 공격하는 입장으로 각자의 본성을 자각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했는데 신회가 주장하는 ‘즉심시불’의 심(心)은 신회나 이전의 선법에서 보는 불성·진성만을 부처로 보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마조는 ‘즉심시불’의 심을 평상심 즉, 일상적인 망심을 포함한 중생심의 전체가 부처라고 보고 있다. 85)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경지는 범부의 경지가 아니라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있어서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조가 제자들에게 즉심시불을 설명할 때 나타난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즉심즉불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말이다.”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에게 물건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에게 대도(大道)를 체득하게 해 주겠다.” 86)
이 문답을 보면, 마조가 설하는 ‘즉심시불’은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행하였던 방편(方便)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집착해 다른 곳에서 불도를 구하려는 이들을 경책하기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져있다. 황벽도 마찬가지로 전심법요 87) 와 완릉록 88) 에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조는 또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말하면서, 마조는 또 ‘삼계(三界)는 마음일 뿐이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심(心) 일법(一法)이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능가경』 제5권 무상품(無常品), 『화엄경』 55권, 『대승기신론』 등 대승(大乘)의 여러 경론(經論)에 등장하는 것인데, 마조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禪)인 일심법(一心法)을 주장하는 것이다.
마조는 또한 깨달음이란 미혹(迷惑)에 대응하여 말하는 것이라 하면서 진망(眞妄) 이원(二元)의 미혹된 입장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진망(眞妄) 이원(二元)을 말한다는 것은 일심(一心)을 진성(眞性)과 망념(妄念)으로 분석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마조도 진성(眞性)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구족(具足)되어 있으므로, 일체 중생은 본래부터 법성(法性)을 벗어난 적이 없이 늘 법성 속에서 살아가며 모든 행위는 법성(法性)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성(自性)은 본래 평등성(平等性)으로서 여러 가지가 없지만 이것은 성(性)의 본체적(本體的) 측면이고, 작용(作用)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같지 않아서, 미혹한 때에는 식(識)이라 하고 깨달은 때에는 지(智)라 하는데, 리(理)를 따르는 것이 깨달음이고 사(事)를 따르는 것이 미혹함이라고 한다는 것이 마조의 진망(眞妄) 이원(二元)에 대한 해설이다.
이렇게 보면 마조가 설명하는 중생의 미혹(迷惑)한 마음이란 곧 명상(名相)의 경계를 따라서 제법(諸法)을 취하고 헤아리는 망념(妄念)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명상(名相)을 따라서 망념(妄念)을 일으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조사선(祖師禪)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말하자면 선(禪)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즉 선문(禪門)에서 입처(入處)를 얻었느냐 아니냐, 다시 말해 견성(見性)을 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명상(名相)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명상(名相)의 근원인 무명무상(無名無相)의 자성(自性)을 보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조는, 진망(眞妄)의 이원적(二元的) 세계에서 망상(妄想)에 기울어져 있는 중생심(衆生心)이란 곧 명상(名相)의 제법(諸法)을 따라가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경계(境界)의 본질을 이해하면 망상(妄想)이 생기지 않는데, 마음과 경계의 본질이란 마음과 경계, 자성(自性)과 만법(萬法),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인 일심(一心)이라는 사실이다. 즉 중생심(衆生心)이란 색(色)이 마음 밖에 따로 있다고 보는 이원적(二元的) 관점이요, 불심(佛心)이란 색(色)이 바로 마음이라고 보는 것 곧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일원적(一元的)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생심이건 불심이건 본래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나 일원적 부처의 마음이나 그 마음은 일심(一心)일 뿐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의 마음은 분열되어 평등하지 못하고,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면 그 마음은 평등하여 늘 하나의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나 성인(聖人)이나 살아가는 일상(日常)은 꼭 같다. 다만 범부는 그 일상 속에서 시비․조작․분별하며 살아가고, 성인은 시비․조작․분별없이 살아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마조의 선(禪)에서 불심(佛心) 즉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 평상심(平常心)이다. 평상심(平常心)이라 하면 무언가 특별한 마음이 아니라 평상(平常)의 마음 즉 일상적(日常的)으로 매순간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고 하면 일상(日常)의 매 순간 순간의 마음 그대로가 모두 도(道)라는 것으로 이른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뜻과 같다. 이처럼 평상(平常)의 순간 순간의 마음이 모두 도(道)라고 하면서도마조는 또 평상심(平常心)의 특징으로서 무조작(無造作)․무시비(無是非)․무취사(無取捨)․무단상(無斷常)․무범성(無凡聖)을 말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범부(凡夫)의 일상적 마음은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조작(造作)하고 시비(是非)하고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것이야말로 중생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작(造作)․시비(是非)․취사(取捨)․분별(分別)이 없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라면, 평상심은 곧 평등심(平等心)과 같은 뜻일 것이다. 평등심은 이원적(二元的)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진일원(眞一元)의 부처의 마음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나 일원적 부처의 마음이나 그 마음은 일심(一心)일 뿐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의 마음은 분열되어 평등하지 못하고,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면 그 마음은 평등하여 늘 하나의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나 성인(聖人)이나 살아가는 일상(日常)은 꼭 같다. 다만 범부는 그 일상 속에서 시비․조작․분별하며 살아가고, 성인은 시비․조작․분별없이 살아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마조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할 때의 평상심(平常心)은 곧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할 때의 그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때의 마음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마음이며, 만법(萬法)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기도 하다.
“무슨 연고로 부처가 말한 마음을 근본이라고 하는가? 부처가 말한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이다. 지금 말하는 것도 곧 이 마음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부처가 말한 마음을 근본이라고 하였다. 무문(無門)으로 법문(法門)을 삼는다고 하는 것은 본성을 요달해서 일법도 없음이다.” 89) “각자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이 마음 그대로가 바로 부처(心卽是佛)라는 사실을 확신하라.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는 상승(上乘)인 일심법을 전하였다.” 90)
또 마조는 수행이 필요치 않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 마라. 생사의 마음을 가지고 조작하여 애써 나아가려 한다면 그것이 다 오염이다. 당장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평상심은 조작함이 없으며, 좋고 나쁨이나 취하고 버림이 없고 시간이라든가 영원이라든가, 범부나 성자의 구별이 없다.” 91) 이 평상심은 단순한 평상시의 마음이 아니라 시비와 조작등의 분별심을 떠난 마음을 말하며, 이것은 보편적인 사람에게 모두 본래부터 구족(具足)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是佛)’이니 수행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뒤에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但莫汚染) 고 하는 말은 일종의 수행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원의 평상심은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 평상심의 현현을 위해서 인위적인 의도를 개입시키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평상심의 수행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살펴본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그때그때 하는 말 가운데서 대상 그 자체는 항상 그대로 진리인 것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달음의 경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현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현상이 공(空 )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생겨난다고 해도 사실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면, 때에 따라 옷을 입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며, 성인이 될 소질을 계속 키워 나가면서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92) 마조선의 의의중 하나는 마조 이후로는 불법의 수행이 거창하게 좌선을 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것 외에도 , 일상생활 그 자체에서 선(禪)이 철저히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도(道는) 옷을 입고, 밥을 먹는 등의 사사로운 모든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시대의 조사선의 불교에서는 좌선만을 실천하는 선승은 없었으며, 또 좌선만이 수행이다. 라고 하는 관념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그 전부를 수행으로 하는 새로운 불교관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마조의 「평상심시도」라는 명구와 임제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말처럼 자기가 지금 여기서 행하는 모든 것들을 도의 수행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생활불교를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상심시도」란 말은 마조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불교, 조사선의 스로건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추상적인 말이 아니었음을 《백장청규》에 의거한 선종종단의 생활에서 입증시켜주고 있다.” 93)
백장(百丈)의 선(禪)
중국 선종사에서 백장회해(749~814)는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의 조사선 선풍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마조도일의 선법을 계승한 백장은 선문에 청규를 도입. 제정시킴으로써 조사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백장의 선법은 위산영우(771~853)와 황벽희운에게 전해짐으로써 법계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위산은 그의 제자 앙산혜적(807~883)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 중에 위앙종을 창시하게 되고, 황벽의 선법은 임제의현에게 전해져 임제종이 만들어지게 된다.
특히 백장청규는 선종의 생활문화와 수행생활의 규범 의례를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에 선법이 전래된 이후로 중국선종은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백장의 청규제정을 계기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케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백장은 마조도일(709~788)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강서성 남창부 봉신현의 백장산(百丈山)에서 머물면서 시적할 때까지 19년간을 백장산에서 선법을 펼쳤다. 이 기간에 위산과 황벽을 비롯한 장경대안(長慶大安)과 석상성공(石霜性空)등 걸출한 禪僧이 배출되게 된다. 백장은 원화9년(814)에 원적하였으며 세수 66세 법납은 47세로 탑명에 기록되어있다.
백장이 중국 선종사에 끼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선종의 율장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원을 율원으로부터 독립시켜 선종의 토대를 마련한 점이고 둘째는 남악회양. 마조도일로 이어지는 남악계의 선법을 위앙과 황벽에게 전함으로서 당대 오가 중 위앙종과 임제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셋째는 선종의 사자상승의 전통을 확립한 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백장은 조사선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백장의 선사상을 일구(句)로써 나타낸다면 우리의 마음을 ‘체로진상(體露眞常)’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심성은 ‘무염’이고 깨달음의 모습은 ‘돈오’로 나타내었다.
기본적인 백장의 사상은 마조와 마찬가지로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오염되지 말라” 94) 고 하고 또, “심성은 오염됨이 없어 그 자체가 본래 완전하니, 허망한 인연을 여의기만하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이다” 95) 라고 되어있어서 마조의 ‘도불용수’와 ‘즉심시불’을 그대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며 참되고 항상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속의 망령된 인연을 쉬면 그대로가 바로 부처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백장은 자신의 선사상적 바탕위에 실천적 수행의 모습을 청규의 제정을 통해 구체화 했으며, 조사선 사상을 더욱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어 중국의 새로운 선불교의 모습을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대 모든 인연을 쉬고 만사를 쉬라. 선(善)하거나 선하지 않거나,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일체 모든 법을 모두 놓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버려 완전히 자유자재해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틈도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96)
여기서 백장은 마조와는 달리 상당히 구체적으로 도를 구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불성을 태양에, 번뇌를 구름에 비교하여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위해서 마음을 목석같이 하고 일체의 모든 집착을 버릴 것을 표현하고 있다. 다만 말뜻을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한다.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곧 탐욕에 속하고 탐욕은 병이다. 지금 모든 유무의 제법을 전부 벗어나 삼구 밖으로 꿰뚫기만 하면, 자연히 부처와 같아질 것이다. 이미 스스로가 부처라면 어찌 부처가 말을 하지 못할까 근심하랴.“ 97)
백장은 특히 지해(知解)에 얽매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이런 상태로 유무(有無)의 모든 법을 벗어난다면 이상태가 바로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백장의 가장 큰 업적은 마조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응용한 것인데, 그는 최초로 선종에서 청규를 제정하여 선종교단을 독립시켰다. 일찍이 도신과 홍인의 동산법문에서 500여명, 마조문하에 800여명의 수행자가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교단이 생겨나면서 집단생활에 대한 새로운 생활 규정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백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98) 고 하여 유명하다. 본래 인도불교에서 승단은 계율에 따라 좌선과 걸식만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백장은 일상생활의 규범인 백장청규 99) 를 제정해 수행적 체계를 세웠다. 백장은 『선문규식』 100) 에서 당시의 선원을 율원으로부터 독립시켰다. 특히 불전을 두지 말고 법당을 중심으로 장노는 방장에 거주하면서 상당설법을 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스승이 제자에게 설법과 문답의 형식을 통한 시중의 원리를 일상화하면서 여러 가지의 기연문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선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설법과 문답에 의한 수행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백장은 자급자족의 생산노동을 주장했고, 조사선의 특징인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으로써 모든 순간이 선(禪)이라 하여 노동의 순간도 수행과 깨달음의 표현으로 승화해 보다 더 일상의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마조로부터 새롭게 전개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실천이 백장의 청규로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이런 자급자족적인 승가 생활은 앞에서 이야기한 파불의 혹독한 고난 속에서 선종(禪宗)만은 유행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혜능에서 시작하고 마조에서 완성된 언하변오(言下便悟)의 새로운 중국선(中國禪)이, 백장에 와서는 외적(外的) 형식까지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중국선은 내외적(內外的)으로 전성기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좌선간심(坐禪看心) 101) 이 아닌 설법(說法)과 문답(問答)이라는 형식을 통한 직지인심(直指人心) 102) 과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새로운 선법(禪法)이 활발히 행해지게 되자, 한편으로는 이 새로운 선법(禪法)의 문제점도 함께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점이란 바로 학인들 가운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경처(究竟處)에 들어가지 못했으면서도, 스승의 설법의 요점을 잘 파악하여 나름의 견해를 세우고, 그것으로써 다 된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설법(說法)이나 선문답(禪問答)에서 언어라는 매개체는 문자 그대로 뗏목과 같은 것으로서 견성(見性)이라는 목적지로 이끄는 방편(方便)으로서의 효능 이외에는, 어떤 의미로서도 취하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견성(見性)을 성취하려면 언어라는 뗏목의 구속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언어라는 뗏목, 다시 말하면 언어적 견해(見解)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데 있다. 사실 설법(說法)과 문답을 통한 선법(禪法)에서 교육의 승패를 결정짓는 열쇠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성광등록』 103) 제9권 『백장록』은 그 내용의 거의 전체에서 여러 가지로 설법(說法)의 언어를 분석하며 이 문제를 계속하여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백장은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 즉, 언어를 통하여 가르치고 배우되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본래 의도한 종지(宗旨)를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해결책은 백장의 삼구투과(三句透過) 104) 라는 것으로서, 이 삼구투과(三句透過)는 백장 수증관(修證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수행인이 투철히 깨달아 벗어나지 못하는 병통(病痛)이 바로 어떤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장은 이른바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방편을 통하여 견해를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삼구(三句)란 백장의 독특한 용어로서 초선(初善)․중선(中善)․후선(後善)을 말한다. 초선(初善)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하나의 입장을 지키는 것이며, 중선(中善)은 초선의 입장을 버리는 것이며, 후선(後善)은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知解] 조차도 버리는 것이다. 청법(聽法)과 문답(問答)을 통한 가르침과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언구에 집착하거나 견해에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장의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새로운 방식의 수행법(修行法)은, 이와 같이 설법과 문답을 통한 수행이라는 변화된 선법(禪法)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장의 증오론(證悟論)도 마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므로 마조의 증오론과 기본적인 내용은 같다. 즉, 백장의 증오론도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형식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이다. 다만 견성(見性) 105) 의 내용에 있어서는 역시 삼구투과(三句透過)를 그 특징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디에도 머물거나 매이지 않는 자재해탈(自在解脫)을 의미하지만, 백장이 특히 지해(知解) 106) 로부터의 해탈을 강조하는 것은, 선(禪) 공부에서 지해(知解)가 그만큼 큰 장애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해(知解)가 조사선(祖師禪)에서 큰 장애가 되는 까닭은, 조사선이 설법(說法)과 문답(問答)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백장은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않으며, 법 아님이 아닌 것을 취하지도 않으며,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삼구투과(三句透過)의 방편을 사용한 것이다.
이상으로써 황벽 이전의 스승인 백장과 마조의 조사선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사선의 의의는 새로운 선사상의 정립인데, 이전의 인도불교의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도 실천에 입각한 새로운 선사상을 제기해 다소 관념적인 선을 생활화, 현실화 시켰고, 이것을 실현하기위해 조사(祖師)라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만들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깨달음을 행하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로써 보면 마조계(馬祖系) 조사선(祖師禪)의 수증관(修證觀)은, 첫째는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점수법(漸修法)을 부정하는 불수론(不修論)과, 둘째는 설법과 문답이라는 형식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방편을 통하여 학인이 스스로를 회광반조(廻光返照) 107) 토록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언하변오(言下便悟)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유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108) 의 선법(禪法)이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물론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일심(一心)의 작용(作用)이 만법(萬法)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심성설(心性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사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편인 언어를 극복하는 문제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 109) 이라는 선(禪)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설법과 문답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조사선(祖師禪)에서는 그 교육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선문답(禪問答)이라는 특별한 문답법(問答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간화선(看話禪)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장에게서 배운 황벽(黃檗) 역시 마조선(馬祖禪)의 기본적인 면들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정성본 『선불교 개설』(한국선문화연구원)10~13쪽 참조.
2) 중국선종(中國禪宗)의 초조(初祖)로 알려진 사람은 보리달마(菩提達摩, 혹은 菩提達磨)이다. 달마(達摩)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록이 있고 많은 선적(禪籍)들이 그의 저작이거나 그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달마에 관한 이러한 기록들이나 선적들 대부분은 당대(唐代) 이후 선종(禪宗)이 성립한 뒤에 이루어진 것들이고 그들 사이에는 서로 불일치하는 부분도 많으며 또 대부분의 내용이 당송대(唐宋代) 선종(禪宗)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따라서 달마라는 명칭에는 6세기 초 남천축(南天竺)에서 건너온 역사적 인물로서의 달마와 후대 선종(禪宗)의 초조로서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로 창작된 달마와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달마에 관하여 최초로 정리한 자료는 도선(道宣;596-667)의 『속고승전(續高僧傳)』(645년?) 권16 습선편(習禪篇)의 ‘남천축사문보리달마전(南天竺沙門菩提達摩傳)’인데, 도선(道宣)이 의존한 자료는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547년)와 달마의 설법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과 그기에 붙인 제자 담림(曇琳)의 서문이다. 두 번째 달마 즉 당송대(唐宋代)에 선종(禪宗)에서 초조(初祖)로 확립한 달마에 관해서는 많은 설화와 저술들이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종용록(從容錄)』․『벽암록(碧巖錄)』 등에 기록된 달마(達磨)의 양무제(梁武帝)와의 무공덕(無功德)에 관한 문답, 달마의 9년 면벽(面壁), 혜가(慧可)와의 안심문답(安心問答)과 혜가의 단비구법(斷臂求法), 달마와 제자들 사이의 피육골수(皮肉骨髓)의 부법(付法) 등의 설화에는 모두 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당송대(唐宋代) 선종(禪宗)의 사상이 짙게 배여 있는 후대의 위작(僞作)들이다. 또 달마의 저작 혹은 달마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심경송(心經頌)․파상론(破相論=觀心論)․이종입(二種入)․안심법문(安心法門)․오성론(悟性論)․혈맥론(血脈論)․문답잡록(問答雜錄) 등 가운데에서 이종입(二種入) 즉 이입사행(二入四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후대의 여러 선불교의 종파(宗派)와 관련된 위작이라고 한다.
3) 중국 선종 제4조는 도신스님(道信大師, 580∼651)이다. 스님의 속성은 사마(司馬)이고, 태어난 곳은 하내(河內,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이다. 스님은 7살에 출가했다. 그러나 스승의 계행(戒行)이 단정하지 못해, 섬기기는 하나 미진함을 느끼던 중, 14세(592)에 사미(沙彌)의 몸으로 오랫동안 환공산에 은거하고 있던 82세의 3조 승찬을 만난다. 이후 스승 승찬이 환공산을 떠날 때까지 9년간 보필하였다. 승찬의 의발을 이어받은 뒤 도신은 양자강에 맞닿은 기주 쌍봉산(雙峯山, 湖北省 黃梅縣)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 곳에서 30여 년간 주석하면서 중생교화에 힘썼는데, 대중의 수가 500여명에 이르렀다 한다. 뿐만 아니라 수행에도 철저해서, 이후 60년간을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했다. 도신의 선사상은 그가 찬술했다고 주장되는〈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도신은 이 책에서 일체의 모든 인연을 멈추고 망상을 쉬게 하고 심신을 놓아버려서 항상 자기의 청정한 본심을 보는 ‘안심(安心)의 대도(大道)를 깨닫는 가르침’을 강조했다.
4) 중국 선종 제5조는 홍인스님(弘忍大師, 601∼674)이다. 스님의 속성은 주(周)씨이고, 태어난 곳은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이다. 그는 태어나면서 영리하여 신동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으며 동네 사람들은 그를 무성(無性)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4조 도신스님이 황매현으로 볼일이 있어 가던 중 길에서 한 어린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의 골상이 남달리 빼어났으므로 도신이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의 성(姓)이 무엇인가?” 무성이는 대답하기를, “불성(佛性)입니다.”라고 하였다. 도신은 기특하게 여기면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는 무성이 아니더냐?”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성은 대답하기를, “불성은 공(空)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도신은 그 아이가 큰 법의 그릇이 될 것임을 알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12살 어린 무성이를 제자로 삼고 불명(佛名)을 홍인(弘忍)이라 지어주었다. 홍인의 선사상은 돈황본〈수심요론(修心要論)〉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홍인은 말한다. “나는 지금 자네들이 스스로 본심이 바로 부처인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에 너희들에게 간절히 권하기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각자의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만 못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도신의 법을 이은 홍인은 스승의 입적후 도량을 쌍봉산 동쪽의 풍무산(馮茂山)으로 옮긴다. 이후 사람들은 도신이 주석한 쌍봉산을 서산(西山)이라 부르고 홍인이 주석한 풍무산을 동산(東山)이라고 부른다. 홍인은 동산에서 700명의 제자를 가르쳐 크게 선풍(禪風)을 선양하였으며, 이로부터 우리는 홍인의 선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부르게 된다. 중국 선종사에서 홍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홍인의 혜안이 아니었더라면 돈오(頓悟)를 제창한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과 점오(漸悟)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이 탄생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와 그 문하의 보적(普寂 651~739), 의복(義福; 658~736)등을 가리켜 북종(北宗)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혜능의 남종과 신수의 북종이 명확히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수가 측천무후의 초대로 왕가에 들어간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혜능 보다 교세가 더 컸고 홍인의 정법을 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종계통의 저작인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의 법계 표시에는 홍인의 법을 이은 것을 혜능이 아니라 신수로 표시되어 있고 왕가의 국사로써 왕이나 귀족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았다.
6) 동산법문은 4조 道信(580~651)과 그의 제자 弘忍(601~678)의 法門이다. 도신의 제자 홍인이 雙峯山의 東山에 이주하면서부터 ‘東山法門’이라고 불리어졌다. 때문에 홍인에 한하여 ‘동산정문’ 또는 ‘동산법문’이라고 했지만, 그의 스승 도신의 선법까지 포함한다. 동산법문의 대표적인 선법은 一行三昧와 任運, 그리고 守一不移와 守心등이다. 이 가운데 일행삼매와 임운의 선법은 달마의 卽事의 禪法을 계승하고 있으며, 남종선의 直心에까지 연결되어 對境慧用思想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守一不移’·‘攝心’·‘心不起’·‘看心’ 등은 달마선법의 壁觀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北宗의 修定法에 역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7)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를 통하여 도신과 홍인의 선법을 보면, ㉠마음이 곧 부처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마음은 본체와 작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체는 청정(淸淨)하여 부처와 같고, 작용은 만 가지로 일어나나 항상 여여(如如)하다.㉢만 가지로 일어나는 작용의 모습이 망상(妄想)이 되어 본체를 가로막으면 이것이 중생의 마음이다.㉣좌선(坐禪)하여 마음의 작용을 잘 관찰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작용이 모두 여여(如如)해져서 점차 망상(妄想)은 사라지고 청정(淸淨)한 본체인 불성(佛性)을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좌선간심(坐禪看心)을 통하여 불성(佛性)을 본다는 것이다. 신수(神秀)의 선법은 요심수도(了心修道)라는 말로 요약이 되는데 『관심론(觀心論)』에 의거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마음이 작용하여 일어날 때에는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타나며, 정심(淨心)은 선인(善因)을 따르고 염심(染心)은 악업(惡業)을 낳는다. 범부(凡夫)는 염심(染心)과 그것이 낳은 악업(惡業)이 진여(眞如)의 본체(本體)인 불성(佛性)을 덮고 있어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한다. 수행자(修行者)는 먼저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알고[了心], 마음을 모아[攝心] 염심(染心)과 악업(惡業)을 물리치는 수행을 하면, 마침내 진여(眞如)의 본체인 불성(佛性)을 깨달아 모든 번뇌를 벗고 해탈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요심(了心)과 섭심(攝心)의 수도법(修道法)을 신수(神秀)는 관심법(觀心法)이라 하는데 그 방법은 역시 좌선(坐禪)을 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선법(禪法)은 좌선간심(坐禪看心)을 통하여 점차 망념(妄念)을 가라앉히고 그 속에서 청정(淸淨)한 불성(佛性)을 찾아내는 것을 골자로 한다. 즉 좌선수행(坐禪修行)을 통하여 점차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선법은 곧 남종(南宗) 혜능(慧能)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에 의하여 점수법(漸修法)의 사선(邪禪)으로 규정되어 부정되게 된다.
8)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 신회는 자신들을 보리달마남종(菩提達磨南宗)이라고 칭했고 이것이 바로 남종(南宗)의 시작이었다. 하택신회는 활대(滑台)의 종론(宗論)이라 하여 활대(滑台)의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를 개설하여 신수계의 북종선은 방계이고 조계혜능이 보리달마종의 정법을 이은 조사라고 선언했다. 당시 중국의 중심에서 번성하고 있는 신수계의 선을 정통이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그 것의 가장 핵심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선의 본질이 북종은 남종에 비하여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북종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점차적인 방편법인 점수법을 하고 있고, 남종선은 단도직입적으로 한 번에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법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에 남종이 훨씬 우월하다는 말이었다.
9) 돈(頓)은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비약적으로 높은 종교적 입장에 당도케 하는 것이며 점진(漸進)이나 단계적 방법을 쓰지 않고 직접 대승의 깊은 이치를 얻는 것을 뜻한다. 한편 그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교(漸敎)는 차례를 밟아 점진적으로 오랜 수행을 겪어 대오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實不先頓後漸初三末一」. 겉으로 보기에는 돈교를 먼저 설하시고 점교를 뒤에 설하시며, 삼승을 처음에 펴시고 일승은 뒤에 펴시는 것 같이도 여겨질 것이니, 이는 실제로 그러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여래의 처지에서는 언제나 일승의 돈교를 펴셨을 뿐이나, 받아들이는 중생의 근기 때문에 돈교·점교와 일승·삼승의 차등이 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10) 육조혜능(六祖慧能 : 638-713) : 당대(唐代)스님. 중국선종의 제6조. 속성은 노(盧)씨. 광동성 신주(新州) 신흥현(新興縣)에서 출생.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나무를 해서 어머니를 봉양함. 어느 날 시중에서 『금강경』읽은 소리를 듣고 출가에 뜻을 품은 후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의 동선원(東禪院)으로 5조 홍인(弘忍)을 찾아감. 방앗간에서 8개월 있다가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유진애(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 라는 유명한 게송을 지음. 스승으로부터 밤중에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시기하는 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수년간 사냥꾼들의 무리에 숨어있다가, 의봉(儀鳳) 원년(677) 광동성 남해(南海)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印宗)에게 구족계를 받음. 이듬해 조계(曹溪) 보림사(寶林寺)로 옮겨 선풍을 크게 선양함. 선천(先天) 2년 8월 3일 국은사(國恩寺)에서 입적함. 원화(元和) 10년(815) 헌종(憲宗)이 대감(大鑑)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원화영조지탑(元和靈照之塔)이라 명함. 제자로는 청원행사(靑原行思 : ?-740), 남악회양(南嶽懷讓 : 677-744),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 영가현각(永嘉玄覺 : 675-713), 남양혜충(南陽慧忠 : ?-775)등이 있음.
11) 본래 완성된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이 돈교의 구체적인 실천은 돈오로써 이루어진다. 선불교에서 돈교라는 말을 최초로 쓴 사람은 신회이다. 그는 하남성 남양의 용흥사에서 도속들에게 설법한 것을 『南陽和尙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라고 제호한 것에서 ‘돈교’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12) 강서(江西) 도일(道一:709-788)스님은 한주(漢洲) 시방현(什方縣)사람으로 성은 마(馬)씨이며 그 마을에 있는 나한사(羅漢寺)에 출가하였다. 용모가 기이하여 소걸음으로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 혀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州) 원률사(圓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唐) 개원(開院:713-742) 연중에 (衡嶽)의 전법원(戰法院)에서 선정을 닦던 중 회양(懷讓:677-744)스님을 만났다.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법제자들은 139명, 혹은 84명이라고도 한다. 마조록에는 「능가경(楞伽經)」「유마경(維摩經)」을 비롯하여「금강경(金剛經)」「화엄경(華嚴經)」「불설법구경(佛說法句經)」「42장경(四十二章經)」등의 경전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또한 어록에 보이는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이 도이다"하는 말씀이 마조스님 법문의 특색이라 하겠다.
13)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청원행사의 제자, 端州高要人 성은 陳씨. 육조스님에 득도하고 육조가 입적하므로 行思에게 師事함. 저서에 [參同契 1권] [草庵歌 1권] 당나라 말기에 선풍(禪風)이 크게 드날려 남악(南嶽) 문하의 마조도일(馬祖道一)은 강서(江西)에 있고, 청원(靑原) 문하의 석두희천(石頭希遷)은 호남(湖南)에 있으면서 한창 천하의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였으므로 강서ㆍ호남 지방은 선승(禪僧)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였음. 따라서 그때 사람들은 이들 운수승(雲水僧)을 가리켜 “강호(江湖)의 선객(禪客)”이라 하였음. 參同契(참동계) 당나라 석두희천(石頭希遷) 지음. 5언(言) 44구 220자로 된 장편의 고시(古詩). 선림(禪林) 특히 조동종에서는 이것을 중히 여겨 아침마다 불전에서 독송. 선종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그 줄거리는 현상이 곧 실재라는 이치를 기록한 것. 참(參)은 만법 차별의 현상, 동(同)은 만법 평등의 본체, 계(契)는 차별이 곧 평등, 평등이 곧 차별인 묘용(妙用)을 뜻함.
14) 조사선(祖師禪): 조사선이란 불도의 최고 경지인 깨달음을 석존이 아니라 조사라는 용어 그 자체를 직접 부처의 경지로 보고 주장한 선이다. 물론 이런 종의 구분은 후대에 의미구분을 위해 나뉜 것이지, 당시에 종파 개념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조사선이란 용어에도 마찬가지인데, 조사선이라는 명칭도 원래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등록11권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장(章)」에서 향엄지한(香嚴智閑 ?~898)이 앙산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앙산이 향엄의 견처가 어떤가 묻자 “내가 갑자기 말은 못하겠지만 게송에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땅이 없었으나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다” 대답하자, 앙산이 “여래선은 얻었으나 조사선은 아직 얻지 못했다”46)고 가르치는데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서 보면 앙산이 여래선과 조사선을 구분함으로 조사선을 여래선보다 높은 경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사선을 여래선보다 발전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여래선과 조사선의 구분이 당시에는 명확하지 않았다.
15) 혜능(慧能)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도교인(道敎人)·속인 등, 일 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儒家)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大師)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法海)로 하여금 설법 내용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宗旨)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니 같이 배운 도제(道 )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悟眞) 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만약 이 법을 부촉할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음이로다.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워야만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덕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16)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혜능의 선법은 혜능 자신의 깨달음의 체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단경』에서 보면 혜능은 『금강경』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며, 깨닫게 되기까지 어떤 수행을 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즉 언하변오(言下便悟)는 곧 돈오견성(頓悟見性)이 선법으로서 혜능은 이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17) 돈오돈수(頓悟頓修)란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닫고 동시에 문득 수행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돈오(頓悟)는 당연한 일이지만, 한 순간에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돈수(頓修)는 어떤 의미인가? 수행(修行)이라는 것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하여 정해진 과정을 일정 기간 동안 노력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행이 일순간 이루어져버린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수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즉 돈수(頓修)의 실재 내용은 무수(無修)이다. 이처럼 혜능이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실재 내용은 깨달음만 있고 수행은 없는 것이다. 수행은 없고 깨달음만 있다는 것이 바로 혜능선(慧能禪)의 중요한 특성이다. 혜능은 아직 무수(無修)라는 말은 쓰지 않고 돈수(頓修)라고 말하고 있으나, 마조(馬祖)에 이르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不用修]’라고 말하며 백장(百丈) 이하에서는 ‘무수(無修)’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돈오무수(頓悟無修)의 선법은 마조(馬祖)와 석두(石頭) 이후의 선종(禪宗) 조사선(祖師禪)으로 계승된다.
18) 五家 七宗 : 5가란 임제·조동·위앙·운문·법안이며 7종이란 5가에 임제종의 분파인 양기·황룡의 2파를 더한 것이다. 중국 선종은 보리달마로부터 출발하여 5조 홍인(弘忍 : 601~674)에 이르러 북종과 남종으로 갈린다. 북종에서는 분파가 없었으나 홍인 문하의 6조 혜능(慧能 : 638~713)으로부터 출발하는 남종에서는 청원행사(靑原行思 : ?~740)와 남악회양(南嶽懷讓 : 677~744)이 등장하여 쌍벽을 이루었는데, 당나라 중기에는 청원과 남악의 문하에서 각각 석두희천(石頭希遷 : 700~790)과 마조도일(馬祖道一 : 707~786)이 출현하여 개성이 풍부한 선사들을 배출하면서 흥성하게 되어 독특한 가풍을 내세웠다. 즉 청원-석두의 후계로 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법안종(法眼宗)이 성립했으며, 남악-마조의 후계로 임제종(臨濟宗)·위앙종(潙仰宗)이 성립했다. 이후 임제종은 송나라 시대에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로 갈려 크게 번영했다. 개괄하면 남종선은 청원과 남악을 두 축으로 삼아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걸쳐 5가로 갈리고 5가 중의 임제종으로부터 다시 2파가 갈리는데, 이 전체적인 양상의 총칭이 오가칠종이다. ( 五 家 ) ( 七 宗 ) 南 嶽 ㅡ 馬 祖 ㅡ 百 丈 ㅡ 黃 檗 ㅡ 臨 濟 < 臨濟宗 > ㅡ 慈明 ㅡ 楊岐 < 楊岐派 > | | | | | | | 潙 山 ㅡ 仰 山 < 潙仰宗 > 黃龍 < 黃龍派 > (六祖 慧能) ㅡ | | 雲 門 < 雲門宗 > | 天 皇 ㅡ 雪 峰 ㅡ| | | | 靑 原 ㅡ 石 頭 ㅡ| 玄 沙 ㅡ ㅡ 法眼 < 法眼宗 > | | 藥 山 ㅡ 洞 山 ㅡ 曺 山 < 曺洞宗 >
19) 백장선사: 선종 수행 규범 담은 청규 도입해 조사선 기틀 마련. 중국 선종사에서 백장회해(749~814)는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의 조사선 선풍을 계승.발전시킨 인물이다. 마조도일의 선법을 계승한 백장은 선문에 청규를 도입.제정시킴으로써 조사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백장의 선법은 위산영우(771~853)와 황벽희운에게 전해짐으로써 법계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위산은 그의 제자 앙산혜적(807~883)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 중에 위앙종을 창시하게 되고, 황벽의 선법은 임제의현에게 전해져 임제종이 만들어지게 된다. 특히 백장청규는 선종의 생활문화와 수행생활의 규범 의례를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에 선법이 전래된 이후로 중국선종은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백장의 청규제정을 계기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케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20) 임제 스님의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9세기초 원화년간(806~820)이 아닐까 한다. 스님의 휘는 의현이고 임제는 그 법호이다. 소성은 형(邢)씨이고 조주의 남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보통사람보다 빼어나 남다른 데가 있었고 자라서는 부모님께 극진한 효행을 하여 이웃에 널리 알려졌다. 스님이 언제 출가하시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타고난 성품이 탁월하고 인간바탕이 순진하며 진리를 알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서는 강원에 있으면서 계율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과 여러 조사들의 저술하신 논(論)을 깊이 연구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탄식하면서「이곳은 세상사람을 구제하는 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 교밖에 근본 마음을 전하는 종지는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일시에 던져 버렸다. 그리하여 선종으로 개종하고 선지식을 찾아 행각에 나섰다. 황벽 스님의 인가를 받고서는 하북지방에 가서 진주성의 동남 모퉁이에 있는 임제원에서 널리 교화를 폈다. 임제라는 호도 여기에서 기인 된 것이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가 스물 둘이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임제종의 종조가 되었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에는 신라의 지리산 화상도 있었다. 당(唐) 함통(咸通)8년 서기 867년 1월 10일, 갑자기 임제 스님은 세상을 떠나겠다고 하신다. 앓지도 않고 단정히 앉으시고는 삼성(三聖)과 같이 문답하여 마치시고 고요히 가셨다. 시호(諡號)는 혜조(慧照) 선사. 저술로는 <임제혜조선사어록>이 한 권 있다.
21) 깨달음은 초심자라도 설법을 잘 듣거나 어떤 기연을 만나면 문득 얻을 수 있다. 마음은 이런 위대함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이때 한 번 깨닫고 닦는 것도 끝내는 큰 기량이 있다면 이것을 수오일시(修悟一時) 돈오돈수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곧 닦음도 마치는 것이므로 돈오돈수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 깨달음은 망상분별을 완전히 제거한 오매일여의 경지에서 이루어야 진짜 깨달음이라 하고 그 전에 깨달은 것은 해오(解悟) 즉, ‘이해로써 깨달은 것일 뿐’이라 했다. 기존의 선문에서 사용하는 돈오, 즉 ‘단박에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닦아 오매항일을 얻고 난 다음 깨달아야 돈오돈수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22) 마조선(馬祖禪)에서 수증(修證)의 관계를 살펴보면, 마조는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결과적으로 증오(證悟)한다는 수인증과(修因證果)를 부정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에 의한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한다. 마조선(馬祖禪)에서는, 학인은 깨닫고자 발심(發心)하여 선지식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노력을 하고, 선지식은 설법과 문답에 의하여 직지인심의 가르침을 펴서 깨달음의 싹이 나올 계기(契機)를 만들어주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전부이고, 무슨 특별한 방식의 수행은 없다. 마조는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수행은 불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마조선에서 수증(修證)의 관계는 불수돈오(不修頓悟) 또는 무수돈오(無修頓悟)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조의 불수돈오(不修頓悟)는 혜능의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혜능의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내용은 사실상 무수돈오(無修頓悟)이지만, 아직 혜능의 『단경(壇經)』에서는 돈수(頓修)라는 말을 사용하고 불수(不修)나 무수(無修)라는 말은 사용치 않고 있는데, 마조는 더욱 분명하게 불수(不修)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3) 이 말은 『유마경』 ‘제자품’(『대정장』14권, p.539하)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연좌라 한다(不斷煩惱 而 入)涅槃 是爲宴坐)”한 것과 『사익경』(『대정장』 15권, p36하)에 “생사를 떠나서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주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
24) 행주좌와(行住坐臥) : 걷는 것.서는 것.앉는 것. 눕는 것의 네 가지 위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총괄한 말이다.
25) 견문각지(見聞覺知) :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아는 것. 감각지각(感覺知覺)의 작용. 육식(六識)의 작용으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 · 혀 · 몸으로 냄새 · 맛 · 촉감을 알고, 뜻으로 법을 아는 것. 심식(心識)이 객관세계에 접촉함을 총칭.
26) 삼구투과(三句透過)는 백장 수증관(修證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하여 가르치고 배우되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본래 의도한 종지(宗旨)를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백장은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것으로서 가르친다. 수행인이 매이거나 머무는 경계(境界)라는 것은 마음에 가지는 견해(見解)를 가리킨다. 어떤 견해를 가지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서 그 견해에 매여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수행인의 병이다. 이와 같이 수행인이 투철히 깨달아 벗어나지 못하는 병통(病痛)이 바로 어떤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장은 이른바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방편을 통하여 견해를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삼구(三句)란 백장의 독특한 용어로서 초선(初善)․중선(中善)․후선(後善)을 말한다. 초선(初善)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하나의 입장을 지키는 것이며, 중선(中善)은 초선의 입장을 버리는 것이며, 후선(後善)은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知解] 조차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구(三句)를 백장은 불교의 교설(敎說)이 가진 독특한 구조라고 하는데, 삼구(三句)를 투과(透過)한다는 백장의 가르침은 곧 부주상(不住相)의 가르침으로서, 불법(佛法)은 어떠한 견해(見解)에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깨달은 자는 어떠한 견해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견해(見解)의 상(相)이야말로 깨달음을 막는 커다란 장애이기 때문이다.
27)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걷고, 정지하고,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순간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없다.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다”라는 뜻.
28) 조사선이나 간화선이라는 말에서 선(禪)이라는 표현은 원래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선은 마음을 안정시켜 한 가지 대상에 의식이 통일된 상태를 말하는데, 이 통일 된 상태를 정(定)이라고도 해서 삼매(三昧:samᾱ[dhi)라고도 표현했다.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선사상(禪思想)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형성된 것으로, 인도의 선이 중국에 전래되어 생활 실천적인 중국인들의 사상에 맞추어 변화된 불교사상을 말한다. 중국선(中國禪)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밖에 따로 전해지는 가르침(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하여 당시 인도에서 건너온 경전에 대하여 강설과 주석에만 주력하는 학문적 불교에서 벗어나 실천적이고 일상생활과 밀접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주장하는 불교였다. 인도에서 들어온 경전을 긴 시간동안 연구, 번역하고 여기에 유교와 도교의 사상을 더해 중국인들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토착화를 높였다. 또한 승단도 인도와는 다르게 생산노동을 중시해서 중국의 문화와 기후에 맞게 독자적인 청규를 제정했으며, 스승과 제자간의 전승(傳承)을 강조하는 등 사상적, 실천적으로 중국만의 독자적인 선종(禪宗)을 탄생시켰다.
29) 불교에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골똘히 탐구하는 문제인 화두를 근거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참선법의 하나다. 간(看)이란 본다는 뜻이며,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摩) 이래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선정(禪定)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양식의 수행법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곧바로 자기의 마음으로 향하여 그 본성을 보아 불타를 이룬다"(直指人心見性成佛)는 것이다. 보리달마 이후 오조(五祖) 홍인(弘忍)에 이르기까지는 단일한 계보로 이어왔으나, 이후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과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으로 분파되었다. 초반에는 북종선이 우세하였으나, 안녹산의 난 이후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의 활약으로 남종선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남종선은 다시 그 종풍에 따라 분파되어 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법안종(法眼宗)·운문종(雲門宗)·위앙종(潙仰宗)의 오가(五家)를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임제종이 가장 융성하였으며 선종의 정통으로 남았다. 고요히 앉아서 좌선하는 묵조선(默照禪)과는 달리 화두를 들고 철저대오(徹底大悟)하는 간화선은 당대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화두만을 보는 것으로 수행의 방법을 삼아 이를 극력 제창한 사람은 송대에 임제종의 정통을 이은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였다. 조동종의 묵조선에 반대하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간화선은 임제종의 정통적인 수행법이 되었으며, 임제종의 융성과 함께 극히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였으며,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이를 널리 폈다. 이후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惠諶) 등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간화선은 우리나라 선수행의 정통적인 방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30)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1월 2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법어.)
31) ‘山是山水是水’의 문헌이 황벽이 최초는 아니고 동진(東晋)시대의 승조(僧肇; 383~414)의 금강경주(金剛經註)에도 나오고 황벽이후에 유명한 것은 송시대의 청원유신(靑原惟信)과 오조법연(五祖 法演; 1024~1104)의 법문이 유명하다.
32) 黃檗山斷際禪師宛陵錄, (大正藏 48, p.385.b16) "但莫生異見 山是山水是水 僧是僧俗是俗(다만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이요, 속은 속일뿐이다)"
33)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大正藏 48, p.383.c19)
34) 한말의 승려 경허(鏡虛 : 1849~1912)가 중국의 선종과 관련된 중요한 글들을 뽑아 모은 선학의 지침서. 2권 1책. 활자본. 1907년 운문사(雲門寺)에서 처음 펴낸 상권(上卷)에는 달마대사(達摩大師)의 〈혈맥론 血脈論〉·〈관심론 觀心論〉·〈사행론 四行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 最上乘論〉 등 중국 고승들의 저술이 실려 있으며, 1908년 범어사(梵魚寺)에서 개간한 하권은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수심결 修心訣〉·〈진심직설 眞心直說〉·〈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천책(天)의 〈선문보장록 禪門寶藏錄〉 등 한국 고승들의 저술로 이루어져 있다.
35) 불교 선종(禪宗)의 공안집(公案集). <벽암집〉이라고도 하며 본래의 명칭은 〈불과원오선사벽암록 佛果圓悟禪師碧巖錄〉 또는 〈원오노인벽암록〉이다. 벽암은 원오선사 극근(克勤:1065~1135)에게 칙명(勅命)으로 수여된 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 선종의 5가 중 운문종(雲門宗)의 제4조인 설두(雪竇) 중현(重顯:980~1052)이 정리하고 저술한 것에 임제종(臨濟宗)의 제11조인 원오선사가 부연하여 저술한 것을 원오의 제자들이 편집, 간행한 것이다. 설두는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에 실린 1,700칙의 공안 중에서 학인(學人)의 선(禪) 공부에 참고할 만한 것으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00칙을 선별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 종지를 들추어내어 알리는 운문의 송고(頌古)를 달았다. 이는 내용뿐 아니라 시적 격조가 매우 빼어나 널리 애송되었다. 나중에 원오가 이 송고에 대하여 각 칙마다 수시(垂示)·착어(著語)·평창(評唱)을 달았는데, 이것이 〈벽암록〉이 되었다. 수시란 취급하는 그 칙의 종지나 착안점을 간단히 제시하는 서문적(序文的)인 것이고, 착어란 그 칙이나 송고에서 구사되는 낱낱의 어구에 대한 부분적인 단평(短評)이며, 평창이란 그 칙과 송고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설두의 문학적 표현과 원오의 철학적 견해가 혼연일체가 되어 종교서인 동시에 뛰어난 문학서로도 평가받고 있다. 원오가 죽은 뒤 그 문하의 사람들이 부질없이 궤변을 붙이므로 제자인 대혜(大慧) 종고(宗杲)는 선공부의 교과서와 같은 이 책이 거꾸로 선을 형식화하고 안이하게 함을 우려한 나머지 간본(刊本)을 회수하여 불태웠다. 그럼에도 잔존한 것이 있어 후대에 다시 간행되었는데, 임제종에서는 최고의 지침서로 간주되었다. 특히 간화선(看話禪)의 발전은 이 책에 의지하는 바가 크며, 이 책을 모방하여 〈종용록 從容錄〉이나 〈무문관 無門關〉이 저작되었다.
36) 『碧巖錄』(제11칙) 擧. 黃檗示衆云, 汝等諸人, 盡是酒糟漢, 恁行脚, 何處有今日. 還知大唐國裏無禪師. 時有僧, 出云, 只如諸方匡徒領衆, 又作生, 檗云, 不道無禪, 只是無師. (大正藏 48, p.151.b12)
37) 고려 중기의 고승 혜심(慧諶 : 1178~1234)이 1226년(고종 13) 편찬한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 30권. 목판본. 위기에 처한 국가의 안녕을 빌고, 불법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선종과 관계되는 각 문헌에서 필요한 내용을 뽑아 편찬했다. 문인 진훈(眞訓)과 더불어 옛 화두(話頭) 1125칙(則)과 여러 조사(祖師)의 염(拈)·송(頌) 등 어록(語錄)을 수집하여 만들었다. 그뒤 제자인 각운(覺雲)이 347칙의 화두를 첨가하여 1472칙으로 내용이 늘어났는데 현재는 이것이 유통된다. 제1·2권에는 석가모니불과 그 직계제자들의 화두를 실었고, 제3권부터 중국 선종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과 각 선파(禪派) 승려들의 화두를 실었다. 본문의 내용은 징(徵)·염(拈)·대(代)·별(別)·송(頌)·가(歌)·착어(着語) 등 다양한 형식으로 짜여져 있지만 그중 염과 송이 대부분이다. 염은 한 사건을 예로 들어 제시하고 풀이해주는 형식이며, 송은 화두 속의 사건을 운문으로 찬송하는 형식이다. 산문과 운문이 융화를 이루고 있는 듯하나 전체적으로는 운문문학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화두의 주인공은 고승(高僧)·대덕(大德)이 대다수이지만 국왕·대신·행자·비구니·소녀 등 각 계층이 그들과의 대화에 참여했으므로 당시의 언어·생활·풍속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화두를 제시한 사람 중에 신라인이 많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1244년 대장도감(大藏都監)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 개판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책에 대한 주석서도 많이 나왔다. 각운이 지은 〈선문염송설화 禪門拈頌說話〉와 일연(一然)이 지은 〈선문염송사원 禪門拈頌事苑〉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이 책은 저술된 당시부터 선문의 필독서로 사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어 불교사상면에서 우리나라 승려들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또 운문 중심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우리 선시(禪詩)의 주제·창작방법·소재 등 각 방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38) 당나라 때, 황벽희운黃檗希運선사가 황벽산을 떠나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대안정사大安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어느 날 상공 배휴裴休가 들어오다가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보고 원주院主에게 벽에 걸린 초상들이 누구의 것인지 물었다. 원주가 “고승의 초상입니다.”이라고 대답하자, 배휴가 다시 물었다. “초상(그림)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에 계십니까?” 원주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배휴가 “이곳에 참선하는 스님이 없습니까?”하고 묻자, 원주는 마침 사찰에서 허름한 일을 하고 있는 황벽이 선수행자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에 배휴가 황벽을 불러서 “초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황벽이 갑자기 “상공!”하면서 배휴를 불렀다.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자, 황벽이 “그대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하고 되물었다. 황벽의 이 말에 배휴는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황벽형의黃檗形儀’라고 하는데, 고려 『禪門拈頌集』등 여러 공안집에 전하고 있다.
39) 정성본 『선학의 원리와 실천수행법』(승가의 실천수행, 2008년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학술대회)115쪽 참조.
40) 현재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민후현(閩侯縣).
41) 두 곳의 황벽산이 있다. 복주 민현 출생의 희운이 처음 출가한 향리의 복주 황벽산과, 그후 희운이 출가본산(出家本山)의 추억을 되살려 개창(開創)한 홍주(洪州) 고안현(高安縣; 현 강서성 南昌市)시의 황벽산이다.
42) 황경피나무라고도 한다. 황색의 내피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건위제, 지사제 등의 약제로 사용한다.
43) 배휴의 자는 공미(公美)이고 맹주(孟州)의 제원(濟源)사람이다. 부친은 숙(肅)으로 정원(貞元) 무렵에 절동(浙東)의 관찰사(觀察使)였다. 그때 극적(劇賊) 율굉(栗鍠)이 산월(山越)지역을 속여 어지럽히고 주현(州縣)을 함락시키자 숙은 주병(州兵)을 이끌고 적을 파하여 사로잡고 평적(平賊)의 기록을 한 편을 지어 올렸다. 덕종(德宗)이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겼다. 숙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배휴는 그 둘째 아들로서 품행을 엄정하게 지켰다. 어린 시절 배휴의 형제들은 모두 문중의 별장에 틀어 박혀 낮에는 경을 강독하고 저녁에는 글을 짓는 등 해가 바뀌도록 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사슴고기가 있어서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나 배휴는 먹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채소로도 족하거늘 지금부터 고기를 즐겨 씹는다면 훗날을 어찌 기약하겠는가?” 진사시험에 나아가 현량방정(賢良方正)에 뽑혔다. 이로부터 여러 부서의 군서(群薯)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으며 내외의 직(職)을 두루 거쳤다. 대중(大中)에 이르러 병부시랑영제도염철전운사(兵部侍郞領諸道鹽鐵轉運使)가 되었고, 동 6년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 中略 … 대화(大和) 후 세조(歲漕)인 강(江)과 회(淮)의 쌀 사십만 곡(四十萬斛)이 위하창(渭河倉)에 이르자 겨우 십 삼만 곡에 불과했다. 뱃사공들이 훔쳐내고 승리(乘吏)들이 속여서 나라의 세금을 모두 축냈던 것이다. 이로써 유안(劉晏)의 법을 모두 폐하였다. 배휴가 분견관(分遣官)이 되어 그 폐단을 자세히 밝히고 분장(分長)과 동조(董漕)에게 명(命)하여 속이고 훔친 자들을 모두 처벌하였다. 강(江)에서 위(渭)에 이르기까지 구세(舊歲) 이십 팔만 곡을 추징하여 모두 관(官)에 되돌리고 칙에 의해 순원(巡院)하니 다시는 속이지 못했다. 또한 신법(新法) 십조(十條)를 정하고 세다(稅茶) 십이법(十二法)을 세워서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거기에 머물기를 3년, 위창(渭倉)에 이르는 쌀이 백 이십 만곡이 되어 허투루 빠지는 일이 없었다. … 中略 … 이렇게 시정(施政)하기를 5년, 배휴는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가 되었으며, 하동현자(河東縣子)로 봉해졌다. 동도(東都)의 태자소보분사(太子少保分司)가 되었다. 다시 소의(昭義)․하동(河東)․봉상(鳳翔) ․형남(荊南) 등 네 곳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나이 일흔 넷에 졸(卒)하니 태위(太尉)에 증(贈)해졌다. 배휴는 관리들을 다스림에 있어 교찰(皦察)을 행하지 않고서도 외신(畏信)을 얻었으며, 문장에 능하여 마치 눈썹과 같은 해서(楷書)의 체법(體法)을 이루었다. 사람됨은 교양이 있고 마음이 넓으며 온화하고 나아가고 그침이 옹한(雍閑)하였다. 선종(宣宗)은 일찍이 배휴를 일러 ‘휴(休)는 참된 유자(儒者)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도법(浮屠法)을 좋아하여 항상 술과 고기를 멀리하고 그 설(說)을 강구(講究)하여 수만 언(數萬言)을 연역(演繹)하고 부저(付著)하였다. 또한 가패(歌唄)를 익혀서 낙(樂)으로 삼았다. 홀천기(紇千臮)와 사귀어 상문(桑門)의 호로써 서로 불렀으며, 당시 세간에서는 이를 비웃었으나 그를 좋아하는 바는 쇠퇴하지 않았다. 이상은 신당서(新唐書) 182권에 실린 배휴의 전기이다. 이 전기에서 나타나는 배휴는 학문과 고급관료로서의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며, 또한 불교에 귀의한 거사(居士)이기도 하다. 따라서 배휴가 당대(唐代)의 저명한 문인관료들이면서 불교귀의자들인 왕유(王維), 이고(李翶), 유종원(柳宗元), 백낙천(白樂天) 등과 동일한 전형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배휴는 화엄(華嚴)과 선(禪)의 대가인 규봉종밀(圭峰宗密 : 780-841)을 사사(師事)했으며, 종밀의 여러 저작에 서문을 쓰고 있다. 규봉종밀이 입적한 회창(會昌) 원년(元年)은 회창(會昌)의 파불(破佛 : 842-845)로 유명한 무종(武宗)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조의 제자인 황벽(黃檗)과 위산(潙山)의 선(禪)은 회창의 파불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의 한 획을 긋게 된다. 당(唐)의 수도 장안 부근의 종남산(終南山) 초당사(草堂寺)에 주석하며 정상급 학승으로서 권위를 누리던 종밀은 마조, 백장의 교단과 선에 관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당시 마조 계통의 선은 일종의 신흥종교였으며, 종밀이 머물던 중앙 사상계의 평가에 들 수도 없었다. 또한 종밀은 마조 계통의 선을 얕게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종밀의 재가제자 배휴가 황벽의 선(禪)을 대하고 그 웅대한 품격에 매료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배휴가 쓴 ‘전심법요서’는 매우 깊은 정신적 감동이 없이는 쓸 수 없는 문장으로서 여운이 있다. 이와 같이 유교와 불교의 교학 및 선(禪)에 깊은 이해를 체득한 배휴가 황벽의 법어를 필록하고 공간(公刊)한 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전심법요』와 『완릉록』의 매력은 필록자 배휴의 존재에 힘입은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조도일 - 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홍주종의 선사상의 성립은 이 책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44) 佛果圜悟禪師碧巖錄, (大正藏 48, p. 152.)"大中云 用禮何為 檗便掌 大中云 太麁生 檗云 這裏什麼所在 說麁說細 檗又掌 大中後繼國位 賜黃檗為麁行沙門 裴相國在朝 後奏賜斷際禪師"
45) 祖堂集, (高麗藏 45, p. 335.)"閌閬天生不拘小節"
46)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66.)"音辭朗潤志意沖澹"
47)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66.) "後遊天台逢一僧 與之言笑如舊相識 熟視之目光射人 乃偕行屬澗水暴漲 乃捐笠植杖而止 其僧率師同渡 師曰 兄要渡自渡 彼即褰衣躡波若履平地 迴顧云 渡來渡來 師曰 咄遮自了漢 吾早知當斫汝脛 其僧歎曰 真大乘法器我所不及 言訖不見"
48) 祖堂集, (高麗藏 45, p. 335.)"後遊上都 因行分衛而造一門云 家常 屛後有老女云 和尚太無厭生 師聞其言 異探而拔之云 飯猶未得 何嘖無厭 女云 只這个 豈不是無厭 師聞 駐而微笑 阿婆睹師容儀堂堂 特異常僧 遂命入內 供以齋 喰畢 詢問 參學行止 師不能隱 竭露見知 阿婆提以再擧微閞 師則玄門頓而蕩豁 師重致言謝擬欲師承 阿婆曰 吾是 五障之身 故非法器 吾聞江西有百丈大師 禪林郢匠 特秀群峯 師可詣彼參承 所貴他日爲人天師 法不輕未耳"
49)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66.)"因人啟發乃往參百丈 問曰 從上宗承如何指示 百丈良久 師云 不可教後人斷絕去也 百丈云 將謂汝是箇人"
50)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66.)"百丈一日問師 什麼處去來 曰大雄山下采菌子來 百丈曰 還見大蟲麼 師便作虎聲百丈拈斧作斫勢師即打百丈一摑 百丈吟吟大笑便歸 上堂謂衆[曰 大雄山下有一大蟲汝等諸人也須好看 百丈老漢今日親遭一口"
51) 염관(鹽官 ?-842) : 당대(唐代)스님, 남악문하, 염관은 주석지명, 속성은 이(李)씨. 해문군 출신, 향리의 운종(雲琮)에게로 출가하여, 남악지엄에게 구족계를 받고, 강서성 남강의 마조도일에게 참구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52) 佛果圜悟禪師碧巖錄, (大正藏 48, p. 152b05.) 後到鹽官會中。請大中作書記。黃檗在彼作首座。檗一日禮佛次。大中見而問曰。不著佛求。不著法求。不著眾求。禮拜當何所求。檗云。不著佛求。不著法求。不著眾求。常禮如是。大中云。用禮何為。檗便掌。大中云。太麁生。檗云。這裏什麼所在。說麁說細。檗又掌。大中後繼國位。賜黃檗為麁行沙門。裴相國在朝。後奏賜斷際禪師
53)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大正藏 47, p. 496.) “我二十年在黃檗先師處 三度問佛法的的大意 三度蒙他賜杖 如蒿枝拂著相似”
54) 좌선하다가 피곤할 때 턱 밑에 괴어 잠시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구.
55) 좌선시 허리가 앞으로 굽어지지 않도록 등 뒤에 댈 수 있는 기구.
56) 古尊宿語錄,「[臨濟禪師語錄之餘」, (卍續藏 68, p. 32.) “師約住 與一掌 黃檗大笑 乃喚侍者 將百丈先師禪板 机案來 師云 侍者 將火來 黃檗云 雖然如是汝但將去 巳後坐却天下人舌頭去在”
57) 앙산(仰山慧寂 : 803-887) : 당대(唐代)스님, 앙산은 주석 산명, 속성은 섭(葉)씨. 소주(韶州)출신, 17세에 출가하여 무명지와 소지 두 개를 잘라서 서원을 세우고 삭발함. 탐원응진(眈源應眞)․위산영우(潙山靈祐) 등에게 참학하고 위산의 법을 이어 받음.
58) 佛果圜悟禪師碧巖錄, (大正藏 48, p. 198.) “百丈當時 以禪板蒲團付黃檗 拄杖拂子付溈山 溈山後付仰山”
59) 회창(會昌) 2년 : 당나라 무종(武宗) 842년.
60) 종릉(鐘陵) :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남창(南昌)부근.
61) 대중(大中) 2년 : 당(唐) 선종(宣宗), 848년.
62) 완릉(宛陵) : 안휘성(安徽省) 무호(蕪湖)의 동남쪽에 있는 선주(宣州) 혹은 선성(宣城). 양자강(揚子江) 남안(南岸)의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휘주(徽州)에서 항주(杭州)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이다.
63) 개원사(開元寺) : 완릉의 능양산(陵陽山)에 있던 절. 경덕사(景德寺) 또는 대운사(大雲寺)라고도 함. 홀주의 개원사와는 다름.
64)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大正藏 48, p. 379.) “予會昌二年廉于鍾陵。自山迎至州。憩龍興寺。旦夕問道。大中二年廉于宛陵。復去禮迎至所部。安居開元寺。旦夕受法。退而紀之。十得一二”
65) 조계(曹溪) : 소주(韶州, 廣東省) 곡강현(曲江縣)에 있음. 양(梁) 천감(天監) 원년(502) 인도의 바라문 삼장(三藏) 지약(智藥)이 조계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신 후, 그 곳의 수원(水源)이 승지(勝地)임을 알고 촌인에게 권하여 한 사찰을 건립, 서국(西國)의 보림산(寶林山)과 지세가 비슷하므로 보림사라고 명명함. 소주목(韶州牧)인 후경중(侯敬中)이 상주(上奏)하여 천감(天監) 3년 보림의 액(額)을 하사받음. 의봉(儀鳳) 2년(677) 봄 5조 홍인에게 득법한 6조 혜능이 인종(印宗) 법사에 의해 체발수구(剃髮受具)하고, 보림사에 돌아와 진아선(陳亞仙)에게 토지를 기증받아 사내(寺內)에 13개소의 건물을 세움. 또한 이곳에 남화사(南華寺)가 있음. 혜능은 조계 보림사를 중심으로 교화 활동을 전개했으므로 조계고불(曹溪古佛) 또는 조계고조(曹溪高祖)라고 존칭함.
66) 조계육조의 적손(曹谿六祖之嫡孫) : 조계는 육조 혜능(慧能 : 638-713)이 오조 홍인(弘忍 : 602-675)에게 법(法)을 전수받아 남행(南行)하여 선법(禪法)을 편 지역. 현재의 광동성(廣東省) 일대를 말함. 적손(嫡孫)은 직전정통(直傳正統)의 제자를 일컬음.
67) 본문에서는 서당과 백장의 법질이라 하였는데 실은 백장의 법제자이고 서당의 법질에 해당한다.『景德傳燈錄』卷9 「黃蘗希運禪師傳心法要」(大正藏 51, 270, b) ;『天聖廣燈錄』第1 「筠州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四家語錄』卷4「筠州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
68) 서당지장(西堂地藏 : 735-814)선사는 건주(虔州) 강서성 감현 사람이다. 속성은 료(廖)씨이며, 법명은 지장이다. 마조의 법을 이었다.
69) 최상승(最上乘) :「금강경」〈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불법의 대의(大意)를 말함.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남종선(南宗禪)의 돈오법문(頓悟法門)을 일컬음.
70)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大正藏 48, p. 379.) "故其言簡其理直 其道峻其行孤 四方學徒望山而趨 覩相而悟 往來海衆Z常千余人"
71) 『景德傳燈錄』卷12 (大正藏 51. p.0293a28.) “屬運禪師初於黃檗山捨眾入大安精舍。混迹勞侶掃灑殿堂。公入寺燒香。主事祇接。因觀壁畫乃問。是何圖相。主事對曰。高僧真儀。公曰。真儀可觀高僧何在。僧皆無對。公曰。此間有禪人否。曰近有一僧投寺執役。頗似禪者。公曰。可請來詢問得否。於是遽尋運師。公覩之欣然曰。休適有一問諸德吝辭。今請上人代醻一語。師曰。請相公垂問。公即舉前問。師朗聲曰。裴休。公應諾。師曰。在什麼處。公當下知旨如獲髻珠。曰吾師真善知識也。示人剋的。若是何汩沒於此乎。時眾愕然。自此延入府署留之供養執弟子之禮。屢辭不已。復堅請住黃檗山荐興祖教 有暇即躬入山頂謁。或渴聞玄論即請師入州 ”
72) 柳田聖山, 안영길․추만호譯, 『禪의 思想과 歷史,』 민족사, 1989,(p.198~206.)참조.
73) 석지관 편저, 『가산불교대사림』, (사단법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6, p. 690 ~ 691.)
74) (『全唐文卷』 743.) 「宗密禪師碑銘幷序」 "休與大師 於法爲昆仲 於義爲交友 於恩爲善知識 於敎爲內護外護 故得詳而序之 他人則不詳"
75) (『全唐文卷』 743.) 「大放光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序」"休常遊禪師閫域 受禪師之顯訣"
76) 禪源諸詮集都序, (大正藏48, p. 398.)"若吾師者 捧佛日而委曲回照 疑曀盡除 順佛心而橫亘大悲 窮劫蒙益 則世尊為闡教之主 吾師為會教之人 本末相扶 遠近相照 可謂畢一代時教之能事矣"
77)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 293.) "雖圭峯該通禪講為裴之所重"
78) 柳田聖山, 안영길․추만호譯, 『禪의 思想과 歷史,』 민족사, 1989, p. 224.
79) 百丈懷海禪師語錄, (卍續藏 69, p. 007.) “故有一日不作一日不食之言”
80) 鄭東一(妙寂)『黃檗希運의 禪思想 硏究』東國大學校 碩士學位論文 2008.참조
81) 頓悟見性: ‘念起卽覺覺之卽失’ 즉, 망념이 일어난 줄 알면 망념은 사라진다는 『坐禪儀』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망념을 가라앉히는 止(samatha)의 수행은 禪修行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현대적인 표현을 하자면 止의 수행은 번뇌의 제거를 위한 정신집중이다. 따라서, 간화선의 ‘無’자 화두를 염하는 것과 밀교의 ‘옴’, 초기불교의 ‘數息觀’, 정토종에서의 ‘염불’은 一念의 정신을 만들기 위한 同一한 취지의 수행 방법론이다. 止 수행을 통하여 망념이 사라지고 불성으로 되돌아 온 것이 頓悟見性이다.
82)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1권.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무량수불관경(無量壽佛觀經)십육관경(十六觀經)관경 (觀經)이라고도 한다. 유송(劉宋) 때(424) 강량야사(畺良耶舍)삼장이 번역하였으며, 범본(梵本)이나 다른 역본은 없다. 아미타경(阿彌陀經)무량수경에 이 경을 합하여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하는데, 정토신앙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기도 하다. 특히, 16관법(觀法)에 의하여 아미타불을 관하고 극락세계를 관하는 관념불적(觀念佛的) 관법이 있으므로 관경이라고도 한다.
83) 佛說觀無量壽佛經, (大正藏 12, p. 343.)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即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 是心作佛是心是佛”
84) 入矢義高, 박용길 譯, 마조어록, 고려원, 1988, p. 98.
85) 정성본, 선의 역사와 사상, 불교시대사, 1994, p. 369.
86) 馬祖道一禪師廣錄(四家語錄)券1(卍續藏 69, p. 004.) “僧問 和尚為甚麼說即心即佛 祖曰 為止小兒啼 曰啼止時如何 祖曰 非心非佛 曰除此二種人來 如何指示 祖曰 向伊道不是物 曰忽遇其中人來時如何 祖曰 且教伊體會大道”
87)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大正藏48, p. 383.)“如將黃葉為金止小兒啼”
88) 黃檗山斷際禪師宛陵錄, (大正藏 48, p. 386.)“皆是化人猶如黃葉為金權止小兒啼”
89) 宗鏡錄券1, (大正藏 48, p. 418.) “何故佛語心為宗 佛語心者 即心即佛 今語即是心語 故云 佛語心為宗 無門為法門者 達本性空 更無一法 ”
90) 馬祖道一禪師廣錄(四家語錄)券1(卍續藏 69, p. 002.)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 達磨大師 從南天竺國 來至中華 傳上乘一心之法”
91) 景德傳燈錄, 「[江西大寂道一禪師語」章, (大正藏 51, p. 440.)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謂平常心無造作無是非無取捨無斷常無凡無聖”
92) 馬祖道一禪師廣錄(四家語錄)券1(卍續藏 69, p. 002.) “汝但隨時言說 即事即理 都無所礙 菩提道果 亦復如是 於心所生 即名為色 知色空故 生即不生若了此意 乃可隨時著衣喫飯 長養聖胎 任運過時 更有何事”
93)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1991. 민족사. p799
94) 天聖廣燈錄卷 9, 「洪州大雄山百丈懷海禪師」[章, (卍續藏 78, p. 458.) “亦名禪道不用修 但莫污染”
95) 百丈懷海禪師語錄, (卍續藏 69, p. 006.)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即如如佛”
96) 百丈懷海禪師廣錄(四家語錄)券3, (卍續藏 69, p. 007.) “你先歇諸緣 休息萬事 善與不善 世出世間 一切諸法 竝皆放却 莫記莫憶 莫緣莫念 放捨身心 全令自在 心如木石 口無所辯 心無所行 心地若空 慧日自現 如雲開日出”
97) 景德傳燈錄,「洪州百丈山懷海禪師 章」, (大正藏 51, p. 249.) “但不用求覓知解語義句 知解屬貪 貪變成病 只如今但離一切有無諸法 透過三句外 自然與佛無差既自是佛何慮佛不解語”
98) 洪州百丈山大智禪師語錄(四家語錄) 券2), (卍續藏 69, p. 007.)
99) 중국 선원(禪院)의 규칙을 서술한 원(元)나라 때의 불서(佛書). 8권. 정식명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라고 한다. 원래 당(唐)나라의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선종(禪宗) 사원의 규범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을 《고청규(古淸規)》라고 하였는데, 선종이 독립된 사원 ·제도 ·의식 등을 아직 갖지 않았을 때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등의 제도를 설정하고, 중승(衆僧)에게 동서(東序) ·요원(寮元) ·당주(堂主) ·화주(化主) 등의 각 직책을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당 ·송 시대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없어졌으므로, 1335년 원(元)나라의 백장 덕휘(百丈德輝)가 순제(順帝)의 칙명을 좇아 수정, 전국 선원에서 시행시켰는데, 바로 이것이 《칙수백장청규》이다. 9장으로 되어 일종청규(一宗淸規)의 대강(大綱)이 망라되어 있다.
100) 선문규식(禪門規式):《경덕전등록(景德傳燈銶)》제6권 백장회해의 항목에 부재(附載)되어 있다.
101) 동산법문의 선법(禪法)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부르는 것인데, 동산법문의 일행삼매는 좌선간심(坐禪看心) 혹은 좌선관심(坐禪觀心)의 수행법(修行法)을 말한다.
102) 직지인심(直指人心): 불교 선종의 4대 종지(宗旨) 중 하나. 교외별전(敎外別傳)·불립문자(不立文字)·견성성불(見性成佛)과 함께 불교 선종의 주요 교리를 이루는 말이다. 직역하면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는 뜻으로, 눈을 외계로 돌리지 말고 자기 마음을 곧바로 잡을 것, 즉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는 선종의 개조(開祖) 달마(達摩)의 가르침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알게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된다. 흔히 "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 "이라 하는데,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어 교리를 공부하거나 계행을 떠나서 직접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선종의 2대조 혜가(慧可)와 달마와의 문답에서 유래하였다. 혜가가 달마에게 불도를 얻는 법을 묻자 달마는 한 마디로 마음을 보라고 대답하였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참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여 밖에서 도를 구한다면 많은 세월을 수행으로 보내고, 애써 경전을 쓰며, 끼니를 잊고 경을 외우더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곧바로 알면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므로 성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쉬운 일이라고 하였다.
103) 天聖廣燈錄 : 송나라 이준욱이 천성7년(1029) 에 엮음. 석가모니불에서 서천이십팔조와 동토육조를 거쳐 남악회양 문하 8세, 청원행사 문하 12세까지 불법을 계속 이어 온 336명에 대한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정리한 저술.
104) 스님의 선법은 삼구투과(三句透過)로 설명이 가능하다. 삼구(三句)란 스님의 독특한 용어로서 초선(初善).중선(中善).후선(後善)을 말한다. 초선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하나의 입장을 지키는 것이며, 중선은 초선의 입장을 버리는 것이며, 후선(後善)은 초선의 입장을 버렸다는 생각[知解] 조차도 버리는 것이다. 청법(聽法)과 문답(問答)을 통한 가르침과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언구에 집착하거나 견해에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장의 삼구투과(三句透過)라는 새로운 방식의 수행법(修行法)은, 이와 같이 설법과 문답을 통한 수행이라는 변화된 선법(禪法)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5) 견성 (見性) :⑴ 천지 만물의 시종본말과 인생의 생로병사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아는 것. 텅 빈 마음과 밝은 지혜로 천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줄 아는 것. ⑵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것.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아는 일.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바른 해답을 얻는 것. ⑶ 자기의 마음속에 항상 정견(正見)을 가져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106) 지해(知解) : 깨달음. 참선이나 불법의 본래 가르침은 '연구, 실험, 강의'하는 것이나 목적이 아니다. 즉 생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불법에서 이야기 되는 '깨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선이나 불법을 구함에 있어, 가장 꺼리는 것은 알음알이(分別智;분별지)이다. [入此門內 莫存知解(이 문안에 들어 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입차문내 막존지해)]라 써서 절 입구나 출입문 주위에 붙이는 것은 이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까닭이다.
107) 회광반조 (廻光返照) : 언어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성찰하고 참구하여 바로 심성을 밝히는 것. 바깥 경계로 끌려가는 정신을 안으로 돌려 자성 본원을 비추어 보는 것. 자성을 깨치는 것이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길이 되므로 모든 것을 자기의 본래마음에서 찾는 것. 차별심·분별심·망상심·집착심·증애심·번뇌심 등을 끊고 항상 자성 본래를 살펴보는 것.
108) 이심전심(以心傳心)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 어느 날 석가 세존(世尊)이 제자들을 영취산(靈鷲山)에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다. 그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세존은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拈華]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세존의 그 행동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微笑]. 그제야 세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 :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 진리를 깨치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현대의 ‘텔레파시가 통한다’와 유사한 의미이다.
109) 불립문자(不立文字) : 문자를 사용하지 않음. 교외별전(敎外別傳) : 경전의 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별도의 전수법을 취함. 직관적 종교 체험인 선(禪)을 중시하는 불교 종파인 선종(禪宗)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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