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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까운 사람이 가톨릭에 입교하여 예비 신자 교리를 한참이나 공부하고, 또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한 끝에, 지난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 과정에 한 번도 참견하지 않았으나 세례 받는 날에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에 가서야 나는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세례 미사는 엄숙하였다.
가톨릭 성당에서 드리는 영성체 의식
사실 모든 종교의 의식이 모두 근엄한 것일 테고, 정작 내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세례를 마친 다음의 풍경이었다. 마치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았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성당 마당의 마리아상 앞에서 수많은 친지와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선물로 받은 꽃다발과 성물을 한아름 안고 사진들을 찍었다. 행복해 보였다. 아, 세례라는 것이 이토록 모든 사람의 사랑과 격려를 받는 일이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영원한 현역 소설가 박완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근엄한 절차에 따라 미사가 진행되다가 끝 무렵에 이르러 영성체 순서가 되었다. 내 가까운 사람은 그동안 예비 신자였기 때문에 영성체를 모시지 못했다가 이윽고 세례를 받고 처음 그 의식을 드리게 되었다. 나는 그저 <대부>나 <미션> 같은 영화에서 미사 드리는 장면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 그 전체 과정을 처음으로 '구경'하게 되어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앉으라면 앉았을 뿐이었는데, 영성체 순서가 되어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성당 안을 가득 채운, 묵직한 기도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대목에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가슴이 울컥 했다. 그리고 오래 전 발간된 박완서의 산문집이 아! 하고 떠올랐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50대 중반에 가톨릭에 입교한 박완서가 1990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생활성서>에 연재한 것을 묶은 책이다. 박완서는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썼다고 했다. 남편과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나서, 그 비통함 속에서 박완서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난 뒤, <한 말씀만 하소서>를 썼다. 영성체를 곁에서 지켜본 다음에야 이 말이 진실한 참회와 믿음의 기도문임을 알게 되었으나 그 무렵에 그 산문집 보면서는 비통한 절규와 질문의 뜻으로만 알았었다. 그 책 속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나는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지만 또한 그러고도 그분을 덧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직 그분만이 생사를 관장하고 있다고 신의 권위를 믿고 있었고, 불쌍하게도 깊이 공구(恐懼)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1931년의 오늘, 10월 20일에 태어나 나이 마흔이 되는 1970년에 <나목>으로 등단하여 그 무렵에 팔팔한 이십 대의 나이로 등단한 사람들과 함께 7,80년대에 빛나는 소설을 썼지만, 대부분 작품 활동이 줄어들었음에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보기 드문 작가다.
고 박경리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기도 드리는 박완서(사진 뉴시스)
작가 인생 절정기를 넘긴 90년대 이후에도 박완서의 폐활량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아 1994년에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1997년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2001년에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그야말로 왕성한 현역 작가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단편집 <친절한 복희씨>를 발간하기도 했다. 다른 이의 일평생 작업을 이렇게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는 했지만, 글쎄, 마흔 되어 등단했음에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역 작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위업이다.
내 짧은 독서 이력에는 1980년에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 중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 가장 깊이 남아 있다. 대하장편 <미망>이나 어릴 적 기억을 샅샅이 찾아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도 인상 깊었고 꽤 오랫동안 박완서 문학의 결정체로 평가 받아온 <엄마의 말뚝> 역시 둔중한 무게로 남아 있지만, 어느 산부인과 의사가 핏덩이를 안고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의 강렬한 마무리는 잊을 수가 없다.
문학동네에서 간행한 '박완서 단편 전집'
소설 속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중에 생지옥을 경험한 여의사다. 피난 중에 그녀는 강간, 임신, 유산이라는 고통을 겪었고, 그래서 휴전될 무렵에 홀홀 단신 상경하여 서울 변두리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는 평생 동안 소파 수술을 전업으로 하였다. 그녀의 삶은 이미 한국전쟁 때 황폐해졌고 그 나머지 수십 년은 지독한 냉소와 자기 혐오로 그 잔인했던 기억을 스스로 덧내는 방식으로 치유해온 세월이었다.
그러던 중에 여의사는 스스로 정한 '정년 퇴임'을 3일 앞두고, 그야말로 그 가을의 잊을 수 없는 3일을 겪게 된다.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을 소파 수술만 전업해온 여의사는 마지막으로 딱 한번 생명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가을의 마지막 날에 그녀는 미숙아를 받게 된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을 부둥켜 안고 여의사는 인큐베이터가 있는 큰 병원으로 미친 듯이 달려간다.
7,80년대에 박완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그것을 끝내는 황폐하게 절단 낼 것 같은 당대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분노의 작품을 많이 썼거니와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순전히 개인적인 독후감이지만 이 중편의 강렬한 생명성이 이후의 장편들과 노년의 삶을 다룬 많은 단편들의 씨앗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연민과 익살이나 세태 풍자 역시 이 작품의 생명성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존중받고, 서로를 또한 인간적으로 존중하며 사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지극한 열망은 때로는 세태 풍자와 비판으로, 때로는 기억의 복원에 의한 장려한 장편으로, 그리고 세월을 살아내면서 자신과 함께 나이를 들어가는 세대에 대한 섬세한 통찰과 연민의 단편으로 이뤄져 왔거니와 나는 여전한 현역 박완서의 그 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에 배어 있는 숭고한 생명성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문학 강연 행사에 참여한 박완서(사진 알라딘)
끝으로 한마디. 지난 촛불 정국의 끄트러미에서 박완서가 <현대문학> 9월호에 쓴 에세이가 '논란'이 된 적 있었다. '8월의 단상'이란 글인데, 촛불 정국에 대한 박완서의 언급이 좌우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이런 저런 반응이 있었다. 좌우 양쪽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원색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저마다의 정치적 입장을 다 만족시키지 못한 박완서를 신경질적으로 비난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그 글을 다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극우보수 쪽에서 거친 욕설도 했는데 그들은 어쩌면 그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박완서는 그 글에서 "우리가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인데 그의 초기의 졸렬한 정치가 아무리 못 참아줄 수준이었다고 해도 그만큼 의사표시를 했으면 나머지는 국회에 맡겨야 되지 않을까. 5년 후에는 정권을 아주 갈아치울 수도 있는 거고"라고 썼는데, 맹렬보수파들은 이 대목을 도저히 참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극우파 사이트를 보니 '뭐라구 졸렬? 이명박 정부를 갈아치운다고?' 하면서 도저히 글로 옮길 수 없는 욕설과 비난을 하는 걸 보았는데,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데 그 반대쪽의 일부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한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뽀르르 미국 먼저 달려간 것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것 천지였기 때문에 촛불시위도 속으로 박수쳐가며 지켜볼 수 있었다"는 박완서의 글은 결코 알리바이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발언이며 "나머지는 국회에 맡겨야 되지 않을까. 5년 후에는 정권을 아주 갈아치울 수도 있는 거고" 하는 문장 역시 그 무렵에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의 많은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소설가 박완서
'조중동문'에서 "흔들고 싶으면 흔들되 아직 어린 나무이니 뿌리까지 흔들진 말았으면"이라는 문장을 특히 가려 뽑아서, 마치 박완서가 촛불 열기를 거세게 비난하면서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쓴 것처럼 했지만, 박완서가 언급한 '어린 나무'는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순결한 피를 흘리고 민주투사를 양산했는지 어찌 잊을까" 했던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어린 나무다. 그 나무를 어찌할까 하는 대목에서 의견이 차이나는 것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무래도 심하다
박완서가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진보적인 생각과 사상에 관심이 있고, 그런 생각과 사상을 갖고 있다. 진보의 이상과 지향이 이 정부에서도 살아있어야 한다. 빈부 격차, 남녀 평등, 소수에 대한 배려 같은 것들이다. 그런 진보의 이상과 가치가 보수 진영에는 너무 적은 것 같다"는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박완서가 변해버린 정국을 급하게 읽고 표변하여 한 발언이 결코 아니라 1970년에 등단한 이후로 4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생각이며, 이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증거해준다.
우리는 박완서가 '8월의 단상'에서 쓴 다음의 말에 대해, 덮어놓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그 상흔의 소멸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6ㆍ25는 아직도 지혈이 안 된 상처지만 그 다음 세대에게는 6ㆍ25를 아무리 설명을 해봤댔자 발굴한 유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골은 엄청나게 깊지만 다행히 우리는 사라져가는 세대이다."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지음 | 세계사
본문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 산문집은 1990년에 연재되어 1994년에 출간된 것이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지금 읽어도 깊은 생각을 거듭하게 만든다. 죽음과 절망과 고통의 생생한 기록인데,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질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영원히 순화될 것 같지 않은 원색적인 포악이 거침없이 치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의 문제는 나는 무엇일까 하는 나의 내면응시로 귀착되고 만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전 6권) |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박완서 단편소설을 한 군데 다 모은 전집이다. 세트 전권 값이 5만 원이 넘는데, 요즘의 책 값 수준으로 보면, 한 작가의 평생 단편을 집적했다는 점에서 결코 무리가 아니다. 70년대의 중산층 세태 풍자가 되는 작품들에서 80년대의 인간 탐구와 90년대 이후의 성찰을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다. 이는 박완서 문학 이력을 되새김질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지난 1970년대 이후 40년 가까운 우리의 현대사, 그 내면의 속살을 응시하는 일이다.
미망 | 박완서 지음 | 세계사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적도 있는 이 작품에 대해 다른 소개 말보다는 박완서의 회고를 전하는 게 나을 듯하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대하장편의 연재를 중단한 사연을 다음처럼 회고했다.
"힘들게 쓰고 있는데 그 사이 내 삶에 아주 큰 일이 났다. 남편과 아들을 그때 잃었다. 그 이전에도 막내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그때 매일 병원에 다니며 병원에서 '미망'을 썼다. '미망'은 연재소설이었다. 연재소설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는지? 독자와 약속한 것이니까. 3권을 쓸 때 남편이 폐암에 걸려 또 병원 생활을 했다. 노트북도 없던 시절, 한 권을 거의 병원 침상머리에서 썼다. 병원 생활에 진력이 날 즈음 1남 4녀 중 아들을 잃었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못하겠다고 잡지사에 알렸다. 최초로 중단한 연재였다."
원출처 : blog.ohmynews.com/booking/224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