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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23장. 성명대왕 왕자 민달천황 聖明大王 王子 敏達天皇
552년, 백제는 큐슈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여,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을 구주백제왕으로 내보낸다. 571년, 일본을 다스리던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서거 하자, 민달천황이 큐슈로부터 건너가서 왜국 천황이 되었다. 민달천황은 이복동생인 추고천황과 결혼하여 일본의 황후로 세웠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에 백제라는 지명을 붙였다. 큐슈에 이어서 대화까지도 백제와 병합하려는 것이었다. |
1.
민달천황 敏達天皇 [記]
沼名倉太玉敷命 / [紀] 渟中倉太珠敷天皇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이
백제왕 선광善廣(=光)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백제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민달천황이 백제왕가 혈통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러나 실제 밝혀지는 족보에는 의자대왕의 작은 할아버지가 민달천황이다.
민달천황은 누나카라후토타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명대왕의 차자다.
성명대왕의 이름이 명농明穠이다.
당시 큐슈에는 백제 대왕과 왕자들을 위한 둔창屯倉이 있었으니 농왕穠王의 둔창이 농창穠倉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일본말로 누나쿠라渟中倉인 것이다.
그림 1) 백제 의자대왕 혈통도
즉, 민달왕자는 구주백제왕 시절에 농창穠倉에 있었으니, 성명대왕의 왕자인 것을 시호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시호에 역어전譯語田이라는 지명을 앞세운 것도 있다.
뒷날 대화에서 오사카의 궁을 역어전궁譯語田宮, 혹은 오사다궁他田宮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대화조정에서 세운 궁이름이지만, 큐슈에서의 궁이름과 같은 것이다. 큐슈에서 역어전譯語田
누나카라渟中倉는 오오이타현大分縣 역관천변譯館川邊의 우사궁宇佐宮이다.
민달천황은
[흠명천황기]에서 552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민달천황기]에서는 568년에 황태자가 되어
서로 기록이 다르다.
앞에 552년 기록은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으로서 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뒤에 568년 기록은 일본 본토 천황 황태자로 보면 맞다.
그렇다면 568년에 흠명천황은 실제 천황에서 물러난 것이 되고, 그때부터 민달천황이 오사카를 통치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의 백제百濟 대정大井에 궁宮을 지었다.
이름자에 들어간 태주太珠, 태옥太玉을 보면 환丸의 의미이므로 한성漢城이라 불렀을 것으로 고려된다.
오사카 땅에 백제 한성이라는 지명을 최초로 붙인 것이다.
대정大井의 의미는 마을을 만들 때 먼저 하는 기초 공사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이고 정읍井邑을 우물 정井자로 만들기도 했다.
위덕대왕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민달천황이 백제 대왕이 되어서 백제 도읍을 오사카로 옮겨오려는
구상인지, 백제와 일본의 병합을 꿈꾼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전장 113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554년,
백제에는 위덕대왕이 즉위하고 568년 일본에 온 민달천황은 구주백제의 왕으로 있다가,
흠명천황이 571년에 죽으니 민달천황(535~585)으로 즉위한다.
민달천황은 불교를 믿지 않았고, 즉위후 15년에 역병이 돌자 불교를 탓하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역병이 더욱 창궐하여 그도 결국 역병으로 죽었다.
민달천황
대에도 큐슈에는 백제에서 새로 온 성명대왕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명천황, 다치바나도요히橘豊日다.
그도 흠명천황의 아들로 조작되었지만, 성명대왕의 아들이며 훗날의 백제 혜대왕惠大王이다.
그는 큐슈 다라국이 있던 아시카라朝倉에 와서 다치바나비리이하궁橘廣庭宮에 있었다. 구려의 광정궁이다.
성명대왕의 아들 용명천황이 구주백제왕이 되고 누이인 추고천황推古天皇(536~628)도 함께 일본에 건너
와서 민달천황의 황후가 된다.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견람원堅藍媛(512~558)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기다시岐多斯라고 읽었다.
중요한 사실은 추고천황 때에 견람원의 능을 새로 일본에 만들면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호칭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 온 백제왕 후비에 대한 호칭이다.
즉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백제 왕비였다는 것이다.
(주) 민달천황은 그 이름에서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출신으로 보인다.
광주의 옛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인데 무등산無等山이 광주에 있다.
민달敏達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무등산, 무진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된다. [
삼국사기]에서 무진주를 일명 노지奴只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민달은 일본에서 비다쓰라고 읽는다.
우리말 뜻으로 빛땅이 되는데, 무진주는 뒤에 빛산인 광산현光山縣으로 발전하여 빛고을 광주가 되었다.
법대왕이 백제에서 한왕漢王(=안한천황으로 고려된다.)의 딸인 대고왕大股王과 결혼하여,
지노왕知奴王(~618)을 낳았다. 무진주의 옛이름 노지奴只는 이 지노知奴를 뒤집은 것이다.
582년,
민달천황은 즉위한지 12년에 자신의 일본 왕권을 강화하려고, 구주백제에 있던 신하 일라日羅를
불러서 독립할 방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구주백제왕이었던 용명천황의 신하가 미리 알고서 일라를 죽여버렸다.
그 후에도 민달천황은 포기하지 않고 신라와 임나가야에 사자를 보냈다.
또한 백제에서 전해주는 불교와 달리, 전통적인 신사 신앙으로 일본을 결집하려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여승들의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가두어두었다.
물론 일본 열도에 천연두 전염병이 돌아서 백성들의 인심이 매우 흉흉한 상황이었다.
(주)
[일본서기]에서는 민달천황이 역병에 걸린지 5개월만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병이란 일단 노출되면 한달 후에 30%가 죽고, 70%는 완쾌되어서 곰보 자국을 남긴다.
즉, 민달천황의 사후에 4개월 가량은 그의 죽음을 고의로 숨겼던 것이다.
대신에 구주백제왕인 용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내어 임나, 즉 큐슈를 잘 지키라고 전한다.
민달천황의 부인인 추고천황은 백제에서 오는 자신의 형제들보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전위하고 싶어서
상을 감춘 것이다. 이때 추고천황의 아들인 죽전황자竹田皇子(562~596)가 23세였으므로 왕위를 이을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백제에서 볼 때는 죽전황자보다 성명대왕의 아들들이 우선이었다.
24장. 혜대왕 용명천황과 숭준천황 惠大王 用明天皇과 崇峻天皇
성명대왕의 아들인 혜왕자가 구주백제왕을 지낸 뒤에 용명천황이 되어 일본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용명천황이 역병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고 나서, 후임 구주백제왕인 아나호 왕자가 천황이 되지 못하고 암살 당한다. 대신에 일본에 오래 있던 흠명대왕의 아들 숭준왕자가 천황으로 즉위한다. 숭준천황은 구주백제왕을 억누르고 일본 독립을 꿈꾸어 전쟁을 벌이지만 패전하여 암살당하고 만다. 결국 성명대왕의 딸인 추고천황이 천황으로 즉위하고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일본 황태자가 된다. |
1.
혜대왕 용명천황 惠大王
用明天皇
[記] 橘豐日命 /[紀]橘豐日天皇
성명대왕의
왕자 혜대왕은 용명천황用明天皇(540~587)으로서
다치바나토요히橘豐日命라고
하였다.
그는 큐슈의 귤광정성橘廣庭城에서 대화로 건너간 것이다.
그의 모후는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의 딸인 황태부인皇太夫人 기다시堅藍媛였고, 민달천황의 황후
였던 추고천황의 동생이 된다.
그의 궁은 이케노베노나미츠키池辺双槻宮이였다.
혜대왕이
큐슈의 구주백제왕으로 부임했다가 민달천황의 죽음을 4개월만에 뒤늦게 듣고서,
큐슈에서 대화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에 아나호베왕자穴穗部皇子(543~587)가 같이 왔다.
아나호베황자를 황제황자皇弟皇子라고 했으니, 다음 즉위는 아나호베 왕자로 예정되었고,
그의 다른 이름인 스매이로네須賣伊呂杵(=聖明伊呂杵)는 성명천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이로伊呂는 마로麻呂의 반대말로 보인다. 마로麻呂는 대형이니, 이로伊呂는 막내일 것으로 보인다.
아나호베穴穗部는
큐슈 안라국을 의미하니,
아나호베황자가 용명천황이 되는 혜왕자의 뒤를 이은 구주백제의 새로운 왕이었다.
아나호베황자는 대화의 새로운 정복자로서 대화에 오자마자 민달천황의 황후인 추고천황을 강제로
범하려고 하였다.
추고천황에 대한 이러한 무례는 형사취수兄死取嫂하여 용명천황보다 앞서서 일본 천황이 되려는
기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추고천황은 그를 싫어하여 몸을 피해 빈소에 숨었고, 민달천황의 충신인 역군逆君이 막아섰다.
아나호베황자는 추고천황이 용명천황의 동부동모 친동생이므로 더이상 무례하지는 못하고,
대신 그를 훼방한 역군逆君을 무고하게 참소하고 직접 쫓아가서 쏘아죽였다.
용명천황은
즉위 이 년도 안되어서 천연두에 걸렸다.
용명천황은 죽어가면서 불교에 귀의하고저 하였다.
민달천황의 죽음이 4개월이나 숨겨진 것과 달리 아나호베 왕자는 미리 알고 달려와서 천황 즉위를
서둘렀고 불상을 가져다 주었다.
흠명천황 때부터 불교를 모시던 소아마자숙녜蘇我馬子宿禰는 불교 도입을 찬성했다.
그러나 민달천황의 유신들이 반대하였고, 그중에서도 물부수옥대련物部守屋大連이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수하인 승해련勝海連이 기습적으로 살해되었다.
물부수옥대련物部守屋大連은 재빨리 몸을 피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하였다.
바햐흐로 대화조정에 내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87년 4월에 용명천황은 황위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였다.
성명천황의 3째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의 전설이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전해오는데 바로 이 용명천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재 전해오는 그의 후예들이 본래 임나任那(큐슈九州)에서 야마구치현으로 건너와서 본래 다다라씨
多多羅氏를 사용하다가 대내씨大內氏로 바꾸었는데,
용명천황의 출신인 귤광정성이 본래 다라국지였던 것이다.
용명천황 다음으로는 황태제인 아나호베황자가 들어와 천황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불교를 반대했던 물부수옥대련은 아나호베황자의 즉위를 돕는 척하다가 암살을 시도하였는데 음모가
누설되었다.
이때 추고천황의 지시로 소아마자숙녜가 아나호베왕자를 주살하였다.
아나호베황자가 추고천황을 범하려고 했던 죄가 있고 추고천황의 경호였던 역군을 죽인 죄가 있었다.
그후
흠명천황의 아들인 숭준천황崇峻天皇이
스스로 천황이 되었다.
7월에 숭준천황을 중심으로 소아마자숙녜등은 물부수옥대련을 토벌하였다.
이때 토벌군 후미에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聖德太子(574~622)가 따라나섰다.
성덕태자가 어린 나이인 14살에 이마에 속발하고 물부수옥대련의 정벌군에 따라나섰다.
성덕태자는
[일본서기]에 용명천황의 둘째 왕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부왕의 상중인데 빈소도 지키지 않고 정벌을 나가는 것은 전혀 성덕태자와 맞지 않는 것이다.
즉, 용명천황은 죽지 않았고, 불교에 귀의하기 위하여 스스로 양위하고 아나호베황자를 일부러 불러들인
것이며, 용명천황의 아들 성덕태자는 반란을 평정하러 나선 것이다.
이 용명천황이 뒷날 백제대왕으로 복귀한 혜대왕惠大王(540~599)으로 추정된다.
2. 숭준천황 崇峻天皇
[記] 長谷部若雀天皇 / [紀] 泊瀨部天皇
숭준천황崇峻天皇(530~592),
하쓰베노천황泊瀨部天皇
혹은 하쓰베와카사자키長谷部若雀天皇는
구라하시노시바카키궁倉椅柴垣宮에서 다스렸다.
587년, 백제 위덕대왕이 보낸 용명천황이 물러나고 아나호베황자가 죽고서,
일본 안에서 흠명천황의 아들인 숭준천황이 즉위하였다.
숭준천황은 민달천황(538~585), 용명천황(540~599)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용명천황의 막내동생이라는 [고사기] [일본서기] 기록은 모두 허위다.
그가 일본에 최초라는 법흥사法興寺라는 절을 세웠는데, 이는 법사군法師君이자 가의천황袈衣天皇이었던
흠명천황欽明天皇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니 그는 흠명천황의 아들로 추정되는 것이다.
[고사기/ 흠명천황기]에서 누카고노이라쓰메糠小郎女가 낳은 삼남매로서 가스가노야마다노이사쓰메
春日山田郎女와 마려고왕麻呂古王,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이 있다.
[일본서기/흠명천황기]에서는 이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의 기록이 아예 누락되어 있다.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은 소하씨宗賀(=蘇我)에게 장가간 왕으로서,
흠명대왕의 아들인 숭준천황으로 추정된다.
[숭준천황기] 말미에 숭준천황의 부인으로 소아빈하상랑蘇我賓河上郞이 존재한다.
그가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宗賀-蘇我)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한다.
창기倉椅에 궁을 짓고 살았다는 사실도 소가의 창왕倉王(宗賀之倉王)에 어울리는 방증이 된다.
숭준崇峻의 숭崇도 소가宗賀에서 따온 것이 된다.
백제
위덕대왕은 이때 법대왕(~600)을
구주백제왕으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무대왕의 모후,
즉 법대왕의 왕비가 일본 큐슈에 살다가 643년에 서거한 오오타마히메왕大俣姬王(562~643)이기 때문이다.
숭준천황 때에 다시 백제에서 들어온 불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숭준천황은 백제에 반기를 들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독주하는 가문인 소아씨 세력을 등에 업고서 대화를 충분히 장악하여 백제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590년,
숭준 4년에 그는 신라를 치고 임나를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신라 공격은 허위 사실이고 실제는 그 중간의 임나,
그 중에서도 큐슈 임나에 있는 이는 구주백제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2만 병사를 출병시켜서 큐슈 북부 축자국筑紫國에 정벌군을 보냈다.
그러나 구주백제왕 법대왕은 이들을 물리치고 일본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숭준천황의 구주백제에 대한 도전은 실패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을 다스린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었다.
패전하고서 일년후 숭준천황은 궁중에 진상된 산돼지山猪의 목을 자를 때에,
언젠가 생각하는 사람의 목을 치겠다고 하였다.
그의 배후였던 소아마자숙녜는 숭준천황의 본심을 의심하고 숭준천황을 암살했다.
4년이 흘렀고 패전을 겪으면서 서로의 인심이 틀어진 것이다.
소아마자숙녜는
아나호베 왕자와 숭준천황을 암살했지만 구주백제왕인 법대왕의 지시였는지 처벌받지
않았다.
백제 위덕대왕은 대화에 성명대왕의 딸인 추고천황을 세우고,
용명천황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일본의 상궁上宮에 거주하며 일본 황태자가 되어서 실제적으로 성덕태자가
대화를 지배하도록 하였다.
대신 구주백제왕은 법대왕에서 위덕대왕의 적자인 아좌태자阿佐太子로 교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