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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 (2009년 6월 23일) 몽골에는 늑대가 살지 않는다 : 전성태 소설집 <<늑대>>에 대하여
소조小鳥 추천 0 조회 1,365 09.06.22 21:45 댓글 3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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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6.23 02:41

    첫댓글 ‘두 번째 왈츠'에 대한 소조님의 감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전성태 씨 본인도 그 작품을 그닥 미더워하지도, 좋다고 여기지도 않더군요. 저 역시 이번 전성태의 작품집이 전작들에 비해 그닥 마뜩하게 다가오지는 않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목란식당' 과 '코리언 솔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읽다 나름의 묘미를 얻기는 했지만, '늑대'는 아직도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물론 당해년도에 나왔던 단편 중에서 자본과 국가에 대한 사유가 매우 진지했던 작품인 것은 맞지만, 그러한 고민이 아직 표층을 겉돌 뿐 어떤 심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아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발화가 때로는 어색하거나, 디테일이

  • 09.06.23 02:49

    다소 떨어지는 것도 험이라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늑대'라는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 자본=욕망이라는 도식이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는 그닥 새로울 것이 없는 등식이거든요. 전성태 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몽골의 환상적· 원초적 배경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물론 이도 필요하겠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머물고 있던 공간(이는 작게 한정하면 농촌일 수도, 넓게 말하면 한국문단일 수도)에 대한 적확하고 세밀한 응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실제로 저는 이 작품집에서 '늑대'가 아니라 '누구 내 구두 못 봤소'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사회의식이 팽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극과 희극이 상존하는

  • 09.06.23 02:39

    사람들의 인생을 담아내려고 하는 작가의 흔적이 엿보였거든요. '매향' 이후로 '소를 줍다'와 '환희'(개인적으로는 이 두 작품들은 소품이라 생각합니다만)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전성태 씨는 사실상 농촌에 관한 소설을 예전처럼 꾸준히 집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삶과 모순에 대해 여전히 그가 써야할 몫이 산재해 있고,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월경의 상상력을 꼭 몽골에만 국한시켜 전개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두서없이 지껄이기는 했지만 제가 부탁하고 싶은 말은, 굳이 몽골이 아닌 전성태 씨 본인이 가장 곡진하게 알고 있는 공간 속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해 보다 밀도 깊은 고찰을 내놓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09.06.23 09:42

    저 역시 전성태에 대한 기대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서내길 바랄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전성태에게 필요한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입니다. 즉 우선은 작품을 많이 써봐야 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의 확립은 이 과정없이는 불가능하니가요. 등단 15년차가 겨우 소설집 4권이면(!) 아무래도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도대체 뭘 했고, 또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정말이지 이거 아니면 안 되다고 생각하고 소설에 올인해야 합니다.

  • 09.06.23 07:24

    어느 한 작가가 한 배경과 의식 속에서 주로 집필했다고 해서..늘 그것에만 전문성을 띠거나 책임을 느껴야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비평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작가는 세월을 두고 연마하고 지평을 넓히거나 바꿔나가는 것이고..가진 미학적 눈 역시 얕거나 깊어질 테죠. 그러한 시도가 없다면 지겨워서 못 볼 겁니다. 저는 제가 3년간 읽은 한국 소설들 중에서..전성태의 '길'이나..매향, 소를 줍다, 환희는 불멸의 명작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론가들은 불감할, 어떤 정서의 파동, 그것이 작품의 장점이자 핵심입니다. 영화관 간판 앞에서 뭍는 아이의 질문에 환희에 대해 답하는 남자의

  • 09.06.23 07:17

    장면만 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이후 기념으로 발간한 일본인 이발사? 국경.. 은 그렇게 좋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개연성이나 디테일, 플롯과 필연이 허물어져 보였습니다. 그때 평론가들은 그에게.. 다작하는 작가다, 라는 말을 붙였지요. 이번 전성태의 늑대는.. 읽고난 후에..이게 무슨 얘기인가도 싶게 혼란스러웠지만..적어도 소설을 아는 독자라면..다중시점으로 인해..피가 낭자하듯 각 인물들의 정서와 갈망이 드러났다는 것은, 마치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때처럼 미아가 된 듯한 세상에 대한 낯선 기분, 타자로만 이해되는 인식의 발휘, 그것이 준 쾌감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전성태의 소설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09.06.23 07:25

    랍스터..,방현석이나 뱀장어 스튜의 권지예 같은 짜임새 있는 알리바이의 미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변태의 과정의 미완으로 풋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늑대가 주는 여운, 오래 생각하게 하는 질문, 문명의 이기에 대해 반대로 돌아서서 초원에 서 보는 그의 시도에.. 몇몇 등장인물의 작위적 대사만을 꼬집어 몽골은 전혀 없었다,고 몰아부치는 것은, 그가 저 같은 독자에게 준 영양가 때문에.. 설 자리가 약해지는 것 입니다.

  • 작성자 09.06.23 09:48

    글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전성태는 몇 편의 가작을 쓰긴 했습니다. 제 바람은 그와 같은 가작이 많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영 아닌 작품이 지금은 다수입니다. 그리고 <늑대>의 다중시점과 포크너의 <내가 죽어 - >는 장르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만약 <늑대>가 장편으로 씌어졌다면, 다중시점도 충분히 긍정적인 기능을 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전성태는 변해야 합니다!!! 평단의 호의적인 평가에 우쭐해서 춤을 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몰아부침은 전성태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그의 설 자리를 단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 09.06.23 22:41

    저도 뮈파님의 말씀에 거의 공감합니다. 작품을 뜯어서 보면 부족한 부분이나 지나치게 넘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작가가 단편 안에 자본주의 문제를 쓸어담기는 어려울 거라 봅니다. 자본주의 뿐만아니라 그 어떤 시스템의 문제라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독자에게 문제를 던져주고 머릿속 촉수를 건드려 준다면 나름 성공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전 개인적으로 지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중에서 전성태와 김숨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름 자신만의 길을 핍진하게 걸어가고 있다는 걸 발표하는 작품들을 통해 느끼고 있습니다.(물론, 모든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 09.06.23 22:46

    <<국경...>>에서도 절반은 괜찮았고 또 절반은 좀 수필 같고 엉성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숲>이라는 뛰어난 단편 하나 때문에 저는 전성태를 다시 보게 되었고, 앞으로 기대해도 좋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작품집의 작품들은 아직 다 보지 못했지만 발표했을 당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좋게 읽었던 터라,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려왔지요.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과 한 달 쯤 후에 토론을 해 보자고 해서요. 해서 소조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의 의견을 주의깊게 경청할까 합니다.

  • 작성자 09.06.24 09:56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문제는 전성태가 독자들의 머릿속 촉수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편 한편 때문에 책 한 권이 구원받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저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별로 생각합니다. 모일간지의 기사를 보니, 그는 이 작품이 북한인민의 인권문제로 접근하는 데에서 불편함을 느끼더군요. 좀더 보편적인 모성애나 인간애 뭐 이런 쪽으로 봐주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게 되면, 이 작품이 가진 역사성은 제거되고 작품 자체도 더욱 어설프게 되고 맙니다. 소위 양식있는(좌파적) 작가라면 북한인권문제는 모른 채 해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존재하는데

  • 작성자 09.06.24 09:59

    왜냐하면 그것은 우파에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바로 그런 것을 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좌우를 왔다갔다할 자유란 이럴 때 사용해야지요. 만약 그랬다면, 좀더 흥미진진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집에 실린 상태로는 탈북자들을 다룬 여느 다큐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밀립니다.

  • 09.06.24 11:46

    창비 여름호에 실린 '로동신문'을 읽었어요. 인물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살고자 하는 메카니즘을 쉬이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만 독자가 찾아서 읽을 수는 있도록 명시해두더라고요, 모호해지게 흐리지 않고―겉멋 부리지 않고 주관을 밝혀둔 것이고요. 그것을 명시해두지 않았더라면, 지적하신 대로, 시점들을 다각도로 흩을 뻔 하더라고요. 그것이 반전을 일으키는데, 반전으로는 약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했지만, 멜로화 하지 않게 하려는 표현 의지로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런 점으로 인해, 작가가 인간성을 탐구하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 외로는 다 소재로 처분한 것 같았습니다.

  • 작성자 09.06.24 11:43

    아! 이번에 실린 것은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 말씀대로라면 이번 소설집과 비슷한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그냥저냥" 하는 정도? 전 솔직히 단편은 스트레이트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완독 후 앞으로 돌아가 작가가 몰래 흘려놓은 흔적들을 되새기게 만드는 단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김연수 단편소설에도 이런 류의 작품이 몇 있고, 대체로 그런 작품들이 평단의 환영을 받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런 평가지평에 대한 고려가 담긴 작품들에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습니다.

  • 09.06.24 13:46

    예. 그렇습니다만, 이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창비를 처음 읽었는데요. 사실 내심 깜짝 놀랐어요. 잡지가 무슨 정부의 '문화정책연구서'도 아닐 것이고, '대학의 담론생산지침(?) 연구서'도 아닐 것이고, 이것이 사사로운 기업의 일반독자를 겨냥한 잡지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아주 특수한 한국적 상황인 것 같았어요. 창비의 이런 특수한 역할이 일반독자에게 통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했고요. 과거 독재 일변도의 군사정권들에서 국가가 해줘야 할 사업을 하지 않아서 사기업이 국민의 권유를 들어 그 지원으로 가능했던 사업이 아직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데 놀라게 되더라고요. 창비의 잡지가 이러면 과거와 달리

  • 09.06.24 12:43

    자유로워진 출판사정 상 타 출판사도 창비 같은 잡지를 따라서 문예적 색깔만 달리해 경쟁적으로 독자에게 이런 역할을 '선전'해 출판사의 명색을 유지하려 들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독자가 읽을거리를 고르는데 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판이더라고요. 이런 판에서 국지언어인 한글로 글을 창작하는 작가들은 이들 비평가독자를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작품을 내서 스스로 일반독자군을 거느릴 때까지 작가들은 이들 비평가독자가 읽는 작품을 안 쓸 수 없을 거예요. 왜냐면 이십 대 초반부터 작가로 이 판에 이골이 난 작가가 유명해진다한들 이 시스템에 뻐대기할 수 있을까싶은 거지요. 작가에게 비평가는

  • 09.06.24 12:56

    요긴한 독자군의 하나일 텐데, 사기업이 내는 문예잡지가 국가가 해야 할 사업을 이 정도로 대신하고 있다면 이들 비평가독자군은 제 위치를 지키기기 급급해지겠다 생각돼요. 작가에게 이들 비평가는 독자가 아니라 두려워 해야 할 존재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호 문학평론에 실린 한기욱의 글을 읽어 보니까, 이론의 빼어남을 떠나서 백낙청의 말을 비평가 본연의 반성 없이 '받아쓰기' 했으면서 그것을 비판 받았다고 해서 자기 말 지키기에 공분을 뿜는 수준이었어요. 물론 비판 내용의 수준을 떠나서 하는 말입니다. 그의 반론 행위 자체가 비평가의 도덕적 감수성을 무너트리고 있었어요.

  • 09.06.24 13:12

    이런 수준이 창비잡지의 머릿기사로 오르더라는 말이어요. 비평가가 말을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그는 무슨 말인들 못할까요. 집단이기가 개입하게 되면 말입니다. 잡지를 돈 내고 사서 읽는 일반독자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네 속사정을 자신들이 더 잘 알 것인데, 그걸 알면서도 쓸 데 없이 할인이네 해서 일반독자에게 '생색'이나 낼 궁리 할 게 아니라요. 그런 게 속 검은 꼼수라. 무슨 문예잡지가 그리 파당정치적인지. 못 된 것만 골라 배워갖고. 작가나 비평가가 정부나 국립대학 연구소에서 나오는 간행물에서 국내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 돌아가는 학문적 사정을 읽고 작업의 방향을 모색한 글을 문예적으로 써서 일반독자의

  • 09.06.24 14:00

    책 읽는 재미를 시스템화 해야 건강한 것 아닌가 생각되고요. 국가공무원 엘리트층이나 문학전문가들이 골머리를 앓아 제시해야 될 그들이 꼭 읽고 생각해보고 해야 할 어려움을 왜 일반독자가 부담해야 되는지. 국가공무원 엘리트층이나 학계의 엘리트층이 해야 할 일을 왜 일반독자에게 고통분담시키는지, 일반독자도 반성을 해야겠어요, 꼼수가 통하니까 낯 두껍게 궁리도 하지 않겠는가 말이죠. 그런 일반독자는 한 켠에선 비아냥 대면서 어쩔 수 없다는 수용이 혹 자신의 속물근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작가들이야 글 잘 쓰는데 밑 보일까 봐서 말도 못하고 답답해 하는 축도 있지 않을까싶어요. 사기업 문예잡지란 독자가 책 '재밋게'

  • 09.06.24 14:25

    읽을 수 있도록 요량을 일러주는 서비스 사업 아닐까. 그래서 돈도 벌면 작가들 초대해 일반독자와 함께 파티나 하게 해주지. 웬 선무당 (파당)정치질. 이게 세계에서 열한 번째로 잘 사는 수준인가싶어요. 전성태의 최근 단편 작품 '로동신문'을 읽고 꼬리말을 달았는데, 그에 대한 소조님의 답글을 읽고, 지적하신 그의 '평가지평에 대한 고려가 담긴 작품'이란 말씀을 읽은 소감을 정리해봅니다. 매체에 실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매체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과, 특히나 창비와 같은 '특수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잡지가 그 매체일 때는 더욱 도리 없겠다싶습니다. 일반독자만을 의식해 뻐대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 09.06.24 14:58

    미국작가 존 치버의 파리리뷰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요. 그는 뉴요커에 단편을 실어 큰 작가잖아요. 뉴요커가 미국서는 작가들에게 한 '역할'하는 대중잡지예요. 그래서 작품의 문예성을 즉 독자에게 글 읽는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룰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요커 픽션 편집진이 기고만장하답니다. 편집진이 원고를 마구 뜯어 고친다죠. 특히 결말부 원고는 '뉴요커(식)'을 그런 식으로 꿰어 맞추려는 경향이 많다네요. 문예에 집중하는데도 그렇답니다. 작가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요. 그래도 작가는 그런 걸 미리 알아 신경을 써 써줘도 그랬으니 말이에요. 치버가 참다참다 열불이 터져서 뉴요커사사에 '전설'로

  • 09.06.24 15:00

    남을 정도의 과격한 '행패'를 부렸답니다. 뉴요커 픽션 담당 편집장에게요. 그것도 (불쌍하게도) 나이가 다 들어서야, 이미 뉴요커 라는 '발판'이 필요 없는 소설가로 대성공을 거둔 후에야 이판사판 한 판이 가능했다는 말이어요. 그때까지 이 대가가, 자기가 나름대로 공을 쳐들여 쓴 작품이 뉴요커단편으로 변하는 걸 어떻게 참아야 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아요. 성에 차질 않을 테니 사사건건 이러쿵저러쿵 말도 못해 보고. 끔찍하더라고요. 존 치버, 알콜중독 경력 화려하잖아요.

  • 작성자 09.06.24 18:13

    폭포수처럼 쏟아내시는 바람에 읽느라 잠깐 아찔했습니다. ^^ 창비라는 잡지는 문예란과 정론란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잡지입니다. 저는 창비의 해체를 주장했는데, 그보다는 문예지와 정론지로의 분리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과 같은 어정쩡함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을 뭐라고 덧붙이든 그다지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 09.06.25 00:15

    "남자는 모두 늑대다"란 시쳇말이 언제부터 통용되었는지 모르지만, `늑대`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한 지는 얼마되지않은 듯합니다. 문득, 안치환이 부르는 `늑대`란 노래가 듣고싶군요. ^^

  • 작성자 09.06.25 09:28

    남자는 모두 늑대라는 말이 사실이긴 한데, 여우에게는 꼼짝 못하죠. ^^ 아, 안치환에게 그런 노래가 있었군요.

  • 09.06.25 01:20

    정말 동감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이응준씨의 <국가의 사생활>과 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잘 모르지만, 글속에서 녹여나는 작가의 목소리 대신, 작가가 직접 설명해주는 듯한 느낌,,,,물론 이응준씨의 소설을 좀 덜 했지만 늑대를 읽고선 좀 실망을 했습니다.

  • 작성자 09.06.25 09:33

    저는 이응준의 소설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최근 소설경향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북한과 연결점을 찾는 소설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난민, 국경, 국가와 같은 문제들과 이어지구요. 그런데 아직 소재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뭔가 돌파하려는 의지는 없고 나도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의 내면이 자꾸 앞에 나서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 09.07.15 18:10

    '몽골의 대초원에서 발견한 삶, 전성태 '늑대' 2009.6.17 방송, KTV 북카페 프로그램에서 전성태 작가가 출연하여 여러 말씀들을 하셨네요. 한번 시청을 권합니다. 주소창에 복사 붙이기 http://www.ktv.go.kr/program_home.do?method=detail&cid=305187&map_idx=&pcode=100995

  • 09.09.24 11:51

    '제목부터 상투적이고', '그 내용 또한 진부한 분석으로 가득 차 있는데다' 비평적 의식 없이 '극찬으로만 이루어진' 해설을 쓴 이선우입니다. 제 해설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는 분이 없어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시원하게 긁어주셨네요. 제목부터 상투적인 것은 저 역시 알고 있었고, 진부한 분석은 아닐까 하는 걱정 또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제 능력이 겨우 거기까지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첫 해설이라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요. 하지만, 짐작하셨다시피 속마음과 달리 어쩔 수 없이 극찬을, 그것이 정말 '극찬'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늘어놓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문창과 수업을 받았던 적도 있고, 소설 습작 경험도 있는지라

  • 09.09.24 10:44

    '제대로 씹어주는' 것이 작가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그닥 좋은 작용을 하지는 않습니다. 소조님의 글을 읽어보면, 저야말로 주례사 비평을 한 사람이 되는 셈이지만, 작가들이 더 좋은 작품들을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격려와 칭찬이 근거가 없을 때가 될 텐데, 제 글이 그런 글이라면 앞으로 더 갈고 닦아 그건 제가 극복해야 할 문제고요. 제 한계는 제가 잘 알고 있어서 제 해설에 대해 비판(?)하신 것에 기분이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이렇게 답글을 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 사진까지 저렇게 떡 올려주셔서 좀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 09.09.24 11:30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지적해주셨다면 저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소조님께서는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도, 더구나 기억이 정확하지도 않아도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에 다 옮기시니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주의가 좀 필요하겠군요. '해설'이라는 한계 때문에, 더구나 창비는 40매 안에 그것을 다 쓰라고 하여 필력이 딸리는 저로서는 제대로 지적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은 소조님께서 정확히 지적해주신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09.09.24 23:50

    물론 반박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여기에 다 쓸 수는 없는 일이고,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든지, 정식으로 글을 좀 쓰든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탁도 없이 이렇게 긴 글을 쓰시는 걸 보면, 전성태 소설가에 대한 애정이 꽤 크셨던 것 같고 여전히 기대도 저버리지 않고 계신 듯한데, 선생님께서 다시 좀더 본격적인 비평문을 쓰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함께 하고 있는 <작가와비평>에서도 2009년 하반기호에서 전성태를 조명합니다. 제가 전성태 소설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글을 보기 전에 진행했지만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부분들에 대한 답변이라고 해도 좋을 내용들도 꽤 들어가 있습니다.

  • 09.09.24 12:34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09.09.25 02:00

    먼저 보는 사람에 따라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제 글에 대해 큰 틀에서 이해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꾸벅. 한국문학판이 의외로 이런 비판을 <개인적 감정>의 표출로 착각하는 이를 많이 봤기 때문에, 조금 감동했습니다. 다소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저 역시 칭찬과 격려가 작가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주례사비평으로 오해받는 글도 씌어지는 것도 이해하구요. 그러나 한두 사람 정도는 나쁜 역할을 맡아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모든 비평가가 비판만 한다면, 도리어 제가 칭찬과 격려를 하는 편에 섰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작성자 09.09.25 02:01

    그리고 제가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부 글감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성태의 경우, 한번 만나 본 적이 있기 때문에(실제 저는 만나본 작가가 거의 없습니다) 친근감을 표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어느 정도 구분 가능하니까요. 아, 그리고 말씀하신 <작가와 비평> 하반기는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09.09.25 14:42

    <작가와비평> 나오면 보내드릴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메일 주소 좀 알려주십시오.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 제 메일 주소는 damdam328@naver.com입니다.

  • 작성자 09.09.26 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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