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적 思惟와 그리스적 思惟의 比較
문제의 배경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문화 및 사상이 그리스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의 역사적 복합산물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스적이고 무엇이 히브리적인가의 정확한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 사유와 히브리 사유가 하나의 복합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특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공통점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이성을 찾는 문제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히브리적 사유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 옮겨지면서 그리스적 사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 리적 사유는 매우 다르다. 둘 사이의 관계성의 논의는 하르낙의 연구 발표 이후 중심적 문제로 등장했다. 하르낙은 기독교 형성에 있어서 그리스 사상의 영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음서는 헬라화 되었으며 복음서의 배경에서 생긴 교리는 그리스 정신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유한 관계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어 왔는데 니그렌, 오르딩, 폰 돕슈츠, 페더슨, 브룰, 그뢴베히, 스넬, 훔볼트, 뮬러, 캇시러, 우르반, 그라슬러, 카르납, 헤르메스 등이 있다. 그 논의 중에서 가장 잘 정의한 것이 퀵(Canon Oliver Quick)이라고 저자는 주장하는데 퀵은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르 완결된 총체적인 통일성으로 파악하고 이 두 형태의 차이는 단순히 외형적인 것이므로 둘다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를라이프 보만은 루트베르크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플라톤 사상과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는 대립이 아닌 통일성과 공동작업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이며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 이라는 반대의 개념에서 논해왔다. 그러나 보만은 이러한 분리와 대립은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분석에 있어서 올바르지 못한 단편적 사유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차이는 표면적이고 단순한 외형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문제의 형식적인 면과 실질적인 면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보만은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일면적 분석을 지양하며 형식적 차이의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보며, 이렇게 할 때에 기독교의 내용이 사유형식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가,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의 연구는 구약성서의 사상세계(히브리인)와 플라톤의 사상세계(그리스인)의 비교에 한정한다.
제 I 부
동적 사유와 정적 사유
I. 동적존재
1. 히브리어 정지 동사의 동적 성격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적 사유는 동적이고 정열적이며 힘찬 것을 지적하고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이며 평온한 것, 조화적인 것을 지적함으로써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러나 정적-동적이란 개념은 우리의 사유 속에 깊이 박혀 있으나 그것은 기계적, 물리적 개념의 표현일 뿐 정신적 성질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는 않다.
히브리인들의 동적 사유 방식은 그들의 동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사들의 기본 의미는 언제나 움직임 또는 작용을 나타낸다. 또한 동사들 안에는 동작과 정지가 함께 존재한다.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 동작과 정지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다. 동작은 정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정지는 동작의 결과로 이해되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 유사한 것으로 일치를 이룬다.
히브리어 동사들의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부동의 고정된 존재가 히브리인들에게는 無일 뿐이며, 이러한 존재는 히브리인에게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활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만이 실재이다. 이들에게는 동작만이 실재성을 가진다. 따라서 정적인 존재는 정지에로 넘어간 동작이며 정지는 부동, 불변을 의미한다.
2. 히브리어 상태동사 및 성품동사들의 동적 성격
상태 및 성품동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동사이다. 이러한 동사들은 히브리어에서 우선 해당 상태와 성품들로 됨(werden)을 나타내며 또한 제3의 동적인 것 즉 작용함(wirken)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leuchten"은 “밝다” “밝게 되다”의 뜻일 뿐 아니라 “밝게 작용한다(=빛을 발산시키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사실 우리는 정적인 동사들조차 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동사들이 어떤 상태를 나타낼지라도 그 상태는 활동적이다. 그들이 정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단지 상태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고정되어 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상태는 존재이며 동시에 생성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에서 정적인 동사는 존재나 생성을 나타내지 않고 내부로부터 나오는 주체의 행동성을 서술한다. 예를 들어 “침묵함”은 하나의 의식적, 의지적인 행동이다. 침묵함은 말없음이 하나의 의지의 표현으로 내적 행동성이다. 상응하는 상태나 성품의 행동성과 존재(생성)는 서로 상반되는 것 이며 서로 다른 심리적 영역에 속한다. 히브리인들은 매우 많은 정적동사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무수히 많은 정적 동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적 정신이 동적인 것, 행동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증거이다.
3. 논리적 문제
명사문장은 주어나 술어가 명사 혹은 그에 상당하는 말을 취하는 모든 문장으로 고정적, 상태적인 것, 존재를 묘사하며 동사문장은 술어가 정동사로 되어있는 것으로 가동적, 유동적인 것, 발생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서술한다. 히브리어는 명사문장을 사용하여 논리적 의미의 정적인 것 또는 존재하는 것을 더 잘 표현한다. 명사문장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술어가 명사로 되어있는 경우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 표현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사물은 그것의 양, 그것의 재료, 그것의 동일성이다.
-우리는 사물의 형태와 재료를 둘로 나누며 형태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히브리인들 에게 있어서는 재료가 곧 사물이다.
2) 술어가 부사 혹은 명사적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어떤 (전치사와 함께 쓰인) 시간, 장소, 성질, 소유자 등에 대한 상세한 규정으로 되어있는 경우
-이 때의 명사문장은 실제적 존재, 어떤 장소에 있음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있음(Sein)”이 아니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명사문장이 고정적이며 상태적인 어떤 존재를 나타낸다는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명사문장은 단지 부가적 예속성을 표현하며 존재의 의미는 일반적 의미와 다르다.
4. Haya 동사의 존재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존재”란 말이 나타내는 기본 사실을 연구한다.
A. Haya 동사
sein 동사는 a.존재,실존 b.계사로서 사용된다. 그러나 sein 동사와는 달리 Haya 동사는 완전한 동사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실제적 동사이다.
a) 정동사 앞에 절대 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동사적 개념을 강화하는 특성
b) 동사의 수동형이 있다.
c) 동사적 내용이 분명한 동사들과 함께 쓰인다.
랏쵸는 haya에서 생성, 존재, 작용의 3가지 주요 의미를 발견했으며, 이것들은 내적인 연관성을 갖고 통일체를 이룬다.
B. 생성과 작용의 의미를 가진다.
a) haya는 실제적 생성, 즉 성립, 실제적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창12:10;30:29)
b) 내면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되는 것(호 7:8)
c) 그의 직업을 통해 어떤 새로운 것이 됨(창 4:2)
d) 작용(왕하 2:21)
C. 전치사와 함께 쓰인 Haya
a) Haya le
-‘무엇으로 되다.’ ‘무엇으로 작용하다.’
-자연과 역사에서 ‘...로 되다.’(겔 17:6,8,23;창32:10)
-내면적인 현실의 증거로서 ‘...로 되다.’(수 7:5)
-‘...로 되다.’= ‘...로 소용되다.’(창 11:3)
-‘...로 되다.’= ‘...로서 작용(행동)하다.’(삼하 13:28;왕상 2:2)
b) Haya Ke
-‘...같이 되다.’(삼상 8:20)
-실현되다. 말로 시사된 잠재력이 현실화 됨(삼하 13:35)
-‘...같이 행동하다.’(출 22:25)
-내적 현실성(민 27:17;사 1:18)
-‘...으로 간주되다.’(출 12:48)
-‘...으로 보이다.’(창 19:14)
c) Haya al
-‘...위에 있다.’
-‘...에 작용한다.’ 어떤 지배함을 언급하는 경우(창 41:40;삼상 8:19)
d) Haya be
-‘...안에 있다.’ 장소적 현존함 - 주어가 대체로 사람이기 때문에 체재하다, 작용하다, 살다 등으로 번역된다.
결론적으로 전치사들이 haya 동사의 본래적 의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D. Haya의 표면상의 정적인 사용
a) 존재
haya가 “있다”의 의미를 가진다는 랏쵸의 분석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동적인 의미가 포함되며 내적 활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b)시간의 계시
haya는 시간영역의 표시를 위해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haya는 동적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계사가 아니다.
c) 문장론적인 사용 : 아름답다
haya가 계보적으로 인물을 열거할 때, 그 앞에 사용되는 경우는 내용과 거의 무의미하며 문체적으로 사용된 것이다(창 9:18P;25:3J). “아름답다”는 문장은 haya와 함께 구성될 수 있다(창 29:17;39:6b;비교 삼하 14:27). 이것은 전체적인 인물됨이 성품과 행동에 있어서 품위있게 거동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d) 분사를 동반한 haya
분사와 함께 지속적인 혹은 종종 반복되는 행동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
e) 선행문에서 haya
귀결문에 있는 다른 동사를 강화하기 위해서 haya를 선행문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후속 동사가 부정법으로 사용될 때에도 동일한 기능을 갖는다. haya는 이런 경우에 후속동사를 준비 하고 또 그것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동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주로 어떤 미래적인 사건의 출현을 포함하거나 혹은 그것을 강조하며 또는 사건의 줄거리를 놀라운,돌연한,기이한 것으로 제시하는 복합문을 유도한다. haya의 동적 성격은 어디에서나 분명하다.
f) 존재의 형식적 성격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haya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존재는 어떤 객관적인 것, 정지 상태에 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주관적인 것, 유동적인 것은 아니다. 존재는 독립해 있는 확고한 어떤 객관적인 것이며 동시에 사물들과 사물들의 총체적인 개념으로서 어떤 살아있는 것, 행동적인 것, 활동적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존재, 가령 정적인 동사들에 포함되어있는 존재는 내적 행동성을 서술하는 것이다.
E. 신의 존재
신의 haya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것이 백성의 haya와 직결되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신의 haya는 신으로서 등장하고 행동하며 신으로서 자신을 관철함을 뜻한다. 신의 haya는 애굽에서의 탈출에서 나타난 숭고한 행위에서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때 분명하게 나타났을 뿐이고 그는 계속 은혜와 실증과 노력의 행위에서 이스라엘의 신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백성의 haya는 에집트에서의 구출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야웨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에서도 나타난다. 야웨의 은혜로운 행동에 상응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실천적인, 순존적인 응답행위이다.
족장사화와 그 후에는 민족의 역사에서 신의 놀라운 섭리와 도움이 그의 haya에 의해 표현 된다. 신의 말이 haya이다(‘...에게 임했다.’로 번역한다.). 야웨의 손은 haya와 결부되며 그의 손은 강한 능력을 표현한다. 야웨의 손의 haya는 야웨의 강력한 능력의 도래를 뜻한다. 신의 영의 haya도 그의 활동이다. 영이 해당 인물 위에 또는 그 안에 돌발적으로 능력을 나타내고 활동한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haya는 실존을 표시한다. haya가 사용될 수 있는 것만이 실제적이다. 실존은 작용함과 동일하다. 그것은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적이다. 그것은 신의 실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haya는 야웨에게 귀속되며 이것은 동적인, 활동력있는 작용을 일으키는 인격적인 실존이다. 현존하는 즉 영원히 작용하는 야웨는 창조자이다.
II. 정 적 존 재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파악은 언어 분석만을 통해서는 할 수가 없다. 엘레아 학파적 유형, 헤라클레이토스적 유형, 플라톤적 유형을 살핌으로써 존재의 문제를 기술하려 한다.
1. 엘레아 학파는 존재를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
-운동과 변화의 현실성을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유일자로 본다.
-부동의 불변의 존재자만이 실존한다.
-모든 생성과 소멸은 단순한 가상-비존재자이며 그것에 관해 어떤 긍정적인 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의 감각이 느끼는 인상은 허위이다.
2.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에 대한 의의의 옹호자이다.
-모든 사물의 가변성에 대한 인상으로 철저히 지배받고 있다: “만물은 유전한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 인간은 동일한 냇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의 유전 속에 영원한 법칙과 모든 대립을 조정하고 조화를 찾고 있다.
변화와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비그리스적이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양식을 다분히 비그리스적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근동적 영향에 의해서 사유하며 그리스 철학에 자극과 영향을 끼쳤지만 그를 전형적인 그리스적 사상가로는 볼 수 없다.
3. 플라톤의 사유의 대상은 주어져 있는 것, 현존하는 것, 또 그런 것을 내용으로 가진 세계이다. 플라톤의 사유의 목표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찾는 데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는 두 단계로 나타낼 수 있는데, 첫째는 직접 주어지는 것, 즉 감성 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감성적인 것, 가시적인 것, 인간, 동물들, 식물들, 사물들이며 이들은 감각적인 사물들로서 어떤 실제적인 존재를 갖는다. 가시적인 사물들과 그의 영상들이 합쳐서 생성의 영역을 형성하는데, 이 영역의 특성은 생성과 소멸이며 여기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변화 무쌍하여 영원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다음으로 정신적, 예지적 세계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실재성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는 변화, 생성, 소멸되는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참 존재 본질의 영역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두 단계로 형성되는데, 하위층을 형성하는 것은 수학적인 실재성, 기하학적 원형, 내적 법칙을 가진 수들이며 최고층에는 이념들,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우리가 정신 그리고 정신계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하고 신빙성있는 물질계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시적인 세계가 아주 확실하고 신빙성이 있는 실재적이고 영원한 정신계의 부속물이다. 실재성을 부여하는 원리는 선의 이념 곧 신이다. 신 또는 선의 이념은 모든 참 존재자의 원천이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선에 의해 인식될 뿐 아니라 그 존재와 본질 까지도 선으로부터 얻는다. 선은 존재가 아니라 품격과 능력에 있어서 존재를 훨씬 능가한다.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모든 존재가 신의 존재에 그 원천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정적이고 조화적이며 보다 높은 존재는 변화가 없고 불멸의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는 선 즉 신의 존재이다.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최고의 존재는 충만한 힘이고, 히브리적 이해에 따르면 신의 엄청난 능력은 영원하고 실제적이며 그것으로써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적-동적 대립이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실제적 차이를 적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차이는 오히려 정지와 운동 사이의 대립에 있다.
III. 비 존 재
1. 그리스적 사유에서
비존재자는 존재자의 부정일 뿐 아니라 실재성을 갖지 않거나 가질 수 없는 표상들도 모두 포괄한다. 비존재자는 허상, 망상, 기만, 오류의 영역이다. 비존재자는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존, 즉 비존재의 실존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비존재라는 사실은 다만 존재의 부정을 의미할 뿐이다. 어떤 것이 비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실존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참 존재자의 실존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비존재자는 존재자의 상반적인 것이 아니라 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2. 히브리적 사유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이스라엘적 사상과 유사형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참 존재자는 말(da bar)이다. 이것은 모든 히브리적 실존성들, 즉 말, 행위, 사실을 포함한다. 비존재자(無)는 말이 아닌 것(lo dabar)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비존재자(無性)는 실제 생활에서 아주 명료하되 불쾌한 어떤 실존을 갖는다. 우리의 사유에서 혼돈이란 무형의 질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재적, 현실적인 어떤 것이지만 히브리인에게 성질이 없는 재료란 無이다.
거짓, 기적, 망상 등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만큼 실재성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표시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같은 개념은 haya를 가지지 않으며 작용하지도 않고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성도 가지지 못한다.
無에 대한 그리스적, 히브리적 이해의 유사성을 알기 위해서 동일한 개념인 불교사상과 비교할 수 있는데, 불교사상에 있어서 無와 비존재는 삶과 세계의 부정적 측면에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선한 어떤 것이다.
그리스적 특성에서 존재는 영원히 정지해 있는 것이며, 히브리적 특성은 영원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지만, 둘 다 존재란 참 현실이고 참 선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