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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노트 ․ 받아들여지지 않은 마지막 술 한 잔 ․ 2013.7.3 PM 6:30 명동 전진상교육관
Ⅰ죽산 조봉암은 누구인가
1.한국 근현대사의 풍운아 - 1899년 강화도의 한미한 농가 출생 - 보통학교 졸업 -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 YMCA 중학부→ 세이소쿠영어학교→ 주오대. 독서와 토론 -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
2.독립운동가, 건국공로자 - 강화 3․1만세 옥살이 -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 최선의 길 판단 - 조선공산당 창당주역 -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체포당해 7년간 복역 - 8․15 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
3.세계 최고수준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 농민들에 희망 안겨줘 혁명포기 - 나라 전체가 공산화 막는 원인 -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 자녀교육 집중 -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
4.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차점 낙선 거물 정치인- 젊은 날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 전향 뒤 원죄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 국가변란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사의 축소판
5.1959년 7월 31 오전 11시 서울형무소 - 아침에 따님과 조카 면회거부 발길 돌려 - 바로 전날 오후 재재심 기각 - 11시 마지막 술 한 잔도 거부당하고 처형 - (첨부 원고 낭독)
6.조선총독부령 120호 -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 처형한 뒤 행정처리 악법 적용 → 사회 안녕 치안 질서 문제 있다며 *조문 금지 *익일 장례 *비석 금지 - 약산 김원봉 평전 - 이종암 평토장 비석도 없어 - 3주기 때 김응현 선생이 비명 써줌 - 경찰에 시달림 - 인천의 원로들 - 국립묘지가 아니라 거기 그냥 계셔야지 비석도 그대로 가야지 권유
7.죽산의 정치적 주장 -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세 가지 - 그게 오늘 더 절실하다.
Ⅱ 짧게 압축한 죽산의 생애
1.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 고려 삼별초 저항 - 조선 병자호란 저항 - 조선말기의 3대 양요 - 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 - 1907년 진위대원 봉기 - 견자산 진위대 진지 - 보창학교
*1899년 강화 선원면 금월리 출생 - 총명하나 공부 안 함 -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죽마고우들→ 유찬식(전남교육청 학무국장) 조광원(성공회 신부) 조구원(3.1운동)
정경창(인천노동운동 모스크바공산대학 중퇴. 만주 투쟁 중 행불) 정수근(3.1운동 인천에서 사업 성공/ 대한농회 인천소장) 박길양(선배. 상동학원 출신 공청 창설 멤버 옥사) 갈홍기(후배. 부친 갈형대 보창학교장/뒷날 이승만 정권 공보처장)
*아우 조용암과 애인 김이옥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 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 대서소 보조원 잠두교회 권사 칭호-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 서대문감옥-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 -이상재 선생 영향 - 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평양경찰서에 구속 - 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 - 김찬 유찬식 홍순복 이성구 등과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주오대학 정경과→김찬의 영향→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黑濤會→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모스크바 담판에 감→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 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 - 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 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 - 조선일보 기자 - 최고의 논객 - 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 - 조용암 김조이 정경창 포함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 - 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 - 6․10만세사건 주도 - 2차당 붕괴 25.11
*27.1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 - 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 - 공금 전용 시비 - 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 - 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정윤교 사건, 반제동맹 주도 - 32.12 체포되어 압송 - 7년 징역신의주형무소 수감 -김이옥 귀국 뒤 죽음 - 딸은 인천 친척집에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 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인천에 정착 - 박남칠 연결 미곡상업계 인물들 - 비강업조합 만들어줌
*김조이와 재결합 긴 유휴기간을 보냄 - 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 - 우발적 사건 두 가지 - 興亞新春 광고와 국방성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 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 - 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 - 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 <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46.8~9 인천의 기업인 함효영, 이필상, 김성진, 배인복 등과 교유 통일건국회 조직 - 중앙에서 김찬, 원우관, 임원근, 이극로, 이동산과 민주주의 독립전선 주도
*47 하반기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당선 강원명 참여하여 역전 - 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 - 헌법기초위원이 됨 - 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 농림부장관-평등지권의 신념 농지개혁법 주도 - 혁명 없이 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 성공 - 농민들 지지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 - 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김조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 - 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 대통령 출마 70만표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 - 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 - 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 차례 위기 - 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 - 양이섭이 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 - 1심 인정하지 않아 5년 → 2심 사형 →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 죽산의 유언 - 비록 사형당해도 애국심은 변함 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 만에 처형 - 총독부령 120호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 - 매카시즘 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 미국 양다리 걸치기
6. 53년만에 무죄선고 햇빛 속으로
*20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 - 2005.11 위원회 재심권유
*2011. 2. 11 대법원 무죄선고
*2012. 독립유공서훈 유보 통보
Ⅲ 죽산이 가졌던 꿈
1.실현시킨 꿈 → 농지개혁의 공적 → 국가 부흥의 발판
*죽산 관련 기자 인터뷰와 강연 - 가장 많은 질문 - 이승만은 왜 죽산을 농림부장관으로? → 세 가지 학설 = 한민당 견제설 = 미국 요구설 = 이범석 총리 거래설
*결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과 평등지권의 확신 - 당시 전체 농가는 200만호 - 완전 소작농이 49% - 반소작농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
*북한 이미 토지개혁, 중국 국공내전 공산군의 승리 원인 - 토지몰수분배 - 남한 민심의 향방 안심할 수 없다 판단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절묘한 선택과 관철 - 신속히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균등성 확보 성공 → 실현단계에서 한국동란 발발 → 농민들 공산혁명 거부 → 자경농의 동력이 곧바로 자녀교육으로 집중 → 기적적 경제성장의 동력이 됨
2. 실현하지 못한 꿈 → 평등과 정의의 사회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3. 죽산이 안았던 원제와 숙명의 고리
1)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 광복 후 전향 →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2)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 충분한 정당성
3)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함정에 빠져 쓰러져 → 분단모순의 상황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4)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5)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6)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4. 죽산이 뿌린 씨앗과 오늘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짐 -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진정한 복권은 국가양심의 회복
#첨부: 낭독 텍스트, [조봉암평전] 중에서
[A]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 시퀀스 1959.7.31 서대문형무소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본적 인천시 도원동 12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충현동 산4의 5번지, 성명 조봉암, 나이 육십일 세,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음은 인상(人相)조사였다. 신장, 체중, 얼굴빛, 머리숱, 전체적 체형 등을 확인하는 절차, 형무관은 가장 분명한 인상인 마디가 잘라져 없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임석검사가 집행을 선언하자 집행관이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죽산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골고루 잘 살려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가니 미안한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산은 임석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 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 선생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쿵!’ 밧줄에 매달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B] 장례식 시퀀스
1952.8.2 망우리
윤길중 변호사는 장택상을 찾아가서 장례비를 부탁했다. 장택상은 애석해하면서 장례비 10만환을 마련해 주었다. 윤길중은 풍수지리를 좀 아는 편이어서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에서 좋은 자리를 골랐다.
8월 2일 오후 2시, 무장 경찰과 사복 경찰이 엄중하게 경계하는 가운데 충현동 집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며 출입을 막는데도 조문객은 200명이나 왔다. 진보당원들은 깊은 밤 지붕과 담을 타고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한 번 나가면 다시 올 수 없다며 골목에 앉아 밤을 새운 사람들도 많았다.
호정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이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악에 받친 사람처럼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어린 동생과 친척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오래 살아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지켜보겠다고.
남편 이봉래가 조시(弔詩)를 낭독하는데 경찰이 장례식을 빨리 끝내라고 재촉해 댔다.
“거기 부모님이 생떼 같은 목숨을 잃었는데 빨리 하라면 그 말을 듣겠어요?”
호정은 그렇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경찰은 그녀를 피해 윤길중 변호사를 닦달했다.
오후 3시 경, 관이 영구차에 실렸다. 뒤에 가족이 탄 버스 한 대 그리고 경찰 지프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30~40분 후 망우리 묘역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인데도 날씨는 무섭게 더웠다. 운구를 하기도 전에 경찰은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가족들이 들은 척도 안하자 산역꾼들에게 “당신, 왜 느리게 하는 거야? 이름이 뭐야?” 하고 수첩을 꺼내 적으려 했다. 산역꾼들은 제 발등을 찍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삽질을 해 댔다.
호정은 남편 이봉래의 부축을 받고 서서 마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나요! 개가 죽어도 이렇게 하지 않아요! 왜 벼락이 안 쳐요? 여름에 벼락도 많이 치는데, 기가 막힌 날 왜 벼락도 안 치는지요? 나한텐 하늘도 없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서해의 강화 섬에서 태어나 조국의 운명을 등에 지고 분투했던 죽산 조봉암, 책임정치와 수탈 없는 경제 체제 확립과 평화통일을 주창했던 거인은 죽어서 시름을 잊는다는 망우리의 한 자락 땅에 순교자처럼 묻혔다.
>>>>>>>이원규 ․ leewk33@hanmail.net ․ Daum 카페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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