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이번엔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
이렇게 2000년 여름 K2를 끝으로 14좌 완등의 대업을 달성하기까지 생사의 경계선을 수없이 넘나들었건만
그의 꿈은 더욱 커졌다. 캉첸중가와 로체 위성봉마저 올라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8천미터 16좌 완등자가 되겠다는 야망이었다.
2002년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입학한 한국외국어대학의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2004년 도전한 얄룽캉(8505m)은
첫 등반에서 끝냈다.
“등반을 앞두고 라마제(히말라야의 신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느닷없이 제단에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더니 바로 잠잠해졌어요.
다와가 왔다 갔구나 싶었어요. 8천미터 봉을 다섯 번이나 함께 등반한 셰르파예요. 정말 산 같은 친구였어요.
그 다와가 캉첸중가 등반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지켜주려고 왔다 갔구나 싶었던 거죠.
그래서 마음 놓고 등반할 수 있었어요.”
얄룽캉 등반을 마쳤을 때 에베레스트를 등반중인 박무택(朴武宅)으로부터 위성전화를 통해 축하인사를 받았다.
그게 무택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박무택은 그 얼마 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뒤 하산 길에 탈진사했다
(엄홍길은 2005년 박무택의 모교인 계명대 산악인들로구성된 휴먼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서 편안한 영면을 위해 박무택의 시신을 루트에서 벗어난 지점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마지막 고봉인 로체샤르는 그를 쉽사리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2001년, 2003년. 2006년 세 차례의 실패를 거쳐 2007년 네 번째 도전에서 성공한 등정이었다.
더욱이 2003년 등반에서는 정상을 150m 놔두고 후배 대원 2명이 눈사태로 수천 미터 절벽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2006년 세 번째 도전 때는 루트를 바꿨다.
그런데도 두 번째 등반 때 사고를 당한 설벽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먼저보다 훨씬 더 많이 쌓여 있는 등 상태가 무척 나빴다.
“한 30분 고민했나 봐요. 그러다 어느 순간 로체샤르 신이 ‘엄홍길,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그래 와봐라 이번엔 정말 가만두지 않는다’ 하고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후배들에게 내려가자 했더니 왜요? 하면서 의아해했어요. 제 목표를 위해 후배들이 사고를 당하게 할 순 없었어요.” |
첫댓글 지난번 총동창회 산행때 엄홍길 산악인 생가 터(址) 앞을 지나면서 씌여 있는 글을 읽었는데 그 싯점은 내가 이곳 파출소 근무할때 이며 엄홍길은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그때 여러번 길에서 만났었겠구나! 생각 했으며 그당시 그의 등하교길 자체가 등산이었으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