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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그네의 낡은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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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 스크랩 한국의 사찰과 불탑, 불상
AceRed 추천 0 조회 44 09.12.30 15: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사찰과 불탑, 불상                                   이길상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많이 들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무, 아미타, 불, 관세음, 보살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시지요. 살아 생전에는 관세음보살에게 죽어서는 아미타여래에게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사적 제6호黃龍寺址

  

위의 두 그림은 경주 황룡사의 옛터와 웅장한 황룡사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해 본 것입니다. 황룡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절(寺)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절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찰(Buddhist temple/寺刹)이라고 하면, 불상을 모셔 놓고 승려들이 거처하면서 불도를 닦고 불교교리를 설하는 곳.  절·사원(寺院)·정사(精舍)·승원(僧院)·가람(伽藍)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사찰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상가라마로서. 이는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比丘:남승)·비구니(比丘尼:여승)·우바새(優婆塞:남자신도)·우바이(優婆夷:여자 신도)의 사중(四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중국에서 승가람마(僧伽藍摩)라고 음역(音譯)하였고, 나중에 줄여서 가람이라고 표기하게 되었으며, 승려를 지칭할 때 단순히 중(衆)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절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가 전해질 때,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 경북구미시 도개면)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는데, 毛禮가 이두표기로 우리말로는 "털레"였고, 그 털이 덜, 절로 바뀌었다는 설이있고, 사찰에 가면 승려는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기원하는 사람은 소망을 부처님께 비는데 수없이 절을 하기 때문에 사찰이 절을 많이하는 곳이라고 하여 절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나 모두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황룡사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신라본기권4 진흥왕 14년조에, 춘 2월 왕은 司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지었는데, 그 땅에서 黃龍이 나타나자, 그것을 의아스럽게 여긴 왕은 이를 고쳐 佛寺로 만들고, 이름을 내려 皇龍(寺)이라 했다.....

 

또한 삼국유사 卷第三, 塔像第四 皇龍寺丈六, 皇龍寺九層塔의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는 기축년(진흥왕 30년)에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하였는데, 얼마 후 남해에 큰 배(巨舫)가 떠와서 이를 살펴보니, ...西竺의 阿育王이 황철 5만 7천 斤과 황금 3萬分을 모아서, 석가 3존상을 주조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축원하기를 인연있는 땅에 가서 丈六尊像이 되기를 바라고, 一佛과 二菩薩像의 모형까지 같이 실어 보냈다....

 

그 땅에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그 삼존을 안치하고, 금철은 京師(수도)로 옮겨 장육존상(높이약 4. 8m)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백 98分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 36分이 들었다. 그것을 황룡사에 안치하였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자장법사가 중국에 유학할 때, 문수가 나타나 그 주조 비결을 일러주면서, 천축(인도)의 무우왕(아소카/아육왕)이 황철 약간 斤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 3백 여 년을 지나 너의 나라에 장육존상을 안치한 절을 마련하게 된 것은 거룩한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이라 하였고,...

 

자장이 중국의 太和池라는 못가를 지날 때 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 龍은 나의 長子로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지키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 韓(夷)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후 팔관회를 열어 죄인을 풀어주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정관 17년 자장은 당제가 준 경상(經像), 가사, 비단(幣帛)을 가지고 귀국, 선덕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왕은 군신들의 뜻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라는 장인(匠人)을 초빙하여 탑을 세웠는데,...刹柱記에 鐵盤 이상의 높이는 42尺, 이하는183尺이라고 하였다.

 

자장이 五臺(중국의 오대산)에서 받은(神人으로부터) 사리 백립(百粒/백알)을 기둥 속과 통도사 戒壇, 대화사 탑에 나누어 봉안하여....

 

안홍(安弘)의 東都成立記에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침해를 누를 수 있는데, 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이라 하였다.

 

탑은 세운 후 다섯 차례 벼락을 맞아 중수하였으며, 몽고 병화로 황룡사가 소실(1238) 되면서 탑과 장육존상 등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 후 황룡사는 다시 재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 법보 사찰 해인사 전경. 축조 연대는 불국사가 해인사 보다는 앞섰고, 신라 중대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절이 차츰 산중으로 들어가게됩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선종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호국신앙 및 개인 기복의 염원을 비는데는 조용하고 산세 수려한 곳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결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겠지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된(1995) 토함산 불국사(佛國寺) 앞 모습으로 백운교, 청운교라고 부르는 33계단이 보이네요.

 

33은 불교에서 말하는 33천을 의미한다고합니다. 불국사가 임진란 때 소실되었으나 이 돌계단만은 불타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국사의 대웅전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 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그 후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무량수전과 대웅전의 차이는 무엇인지?

 


고려후기의 목조 건축물로 대표되는 부석사의 무량수전 입니다. 기둥 위에 공포를 하나씩 배치하고 있는데, 이를 주심포 양식이라고 합니다.


 

 

 

절은 통상적으로수행· 교육· 포교의 3기능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건물과 상징적인 조형물이 있어야 하겠지요. 건물로는 불전(佛殿)· 강당(講堂)· 승당(僧堂)· 주고(廚庫)·욕실· 동사(東司:측간)· 산문(山門)등이 있고, 조형물로는 탑, 석등, 법고, 범종, 목어 등이 있습니다.

 

탑· 금당(金堂)· 강당(講堂)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리켜 가람배치(伽藍配置)라고하는데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고구려 가람은 팔각의 목탑을 사찰의 중심 건물로 하고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에 북쪽 금당 좌우에 2개의 건물 터가 또 있는데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백제는 한성시대 절터로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고, 공주와 부여시대의 절터가 최근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정림사지는 남향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었고, 익산 미륵사지는 남향으로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가 많은 백제의 유형에서는 벗어나기 때문에 새로운 가람배치로 조사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네요.

 

삼국시대 신라의 가람은 황룡사지는 남향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남문(南門)·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이 서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는데, 중문과 탑 사이 좌우에 경루(經樓)나 종루(鐘樓) 같은 건물이 대칭으로 배치되었고 금당 좌우에도 2채의 불전이 병렬(竝列)로 배치되어 있어서, 일탑삼금당병렬식(一塔三金堂竝列式)이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가람 중, 감은사지는 남향으로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 좌우에 쌍탑(雙塔)이 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고, 불국사지는 남향으로 중문(자하문)·금당· 강당(부설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대웅전) 앞 좌우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건립되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습니다.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가, 통일신라 후기에는 산지(山地) 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어 쌍탑이 없거나, 일탑일금당식이거나,경우에 따라 무탑(無塔) 절이 생겼다고 합니다.

 

고려는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를 계승하여, 초기에는 탑에 대한 배려가 높았으나 후기로 오면서 탑이없는 절이 많이 생겼고, 조선시대는 고려 가람배치의 계승과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절이면 그냥 절인 줄알았는데 이렇게 복잡한 형식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이를 정리해 보면 양지 바른 곳에 절을 세우고, 방향은 대체로 남향이 되며,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 탑을 두 개 세우면 쌍탑형식, 하나를 세우면 일탑형식, 탑이 없으면 무탑형식,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佛殿)을 금당(金堂)이라고 하니까 하나 혹은 둘 셋에 따라서 일금당 삼금당으로 부르는 것으로 이해 하시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불전 곧 금당은 본존불(本尊佛)과 보살 및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봉안하는 사찰의 중심건물이 됩니다. 이 불전의 명칭은 종파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주존불(主尊佛)을 비로자나불로 하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극락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합니다.

 

이 밖에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미륵전(彌勒殿),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는 약사전(藥師殿),석가모니의 일생을 팔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봉안한 팔상전(八相殿), 16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원통전(圓通殿),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신 문수전(文殊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등이 있습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국보 제 119호

 

구리로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도금(鍍金)한 고구려 불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체 높이16.2 cm, 입상 높이 9.1 cm. 광배 높이 12.1 cm, 대좌 높이 4.1 cm인작은 불상인데,

 

1963년 7월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밭 매던 村婦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각명(刻明)한 수법, 찬란한 금색, 조상명기(造像銘記)가 있는 점으로 봐서 고구려의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학계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불상이 남쪽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에 대한 경로의 설명이 부족하고(?) 그리고 명문(銘文)에 있는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으로 시작되는47자 가운데 延嘉가 연호인 듯하나 이런 연호는 중국, 우리나라, 일본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 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소재

 

백제 말기의 화강석 불상.높이 본존여래상 2.8 m, 보살입상 1.7 m. 반가상 1.66 m.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그 우측에 보살입상, 좌측에 반가사유상을 조각하였고, 여래입상은 소발(素髮)한 두상, 풍만한 면상을 특징으로 하며 두꺼운 법의(法衣)가 발등까지 덮여 있고 발 밑에는 간략한 단판연화(單瓣蓮華)가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寶珠形頭光)의 단판연화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우측의 보살입상은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면상은 약간 긴 편이며, 상반신은 나형(裸形)에하상(下裳)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고,좌측의 반가상은 삼산관을 썼고 상반신은 나형이며 두 팔은 손상되었습니다. 하상은 매우 얇고, 넓게 옆으로 퍼져 발등까지 덮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라고 합니다.

 

온유한 조각수법

 

 

 

 

 

 

위 쪽 왼편은 미륵사지 석탑이고 오른편은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이것은 탑의 재료가 나무에서 돌(화강석)로 바뀌는 과도기적인 형태의 탑이라서 목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황룡사의 9층 탑은 목탑이었기에 화려하고 장엄하였는데,...그러나 화재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이런 석탑은 많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모형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돌을 벽돌(塼)처럼 만들어서 차곡차곡 쌓았는데, 이것은 중국 전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불탑(stupa/佛塔)은 탑. 탑파(塔婆)· 솔도파(率堵婆)라고도 하는데, 솔도파는 산스크리트인 ‘stupa’를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이며, 탑파는 팔리어(語) ‘thupa’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모두 방분(方墳) 고현처(高顯處)로 의역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眞身舍利)을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세웠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사리에는 수 적인 한계가 있고, 진위를 구분하기도 어려우며, 또한 외견상 구별이 힘들기 때문에 불교의 성지에 기념비적인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렇게 영장(靈場)·고적(古蹟)을 표시하는 기념탑적인 것을 지제(支提:Caitya)라고 하여 불사리를 봉안하는 탑과 구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경전에는 “사리가있는 것을 탑파라 하고 사리가 없는 것을 지제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를 구별하기란 사실상 매우 곤란한 문제이며, 따라서 이러한 정의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오늘날의 불교국에서는 탑과 지제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질이 좋은 화강암을 다량으로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석탑이 크게 발달하여, 실제 1,000 여 기의 불탑 중 그 대부분이 석탑인데 반하여,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탑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8세기 통일 신라시대가 되면 탑의 모양이 많아 달라 집니다. 양편에 보이는 두 탑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지요.

 

불국사의 다보탑과 3층석탑(석가탑 혹은 무영탑)으로 나란히 국보 20호와 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모진 풍상과 병화에도 자세를 흐리지 않고, 균형 잡힌 몸매를 지금까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그림은 문무왕의 해중 능(대왕바위), 이견대와 더불어 호국사찰로 유명한 감은사지3층 석탑입니다.

 

感恩寺는 문무왕이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유골은 화장하여 수중 능에 안치하고, 절을 완성하여 감은사라 하고 해룡이 된 부왕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지하 통로를 만들어 바다와 금당을 연결시키고, 상징적인 휴식공간을 마련한 특수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호국신앙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사적 제 31호)

 

의좋게 나란히 東 西로, 마주 서 있는 쌍탑은 초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라고합니다. 13 미터의 높이는 삼층석탑으로서 최대 규모라고 하며,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고 이를 조립해서 세웠는데 3층 옥신(屋身)에서 매우 정교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국보 제 122호)

  

고려시대가 되면서 탑의 모양도 다시 달라지기 시작하네요. 위에서 본 감은사지석탑이나 불국사 3층 석탑이 사각형의 方形인데 반하여, 외쪽의 두 탑은 8각을 이루면서 圓形에 가까워 지고 있습니다. 왼편의 그림은 국보 제48호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고, 오른편의 그림은 국보 제 86호 경천사지10층 석탑입니다. 몸매가 매우 날씬해 지고, 층수도 다시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안정감이 떨어지고, 조각에 많은 기교(?)가 들어가네요. 그리고 마치 접시를 포개 놓은 듯한탑들도 이 시기에 나타납니다. 월정사 석탑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송나라 석탑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며, 경천사 석탑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월정사 석탑은 높이 15.2m의 2중 기단으로 지대석은 1단의 받침이 있어 하층 중석(中石)을  받치고,각 면에는 1면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 되었으며 갑석(甲石)은 복련(覆蓮:아래로향한 연꽃)으로 덮고, 그 위의 상층 면석을 받치는 받침 돌을 두고 있습니다.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 탑신을 괴는 받침돌이 1매 있어 1층 옥신(屋身)을 받치는데 8면에 1면씩을 건너 뛰어 4개면에 직사각형 홈이 패어져 있습니다. 옥개의 각 구석에는 풍탁(風鐸)이 달려 있고 상륜부도 보존이 완전하며, 탑 앞에는 보살좌상이 탑을 향해 앉아 있습니다. 이 탑에서도 사리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경천사지 석탑은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 경내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해방후 반환되어 남북분단으로 인해 경천사가 아닌 경복궁에 자리잡고 복원되었습니다. 기단 평면은 亞자형의 3단으로 되었고, 탑신부는 1, 2, 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위층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4층부터는 탑신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탑에도 부분마다 명칭이 있는데 좀 복잡합니다. 대강 밑에서 탑을 바치고 있는 부분을 기단부, 중간을 탑신부, 그리고 위쪽을 상륜부로 크게 구분합니다. 탑의 층수를 세는 것은 탑신부에 지붕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옥개석이라고 하는데그 수자를 가지고 층수를 구분한다고 하네요. 따라서 기단부나 상륜부는 높낮이와 관계없이 탑의 층수와는 상관 없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묘탑(墓塔)을 부도(浮屠)라고 합니다.

 

불탑이라는 일반 석탑은 대개 사찰을 이룩하는 데 중심이 되어 후세에 이르는 양식의 발전과 계통이 있으며, 혹시 특수탑파라 하여도 일반형에서 변형되어 그 원류는 불탑의 형식이므로 역시 계보가 뚜렷합니다.

 

아울러 부도에서도 전형의 정립과 발달을 볼 수 있고, 그 계보를 살필 수 있으며, 또한 각 부도에는 대개 탑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곧 개개인 승려들의 행적은 물론이고 다른 승려와의 관계와 사적(寺蹟), 나아가 당시의 사회 및 문화의 일단까지도 알리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기도 합니다.

 

오른쪽 그림은 정토사홍법국사 실상탑(국보 제 102)으로서 충북 중원군 하천리에 있었던 것을 서울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도가 바로 옆에 있는 탑비의 비문에 의해서 조성 경위 및 연대가 밝혀졌고, 圓球形의 탑신이 매우 이채롭다 합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으로불리고 있는 위쪽의 두 불상 중, 왼편은 삼국시대(국보 제 78호), 오른편은삼국시대의 백제 불상(국보 제 83 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불상을 이야기할 때, 우리들은 통 털어서 부처님이라고 하나, 그 위격에 따라서 여래상과 보살상, 신장상 그리고 나한상 등이 있고, 그 자세에 따라서 입상, 좌상, 와상, 그리고 반가상 등으로 구분하며, 조성재료에 따라서 목불, 석불, 토불, 철불, 금동불 금불 은불 등으로 부르고, 조각수법에 따라 소조,마애, 선각, 조각, 주조...등으로, 다시 손의 모양(手印)에 따라 禪定印, 降魔觸地印, 轉法輪印, 시무외 여원인, 아미타정인과 9품인, 지권인,..등

 

다시 좌상에는 결가부좌한 형태에 따라 吉祥坐와 降魔坐, 한 쪽 다리를 밑으로 내린 반가좌 등등으로 구분하고,... 보살의 옷은 天衣라 하고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면 통견식, 왼 쪽 어깨만 걸치면 우견편단식,... 크기에 따라서 장육상, 반장육상, 등신상 등....여기에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등 등으로 매우 복잡합니다.

 

전문가 아닌 아마투어 입장에서, 여래상은 머리에 울퉁 불퉁한 육계가 있고, 보살상은 머리에 관(화관)을 쓰고 있으며, 신장상은 손에 무기(?)를 들었고, 나한상은 속인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서 보시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성연대와 장소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한다고 하니 비전문가 입장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우스울 것 같아서 그냥그림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석굴암 본존불과(8세기중엽) 삼릉골 아미타여래좌상(9세기 초)
왼편의 석굴암 부처님과 오른편의 삼릉골 부처님의 모양이 비슷하지요. 그런데 석굴암 부처님은 세련된 미가 보이고, 손상이 없는데 이것은 일제시대 발견될 때 까지 숲 넝쿨이 가려서 일반인들이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른 쪽의 부처님은 노지에 방치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코를 비롯한 돌기 부분이 심하게 마모된 흔적이 보입니다. 사내 아이를 얻겠다는 주술 신앙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돌기된 부처님의 성체 부분을 갈아서 마시면 사내 아이를 낳는다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속설이였지만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영험이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두 부처님의 형상이나 수인(손의 자세)이 비슷합니다. 이런 부처님을 아미타여래라고 하는데,...석굴암에는 여러 보살상이 뒤 벽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라면, 극락에 가지 않고 대중 구제를 위해 남아 있는 보살이 아미타여래가 계시는 극락세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을 석가여래좌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것은 불교의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일 뿐, 아미타여래좌상이 틀림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지금은 그저 본존불(중심 부처님)이라는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미륵보살입상과 철조여래좌상(서산운산출토)8세기경 통일신라

 

 

 

 

 

 

 

 

 

 

 

 

 

 

 

 

 

 

 

 

 

 

관세음보살좌상과 금동관세음보살입상(고려시대)

 

 

선본사 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제 431호). 속칭 갓바위 부처님

 

대구 팔공산 동쪽 끝, 해발 800m  지점에 우뚝 앉아 있는 이 불상을 갓 바위 부처님이라고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30분정도의 완만한 경사 길을 오르면 관암사라는 절이 있고, 거기에서 부터 가파른 1400여 돌계단을 밟고 힘겹게 올라서면, 동남 쪽을 향해서 앉아 계신 부처님의 장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은 특이하게도 머리 위에 1.8m크기의 판석(板石)이 올여 있어서, 보살상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부처님이 틀림없고, 언제, 누가, 어떤 이유에서는 알 수 없으나, 갓 모양으로 판을 만들어 머리에 얹어 놓았기에 갓바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녹음(?)된 듯한 스님들의 독경을 들으면 "약사여래불"을 수 없이 반복하고 있으나, 안내판에는 석조여래라고만 적혀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속설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불자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이루는데,...

 

특히 입시 철이 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붐벼,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는 것인지, 앞 사람의 등에 절을 하는 건지 분간 못할 정도라고 하니,... 祈福신앙과 밀착된 현세관은, 자녀의 대학 합격까지도 부처님께 의존하는 심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믿음 중, 불심에 대한 믿음 또한 대단한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元代의 중국과 고려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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