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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오랜만에 대학친구들이 모인다고 한다.
오랜만의 술자리는 서로를 반기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집이 몇 평인가, 요즘의 경제와 교
육의 중요성의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반갑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내 친구들이란 사람들은 변하지도 않는다. 그 얼굴들은 세월이 지나도 어쩜 그리도 변하지 않는지, 우습지만 예전에도 그 얼굴들은 좋은 기억의 얼굴들은 아니다. 학교에서는 뻔뻔한 점수도둑이며, 가정에서는 골칫거리의 집합체 같은 친구들이었다. 이들과 난 삶이 버겁다는 투정을 부릴 나이에 밤을 지새웠고 세상을 토론했으며,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반항을 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한 번도 진정한 친구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야~ 선주야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니?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야~ 세월이 넌 비켜 갔나봐."
미소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비웃는다.
10년 전,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그려보며 우스개 소리를 지껄일 때, 적어도 지금의 모습은 상상하지 않았다. 한 녀석은 임신을 했다며 배를 디밀고 나왔다. 배가 불룩한 걸 보니 8~9개월은 족히 된 듯 싶었다. '쟤 남편 괜히 건드려서 코 꼈네.' 친구들끼리의 소곤거림이 거슬린다. 계집애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조리 쌍꺼풀이 짙어졌다. 사는 게 버거워 피곤이 깔린 건지 칼을 대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서로들 병원의 이름을 대며 키득대며 웃곤 한다. '젠장' 나지막히 외친다.
문득, 나와 항상 같이 하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이제는 친구라고 이야기하기에 어색해져 버린 친구. 그러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친구.
그녀와는 초등학교 4,5,6학년 같은 반을 지내며 친해졌다. 그 때에 친구란 좋아하는 연예인이 동일인물이거나 좋아하는 학교 선배가 서로 친구간이면 우린 더 없이 친하게 지내버리게 되는 순수한 감정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때였다. 친구가 무엇을 가졌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차는 어떤 것을 끌고 다니는 지는 절대 필요 없는 때였다. 그녀는 나에게 세상의 드넓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와는 내 삶은 항상 함께였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하던 중3의 겨울에 서울에서의 교육을 꿈꾸시는 어머니의 고집으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윤석이네서 지내야 했다. 난 윤석이가 싫었다. 공부 좀 한답시고 굉장히 잘난척하는 마마보이였다. 그 때의 난 가족이 필요하지만 홀로의 독립을 갈망하던 어린 사춘기 속의 소녀였다.
윤석이네 옥탑방에 나의 작은 쉼터가 만들어졌다. 가장 많이 도와주고 기뻐한 건 당연히 그녀였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르게 배정받은 나와 그녀는 우습게도 떨어지기 싫다는 명분으로 나의 쉼터를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바꾸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세상을 알아가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서 서로 다른 친구들을 만들었다. 나의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범생이었고,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가 혀를 차는 날라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하다며 이곳 저곳에 연예인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나는 수능에 좋은 점수를 받아 대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와 친구의 작은 실랑이 시작되었다.
이곳 저곳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프로필 사진을 찍어대던 그녀의 통장에 잔고는 바닥을 치고 카드값은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상을 향한 그녀의 열망은 끝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의 통장에 손을 대었다. 다음학기 등록금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벌어놓은 돈이 없는 줄 아시게 살았다. 그리고 나의 모아지는 돈들은 그녀의 지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우정이라고 착각했다.
내 첫사랑은 대학2년때 복학한 진서선배였다.
나의 성격도 흑백이 분명한 성격이었기에 몇 달 후 진서선배에게 고백하였다. 결론은 생각 할 시간이었다. NO라는 대답이 아닌 것에 뛸 듯이 기뻤고, 그 기쁨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셋이 함께 술을 한잔하자고 했다.
1차, 2차 흥에 겨웠고 우린 그녀와 나의 옥탑방을 3차의 장소로 정했고 몇 병의 소주와 안주를 편의점에서 구입했다. 그 날 밤 그녀는 선배와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난 그녀를 범한 선배를 욕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더러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남자친구와의 로맨스를 만들 수 없었다. 몇몇 그녀를 본 나의 친구들은 그녀를 소개해 달라며 귀찮게 했고, 마음에 든 남자들은 곧 그녀의 사냥감이 되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 정도에 넘어오는 남자는 너의 남자가 될 자격이 없어."라며 나를 설득시켰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학원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잘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강남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터가 나뉘자 서로에게 소홀하기 시작했다. 서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바쁘고 빠듯한 일상중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짝을 찾아 맺어지고, 그런 것을 피할 수 없는 난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고등학교 한 친구의 결혼식날 친하게 지내던 고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에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다.
"야~ 미희 그 년. 남의 남자랑 바람났다며?"
"뭐?"
"뭐야~난 너한테 물어볼라구 했는데..몰랐어?"
심장이 두방망이질 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멀고 먼 이야기가 내 옆방에서 이루어지다니…
"미희야 어디야?"
"응? 어… 밥 먹어."
"그래… 미희야 오늘 우리 한 잔할까?"
"그러던지…."
그녀와의 통화가 어색하다. 마치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 첫 장과 같은 모습으로 통화를 마쳤다. 삐삐를 가지고 있던 때라 '6시 강남역 롯데리아 앞'이라는 약속문을 철저히 되새기며 시간을 맞추었다.
6시..7시..그렇게 그 날 난 11시까지 한 자리에서 연락 없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집에 들어 온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약속을 정했다. 그녀에게 '미안'이란 말은 듣지 못했다.
약속장소에서 본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함께 술잔을 기우렸다.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우리 탁자 위엔 6병의 소주병의 입이 모두 따져있었다.
얼큰하게 취했을 때 난 그녀의 남자에 대한 진위여부를 캐내야 하는 의무감이 들었다.
"야..이씨…후~ 너 만나는 남자 데려와."
"못 해."
"왜~"
"너 정화년한테 들었다며, 정화년이 이야기 하드라."
순간 술이 확 깨버렸다. 어설프게 술 먹이고 비밀을 캐내려 했던 초보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억눌러 온 감정이 복받쳤다. 내 친구가 한 없이 안쓰러웠다.
"씨발..젠장..내가 쫒아가서 그 개새끼를...흑흑"
"……."
"너 아닌거 알잖아. 흑흑 너 니 자신이 소중하잖아. 그럼 나와. 빠져 나와. 흑흑."
나의 흐느낌은 나만의 것이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날 내려보고 있었다.
"너 지금 나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네 착각이야. 너랑 나랑 10년 같이 살았다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커다란 재떨이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는 척 하지마. 너하고 난 벽이 있어. 난 그래. 친구를 사귈 때 벽을 둬. 그 벽이 얇은지 두꺼운지에 차이야. 너하고는 이만한 벽에서 요만큼..그래 요만큼으로 줄어들었을 뿐이야."
그 날 난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녀에게 매달렸다. 정신차리라며 너의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노라고, 그러나 그녀는 냉소섞인 반응만을 보였다.
"니가 내 인생 책임질꺼야? 아니 책임 필요없어. 내가 거부해. 니가 친구인 것도. 이 시간 이후로 내 남자 욕하는 넌 친구도 아니야."
"뭐? 흑흑 그래 그래… 내가 상관 안 할게. 안 하면 되는거지? 네 뜻대로 할게."
그녀는 눈물섞인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남자가 마련해 준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녀는 술기운에 나에게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늘 그녀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던 작은 몸부림이 그 날 매몰차게 날 밀쳐 낸 것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딘가 그녀에게로부터 묶여있던 보이지 않는 끈을 그 날 끊어버린 건지 모른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또 그녀가 도마에 오른다.
"제일 많이 당한 건 선주지. 그렇지 않니?"
자기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한 품평회를 시작한다. 저들의 기억 속에 나는 그녀를 제외하곤 생각나지 않는 존재인가 보다. 그녀의 이름이 나온 후에는 어김없이 내 이름이 올라온다. 저들에게 동정받는 저들의 이야기 속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저들의 이야기 속에 난 콩쥐고 그녀는 팥쥐다. 콩쥐는 팥쥐 없이는 절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런 콩쥐를 저들은 나로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추려던 나의 옛 모습을 제 3자인 저들이 평가하고 있다.
난 의존적 콩쥐이다.
지금은 팥쥐를 잃어 무대도 잃어버린 배고픈 콩쥐이다.
※세상님과 운영자님들 혹, 수필에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시면 옮겨주세요.
그럼 작가님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음..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다르니,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겠습니까! 그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길로 가는 거겠지요.. 제목은 다른 걸로 바꾸심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걸로?? 좋은 제목 말씀해 주세요.
팥쥐를 잃은 콩쥐? 기억 속의 친구?.. 아..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십니다...
앞에 부분이 마음에 쏙~~듭니다. 팥쥐 잃은 콩쥐로 정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들강아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