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八字(사주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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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가 아무래도 漢文에 해박하지 않을까 추측되었다.
四柱八字나 陰陽五行은 어차피 한문과 연계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학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가운데 앉은 젊은 여인에게 부쩍 관심의 심지를 돋우었다. 동안인 듯 보이지만 저기 저 자리에 앉을 만큼의 충분한 공부를 하고 소양을 갖추었으려니 믿고 싶었다. 무료한 몇 시간을 친구들과 사주팔자 놀이로 보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세 분 어르신들보다 젊은 여인에게서 어쩌면 훨씬 명쾌하면서 구체적인 사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긴다. 나의 인생 후반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그 여인이 제시해 주기라도 하는 듯 여인을 향한 줄에 자연스레 늘어섰다.
서울의 친구가 며느리를 맞는 자리에 참석했던 나는 예매한 버스의 시간이 아직도 넉넉하게 남았음을 확인했다. 출발하기까지 같이 있어준다며 남게 된 친구 몇은 그동안 옷 천지인 지하상가를 느긋하게 둘러보자는 의견을 냈다. 아이쇼핑이라면 나도 솔깃하다. 웨딩홀과 은행과 쇼핑몰, 그 밖에도 전국으로 갈 수 있는 버스터미널까지 한 공간에 있는 편리한 문명을 온 몸으로 내가 누린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적막한 우리 동네에 비하면 툭툭 어깨가 오가는 인파에 부딪히는 이곳은 생동감이 넘쳐났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탁한 공기에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던 무렵이다.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이 하도 신기해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동행해주는 친구들에게도 저것 좀 보라며 소리쳤다. 할아버지라고 호칭해도 좋을만한 연세의 바깥어른 세 분과 4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란히 앉았다. 이 혼잡함속에서 접이식 작은 책상 하나 달랑 놓고 사주, 궁합, 길일까지 두루 본단다. 돈 버는 방법도 다양하고 희한하다는 듯 친구들도 호기심을 보였다. 생년월일을 풀어서 맞히는 것이니까 점쟁이보다는 학문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망설이는 내게 한 번 재미로 운세를 보라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예전에도 어느 관광지 입구에서 자리를 깔고 앉은 할아버지께 미래의 운을 본 적 있다. 당시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사서도 한다는 초년고생 속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였다. 말년에는 번성한 아들과 더불어 운수 대통이라고 했다. 반신반의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져서 동행인들과 즐겁게 화제 삼던 기억이 난다. 당장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식이 성공하고 말년 운이 길하다면 한 번 인생 살아볼만하다 생각하며 무엇에든 열심이지 않았을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시나브로 그 말은 내안에 스며들어 절망의 순간도 견디어 온 근원이 되었을는지도. 오늘도 젊은 여인의 입을 통해 긍정적 운명론을 전해 듣는다면 그 것 또한 이후의 삶에 그 때처럼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차례가 되어 만 원짜리 한 장 책상 위에 던져놓고 여인 앞에 앉았다.
재미삼아 라고 전제했지만 기분이 심각해져서 또박또박 생일과 나이를 일러주었다.
여인은 그런데 대뜸 특정대학의 이름을 대며 오랫동안 이 방면의 공부를 심층적으로 했노라는 자신의 이력부터 설명했다. 그 것은 앳된 자신을 못미더워하는 나의 심중을 꿰뚫고 안심시키느라 달래고 설득하는 수단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그리고 완벽하게 공부한 후 비로소 세상에 나왔노라고 재삼 나에게 상기시켜주려 했다.
곧이어 나의 운이라며 펼쳐놓는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지금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대부분 나와 가족들에 대한 찬사였다. 사투리 진하게 쓰는 내가 지방의 농촌에서 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근면 성실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타인이 바라볼 때의 농부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성실과 바로 줄긋기가 되는 모양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종래에는 풍요할 수밖에 없는 보편타당하고 진부한 지론을 세련된 표준어로 상대가 설득당하도록 구사하는 능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나의 사투리로 시작되어져 급기야 농부의 아내라는 것까지 보여 지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터무니없는 예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모했다. 미리 단정 짓고 바라보는 미래는 찬란하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어지는 그녀의 내 운명예찬을 묵묵히 들으며 어느새 스스로 안도했다. 그 언제 적처럼 밝아져서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되었나보다.
가만히 지켜보던 친구들도 나의 운세가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어지자 짝짝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사주에 의해서 개인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힘든 상황과 맞닥뜨리면 쉽게 팔자타령을 쏟아놓은 적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 주장이나 예전 관광지 입구 할아버지의 말씀을 종합하면 운명이 정해져 있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끄느냐의 문제만 있는 걸 확인했다. 좋은 사주만 믿고 베짱이와 같은 마음가짐이라면 달라질 건 뻔 한 이치다. 그러기에 모진 운명이라 해도 비통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부지런하고 모범적으로 사는 인생은 곧 탄탄대로인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불변하는 만고의 진리를 평소 염두에 두는 사람이라면 사주팔자를 보는 가게 앞에서 맹신하며 기웃거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내심 흐뭇했다. 결혼식에서 더없는 축하를 보내고 덤으로 노후의 좋은 팔자까지 보장받은 후 무사히 귀가하는 오늘의 운세는 완전 대박이다.
-끝-
(2015 6 5)
첫댓글 저도 엊그제 하도 심란해서 지인을 따라 사주팔자 비슷한거 이만원 놓고 봤어요. 너무 믿는것도 안되지만 그래도 좋은 얘기만받아들이고 잊어버려야 건강에도 좋고 만사 열심 살아갈꺼라 결론얻었답니다. 근데 재미있기는 하대요 신기하게도. 솔깃하기도 하고 무슨얘기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선배는 자연스럽게 소재를 끌어내어 재미나게 잘 풀어가는 글이 저는 꼭 배우고 싶은 글솜씨 중에 하나랍니다
무슨말씀!
미성씨가 얼마나 예쁜 글을 쓰는 사람인지 나는 알지요.
끝없는 공부,우리 서로 부단히 노력합시다.
복채가 올랐군요?
나는 만 원을 줬는데-ㅎㅎ재미있어요.
나도 점 보러 가야겠어요,
갱년기가 넘 심해요. 누가 요런 걸 맹글었는지?????
미성씨!!
담에 나랑 한번 동행하자구요.
미경언니야는 안봐줄껄... 볼 필요 없는 사람은 안봐준다카던디. 방세 내라소리 안하는 음전선배라 부담없이 가끔 여기로 발길을 돌리곤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