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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장 1-3절(오직 예수 그리스도) ) 07. 05. 27 오전 11시.
1장 1절에 보면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사도라는 말이 붙어 나옵니다. 그냥 바울이 아니고 사도바울입니다. 이 편지를 사도의 자격으로 쓴다는 겁니다.
사도란 자기가 하고 싶다고 아무말이나 지껄여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사람들이 평소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아예 이해할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는 다른 세상, 다른 운명을 펼쳐보이겠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나님과 세상은 이렇게 서로 의사가 안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그 본성상 하나님을 싫어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만 일하시고 일체 인간의 욕망중심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돈이 필요합니다. - 안개니라.
애가 아픕니다. - 안개니라
제가 이런 소원이 있습니다. - 안개니라.
누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되고 싶겠습니까? 아예 짱박히는 가로등 되고 싶죠.
사람들은 고달프게 사는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고달픈 자기 운명을 어떻게 해서든지 안고달픈 쪽으로 바꿔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사회전체가 이런쪽으로 움직이기에 그 물결에 휩싸여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구조란 이것이 전부다 나한테 이득이 되는 쪽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인간의 언어란 바로 이런 면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란 전부다 자기존재를 확정짓고 확장하는 면에서만 소통이 가능한 겁니다. 한마디로 나 알아달라는 모든 표현이 인간의 언어입니다. 나 알아 줄거야? 그럼 네 말 들어줄게? 그럼 너도 나 알아줄꺼야? 그럼 나도 네말 들어줄게. 이 구조를 못벗어납니다.
그것이 여의치 안될때는 대화가 꼬이고 관계가 단절되는 겁니다. 적당히 서로 서로 알아주는 한에서만 말이 되는 겁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서로 서로 상호인정하는 한에서만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하지 어느 한쪽이라도 자기를 안알아 준다 싶을때는 삐지고 등돌리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라도 마찬가지고 부모자식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차 자기 욕망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용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이고, 그걸 알기 때문에 더러워서 참아주고, 서로를 칭찬해주고 그러면서 관계를 유지해 갑니다. 설사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런식으로밖에는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시작부터 이런 인간의 요구사항들을 일체 묵살하겠다는식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는 더 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평소에 사람들이 듣고 싶고 좋아하고 기뻐할만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그런 소리를 들으러 왔거든 아예 번지수를 잘못 찾아 왔다는 뜻이 됩니다.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인들이 맨정신으로 알아들을수 있는 말이 아닌겁니다.
1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한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세상을 방문했던 예수님이 당한 그 사건만 가지고 이 세상을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 사건이란 바로 자기욕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이 세상은 이미 저주로 처리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운명은 저주입니다. 이미 저주받은 세상입니다. 사망선고받은 세상이라는 겁니다. 저주로 확정되었기에 그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당한 그 사건으로 이 세상을 저주로 확정지은 운명을 사도는 기정사실로, 그냥 장난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된 상태에서 쓴 글이기에 그것을 알아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함께 고백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겁니다.
(갈 1:13-15)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때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헤로 나를 부르신 이가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열심히 하면 소원들어주는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자기 열심을 인정해주는 하나님,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것을 무시하는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를 직접 만난겁니다.
예수 만나고 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죄이며, 내몸을 믿는 것이 죄이며, 나라는 인간이란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그 저주를 그대로 당해야 마땅한 인간임을 본겁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도록 이미 죄악에 가두어진 현실을 본겁니다.
이 세상이 아예 저주안에 갇혀서 지옥가도록 되어 있는 세상 전체의 확정된 현실임을 보게 된겁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정된 현실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서 만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 두분의 약속안에 있는 선택에 의해서만 하늘나라 갈 사람도 이미 확정되어버렸다는 사실도 알아버렸습니다.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를 직접 만난겁니다.
(갈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자랑할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이제 이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고 이미 이름이 지워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볼일은 하나밖에 없다는겁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 운명이 자기운명으로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운명이란 확정된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다가 지옥갈 사람이 있고, 십자가자랑하다가 하늘나라갈 사람으로 나뉘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옥갈 인간의 특징이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자기가정, 자기직장, 자기교회, 자기나라 등등. 성도란 십자가안에서 자아가 늘 해체되는 지경에 놓인체 살아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것이 은혜와 평강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입니다. 십자가외에 달리 꺼내놓을 것이 없는 죄인의 모임.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고 형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사도란 주인이신 예수께서 부리는 종이기에 예수님의 말 외에는 이 세상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런 줏대, 그런 배짱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십자가 자랑합시다.
갈라디아서 1(4-5) /악한세대, 대신죽음, 영광, 교회
(갈 1:1-3)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좆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정말로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진 교회라면 사도의 이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는 이런 이야기가 전혀 이상스럽게 들리지 않아야 하고 더 나아가 이런 소리가 기쁨으로 다가와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진 교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일이 주로, 사람들에게서 난것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들로 채워서 교회의 교회됨을 내보이려는 움직임으로 분주하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교회론에 따르면 필경 교회가 아닐 경우에 해당됩니다. 교회가 아니라면 사람이 만든 단체에 불과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좋게 하는 행진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마귀와 붙어서 놀아나고 있는 중이라고밖에 볼수 없겠습니다.
사도가 받은 은혜의 선물보자기를 쫙 펼치니까 그것이 4절과 5절입니다. 이 보따리를 함께 풀어놓고 받은 은혜를 맞춰볼수 있어야 교회입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2) 하나님의 뜻대로
3)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4) 영광이 세세토록 예수님 한분에게만 다 돌아간다.
“하나님의 뜻”이란 고정되고 확정되어서 움직일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확정된 사실이 세가지 나옵니다. 은혜란 이 세가지 사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을 말합니다.
1) 우선은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의 구덩이 같아서 자기가 실력발휘해서 빠져나올수 있는 구덩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뭘 해도 소용없습니다. 심지어 성경말씀대로 믿고 행하고 신앙생활하고 봉사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면서 이웃을 사랑해도 다 헛짓입니다. 이 세상을 거대한 가마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가마솥 밑에서 불을 때고 있는데, 그 속에 들어 앉아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으면서 시원하다 시원하다 하고 있는 겁니다.
2) 또 한가지 확정된 사실은 이 악한세대에서 빠져 나오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도 확정되었습니다(고후 5:21). 이 확정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면 악한세대에서 빼내는 일에까지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빼내놓고 알아서 살아보라는 구원이 아닙니다. 빼내기만 하고 알아서 살아보라고 하면 그것은 확정이 아니고 미확정입니다. 이미 확정된 예수님의 대신죽음의 능력에 아예 못박듯이 고정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의 대신죽음 안에서 영원토록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신죽음만이 의가 되고 생명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은 곧 이 지상이 전체로 죄악되며 다 죽음임도 확정되었습니다(고후 5:15).
3)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확정하신 것은 뭡니까? 5절입니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 세가지 사항이 따로 따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확정된 상태를 그대로 적용시켜서 구원해내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구원입니다. 그것을 우리보고 확정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로 다 이루는 겁니다(요한복음 19:30).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사항을 그대로 밀어붙이듯이 적용시키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일컬어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4:16).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21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란 악한세대의 그 악함이 뭔지 모르는채 주어지는 경우란 없다는 말입니다. 갈 2장 21절에 보면 그 악함이 뭔지가 나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자기 행함으로도 가능하다고 나오는 그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대신죽음을 헛되게 만들려는 짓이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함의 정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내가 받고 싶은 은혜 챙기고, 내가 빌어서 내가 받고 싶은 소원 챙기겠다는 이런식은 사도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자는 수작이 되는 겁니다. 악한세대라는 그 확정을 폐하는 것이 되고, 또 하나는 오직 예수님의 대신죽음안에서만 의가 된다는 확정도 폐하는 것이 되어서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로만 되어지는 구원을 헛되게 만들려는 시도로서 죄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확정된 이 세가지 사항에 함께 고정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아서 십자가에 고정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아서 내가 펄펄뛰는 그런 구원은 사기입니다. 도리어 이미 확정된 은혜가운데서 죄가 뭔지 알게 됩니다(요한복음 16:8).
오늘 본분 4절과 5절의 말씀에서 찾아 봐야 할것은 없는게 뭔지를 찾아야 합니다. 없는것이 뭔지를 먼저 찾아서 그 없는 것을 아예 찾을길이 없게 되어 있는 그런 운명속에 놓인 상태를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없는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1) 내뜻이 없습니다.
2) 내 행함으로 된것도 없습니다.
3) 내가 따로이 받아 챙겨야 할 내 영광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에 보면 예수님의 대신죽음의 공로가 이정도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도 보면 “내가”라는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은혜받은 교회란 예수님의 대신죽음안에 담긴 영광을 담아내는 일종의 그릇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릇은 그냥 내용물을 담아내면 되지 내 행함을 집어 넣어서 뭔가 따로 챙기겠다는 것은 자기주제파악이 안되고 있는 겁니다.
그 은혜의 선물보따리를 풀어 보니까 그 속에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것이 아예 없다는 이점이 아주 심히 우리를 안심시키는 대목이 아닙니까? 그릇은 그냥 담아주는대로 담아내면 그뿐입니다. 내가 그럴 필요조차 없을정도로 예수님의 대신죽음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의 대신죽음의 은혜안에 놓인사람같으면 이런 소리가 참 안심되고 기쁘고 괜히 옆집에 가서 이야기해주고 싶은 그런 소리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자꾸 자기 있는 것에, 뭔가 덧붙이겠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읽어요. 그런식으로 성경읽는 사람은, 내가 뭘 해야 은혜받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내가 무엇인가 노력을 해서 내뜻을 하나님앞에 도달시켜서 뭔가 이루어 내고 얻어내는 것을, 은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선물보따리를 보면서 얼마나 실망할것이며 얼마나 짜증날것이며 얼마나 분통터지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마도 성경을 덮어버리고 싶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쪽에서 더 받고 덜받는다든지, 받아내려는 노력을 한다는 이런 이야기는 아예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놓여져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식의 은혜가 복음안에서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쏟아지게 되면 “내가 뭘 한다는” 자아가 통채로 사라진다는 것이 기분나쁘다는 겁니다. 내가 뭘 한다는 것이 사라지게 되면 내가 내 의를 쌓아서 하나님께 받아챙겨야 할 영광도 함께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라는 것을 인정못하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대신 죽음만 의가 된다는 그 확정된 세계도 인정못하겠다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세상을 두쪽 내어 버리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리 되면 자기 자리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만 영광받는 것은 싫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정체이고 이 세상의 악함의 정체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나쁜 버릇이 몸에 배어 가지고는 뭘 해도 내가 뭘할까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모양입니까? 이런 사고방식에 쩔어서 매사 이렇게 나오는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내가” 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죠. “그리스도” 가 들어가셔야 할 그 자리에 자기를 집어 넣고 싶어서 환장한 이런 점이 바로 우리의 악함이고 죄성입니다. 이 지상에서 자기영광 따로 챙기겠다는 의도가 늘 잠복해 있다가 튀어 나오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조차 속수 무책으로 그런 의도를 예수님앞에서 쏟아 냅니다. 악한세대는 자꾸만 자기가능성을 부추기고 부채질합니다. 그것을 안들키겠다는 식으로 한다든지, 자기 스스로 밀어 내겠다는 식으로 하는것조차 복음은 다 속속 들추어내고, 그것을 사그리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죽음의 용서와 다 이루신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시기에 교회는 문득 문득 회개하면서 기쁨에 차고 감사가 가득 차서 예수님의 대신죽음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저수지에서 수로에 물 흘려 보내듯이 죽죽 밀려 내려가는 겁니다. 그렇게 한없이 내려오는 용서의 은혜에 밀리고 또 밀리면서, 그 은혜를 감사와 기쁨으로 계속 흘려 내려 보내게 됩니다. 내 죄를 맘껏 들켜도 좋은 엄마같은 주님의 푸근함(사랑)이 교회를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런 교회가 십자가 자랑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6-10)(복음, 다른복음)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좆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사도는 세상을 들여다 보는 아주 특별한 시야를 보여줍니다. 복음과 다른복음이라는 두 틀로 세상을 쪼개어 보는 시야, 혹은 시선입니다. 사도가 보기에 세상은 복음이라는 층과 다른 복음이라는 층으로 세상이 분리되어 있는데 인간이란 그 두 층 어디인가 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다고 보는 겁니다.
사도는 맨눈으로 세상을 보고 ‘정상이다’ 혹은 ‘이상하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안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복음안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이 도데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정상이 아니냐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좆는” 그 정도로 정상이 아닌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예 세상은 정상적인 구석이 아예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좆는 것을 보니 인간의 형편없는 정도가 개인의 자질이나 실력을 아예 싸그리 무시해도 할말이 없을만큼 이상하고, 그 이상함은 단지 개인적이 아닌 어떤 세력이 포진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자기 자질을 발휘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이미“나는 지금 마귀가 주입해 준대로 다른 복음을 열심히 좆고 있는 중입니다”하는 자기믿음의 표현이 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이길래 사람의 마음에 그토록 쫙쫙 끌리듯이 들어 맞는 겁니까?
10절에서 사도는 복음을 좆는 입장에서 복음안에는 자기를 기쁘게 할 자리, 혹은 입장, 처지에 아예 놓여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복음을 좆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기쁘게 하기, 다른말로 나를 즐겁게 하기”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이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따라서 따로이 나를 기쁘게 할 여지는 없음”이 됩니다. 다른 복음이란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기”로 압축됩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내가 기쁘면 그것이 정상인것이고 내가 안기쁘고 안즐거우면 그것은 비정상이라고 보는 자기몸 중심의 축복과 저주의 이 사고방식을 평생 사는동안 어린시절부터 계속해서 사회로부터 주입되는채 살아갑니다. 매사를 다 그런식으로 보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준다해도 그렇게 밖에는 읽어내지 못하는 겁니다.
“나보고 똑바로 살아서 구원받으라고 하는구나” 이런식으로 읽는다는 겁니다.
사도는 그런 상태를 고린도후서 4장에서 세상신에 매여 있는 상태로 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다가 와야만 훌렁 껍질 벗듯이 벗겨질 사항이지, 절대 어떤 인간도 자기 실력 발휘해서 깨닫고, 잘믿고, 열심내서 되어질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는 도리어 그런식으로 자기 개인적인 자질을 발휘하는 식이 바로 저주받을 짓에 해당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저주를 자기가 알아서 풀고 축복으로 바꿔놓겠다는 소리가 되고, 그것은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는 짓이며, 세상신인 마귀짓임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까요? 그게 남이야기가 실제 자기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고 나면 다른 복음의 현실이 훤히 들여다 보여야 합니다. 뭐가 이상한것인지 정상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거짓복음을 거짓복음으로 알게 하는 능력입니다.
6절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예수 믿은 것이 내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7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행함 곧 4절에 있는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리신”것만 고스란히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내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힘들여서 해 놓은 것이 일체 없다는 뜻입니다. 10절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만 고스란히 담아서 내놓을 뿐입니다. 그런 용도로써 쓰임받기에 예수님 말외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이게 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복음의 세계는 개인적인 자질을 발휘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예 다른 세상인겁니다. 어떤 잘난 인간이 나서서 잘난체를 할수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이동네는 어떤 사람이 잘난체를 한다는 그게 이상하게 보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질을 발휘해서 뭐가 된다는 그런 소리를 한다는 그런 소리가 아주이상하게 들려야 그게 정상이 되는 겁니다.
지옥과 저주의 실상을 알지 못한채 천국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주가 뭔지도 모르고 천국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옆에 달린 강도는 낙원만 알고 간것이 아니라 지옥의 생생한 실상을 알고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 지옥의 실상이란 죄인주제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겁니다. 어떻게 멸시했습니까? 나를 구원해주면 믿어 주겠다는 겁니다. 나중심입니다. 인간구원중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서 믿으라면 믿고, 실천하라면 실천해서 자기구원챙기고, 자기복 챙긴다는 이런 식은 자기 전부 거짓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저주와 축복의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한켠에 있던 강도를 통해서 저주아래 갇혀 있는 인간의 실상을 확실하게 보여줬고, 예수님의 십자가옆에 달린 또 한 강도는 그 모습 그대로 나는 이렇게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며,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이 의인임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강도를 낙원에 보냈습니다.
이것이 복음과 다른 복음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양편에 있던 두 강도 다 저주속에 묶인채 옴짝 할수 없는 처지에서, 다만 한쪽은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로, 예수님의 솜씨로만 낙원에 가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찌어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님이 대신 받은 그 저주의 죽음만을 자꾸만 꺼내놓습니다. 그때 이 세상의 저주스런 면모도 함께 폭발하듯이 터져 나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꺼내놓는 그 일이 그리스도의 종의 기쁨이고 종의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대신 저주의 죽음만이 생명이고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저주의 죽음안에서, 세상과 자기저주를 볼 줄 모르는 그 인간이 정말 이상한 인간입니다. 그런 이상한 인간들만 잔뜩 몰려가서 안심하고 믿는 복음, 그렇게 안심하다가 확실하게 지옥가도록 되어 있는 그 복음이 다른 복음이고 거짓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7절(2007년 6월 17일) (아들을 위한 복음)
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복음을 모르고서 구원되는 경우란 없습니다. 복음을 알고서 지옥가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복음에 다가가서 구원되지도 못하고, 자기가 원해서 자기 맘대로 지옥가지도 못합니다. 복음이 천국갈자 지옥갈자를 확정해 놓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힘을 행사하는데 그 행사된 힘을 그대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 형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어린애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기적을 보고도 회개치 않는 세상 형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기적을 행사했어도 회개치 않는 것처럼, 구원이란 인간의 힘과 능과 지혜로는 도저히 될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다만 복음을 알게 되는 어린애 같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 등장하게 될터인데 그들의 특징이란 자기지혜가 없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받고 그 받은 것을 고스란히 꺼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처럼 말입니다.
사도가 받은 복음은 15-17절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취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복음으로 구원하는 취지란 내 구원이 아니고 아들을 자랑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아들을 자랑하고 높이는 일에 나를 껍데기로 그릇으로 이용하는 일로 쓰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나를 위한 그런 구원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비밀처럼 담겨있는 이 취지는 구약부터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열심낸 사항입니다. 이사야서 9장 6-7절에 보면 하나님의 열심가지고 성사시키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리에 앉혀서 왕노릇 하게 한다는 약속입니다.
그 처음약속이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대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쳐서 부수는 사명을 감당하면 달성될 일입니다. 그 약속을 이룬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요 19:30). 십자가사건으로 확정된 그 약속대로 세상은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에 속한 자손들로 쫙 쫙 바닷물 갈리듯이 갈리우는 일만 남은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일체 인간의 자기역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 현실이 그대로 우리속에 담겨서 우리가 열심내서 우리가 퍼담은 거짓현실이 폭로당하고, 폭파당하는 현실입니다.
인간의 열심은 옛날에 사도가 몸담았던 유대교의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유전이란 할례와 안식일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구원에 합류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그 조건을 구약에 주어진 모든 말씀으로 삼았지만, 최고의 조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운명이란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에는 유대교의 핵심을 ‘자기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조상의 유전 곧 인간들이 이미 만들어놓는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부합하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기존의 전통과 질서란 다 자기의를 고스란히 꺼내서 쌓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쓰레기더미인 셈입니다. 자기의에서 인간의 열심나오고 다시 자기의로 회수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이 이런 곡선을 그리면서 다 자기에게로 회수되기에 인간은 결코 자기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온 현실이란 내안에 쓰레기처럼 들어차는 자기의, 내가 열심내서 뭐가 되었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약속에 의해서 폭파당하는 현실입니다. 내가 열심내서 되었다고 여겨진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살해한 원수짓거리 인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런 내것은 날라가버리고, 주님의 공로만이 고스란히 남게 하는 작업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실시되는 현장이 된겁니다.
사도의 복음이 사도에게 들어오는 방식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방식입니다. 사람손이 일체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취지대로 행사하는 것까지도 사람손이 일체 닿지 않습니다. 주님손에 의해서 내 배를 가르고 쑥 집어넣어 주는 식으로 복음이 내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복음을 알아먹을 도리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갈 3장 14절에는 성령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내 속에 복음을 밀어 넣는 손길에 의해서 사도는 속없고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처럼 되어서 이리 저리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그일로” 쏘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것 자랑못해서 환장한 세상, 자기의 꺼내놓지 못해서 허천난 세상입니다. 그래서 생존이 가능하고 돈벌이가 가능합니다. 그 속에서 속절없이 휘돌려 살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복음에 의해서 자기의가 매일 매일 날라가는 속없는 인간,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그런 인간. 그래서 누가 뭐래도 거침없이 어린애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은혜라고 어린애처럼 고백하는 그런 인간. 내가 뭘 해도 나는 죄인에 불과하고, 예수님의 공로외에 자랑할게 뭐냐고 줄기차게 고백하는 인간.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 의해서 나지 못하고, 결단과 어떤 열심가지고 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공로로만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24절 (그 믿음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란 구약때부터 한가지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언약안에 담긴 의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안에 담긴 의는 언제나 흠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지상에서 사람들이 지어내는 어떤 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계속 파고 들어서 근원까지 파 헤쳐서 처리하겠다는 의도로써 이 지상에 언약에 의를 담아서 내려보낸 겁니다.
사람들은 이점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뭘 내려주니까 그것을 잘 이용해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가 집결하고, 그 집결된 자리에서 언약안에 담긴 의가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그 희생을 기준으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됨을 구약성경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성사된 자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란 예수님의 죽음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버지고, 이 세상이 아들이라면 항상 말을 건네오시는 것이 이것뿐입니다. “네가 내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어찌 보느냐?”
요한삼서 1장 2절의 말씀으로 바꾸어서 말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랑하는 화평교회야! 네 영혼 잘되게 하는 내 아들의 십자가피만으로 너는 오늘도 횡재한 인생이야! 맞지? 오늘도 그렇게 믿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데 아들의 희생외에는 아예 다른데 관심이 없는 것이 동일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이런 식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위해서 주님이 몸도 주셨는데, 그보다 작은 것은 못주겠는지요? 제 앞에 닥친 범사가 다 저의 강건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고방식이 맨 이런 믿음으로 충만해 있으니, 오늘 우리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해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판국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맨 자기 인생 구멍 뚫린것, 메울생각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힘좀 쓰는 분이니까 힘꽤나 쓰는 분 믿어주고, 그 힘을 좀 끌어다 쓰자는 식입니다. 교회와서 자꾸만 보기를 원하는 것이란, 내 인생의 구멍난 부분, 그래서 행복이 술술 빠져나가는 허술한 인생을 꿰매어줄 메시아 보기를 원하고, 내가 원하는 행복 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 주면 그때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겁니다. 내 몸이란 이런 항의시위가 매일 벌어지는 농성장이 됩니다. 내 인생을 개선시켜 주지 않으면 십자가고 뭐고 때려치우겠다는 시위가 벌어지는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런 시위를 매일 매일 부추기는 마귀를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야! 너 혼자 예수 믿어? 꼬라지 하고는.”
오늘 사도바울이 증거한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가 듣고 신나했던 믿음이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믿음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는데 그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전에 핍박하고 잔해하던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전한다는 소리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22절에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바울의 몸에는 자기가 증거하는 복음이 자기몸의 현실이 되어서 아예 생생한 낙인처럼 찍혀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겁니다. 따라서 반드시 두가지 점을 내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심판성, 저주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저주를 넉넉하게 이기는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와 사랑이 외부에서 볼때는 절대로 노출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꽁꽁 숨겨져서 감추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겁니다.
저주스런 십자가안에 보석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것처럼, 사도의 몸을 휘감고 평생을 따라 붙을 그 저주스런 낙인(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한 사람)이 찍힌 몸 속에 보석같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도가 복음 전한다는 소리를 듣고,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내듯이 그걸 알아보고 좋아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도속에 살아계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들여다 보았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하는 것을 보면서, “야! 복음은 진짜 대단해. 대단해. 정말 끝내줘. 역시 구원은 십자가공로로만 되는거야”라는 점을 또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란 반드시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덮쳐오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부인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절대로 되어질수 없는 일임을 확인하는 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복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외에 다른 것 보기를 원치 않게 됩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겁니다. 겉으로 보면 다 문둥이에 중풍병에 별별 더러운 몸땡이인데, 서로 서로 그 속에 담긴 진주를 보고, 다이아몬드를 보는 것같이 즐거워하고 신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로마서를 강의한 책인데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근호 저)라는 책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예화가 나옵니다. “언니가 동생을 그네 태웁니다. 동생은 무섭다고 죽겠다고 하면서 내려달라고 하는데 마구 밀면서 재미있지? 재미있지? 그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루실 때, 그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원되었음을 더욱 더 깊이 알기를 원하고, 그 복음의 능력을 맘껏 자랑하는 쪽으로 인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우리의 잘남을 한없이 죽여서 내 힘으로 된 구원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겁니다. 죄인인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더 많이 더 깊게 알아야 합니다. 이미 범사에 철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어줍잖은 자신의 손바닥 만한 믿음으로 가리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1-5) 달음박질
복음듣기 위해서 모이고 복음을 듣는 기분이란 어떤 기분이냐고 할때에 제가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배고픈 개가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날름 먹어 치우고는 감지덕지해서 꼬리를 살살 내둘루면서 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그런 기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복음이 시시하게 여겨지는 경우란 어떤 경우냐?
그 개가 자기를 개로 파악 못할때입니다. 내가 개냐? 이렇게 나올때는 복음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마구 밟으면서 도리어 복음에다가 화풀이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은 자기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성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파악했을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나라는 주제는 푸른 초장도 뭔지도 모르고 쉴만한 물가가 어딘지도 모르는 겁니다.
한마디로 알아서 의의길로 갈수 없는 처지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함”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인간이 사망의 세력안에서 못빠져 나가는 사망에 불과하고 죄인에 불과한데 그런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주제를 이렇게 파악할 때만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그 자체가 부족함이 없는 고마움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과 5절을 그냥 얼핏 보면 예수님이 자기 몸 드려서 나를 구원한다는 이야기로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이걸로 일단 챙겨놓고 세상살이는 별도로 챙겨야 하는데 그것은 뒤에 나오는 명령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 해결 본다는 식으로 대하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보니 성경보면서도 자기것 쳐다보기 바쁩니다.
내 세상살이 따로 있고 복음 따로 있는데 나와 복음을 어떻게든 연결시켜서 유익보겠다는 사고방식은 자기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무슨 능력을 발휘해서 축복과 저주를 달라지게 할 어떤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성경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뜻대로 자기바램대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라도 복음을 가차없이 버릴 태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신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겁니다. 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 홀로 다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마태복음 5장 17절 - 20절). 마태 8:15-17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전체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진 죄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용서란 십자가안에 담긴 그 죄를 깨닫게 하는 식으로 다가오지 다른방식은 없는 겁니다. 십자가란 예수님께서 홀로 자기 죽음으로 다 짊어진 우리의 죄짐 보따리를 풀어 놓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숨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망의 진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죽은 인간이 맞습니다 하는 사항을 통보받는 겁니다. 동시에 그 죽은 인간을 살리는 능력이 예수님의 대신 죽음의 공로임도 아울러서 통보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로써 기존의 죽음과 생명이 예수님 죽음안에서, 새롭게 교체되는 작업을 당하게 됩니다.
2절에 보면 “계시를 인하여”라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서 자기목숨이 예수님이 생명으로 교체당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죽음 보따리(십자가)를 아예 등짐지우듯이 지워서 여기 저기 풀어 놓고 선전하면서 다니라고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그 십자가안에 들어 있는 말씀의 짐보따리가 아예 나를 데리고 다니는 방식입니다.
말씀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의를 가지고 실력행사를 합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의 제출이 다 십자가의 위력이 이렇게 나에게 실력을 행사해서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입장인데, 말씀이 살아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쪽으로 살아서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을 실어서 달음질치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겨냥해서 십자가의 위력을 증거하는 쪽으로 실력행사합니다.
“내가 이방인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을 그대로 유대인에게도 그대로 제출했다는 이 대목은 이 세상은 이미 복음에 의해서 다 접수되었다는 겁니다. 복음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이 세상 전부 다 사망처리 되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복음을 제출하기 위해서 여기 저기 달음박질하게 하면서 이 세상이 진짜로 죽어 있는 사망상태임을 확인시키고 다닙니다. 그 복음에 반응하고 반색하고 함께 수고하기를 마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서 나온 생명교체작업을 당한 자가 아니면 안되는 일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와서 애굽의 군대가 몰살당한 시체를 구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안에 있는 그 현실이 진짜 현실임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복음의 능력과 소중함을 알게 하시는 가운데 복음을 증거케 합니다.
갈라디아서 2(1-10) 자유
전도서에 1장 8절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할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 그러면 어디로 도망치는것을 생각합니다. 집안이 힘들면 집밖으로 도망치고 싶고, 학교가 힘들면 학교에서 도망치고 싶은 겁니다. 직장이 힘들면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가난이 힘들면 가난에서 벗어나고프고요.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현실로 달음박질하는 것을 사람들이 소위 자유라고 부르는 겁니다. 옛날 어떤 가수가 부른 가요중에 그런게 있었습니다.
벗어나고파 그대에서 벗어나고파! 어떤 학자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상(꿈 유토피아)는 배고픔에서 비롯된다고요. 사람은 평생 배고픔(결핍)에 시달립니다. 사회는 계속해서 배고픔이라는 의식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더 나은 현실을 환상처럼 꿈꾸게 되고 그 현실속으로 비상하는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유란 한마디로 욕망의 질주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냥 계속되는 이렇다할 향방도 없는 질주와 서로 서로 부딪히는 충돌과 혼란뿐이어서 정작 이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면서 아예 방치된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사도가 말씀하는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냥 방치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 분명한 기준이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한쪽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고, 한쪽은 평생 살아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가 뭔지도 모르도록 조치하는 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겁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이 세상은 그리스도안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느냐 그렇게 두종류의 인간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똑같은 내용물이 있는데 그 내용물이 자유입니다. 자유! 오자유. 김자유. 노자유. 반대로 그리스도밖에 있으면 무조건 자유아닌게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20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그리스도밖이란 온세상인데 그 세상은 악한자 안에 처했다고 되어 있고, 그리스도안이란 그 악한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그런 영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렇게 완전히 자유케 하는 구원이고 아예 사망과 악과 온갖 저주로부터 떼어놓는 식으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 끝난 사항입니다. 사망신고를 해 버립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아예 호적정리가 끝난 겁니다. 짐 옮기듯이 옮겨버린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자유입니다.
어느정도로 자유하냐면, 아예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따로 책임질 필요도 없어요. 죽은 놈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닌데 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볼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개입해서 살려낼수 있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자기 몸을 드려서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 죽음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을 작렬하고 계시기에 사는 생명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그 자유의 상태와 자유아닌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자유입니다.
결코 사망이 없나니.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이런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밖에는 결코 정죄함밖에 없나니
그리스도밖에는 결코 사망밖에 없나니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밖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밖에 뭐가 있습니까? 사망만 넘쳐나고, 정죄만 넘쳐나고 저주만 넘쳐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영생만 넘쳐나고 용서만 넘쳐나고 축복만 넘쳐나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되었는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속에 무슨 요구가 들어 있느냐 하면 육신으로서는 할수 없도록 한다는 그 요구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할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겁니다. 할수 없다는 그점을 기쁘게 수용하는 그것까지 포함해서 이룬겁니다.
2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엿본다고 되어 있고 또 종으로 삼고자 한다는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도가 끊임없이 어떤 세력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유혹과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야만 되고 또 그런 유혹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라면 그런 입장에서 나는 자유롭다고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정작 자유로와야 할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것같이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유혹과 공격받는 환경 속에 교회를 놓아두는 이유가 교회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교회의 적을 통해서 교회로 하여금 자기정체를 파악하게 하는 겁니다. 반대로 이 말은 교회를 통해서 적의 정체를 폭로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거짓형제가 나오는데 이들을 특징지우는 단어들이 할례받게 하는것, 외모를 보는것,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것. 이런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할수 없는 것을 할수 있는 것으로 바꿔놓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 유혹과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은 할수 있다 할수 있다 그걸 외칩니다. 마귀는 늘 이것으로 공격하고 미혹하는 겁니다. 할수 있다 할수 있어야 교회되는 거야 할수 있어야 구원받는거야 할수 있어야 성도다운 거야 이런 식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뭔가를 할수 있다는 것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내보이는 시범조로 불려나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유케 하는 시범조로 누가 걸렸냐 하면 간음한 여인이 걸렸습니다. 어이 조교. 위치로. 그렇게 해서 걸려 나온 사람들이 문둥병자, 소경, 간음한 여자, 창녀, 세리,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창녀라서 구원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혹은 세리라서 병자라서 사회적인 약자라서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강자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이란 이렇게 자유케 하는 방식으로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뽑힌 시범조교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간음한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를 예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데 그 자유케 하는 과정속에서 여인은 두가지 사항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쳐 놓은 율법의 정죄안에 가두어진상태입니다. 한 마디로 아무도 못빠져 나오라고 거미줄 쳐놓은 것입니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 구원받을만한 행위가 나올수 있느냐 없느냐 그문제가 아니고 아예 처지가 그렇습니다. 율법은 구원 못되라고 쳐놓은 겁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로 구원되는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의 구원방식이 예수님이 자유케 하는 방식이 그대로 품어져 나오는 사람이 형제입니다. 예수님이 자유케 해야 자유케 됩니다. 진리되시는 분이 자유케 해야 자유케 됩니다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조교 위치로! 시범조교와 같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2:11-21 (내가 사는 것)
사람이 자기의 처지를 쳐다보거나 혹은 다른 사람 쳐다 보면서 잘산다 못산다 하는 기준으로 삼아서 달음박질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모래위에 집을 짓는 식의 헛수고를 하는 셈입니다. 신앙세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양새를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 것은 얼어붙은 바위벽을 맨손으로 올라가겠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뭘 했으며 뭘 할수 있느냐 하는 인간의 행함과 모양새로 따질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무슨 일을 하셨으며 그 일이 지금 어떤식으로 이 지상에서 펼쳐지고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사람을 육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로 표현된 사람의 특징이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약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돌고래 쇼장으로 치면 절대로 돌고래고 점프해서 뚥고 나갈수 없도록 단단하고 높고 쳐진 천정같은 겁니다. 그 밑에서 돌고래가 쇼를 합니다.
점프 점프 하면서 어떤 높이만큼 닿거나 통과하면 조련사가 보상으로 맛있는 먹이를 줍니다. 믿음안에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안에는 죄인의 대표격으로 뽑힌 이스라엘의 죄성,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율법에 대한 태도로 보여주고 나타났던 그 죄성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은혜란 노력하고 수고한만큼 보상받는 이것이 은혜의 구조라는 겁니다. 돌고래가 쇼하고 고등어받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죄악된 구조를 껍데기 처럼 뒤집어 쓰고 있는 인간을 육체라고 하는 겁니다. 그 구조가 율법의 투입으로 말미암아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폭로되고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피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고 은혜임도 온천하에 다 드러났습니다. 이 지상의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그 껍데기를 깨고서 구원될 수 있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육체로서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할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말씀을 이용할뿐, 말씀에 순종할 맘이 일체 없는채 죄악만을 생산하는 세포의 모임이 곧 육체입니다.
구원된 몸이란 육체의 행함과 무관하게 예수님의 행함만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구원된 몸의 현실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일방적인 예수님의 선택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존재이유란 내가 나를 존재케 하니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존재케 했다는 그 점이 나의 존재이유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나를 사랑하는 내용물이 나에게 고스란히 담길때 그 내용물을 내어놓는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의 이유가 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그 사랑이란 계속해서 내 육체를 죽이는 방식으로 내게 역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육체의 속성이란 창세기 6장에 있는대로 자기좋은대로 편할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평소가지고 살던 습관이 진리로 굳어진채 아무 때나 돌발적으로 튀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편한것이 기준인양 마구 이웃에게 전파해서 그것을 하나의 진리로 모양내기에 바쁩니다. 평소 습관이 그렇고 이것이 관성처럼 작용합니다. 용서의 기쁨이 어느새 날아가고, 신자다운 모양새를 본인이 연출해 내기에 분주합니다. 그리고 그런것들이 맞는 것인양 냄새를 마구 풍기게 됩니다.
그 육체가 관성처럼 머리를 드는 것을 십자가사랑은 계속 망치로 내려치듯이 죽이는 작업을 실시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사랑안에 들어 있어서 하늘나라고 인도함을 받는 현실입니다. 이점에 사도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외에 다른 것을 사랑의 기준으로, 교회의 존재의 이유로 세울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지상에 유일한 의의 기준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낼수 있는 어떤 표식도, 아니 육체 자체까지도 다 폐해야 마땅합니다. 육체로 사는 이유가 오직 십자가공로를 내보이는 것외에 달리 있을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육체들의 행진을 넓은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복음은 거짓복음입니다. 육체의 소원을 인정해주고, 육체의 시선으로 볼때 아름다워 보이고, 그것을 진리인양 간주해주는 방식은 어떤 모양새라도 다 예수님의 죽음을 훼방하는 짓이 됩니다.
나는 언제나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나는 언제나 나만 위해서 살줄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남의 눈치나 슬슬 살피고, 이목을 두려워하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말도 하고 침묵도 하고, 있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그리고는 그것이 맞는 것인양 남들에게 은연중에 전파하고 다니는 그런 몸땡이입니다. 그짓을 매일 매일 고발당하고, 그짓을 일삼는 육체가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우는 식의 인도하심이 곧 교회가 가는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에 밀착, 또 밀착시켜주시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복입니다. 신자다움이란 육체의 모양새와 무관하게, 다 같이 받은 예수님의 희생뿐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성경을 대하면서 가장 나쁜 태도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가 이대로 살아줘서 복받겠다는 그런 정신상태입니다. 얼핏보면 이것이 매우 고분고분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같은 매우 순종적이고 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점집찾아가서 소원비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신앙이란 인간이면 누구의 육체에서든 다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이런 종교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유대인의 것과 다르지 않은 죄악임을 파악케 하는 겁니다.
2절과 3절에 성령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막을 제대로 알려주는 일에 성령이 개입해야만 되고, 또 계속해서 성령의 개입으로만 깨달아지고 또 예수님과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그냥 종교성 가지고 성경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이란 해리포터의 마법사 지팡이 같은 것입니다. 쥐고 흔들어서 주문외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팡이 하나씩 주고 알아서 잘 사용하라고 준것이 됩니다. 개인 개인에게 처음 줄때는 똑같은 것 주지만 그 다음에 그것을 활용해서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법지팡이 사용하는 법이나 성령의 역사나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남들 다 하는 종교적인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성령받은 흉내나 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마법지팡이를 사용하는 방법이란 1) 주문을 정확하게 외워야 하고 2) 온정신을 집중해서 실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들려주고, 그 성경에 집중케 해도 결국 결론은 자기 소원에 집중하는게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는 이유란 하나뿐입니다. 자기소원을 계속 퍼올리기 위해서 모이고, 그 소원의 성취에 마음을 다지고 다지는 식으로 정신력을 몰입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모임이 힘이 되고 그 힘은 다시 자기에게로 나누어지겠지요. 이런식으로 사회가 형성되는 겁니다.
사람들 소원이란 다 한가지로 모아집니다. 생존에 유리한 조건들을 더욱 얻어서 이 땅에서 더욱 견고한 뿌리를 내리겠다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을 지금 전하는 사도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신상태로 이 말씀을 전하는 겁니까?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게 거하는 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다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 심판대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는 그 미래의 현실이 지금 매일 매일 들이닥치는 식으로 살아지는 몸인데 그런 현실이 사도에게 두려움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담대하고 만들었다고 하고, 그 담대함이 이 몸을 어서 벗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 지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보편적으로 다 가지고 살아가며 의심없이 피워내는 것과는 다른 기준,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는 안목입니다. 그 안목에서는 오직 한가지만 자신에게 존재의 이유를 준다는 겁니다. 그 한가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안목을 계속해서 열어주고 또 그 열린 안목의 삶을 살게 하는 그 일이 성령의 일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안목에서 볼때 무엇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됩니까?
십자가의 안목에서 볼때 무엇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주님을 화나게 하는 일이 됩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믿어지는 경우란 오직 한가지 경우 뿐인데 그것은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하는 그 경우외에는 없다는 뜻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한 십자가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육체의 행함은 일체 배제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쪽에서 노동을 보태서 뭐가 되게 한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성령이 준 십자가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바로 이점이 십자가에서 다 이룬 예수님의 말씀성취를 모독하고 따라서 주님의 진노를 자아내는 일입니다.
아브라함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앞에서 언약의 내막을 보여줍니다. 쪼개진 제물사이로 불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지나갑니다. 언약이란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선택한 제물이 될 운명으로 이 지상에 오시는 분과 맺는 겁니다.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 완성을 보는 언약이며 여기에 일체 인간의 행위는 개입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경우란 그 쪼개지는 제물과 함께 쪼개지는 식으로 합류했을 경우뿐인데 그일을 성령의 작업으로 됩니다. 즉 성령의 작업이란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를 그대로 적용하는 방식으로만 행사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합류된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는 경우란 그 십자가에 못박힌 나의 저주됨도 밝히 보이는 경우뿐입니다.
따라서 비로소 예수님의 행함만으로 완벽한 죄사함, 용서가 실시되는 현장이 십자가안뿐임을 고백하되, 절대로 육체로는 일체 공로가 되돌아갈수 없도록 하는 조치까지 완벽하게 취해줄때 진짜 성령 받아 아는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이하에 있는대로 성령께서 문득 문득 죄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행함만 의가 됨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때에만 그 의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성사됨도 감사함으로 알게 되고 기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 가는 곳마다 하는 짓마다 다 자기 살기에 급급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행위는 죄만 나오는 육체인데 그 육체를 살리는 능력이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우리에게서는 나를 기쁘게 하고파서 나오는 소원외에 달리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의 희생으로 완성된 의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겁니다.
갈 3:4-7 성령의 능력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예수님께서 벌이신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일의 내막이 끝없이 펼쳐지는 일로 성령께서 분주하게 활동하시는 겁니다. 그 능력의 열매로서 성도는 살아지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자기 주도권을 따로이 행사 못합니다. 주도권자체가 통째로 십자가에 넘기운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하시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효과로써 펼쳐짐을 알리신 겁니다. 예수님조차 성령으로 일하셨고, 성도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고스란 담아내는 일로 부름받아서 일생토록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로 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란 성도가 이 지상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관계없이 십자가를 담아내는 일생을 산다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복음이 증거되는 겁니다. 다 뭉뚱그리면 십자가자랑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자랑될때는 반드시 성령께서 능력으로 조치하시는 사항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육체의 행위를 잘라버리는 겁니다. 육체의 행위가 십자가공로에 섞이지 않도록 계속해서 조치하는 일로 능력을 행사하시는 겁니다.
도끼날이 위에서부터 내리 꽂혀서 장작을 쪼개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의 내막이 속살 비치듯이 훤히 내보이도록 까발리는 겁니다. 7절에 보면 성도를 아브라함 아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자손의 해석을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대판 싸웁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마귀자식들이라고 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보고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반드시 자신을 죽일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 보기에 황당하고 어이없지요.
실제로 십자가 사건이란 이 싸움이 빚어낸 충돌이었습니다. 육과 영의 충돌인겁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육을 쪼개면 바리새인 나오고 바리새인 또 쪼개면 마귀가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그와같이 육의 내막을 그대로 폭로하는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의 내막을 그대로 펼치는 일이 성령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이란 한마디로 육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태생적으로 가지게 되는 기존의 목숨의 가치를 존중해 달라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나의 생명과 그 생명을 감싸고 있는 소유를 그대로 놔둔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가진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보태주는 식으로 계속 뭔가 쌓아가는 식으로 구원해달라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란 그런 속성을 유감없이 일생토록 발휘하면서 살아갈 처지뿐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6절에 아브라함 자손이란 한분뿐이고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란 이 지상에서는 아예 날수 없는 겁니다. 육에서는 못나오는 겁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출현이란 반드시 이 지상의 어떤 육에서도 날수 없었다는 증거와 아울러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출생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증거를 외부로 내 보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증거가 뭘까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뿐입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성도가 내보일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능력이란 한터럭도 우리 육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도록 저주만 나오도록 조치를 취해서 사망으로 확실하게 골인하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육체의 결론입니다. 그렇게 사망만 나오도록 되어 있는 육체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의 증거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 피만 생명이기에 그 피만으로 구원된다는 십자가복음만 자랑됨은 그 안에서 맹렬하게 성령께서 자기 능력을 행사해 주실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곧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는 겁니다.
십자가안에는 예수님께 우리가 안겨준 괴로움이 충만하게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만 생명으로 내어놓는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당한 그 괴로움을 고스란히 맛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위력을 새삼 더 깊게 더 크게 더 넓게 밟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십자가외에는 달리 하나님께서 의로 정하신 것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8-14(복)
십자가사건이 담긴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양자의 관계란 '우리'는(갈 3:13) 저주만 피워내는 저주생산자가 되어야 하고, 두번째로 예수님은 저주를 이겨내는 의를 생산하는 의 담당자가 되는 관계맺음이 확정된 입장에서 이루어진 관계일때만 '우리'에 해당됩니다.
그때에 한해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받는자가 되는데 아브라함의 복이란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소지하거나 소유하는 소장용복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우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약속,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아내는 용도로서의 선택과 그 선택이 유효하도록 매일 매일 사용당하는 그 의의 관계를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성령의 약속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복이 개같은 이방인에게 전달된 취지, 곧 개같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취지는 십자가외에 달리 참세계는 없음을 개같은 이 세상을 까발리면서 증거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우리 자신의 몸에서 피워내는 복과 저주는 가짜이며 환상에 불과한것을 매일 매일 우리 자신부터 들키우는 작업이 성령의 능력으로 실시되는 현장입니다. 교회는 매일 매일 예수님의 저주를 경험하면서 십자가의 위력을 실감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복받겠다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들어온 복이 나를 가지고 놉니다. 진짜 복받은 사람은 십자가만 증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義)/이근호 목사
2006년 8월 13일 본문: 갈라디아서 3:22-24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보고 ‘죄인이다’고 지적하면 누구나 다 기분 나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죄인에서 벗어나 의인의 부류로 속하려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자진해서 죄인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어느 정도 의인이라고 간주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호응과 도움을 받을 확률이 많아지기에 그러한 보람있는 결과를 스스로 포기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자신을 의인으로 되는 틀로 삼게 됩니다. 이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실천에 옮기고 준수하면 점차 의인으로 간주되어 복도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여망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은 우리를 의인되게 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도리어 죄 아래 가두어두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즉 그 어느 누구도 성경 밑에서 죄인이 아니다고 할 자가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입니다.
만약 성경 말씀 그대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인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달라고 요청한 자격조차도 박탈당한 입장에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 복을 달라라든지, 구원해달라 라든지 말은 건방진 요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그 대신 다른 현실을 느끼며 삽니다. 예를 들면, 중앙일보 경제면에 보면, 매일같이 흔히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부동산 가격에 대한 정보라든지, 기업 부도에 관한 기사라든지, 은행 금리라든지, 시중의 이자률과 새로운 창업에 대한 호응도라든지, 경매 물품 소개라든가, 신기술 개발에 따른 어느 회사의 번창 사례에 대해서 신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문을 보면서 조금도 그런 내용을 비현실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참된 현실의 전부로 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중앙일부 경제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칩시다. “우리는 모두 성경에 의해 죄 안에 갇혀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신문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종교의 교리의 선전문구를 그 신문에 실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오로지 현실을 감각과 느낌으로 판단해버립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 감각적인 현실말고 또다른 현실을 믿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이미 ‘죄 아래 갇혀있다’는 겁니다. 신자라고 해서 시장에서 물건 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해서 세상 것을 싫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자는,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든지 간에 여전히 그는 죄 이래 갇혀있어 죄와 욕망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며 살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이 세상이 비현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외에 또다른 현실이 이 현실세계를 장악하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무엇을해도 죄인이 되는 걸까요? 로마서 3:23-26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예수님이 하신 행동과 비교대상이 됩니다. 즉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않는 한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게다가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죄의 지배 아래에 있게 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본인의 양심대로 바르게 살고 싶어도 자기 마음 안에 품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이 자기 마음를 장악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대로 순응못하게 만듭니다.
이렇게해서 인간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성경에게 의로움이 나오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신 화목제물의 공적으로 널리 우주 곳곳까지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뽑힌 자들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는 특징입니다.
그들 성도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말고 하나님의 화목제물되신 예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그들로 통해서 외부로 증거되게 됩니다. 특히 로마서 3:22에 보면,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의는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던지간에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든 그저 받은 입장이요 외부에서 주입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전부 죄인되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의로움을 오직 한 분, 예수님의 행하심에만 국한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각자의 역량으로 제작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라 최면에 해당됩니다. 참된 믿음은, 그 믿음이 때가 되어야만 오시기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 각자가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괄적으로 공통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와서 행하시고 완성하심에 의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차이가 없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 아래 갇혀있음을 현실로 받아들여 오직 그 가운데서 이끌어 날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woorich.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