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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 IC를 나와 개천을 따라가자니 검은 빛을 띠는 돌이 많이 눈에 띈다. 수석산지로 유명한 고견천이라고 한다. 이름난 수석 산지이련만 뭍사람들의 발길로 명석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고견천을 따라 약 4km를 따라 올라 고견산장 아래의 주차장에 이르렀다.
우두산(牛頭山)은 아홉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산세가 덕유산, 기백산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많아 수려하다. 그 중에서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곳으로 알려진 의상봉, 처녀봉, 장군봉, 바리봉, 비계산 등이 빼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우두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는 해발 1,046.2m의 상봉이다. 그러나 바위 암봉이 멋진 의상봉(義湘峰 1,046m)이 주봉의 대접을 받고 있다.
우두산 입구의 주차장에 다다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북적거렸다. 이 지방에서는 꽤나 이름난 산인 모양이다. 거창군에서는 800원의 입장료를 우두산 고견사 문화재 관람료의 명목으로 받고 있다.
거창군 가조면사무소 직원들이 산불조심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수십 가지의 불조심 표어를 예로 들어 등산객들의 귀에 경종을 울린다.
‘쥐불놀이를 하지 맙시다. 산불 조심에 앞장섭시다. 담뱃불을 조심합시다. 우리 산을 보호합시다.’
비교적 가벼운 멘트를 남녀 두 사람의 목소리로 교대하여 안내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빨간 모자와 빨간 완장을 차고 산행 자체를 금지하는 강원도와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르다.
주차장에서 장군봉을 향하여 산길로 접어 들어섰다. 노란 꽃을 피운 생강나무가 먼저 나와 반긴다. 바리봉을 거쳐 장군재에 올라섰다. 장군봉에 이르렀다. 장군봉에서 내려다보는 거창군 가조면 일대의 너른 들이 아득하다.
장군봉에 이르러 옛일을 생각했다. 고구려 광개토왕 훈적비문에 등장하는 남거성(南居城)의 위치가 이곳이 아닐까? AD 396년 광개토왕 6년, 태왕은 백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토경을 침탈하는 왜의 세력을 토벌하고자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하였다. 남거성(南居城,거창?)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하고 정발성(鼎拔城,부산?)을 뽑아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어 가야 제국을 고구려의 식민지인 임나(任那)로 두었다. 그리고 6가야의 하나인 안라인 술병(戌兵)을 두어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임나는 곧 고구려 광개토왕이 가라 제국을 담임 맡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금도 가야의 영토에서 고구려식 갑옷이나 세발 달린 토기 등이 발굴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삼국시대의 성는 크게 토성과 석성으로 구분된다. 지금은 성(城)의 의미를 대부분 석성(石城)으로 이해하지만 삼국시대에는 토성(土城)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토성은 외침을 방어하는 구실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나라, 도읍의 의미가 더 컸다. 찰흙으로 땅을 다지고 그 위에 백토를 깔고 또 다지는 판축 기법으로 토성을 축조하였다. 화성시에 위치한 길성토성이나 하남시에 위치난 몽촌토성이 대표적인 것이다. 가야의 옛 땅인 거창군에 거창향토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장군봉에서 의상봉에 이르는 구간은 오르내리기 재미있는 바위 암릉이었다. 응달에는 겨우내 언 땅이 아직 채 녹지 않아 얼음 덩어리로 남아 희끗희끗하다.
의상봉에 이르렀다. 일단의 산행 인파들의 환호성이 솟아오른다. 농업인 후계자들의 가족 산행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와서 플랑카드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한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부모들도 좋아하고 아이들도 좋아한다.
의상봉을 뒤로 돌아 철제 계단으로 봉우리에 올랐다.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연꽃 모양의 산봉우리라고 한다. 의상봉에 오르는 철제 계단이 오래 되었다. 또한 눈비로 인한 토양의 유실로 철제 계단의 밑 부분이 공중에 떠있다. 등반 사고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철제 계단이다. 등산객을 위하여 설치한 철제 계단이지만 이후에는 두 개의 밧줄을 매어 두는 것이 더 나을 성 싶다. 의상봉을 오르내리는 밧줄 두 개를 설치하여 용을 쓰고 오르게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쇠뿔처럼 생긴 바위 봉우리에 올라서면 장군봉과 상봉 비계산과 박유산이 의상봉을 연꽃처럼 에워싸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 가야산, 서쪽으로 덕유산, 남쪽으로 지리산이 먼빛으로 바라다 보인다.
의상봉을 내려와 우두산의 정상인 상봉으로 향하였다. 해발 1046.2m 높이의 상봉에는 작은 푯말이 세워져 있다. 지도에는 의상봉보다 겨우 20cm 높은 봉우리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산봉우리가 비좁아 머물러 있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나아가면 가야산이다.
상봉 아래의 전망 좋은 바위에 올라앉아 점심을 먹었다. 오늘 점심 메뉴는 김밥 두 줄과 고로쇠 수액 한 병이다. 의상봉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우두산 능선을 관상하며 점심을 먹자니 김밥이 꿀맛이다. 목마른 참에 마시는 고로쇠 수액이 더 달게 느껴진다.
점심을 먹고 우두산에서 비계산으로 이어지는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왔다. 비계산? 비계산의 이름이 다소 낯설고 우스꽝스런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나 뜻글자인 한자로 산 이름을 파악하자 이내 비계산의 의미가 쉽게 다가왔다. 비계산은 삼겹살의 비계산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토종닭의 비계산(飛鷄山)이었다. 문득 열도의 고대 도시 나라현(奈良縣) 명일향(明日鄕)의 비조(飛鳥)가 떠올랐다.
비조(飛鳥), 바다를 건너 날아온 새, 현해탄을 건너 날아온 새 비조(飛鳥), 가야산과 우두산과 비계산이 위치한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이 바로 고대 일본 왕가의 고향이라는 설명이었다.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세운 안내판의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이곳 가조(加祚,加召)벌은 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대편(神代편) 첫머리에 묘사되어 있는 일본 왕가의 조상신이 살았던 고천원(高天原)에 비정되는 유서깊은 터로서, 신화에 등장하는 남매의 신 아마데라스(天照大神)와 스사명존(素戔鳴尊)의 역정과 관련된 유사 지명과 유적지가 산재한 곳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천원의 유사 지명과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마상리(馬上里)-고천원 고지의 중심지
∘고만리들(古萬里坪)-고천원의 신들이 모여 살던 곳
∘궁배미(宮城址)-고천원 주재신이 살았던 궁궐터
∘바람굴(風穴)-천조대신(아마데라스)이 스사의 횡포를 피해 은신하였던 천석굴(天岩屋戶)
∘닭뫼(飛鷄山)-천조대신(아마데라스)이 천석굴에 은신하자 고천원이 암흑천지가 되었다. 이때 장닭들이 모여 일제히 울었다는 산이다.
∘우두산(牛頭山)-스사가 고천원에서 천강한 신라국 소시무리(曾尸茂梨)
∘장군봉(將軍峰)-백마를 탄 장군 스사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
∘집(蘇塗)-천조대신(아마데라스)을 구출하기 위하여 여신 아메노우즈메(天細女命)가 굿판(大嘗祭)을 벌였던 곳
∘가소천(加召川)-아마데라스와 스사가 대치하였던 고천원에 있는 강]
위의 기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신라국 소시무리(曾尸茂梨)이다. 우두산 고천원에 머물던 스사명존((素戔鳴尊)이 신라국 소시무리로 천강하였다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신라국 소시무리는 어디인가? 그 곳은 바로 한반도 제일의 항구도시 부산(釜山)이다. 이두 향찰식으로 표기한 소시무리(曾尸茂梨)는 솥이물이에 비정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솥(鼎)과 시루(甑)는 음식을 익힐 때에 함께 쓰였으며 부산항의 지형은 솥 위에 놓인 시루에 비정된다. 금정산(金鼎山)이 바로 가마솥을 상징하는 부산의 주산인 것이다.
일본서기는 고천원(거창)을 떠나 솥이물이(부산)에 머물던 스사명존이 이후 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열도의 이즈모(出雲)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우두산에서 비계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마당재, 노로재, 뒷들재가 있다. 합천군 가야면과 거창군 가조면을 잇던 고갯마루 이름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예전에는 이 고개들을 넘어 다녔던 것이다.
마당재로 하산하여 산행 출발지인 주차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까지 왔다가 우두산의 명소인 고견사와 고견폭포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다시 고견사에 이르는 산길을 따라 올랐다. 고견사로 오르는 산길의 어귀에는 고견폭포(견암폭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올 겨울 가문 탓에 물줄기는 미약하였지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시원하였다.
고견사로 가는 산길은 자연스럽고 편안하였다. 바윗돌이 깔린 길의 가장자리에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고견사에서 필요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필요한 원동기가 오르내리는 외줄 톱니바퀴 철길이다. 숲길을 시멘트로 포장하지 않고 모노레일을 설치한 사찰측의 결정이 다행이다. 숲길을 시멘트로 포장하였으면 숲길은 이미 오염되고 훼손되어 제 멋을 잃었을 것이다.
우두산고견사는 신라 문무왕 7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알려진다. 쇠락한 사찰의 풍모는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오래된 석불과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대웅전을 받쳐 쌓은 오래된 석축이 온전히 남아 있어 반가웠다. 석축과 석불과 고목이 오랜 전통을 지닌 사찰이었음을 대변해준다. 고견사 뒤편으로 하늘을 향해 쇠뿔처럼 우뚝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가 바로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터로 알려진 의상봉이다.
우두산에는 용소폭포, 은행나무, 쌀굴 등의 볼거리가 있다. 일명 고견사의 세 가지 구경거리가 그것이다. 높이 80m 되는 용소폭포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의상대사가 식량을 얻었다는 쌀굴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고견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향을 내린 사찰이기도 하다.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밭 150결과 대궐의 향을 내려 해마다 봄 2월과 겨울 10월에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두산(별유산) 산행 후 가조 온천에서 피로를 푸는 주말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진다고한다.
고견사를 둘러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 나왔다. 주차장에 이르러 족발 안주에 소주 서너 잔을 산행 친구들과 나누어 마셨다. 주차장 부근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각종 봄나물을 뜯어 가지고 나와 장을 본다. 냉이, 시금치, 파, 무말랭이 등의 채소와 한 되쯤 되는 콩, 팥, 좁쌀, 수수 등도 있다. 그 중에는 장을 담그고 남은 메주를 두 덩이를 가지고 나온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 곁에 주저앉아 일본 왕가의 고향이라는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물었다. 마을 할머니의 대답은 안내판에 쓰인 내용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거창양민살해사건에 대해서도 넌즈시 물어 보았다. 할머니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어렸을 때의 일이라서 자세히는 모른다며 즉답을 피한다.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일어난 거창양민살해사건은 기록은 다음과 같다.
거창양민살해사건은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의 양민 500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1951년 2월 10일, 당시 이 부대는 거창군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던 북한 무장공비 토벌 중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이렇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1951년 1월 4일 이후, 국군은 전방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그리고 후방의 빨치산으로부터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의 단일화를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배치된 군부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이 부대는 빨치산의 유격전술에 말려 만족할 만한 토벌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에 9연대장 오익균과 3대대장 한동석은 1951년 2월 10일과 11일,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 570명을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살해하였다. 다이너마이트를 마을을 폭파시켜 주민 대부분을 살해하고 여기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을 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
이때에 학살당한 570명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이는 분명한 양민 학살이었다.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국군에 학살당한 신원면 주민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을 보고했다. 학살 당시의 사진과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왔다. 이를 토대로 국회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치밀한 추적 끝에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국회에 공개되었다.
1951년 12월, 국회는 이들을 범죄자들로 규정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연대장 오익균과 대대장 한동석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얼마후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과 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사례는 이 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서 아이러니 한 것은 마을의 이름이다.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양민 살해 사건은 마을 이름인 노근리의 어감과 비슷한 No Good이라는 이름으로 곧잘 회자된다. 그리고 국군에 의해 살해당한 거창군 신원면의 억울한 죽음은 마을 이름과 어감이 같은 신원(伸寃)으로 복권되어야 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문득 할머니의 얼굴에서 힘없고 선량한 백성의 표정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지금 파장을 맞고 있다. 잘 썰어 말린 무말랭이 한 봉지를 사주고 싶었으나 얼마 전 황악산 어귀에서 사온 무말랭이도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장 담그기 철이 지난 메주의 가격을 물어 보았다. 지난 일요일에는 1장에 2만원씩 팔았는데 오늘은 1,000원을 깎아 주겠으니 사달라고 한다. 집사람에게 전화로 물어 보아야 할 것이지만 손전화는 버스안의 배낭에 담겨 있다.
38,000원을 주고 장 담그기 철이 지난 메주 두 덩이를 샀다. 집에 돌아와 한 동이의 물에 두 됫박의 굵은 소금을 붓고 참숯 세 덩이를 넣어 장을 담갔다. 더워지는 날씨를 염려하여 항아리를 응달에 내다 두었다. 달포가 지난 다음, 메주는 꺼내 된장으로 쓰고 소금물은 다려 간장으로 쓸 것이다. 장 담그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집사람이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그러나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그 다음의 일이지 않은가?
첫댓글 천국으로 통하는 이백일십 철계단이 손상 됐군요.4년전 발자취가 아련~합니다.잊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회상하면서 장맛도 좀 봐야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