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廢寺)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音管)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에밀레종의 정식 명칭은 종에 새겨진 대로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은 신라 제 33대 왕이나, 이 사람이 종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아들인 경덕왕(35대)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종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경덕왕은 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근 20여 년이 지나 결국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36대)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이 탄생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이 무게가 20톤 가까이 나가는 크고 무거운 것이긴 하지만 제조 기간이 20여 년씩이나 걸렸다면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가 거듭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결국 거듭된 실패를 극복하고자 인신공양 같은 극한적인 방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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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에밀레종은 그 독특한 소리 때문에 아기공양 전설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이 종은 소리의 여운이 유난히 긴 것으로 유명하다. 종을 치면 그 은은한 여운이 끊어질 듯 작아지다가 다시 이어지곤 하는 현상이 1분 이상 지속되며, 특히 가슴을 울리는 저음역의 여운은 3분까지도 이어진다. 이렇듯 반복되는 여운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하며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를 탓하며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전설이 신빙성을 가지려면 에밀레종에도 앞서 얘기한 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검사 기관마다 엇갈리는 보고가 발표되곤 하였다.
먼저 1970년대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선 에밀레종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체 분량에 해당하는 인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1998년에 포항산업과학원에서 분석했을 때에는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에밀레종의 각 부분 열두 군데에서 시료를 채취하여 ‘극미량원소분석기’로 분석했지만 인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장비는 시료에 0.0000001% 이상 포함된 성분은 모두 포착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에밀레종에 인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구리가 녹은 물에 사람이 들어가면 비중이 낮아서 위로 뜨기 때문에, 그 유체가 타고 남은 찌꺼기도 다른 불순물 같이 위에 걸러서 없애버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에밀레종 전설의 핵심은 종 자체의 소리와 제조 기법의 신비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에밀레종의 복제품을 두 번이나 만든 적이 있지만, 에밀레종 원래의 그 신비하고 은은한 여운을 재현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 페드로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 하기위해 우리나라가 1976년에 기증한 ‘우정의 종’이 한국식 보신각 건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데(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배경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이 종이 에밀레종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서울의 종로 보신각에 걸려있는 종 역시 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이지만, 이 종들은 둘 다 에밀레종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신비한 소리를 전혀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종소리가 갖는 주파수와 화음 등등 여러 가지 항목을 수치화하여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겨 보면 현재의 보신각종은 채 60점이 안 된다.
하지만 에밀레종은 86점이 넘게 나온다. 이밖에 에밀레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65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46톤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유명한 중국의 영락대종은 40점 대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이다.
왜 에밀레종의 소리를 재현하는 일은 어려운가?
현대 과학은 합금의 성분비와 질량, 무게중심 등등 여러 가지 물리적 특성을 정확히 측정하고 계산해낼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을 그대로 복제해 내는 기술을 밝히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에밀레종에 바쳐진 20여 년의 세월과 아기 공양 전설까지 낳게 한 옛날 선인들의 정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
경주에 오는 사람은 거의 모두 경주박물관에 들른다.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또한 거의 모두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에밀레종을 둘러보고 간다. 그들이 저 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동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어린애를 희생해서 만들었다는 잔인한 전설을 기억했을 것이고, 비천상의 아름다운 돋을새김,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상당초무늬에 눈길이 닿았다면 그래도 안정된 정서를 가진 관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위대하다는 존대의 감정을 갖고 갔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온갖 기술이 발달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에밀레종을 만드는 정도의 기술에 놀랄 리 만무하다.
1,200년 전에 제법 큰 종을 만든 것이 대견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칭찬 정도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단연코 말하건대 에밀레종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유물이 아니다. 에밀레종 이전에도 없었고 에밀레종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에밀레종 하나가 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20 세기 복제품의 실패 1986 년에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에밀레종 복제품을 만들었다. 그 하나는 아메리카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제작되어 `우정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종으로 지금 로스앤젤레스,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어느 공원 언덕에 설치되어 있다.
천년을 이어온 종소리는 석양의 모습처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