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봄 일구다
전수림
해가 바뀌면 마음은 벌써 봄기운이 도는 듯해 뒤숭숭하다. 아직은 하얗게 눈이 덮여있지만 앙상했던 가로수에 한껏 물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아침안개로 뒤덮인 강물은 봄기운에 녹아 생기는 수증기쯤으로 여겨진다.
년 초, 며칠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시간을 갖는다. 뭔가 새로 시작하기 좋은 시점으로, 휴가와는 다른 개념으로 마냥 뒹굴어보는 것이다. 그 시간은 보약처럼 느껴져 마음이 정화되고 차분해지는데, 그때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일 년 계획표를 작성한다. 거창한 것보다는 이룰 수 있는 것들로 단기간으로 쪼개서 세운다. 그렇게 올망졸망한 계획까지 세우고 나면 괜스레 마음이 바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가슴 벅차게 기꺼운 일들이다.
올해 계획 중에 가장 마음 가는 일은 책 출간 하는 일과 채마밭 가꾸기다. 봄이 되면 채마밭을 가꿀 예정이다. 지난해에도 최선을 다한 덕에 주변사람들까지 채소를 챙겨줄 수 있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무엇을 심을 것인지, 씨앗의 종류부터 좋은 종자를 고르는 일. 지난해에 쓰던 호미며 고춧대며 질척한 땅에서 신을 장화까지. 아, 작년에 사서 옆 사람에게 꿔주었던 두엄포대까지 차곡차곡 채비를 한다. 하여, 날이 따뜻해지면 밭을 갈아 자갈을 골라내고, 거름을 듬뿍 뿌리고, 봄볕이 충분해지면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다음 할 일은 충분한 물주기와 잡풀이 자라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다. 그로하여 메말랐던 땅을 푸름으로 가득 채우고, 더불어 알찬 수확으로 보상 받고 싶다.
책출간을 하는 것도 채마밭 가꾸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땅이나 글쓰기나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씩 써서 모아 두었던 글들을 책으로 엮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원고를 추려내는 것도, 그에 맞는 자료를 수집하는 일도. 수없이 퇴고를 해야 하는 일 등등. 그렇듯 쉽지 않지만 한권의 책으로 탄생할 순간을 생각하면 매일을 축제로 간주해도 좋을 듯싶다. 그것은 시큰둥한 일상에, 식은 가슴에 불꽃을 점화하는 일이다. 보이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를 글 쓰는 일에 연관시키다 보면 날마다 축제를 준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농사를 짓는 일이 농부의 땀과 노력이 얼마나 더해져야 하는지 땅을 일궈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부모님이 농사를 얼마나 힘겹게 지었는지는 어려서 몰랐고, 이제 와서야 겨우 열 평 남짓한 땅에 채마를 가꾸는 일을, 그것도 농사라고 조금씩이나마 농부의 마음을 체험하게 됐다. 부지런히 드나들며 땀과 정성을 쏟아 부으면 그 만큼 돌려준다는 것도 알았고, 하찮은 채소이파리 하나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아야 함도 알았다,
땅을 대하는 자세와 글쓰기는 닮았다. 채마밭을 가꾸는 일이나, 글 쓰는 일이나 내 인생에 있어 단연 최고의 농사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정말로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을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고 했다.” 가을상추는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맛도 아주 좋은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 가을상추처럼 맛깔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채마밭 드나들 듯 발로 부지런히 뛰고, 많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끈임 없이 써야만 얻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올 일 년은 어느 해보다 바쁘게 돌아가지 않을까싶다. (월간한국수필 301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