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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爲學類(위학류) ㅡ<전 111 조>
[爲學001]
濂溪先生曰, 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伊尹顔淵大賢也. 伊尹恥其君不爲堯舜, 一夫不得其所,
若撻于市. 顔淵不遷怒, 不貳過, 三月不違仁. 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 過則聖, 及則賢,
不及則亦不失於令名.
염계선생이 말씀하시길, 성인은 하늘을 바라고(睎),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선비는 현인을 바란다. 이윤과 안연은 큰 현인이다. (그러하기에) 이윤은 그의 군주가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하지 않아서 부끄러워했고, 한사람의 필부가 그 거처를 얻지 못하면 마치
시전에서 매질을 맞는 것처럼 (부끄러워) 하였다. 안연은 화냄을 옮기지 않았으며,
과실을 거듭하지 않았으니 삼개월 동안이나 인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워 지나면 성인이고, 미치면 현인이고,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훌륭한 이름(명예)은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爲學002]
聖人之道, 入乎耳, 存乎心. 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 彼以文辭而已者, 陋矣.
성인의 도는 귀로 들어와서 마음에 보존되고, 쌓아가면 덕행이 되고,
행하면 사업이 되는 것이니, 저 문장과 말 뿐인 자들은 비루한 것이다
[爲學003]
或問, 聖人之門, 其徒三千, 獨稱顔子爲好學. 夫詩書六藝三千子, 非不習而通也. 然則顔子所獨好者,
혹문, 성인지문, 기도산천, 독칭안자위호학, 부시서육예삼천자, 비불습이통야, 연칙안자소독호자,
何學也. 伊川先生曰, 學以至聖人之道也. 聖人可學而至歟. 曰,然. 學之道如何. 得五行之秀者爲人,
하학야, 이천선생왈, 학이지성인지도야, 성인가학이지여, 왈연, 학지도여하,
其本也, 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其中矣.
기본야, 진이정, 기미발야, 오성구언, 일인의예지신, 형기생의, 외물촉기형이동기중의.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樂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是故覺者, 約其情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 愚者則不知制之, 縱其情而至於邪僻, 梏其性而亡之. 然學之道, 必先明諸心, 知所養, 然後力行以求至. 所謂自明而誠也. 誠之之道, 在乎信道篤. 信道篤, 則行之果. 行之果, 則守之固. 仁義忠信不離乎心.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出處語黙必於是. 久而弗失, 則居之安, 動容周旋中禮, 而邪僻之心, 無自生矣. 故顔子所事, 則曰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仲尼稱之, 則曰得一善則拳拳服膺而不失之矣. 又曰, 不遷怒, 不貳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此其好之篤, 學之之道也. 然聖人則不思而得, 不勉而中. 顔子則必思而後得, 必勉而後中. 其與聖人相去一息. 所未至者, 守之也, 非化之也. 以其好學之心,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後人不達, 以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爲學之道遂失. 不求諸己而求諸外, 以博聞强記, 巧文麗辭爲工, 榮華其言, 鮮有至於道者. 則今之學, 與顔子所好異矣.
혹자가 묻기를, 성인(공자)의 문하에 그 문도가 3천명 이었는데 유독 안자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시서와 육예를 3천명의 제자가 익히고 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안자가 유독 좋아한 것은 어떤 배움입니까? 이천선생이 대답하기를, 배움으로써 성인의 도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성인은 배움으로써 이룰 수 있습니까?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배움의 길은 어떠합니까? 묻자, 천지의 精이 응집되어 오행의 빼어난 정기를 얻은 것이 사람이니, 그 근본이 참되고 고요하며 그 미발한 때에 오성이 갖추워져 있으니, 말하기를 인의예지신이라 한다. 형체가 이미 생기면 그 형체가 바깥 물건과 접촉하여 움직임이 그 속에 있게 되니, 그 속의 움직임에서 철정이 나오게 되는 바 말하기를 희노애락애오욕이라 한다. 情이 이미 성해져서 더욱 방탕해지면 性이 뚫리게 된다. 이런 까닭에 깨달은 자는 그 情에 묶여서 합함이 중도이니, 그 마음이 바르고, 그 性을 기른다. 우매한 자는 절제할 줄을 몰라 그 情에 늘여져서 삿되고 편벽함에 이르러 性을 질곡하여 잃게 된다. 그리하여 배움의 길은 반드시 먼저 마음을 밝혀서 기르는 바를 알고난 연후에 힘써 행하며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니, 이른바 밝음으로부터 정성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정성으로 가는 길은 도를 믿고 도탑게 함에 있으니, 도를 믿어 돈독히 하면 행함이 과단성 있게 되고, 행함에 과단성이 있으면 지킴이 견고해진다. 인의와 충심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조차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전패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출처와 어묵에도 이렇게 하며, 오래도록 잃지 않는다면 거처함이 편안하여 움직임을 용납하고 두루 배풀음이 예 속에 있게되니, 삿되고 편벽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자가 일삼은 바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기를 한 가지 선을 얻으면 권권히 가슴속에 두어서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성냄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거듭하지 않으며, 불선함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다 하였으니, 그 좋아함이 독실한 것이고 배워가는 길(방도)이다. 그러나 성인은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고, 힘쓰지 않아도 중도인데, 안자는 필히 생각한 후에 터득하고, 필히 힘쓴 이후에 중도이니, 성인과 더불어 서로 한 번 숨쉴 거리가 있고, 아직 이르지 못하는 바가 있어 (힘써) 지킨 것이니 (성인에) 化한 것은 아니다. 그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령 몇 년 더 지킬 수 있었다면 몇일 못되어 (성인에) 化하였을 것이다. 후인들은 이를 통달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성인은 본래 나면서 아는 것이니, 배워서 가히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니, 배움의 길을 마침내는 잃게 되어,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고 밖에서만 구한다. 이로써 많이 듣고, 잘 기억하고, 문장을 잘 짓고, 말만 화려하게 하는 것을 공부로 여기니, 그 말들이 영화로우나 道에 이르는 자가 드문 것이다. 오늘날에 배움음은 안자가 좋아 했던 바와는 다른 것이다.
[爲學004]
橫渠先生問於明道先生曰, 定性未能不動, 猶累於外物, 何如. 明道先生曰, 所謂定者, 動亦定, 靜亦定,
횡거선생문어명도선생왈, 정성미능불동, 유누어외물, 하여, 명도선생왈, 소위정자, 동역정, 정역정
無將迎, 無內外. 苟以外物爲外, 牽己而從之, 是以己性爲有內外也. 且以性爲隨物於外, 則當其在外時,
무장영, ,무내외 구이외물위외, 견기이종지, 시이기성위유내외야, 차이성위수물어외, 칙당기재외시,
何者爲在內. 是有意於絶外誘, 而不知性之無內外也. 旣以內外爲二本, 則又烏可遽語定哉. 夫天地之常,
하자위재내, 시유의어절외유, 이불지성지무내외야, 기이내외위이본, 칙우오가거어정재, 부천지지상,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故君子之學, 莫若擴然而大公, 物來而順應. 易曰,
이기심보만물이무심, 성인지상, 이기정순만사이무정, 고군자지학, 막약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 역왈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苟規規於外誘之除, 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非惟日之不足. 顧其端無窮,
정길회망, 동동왕래, 붕종이사, 구규규어외유지제, 장견멸어동이생어서야, 비유일지불족, 고기단무궁,
不可得而除也. 人之情各有所蔽, 故不能適道. 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 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
불가득이제야, 인지정각유소폐, 고불능적도, 대솔환재어자사이용지, 자사칙불능이유위위응적,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 今以惡外物之心, 而求照無物之地, 是反鑑而索照也. 易曰, 艮其背, 不獲其身,
용지칙불능이명각위자연, 금이악외물지심, 이구조무물지지, 시반감이삭조야, 역왈, 간기배, 불획기신
行其庭, 不見其人. 孟子亦曰, 所惡於智者, 爲其鑿也. 與其非外而是內, 不若內外之兩忘也.
행기정, 불견기인, 맹자역왈, 소오어지자, 위기착야, 여기비외이시내, 불약내외지양망야,
兩忘則澄然無事矣. 無事則定, 定則明. 明則尙何應物之爲累哉. 聖人之喜, 以物之當喜, 聖人之怒,
양망칙징연무사의, 무사칙정, 정칙명, 명칙상하응물지위누재, 성인지희, 이물지당희, 성인지노,
以物之當怒. 是聖人之喜怒, 不繫於心, 而繫於物也. 是則聖人豈不應於物哉. 烏得以從外者爲非,
이물지당노, 시성인지희노, 불계어심, 이계어물야, 시칙성인기불응어물재, 오득이종외자위비,
而更求在內之爲是也. 今以自私用智之喜怒, 而視聖人喜怒之正, 爲何如哉. 夫人之情, 易發而難制者,
이경구재내지위시야, 금이자사용지지희노, 이시성인희노지정, 위하여재, 부인지전, 이발이난제자,
惟怒爲甚,. 第能於怒時, 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惡, 而於道亦思過半矣.
유노위심, 제능어노시, 거망기노, 이관리지시비, 역가견외유지불족악, 이어도역사과반의.
횡거선생이 명도선생에게 물어 말하길, 성을 定할 적에 동하지 않을 수 없어 유독 바깥 물건에 얽매이니 어찌 해야 합니까? 명도선생이 답하기를, 이른바 定이란 것은 動하여도 定하고, 靜하여도 定하니 보내고 맞이함이 없고 내외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물을 밖이라 여기고 자신을 이끌어 쫓아간다면 이것은 자신의 性에 내외가 있게 된다. 또한 性으로써 바깥 물건에 따른다면 마땅히 그 바깥에 있을 때에 어떤 것이 안에 있게 되겠는가. 이것은 바깥의 유혹을 끊는데에 마음을 둠으로써 性에 안팎이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외로써 두 근본을 삼는다면 또한 어떻게 갑자기 定이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천지의 항상함은 그 마음이 만물에 두루하여 무심함이고, 성인의 항상함은 그 情이 만사에 순응하고 무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게 크고 공정하지 않음이 없어 물건이 오면 순응하는 것이다. 역에 이르기를 바르고 길하여 후회가 없을 것이니, 자주자주 오고가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른다 하였으니, 바깥의 유혹을 제거하는데에 급급하게 되면 장차 동쪽에서 없어졌다가 서쪽에서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니, 날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단서들이 끝이 없어서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情은 각기 가려진 바가 있어서 능히 도에 나아가지 못하니, 대체로 근심함을 제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씀을 쫓게 된다. 스스로 사사로우면 유위로써 자취에 응하지 못하고, 지혜를 쓰면 명각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지금, 외물을 싫어하는 마음으로서 외물이 없는 곳을 비추고 구하려 한다면 이는 거울을 뒤집어 가려서 비추는 것이다. 역에 이르길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에서 행하여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 또한 말하기를, 지혜를 미워하는 바는 그 천착함 때문이다 하였으니, 밖은 그르고 안은 옳다고 하기 보다는 내외가 아님을 아울러 잊어버리고, 둘을 잊을 잊으면 맑아지고 자연히 일 없을 것이다. 일이 없으니 定해지고, 定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진즉 오히려 어찌 물건에 응함에 얽매임이 있겠는가. 성인의 기뻐함은 물건에 마땅히 기뻐함이요, 성인의 노여움은 물건에 마땅히 노여워 함이니, 이는 성인의 희노는 마음에 매임이 아니라 물건에 매임이다. 이와같은즉 성인이 어찌 물건에 응하지 않겠는가. 어찌 바깥 것들을 쫓아 얻어진 것은 그릇 되고, 다시금 안에 있는 것을 구하여 옳다 하겠는가. 지금 스스로 사사롭고, 지혜를 쓰면서 기뻐하고 성냄으로, 성인이 살피신 희노의 바름을 견준다면 어떠하겠는가. 무릇 사람의 情이 쉽게 나타나고 어렵게 제어되는 것은 오직 성냄이 깊기 때문이니, 다만 성낼 때에 재빨리 그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하면 역시 바깥의 유혹이 미워할 것이 못됨을 알 것이니, 道에 있어서도 또한 사려함이 반을 넘을 것이다.
[爲學005]
伊川先生答朱長文書曰, 聖賢之言, 不得已也. 蓋有是言, 則是理明, 無是言, 則天下之理有闕焉. 如彼耒耜陶冶之器, 一不制, 則生人之道有不足矣. 聖賢之言, 雖欲已 得乎, 然其包涵盡天下之理, 亦甚約也. 後之人, 始執券, 則以文章爲先, 平生所爲, 動多於聖人. 然有之無所補, 無之靡所闕. 乃無用之贅言也. 不止贅而已, 旣不得其要, 則離眞失正, 反害於道, 必矣. 來書所謂 欲使後人見其不忘乎善, 此乃世人之私心也. 夫子疾沒世而名不稱焉者, 疾沒身無善可稱云爾. 非謂疾無名也. 名者可以厲中人, 君子所存, 非所汲汲.
이천선생이 주장문에게 답한 서한에서 말하기를, 성현의 말씀은 부득이 해서 하신 것(들 뿐)이다. 대개 이 말씀이 있으므로 이 이치가 밝아지고, 이러한 말씀이 없으면 천하의 이치에 빠진 부분이 있게 되니, 마치 저 쟁기자루와 쟁기의 머리처럼, 옹이장이와 대장장이가 기구들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것처럼 사람이 사는 도에 부족함이 있게 된다. 성현은 말씀을 비록 그치려 하나 만족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포함하면서도 천하의 이치를 다함이 있으니 또한 깊은 요약이 있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처음 책을 잡으면 문장을 우선시 함으로써 평생토록 하고자 하는 바가 성인보다 움직임이 많으나 있어도 더할게 없고, 없어도 부족한 바가 없으니 이내 쓸데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군더더기에 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요점을 얻지 못한 것이니 참됨을 떠나고 바름을 잃은 것이어서 오히려 도를 해칠 것이 틀림없다. 보내온 서한에서 이른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선행을 잊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함은 바로 후인들의 사사로운 마음인 것이다. 공자께서 평생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괴로워하신 것은 종신토록 가히 일컬어질만한 선행이 없음으로 괴로워하신 것 뿐이니, 이름(명예)이 없음을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것이 가히 뭇 사람들 속에서는 괴로운 것이지만 군자에게 있어서는 급급할 바가 아니니다.
[爲學006]
內積忠信, 所以進德也. 擇言篤志, 所以居業也. 知至至之, 致知也. 求知所至而後至之, 知之在先. 故可與幾. 所謂始條理者, 智之事也. 知終終之, 力行也. 旣知所終, 則力進而終之, 守之在後. 故可與存義. 所謂終條理者 聖之事也. 此學之始終也.
안으로 충과 신을 쌓음은 덕으로 나아감이고, 말을 가리고 뜻을 돈독히 함은 업을 닦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은 치지이니, 이를 데를 알아 구한 후에 이르는 것이다. 아는 것이 앞에 있기에 가히 기미와 더불 수 있으니 이른바 시조리는 智의 일인 것이다. 마침내 마칠 때를 아는 것은 힘써 행함이며, 이미 마칠 데를 안다면 힘써 나아가 마치는 것이다. 지킴은 뒤에 있으므로 가히 더불어 義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종조리라는 것은 聖의 일인 것이다. 이것이 배움의 시작과 마침이다.
[爲學007]
君子主敬以直其內, 守義以方其外. 敬立而內直, 義形而外方. 義形於外, 非在外也. 敬義旣立, 其德盛矣, 不期大而大矣. 德不孤也. 無所用而不周, 無所施而不利. 孰爲疑乎.
군자는 敬을 주장함으로써 그 안을 곧게 하고, 義를 지킴으로써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敬이 서면 안이 곧아지고, 義가 나타나면 밖이 방정해지니, 의가 바깥으로 나타나나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과 의가 이미 서면, 그 덕이 성해진다. 커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커지니 덕은 외롭지 않은 것이다. 쓰는 곳마다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배푸는 곳마다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누가 의심하겠는가.
[爲學008]
動以天爲無妄, 動以人欲, 則妄矣. 無妄之義大矣哉. 雖無邪心, 苟不合正理, 則妄也, 乃邪心也. 旣已無妄, 不宜有往. 往則妄也. 故無妄之彖曰, 其匪正有眚. 不利有攸往.
動하기를 하늘처럼 하면 망령됨이 없고, 動하기를 사람처럼 하고자 하면 망령되어진다. 무망의 뜻이 크도다. 비록 삿된 마음이 없을지라도 바른 이치로써 계합하지 않으면 망령되어지니, 이것이 삿된 마음이다. 이미 망령되지 않음을 버렸다면 갈 바를 두어서는 마땅치 않으니, 가면 망령되어진다. 그러므로 무망(괘)의 단전에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으니 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한 것이다.
[爲學009]
人之蘊蓄, 由學而大. 在多聞前古聖賢之言與行. 考蹟以觀其用, 察言以求其心. 識而得之, 以蓄成其德.
사람이 많이 쌓음은 배움으로 말미암아 커진다. 옛 성현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듣고, 자취를 상고하고 그 쓰임을 살피며, 말씀을 생각해 봄으로써 그 마음을 구한다면 지혜를 얻을 것이니, 쌓음으로써 그 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大畜之象曰 天在山中이 大畜이니 君子ㅣ 以하야 多識前言往行하야 以畜其德하나니라. 상에 가로되 하늘이 산 가운데 있음이 大畜이니, 군자가 이로써 앞의 말과 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느니라.)
[爲學010] 咸之象曰, 君子以虛受人. 傳曰, 中無私主, 則無感不通. 以量而容之, 擇合而受之, 非聖人有感必通之道也. 其九四曰,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傳曰, 感者, 人之動也, 故咸皆就人身取象. 四當心位而不言咸其心, 感乃心也. 感之道無所不通, 有所私係, 則害於感通. 所謂悔也. 聖人感天下之心, 如寒暑雨暘, 無不通無不應者, 亦貞而已矣. 貞者, 虛中無我之謂也. 若往來憧憧然, 用其私心以感物, 則思之所及者, 有能感而動, 所不及者, 不能感也. 以有係之私心, 旣主於一隅一事, 豈能廓然無所不通乎. 함괘의 상전에 군자가 이로써 비움으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하였다. 역전에서 마음으로 사사로움을 주장하지 않으면 감동하고 통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자신의) 도량으로서 수용하고, 가려서 계합해 가는 것은 감동함에 있어 반드시 통하는 성인의 도가 아니다 하였다. 함괘 구사효에 바르게 하면 길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니 자주자주 왕래하면 벗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하였는데, 전에서 말하기를 함괘는 사람의 동함이다. 그러므로 함괘는 모두 사람의 몸에서 상을 취하여 이루어졌다. 구사는 마음의 위치에 해당하고 그 마음으로 느낀다 말하지 않음은 느낀다는 것이 이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감동하는 도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사로이 매이는 바가 있으면 감통함을 해치니 이른바 후회함이 된다. 성인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은 마치 춥고, 덥고, 비오고, 화창한 것처럼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 또한 바르다는 것일 뿐이다. 바르다는 것은 비어서 그 마음에 내가(사사로움이) 없음을 이른다. 만일 오고가기를 자주 자주하고 그 사사로운 마음을 씀으로써 물건마다 감동한다면 생각이 미치는 바에는 능히 감동할 것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능히 감동시키지 못하니, 사사로운 마음에 매여서 이윽고 한 구석 한가지 일만을 주장한다면 어찌 능히 확연하게 통하지 않는 바가 없겠는가. [爲學011] 君子之遇艱阻, 必自省於身, 有失而致之乎. 有所未善, 則改之, 無歉於心, 則加勉. 乃自修其德也. 군자가 어려움과 막힘을 만나면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잘못이 있는지 힘써야 한다. 잘못한 바가 있으면 고쳐가고, 마음에 부족함이 없어도 더욱 힘써서 이내 스스로 그 덕을 닦는 것이다. [爲學012] 非明, 則動無所之, 非動, 則明無所用. 밝음이 아니면 동함이 갈 곳이 없으며, 동함이 아니면 밝음을 쓸 곳도 없다. [爲學013]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也.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습은 거듭 익히는 것이다. 때때로 다시 생각하고 궁구히 하여 마음에 두루 배어들면 기쁨이요, 선함이 남에게 미치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아지니 즐거운 것이요, 비록 즐거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을지라도 옳다고 보여지지 않아도(인정받지 못하여도) 번민하지 않으면 이내 군자라 이른다. [爲學014] 古之學者爲己, 欲得之於己也. 今之學者爲人, 欲見知於人也. 옛날에 배우는 자들이 자신을 위함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자 함을 얻고자 함이고, 지금에 배우는 자들이 남을 위함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래서이다. [爲學015] 伊川先生謂方道輔曰, 聖人之道, 坦如大路. 學者病不得其門耳. 得其門, 無遠之不可到也. 求入其門, 不由於經乎. 今之治經者, 亦衆矣. 然而買櫝還珠之弊, 人人皆是. 經所以載道也. 誦其言辭, 解其訓詁, 而不及道, 乃無用之槽粕耳. 覬足下由經以求道. 勉之又勉, 異日見卓爾有立於前, 然後不知手之舞足之蹈, 不加勉而不能自止矣. 이천선생이 방도보에게 일러 말하기를, 성인의 도는 평탄하여 큰 길과 같다. 배우는 자들이 그 문을 찾지 못하는 것이 병통일 뿐이다. 그 문을 찾으면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문에 들기를 바란다면 경전을 말미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에 경전을 다루는 자들이 또한 많으나 궤짝만 사고 (그 속에) 진주는 되돌려 주는 병폐로 사람들이 모두 이렇다. 경전에 도가 실려 있기에 그 언사를 외우고, 그 가르침을 해석한다 해도 道에는 미치지 못해서 이내 쓸모없는 지게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바라건대 족하는 경전으로 말미암아 道를 구하고, 힘쓰고 또 힘쓰면 훗날 탁월하게 그대가 앞에 서 있음을 볼 것이니, 그런 후에 부지불식간에 손으로는 춤추고 발로는 밟아갈 것이니, 더는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爲學016] 明道先生曰, 修辭立其誠, 不可不子細理會. 言能修省言辭, 便是要立誠. 若只是修飾言辭爲心, 只是爲僞也. 若修其言辭, 正爲立己之誠意, 乃是體當自家敬以直內義以方外之實事. 道之浩浩, 何處下手. 惟立誠纔有可居之處. 有可居之處, 則可以修業也. 終日乾乾, 大小大事. 却只是忠信所以進德, 爲實下手處, 修辭立其誠, 爲實修業處.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경전의) 말씀을 닦음은 그 誠을 세움이니 자세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능히 언사를 닦고 살펴서 誠을 세워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단지 이러한 닦음이 언사를 꾸미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다만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언사를 (바르게) 닦으면 곧 자신의 성의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내 자신 스스로 공경함이 그 안에서 곧아지고 의리가 바깥으로 방정해지는 참된 일을 체득함에 해당한다. 도는 크고 광대하니 어느 곳부터 손을 써야 하는가. 오직 誠意을 세워야 겨우 의지할 곳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의지처가 있게 되면 곧 業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종일토록 굳세고 굳셈(부지런히 힘씀)은 매우 큰 일이니, 오직 忠信으로써 德으로 나아가야 진실로 손 쓸 곳이 되고, (경전의) 言辭를 닦아 그 誠을 세워야 실제로 業을 닦는 곳이 되는 것이다. [爲學017] 伊川先生曰, 志道懇切, 固是誠意, 若迫切不中理, 則反爲不誠. 蓋實理中自有緩急, 不容如是之迫. 觀天地之化, 乃可知.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길, 道에 뜻하기를 간절히 함이 진실한 성의이니, 만약 박절하여 道理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不誠하게 된다. 진실한 도리 속에는 자연한 완급이 있어서 이러한 박절함이 용납되지 않으니, 천지의 조화를 관찰하면 가히 알 수 있다. [爲學018] 孟子才高, 學之無可依據. 學者當學顔子. 入聖人爲近, 有用力處. 又曰 學者要學得不錯, 須是學顔子. 맹자는 재기가 높아 배움에 의거할 곳이 없다(그만큼 배우기 어렵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안자를 배워야 한다. 성인에 들어감에 가까워서 힘 쓸 곳이 있다. 또한 말씀하시길 배우는 자들이 배움이 어지럽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안자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爲學019] 明道先生曰, 且省外事, 但明乎善, 惟進誠心. 其文章雖不中不遠矣. 所守不約, 泛濫無功.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또 바깥 일을 줄여서 다만 善을 밝히고 오직 성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문장이 비록 (도리에) 맞지 않더라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지키는 바가 기약되지 않으면 범람하여 功이 없다. [爲學020] 學者識得仁體, 實有諸己, 只要義理栽培. 如求經義, 皆栽培之意.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배우는 자가 인의 체를 얻게 되면 진실한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니, 다만 의리로서 심고 다듬어서 구해야 한다. 경전의 뜻을 구하는 것과 같이 모두 재배의 뜻이다.
[爲學021]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顔子仲尼樂處. 所樂何事.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주무숙(주돈이)에게 수학할 때, 매번 (나에게) 안자와 중니께서 즐거워하신 곳이 어디인지, 어떤 일에 즐거워 했는지를 찾게 하셨다. [爲學022] 所見所期, 不可不遠且大. 然行之, 亦須量力有漸. 志大心勞, 力小任重, 恐終敗事. 보는 바와 기약하는 바를 원대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행해 갈 때에는 역량을 헤아려 점진적이어야 한다. 뜻만 크고 마음만 수고로우며, 역량은 적은데 맡은 일이 무거우면 마침내는 일을 그르칠까 두렵다. [爲學023] 朋友講習, 更莫如相觀而善工夫多. 친구와 벗하여 강습함은 다시금 서로를 살펴서 선하게 하는 공부를 넓히는 것 만한게 없다. [爲學024] 須是大其心使開闊. 譬如爲九層之臺, 須大做脚, 始得. 모름지기 그 마음을 열어 활연히 넓혀야 하니, 비유하면 9층짜리 돈대를 만드는 것과 같이 마땅히 다리(기단)를 크게 만들어야 비로소 얻어지는(만들어지는) 것이다. [爲學025] 明道先生曰, 自舜發於畎畝之中, 至孫叔敖擧於海, 若要熟也, 須從這裏過.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순임금이 畎畝 속에서 몸을 일으키심으로 부터 손숙오가 바닷가에서 천거됨에 이르기까지 완숙하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그 속에 재앙(시련)들을 넘어서 좇아야 한다. [爲學026] 參也 竟以魯得之. 曾參은 끝내 노둔(미련)함으로 도에 이르렀다. [爲學027] 明道先生以記誦博識爲玩物喪志. 명도선생은 잘 기억하고 외며 박식함은 완물상지라 하였다. 玩物喪志 : 쓸 데 없는 물건(物件)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精神)이 팔려 소중(所重)한 자기(自己)의 의지(意志)를 잃는다는 뜻으로, 물질(物質)에만 너무 집착(執着)한다면 마음 속의 빈곤(貧困)을 가져와 본심(本心)을 잃게 됨을 비유(比喩)한 말 고사유래 :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에게 서역에서 진귀한 개 한 마리를 보내 왔을 때, 신하인 소공(召公)이 무왕을 훈계하여 한 말 이라고 함 출전 : 서경(書經) [爲學028] 禮樂只在進反之間, 便得性情之正. 예악은 다만 나아가고 돌아오는 사이에 있는 것이니 바로 성정의 올바름을 깨우쳐야 한다. [爲學029] 父子君臣, 天下之定理, 無所逃於天地之間. 安得天分, 不有私心, 則行一不義, 殺一不辜, 有所不爲. 有分毫私, 便不是王者事. 아비와 자식, 임금과 신하는 천하의 정해진 이치로서 천지간에 달아날 곳이 없는 것이다. 편안히 하늘이 내린 분수를 깨우쳐 사사로운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 곧 한가지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거나, 한 사람이라도 무고한 이를 죽이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으면 곧 다스리는 자의 일이 아니게 된다. [爲學030] 論性不論氣不備, 論氣不論性不明. 二之則不是. 性을 논하고 氣를 논하지 않음은 갖추지 못함이요, 氣를 논하고 性을 논하지 않음은 밝지 않음이니, 둘로 나누면 옳지 않다. [爲學031] 論學便要明理, 論治便須識體. 학문을 논할 때는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를 논할 때는 마땅히 예를 알아야 한다. [爲學032] 曾點漆雕開已見大意, 故聖人與之 증점과 칠조개는 이미 대의를 보았기에 성인(공자)이 허여하신 것이다. [爲學033] 根本須是先培壅, 然後可立趨向也. 趨向旣正, 所造淺深, 則有勉與不勉也. 근본을 마땅히 먼저 북돋은 연후에 가히 나아가는 방향이 서는 것이다. 추향이 이미 바로잡히면 조예의 얕고 깊음은 곧 힘쓰는가 힘쓰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爲學034] 敬義夾持直上, 達天德自此. 경과 의가 좌우에서 돕고 받쳐주면 곧바로 위로 올라갈 것이니 천덕에 도달함이 이것으로 부터이다. [爲學035] 懈意一生, 便是自暴自棄. 게으른 뜻이 한 번 생기면 곧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爲學036] 不學, 便老而衰. 배우지 않으면 곧 늙어 쇠한다. [爲學037] 人之學不進, 只是不勇. 사람들의 배움이 나아가지 못함은 다만 용맹스럽지 않아서다. [爲學038] 學者爲氣所勝, 習所奪, 只可責志. 배우는 자들의 기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습관에 뺏기는 바 다만 뜻(立志)을 따져봐야 한다. [爲學039] 內重則可以勝外之輕, 得深則可以見誘之小. 안이 무거우면 바깥(외물)의 가벼움을 이겨낼 수 있고, 얻음이 깊으면 유혹이 적음을 알 수 있다. [爲學040] 董仲舒謂,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孫思邈曰, 膽欲大而心欲小, 智欲圓而行欲方, 可以爲法矣. 동중서씨가 이르기를 그 義를 바로잡고, 그 利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 道가 밝아지며, 그 功을 계산하지 않는다. 손사막이 말하기를 담력을 크게 하고자 하고(용감), 마음을 적게 하고자 하며(치밀), 지혜를 원만히 하고자 하고(달통), 행실을 방정하게 하고자 하면 가히 본받을만 하다 하였다. [爲學041] 大低學, 不言而自得者, 乃自得也. 有安排布置者, 皆非自得也. 대저 배움에서 말없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이내 자득이라 한다.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은 모두 자득이 아니다. [爲學042] 視聽思慮動作, 皆天也. 人但於其中, 要識得眞與妄爾.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임이 일어남은 모두 천리이다. 사람이라면 다만 그 속에서 참됨과 망령됨을 알아야 할 뿐이다. [爲學043] 明道先生曰, 學只要鞭辟近裏著己而已. 故切問而近思, 則仁在其中矣.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行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只此是學質美者, 明得盡渣滓, 便渾化, 却與天地同體. 其次惟莊敬持養, 及其至則一也.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배움에서 오직 중요한 것은 허물을 채찍질하여 자신의 몸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묻고 생각을 가까이 하면 仁이 그 가운데 있다. 말을 진실하고 미덥게 하고, 행실을 돈독하고 공경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일지라도 행해질 것이요,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독경하지 못하면 비록 이웃 마을이라해도 행해지겠는가. (충신독경이) 서면 그 앞에 참여됨을 보게 되고, 수레에 있으면 그 멍에에 의지함을 볼 것이니 무릇 그런 후에야 행해진다. 오직 이같이 배움의 바탕이 아름다운 자만이 밝음을 얻어 찌끼와 앙금이 다할 것이고, 문득 혼연히 화하여 곧 천지와 더불어 동체가 된다. 그 다음은 오직 장경을 길러 지켜야 하니, 그 지극함에 이르면 똑같다. [爲學044] 忠信所以進德, 修辭立其誠所以居業者, 乾道也. 敬以直內義以方外者, 坤道也. 충신으로써 덕을 진전시키는 것과 언사를 닦아 그 성실함을 세워 업을 쌓는 것은 乾의 道이고, 敬으로써 그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바깥을 방정하게 함은 坤의 道이다. [爲學045] 凡人才學, 便須知著力處, 旣學, 便須知得力處. 무릇 사람이 처음 배울 때는 모름지기 힘쓸 곳을 알아야 하고, 이미 배웠으면 마땅히 힘을 얻을 곳을 알아야 한다. [爲學046] 有人治園圃, 役知力甚勞. 先生曰, 蠱之象, 君子以振民育德. 君子之事, 唯有此二者, 餘無他焉. 二者爲己爲人之道也. 어떤 사람이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힘쓰기를 매우 수고롭게 사역하고 있었다.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고괘 상전에 군자가 이로써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기른다 하였다. 군자의 일은 오직 이 두가지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 다른 것은 없다. 두가지는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도이다. [爲學047]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何以言仁在其中矣. 學者要思得之, 了此, 便是徹上徹下之道.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 것을 어찌하여 인이 그 가운데 있다 하는 것인가. 배우는 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터득하야 하니, 이것을 마치면 곧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방도이다. [爲學048] 弘而不毅, 則難立, 毅而不弘, 則無以居之. 넓기만 하고 굳세지 못하면 서 있기 어렵고, 굳세기만 하고 넓지 않으면 머물 수 없는 것이다. [爲學049] 伊川先生曰, 古之學者, 優柔厭飫, 有先後次序. 今之學者, 却只做一場話說, 務高而已. 常愛杜元凱語. 若江海之浸, 膏澤之潤, 渙然氷釋, 怡然理順, 然後爲得也. 今之學者, 往往以游夏爲小不足學. 然游夏一言一事, 却摠是實. 後之學者好高, 如人游心於千里之外, 然自身却只在此.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우유염어(오래도록 순일하고 질리지 않게)하여 앞뒤 순서가 있었다.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오히려 다만 일장연설만 하며 높아지고자 힘쓸 뿐이다. (나는) 일찍이 두원개가 말한 ‘강이 바다에 스며들듯 하고, 빗물이 적셔주듯 하며, 환연히 얼음이 풀리듯 하고, 기껍게 이치에 순한 연후에야 깨닳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왕왕 子游와 子夏를 하찮게 여겨 배울게 못된다고 한다. 그러나 子游와 子夏는 한마디 말에도 한가지 일에 조차 모두 진실하였늗데,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높은 것만 좋아하여 마치 사람의 마음은 천리 밖에서 놀고 있으나 자기 몸은 다만 여기에 있는 것과 같이 한다. [爲學050] 修養之所以引年, 國祚之所以祈天永命. 常人之至於聖賢, 皆工夫到這裏. 則有此應. 수양으로 수명이 늘고, 국운이 하늘의 영원한 명으로 기원되고, 보통 사람이 성현에 이르는 것은 모두 공부가 이 안에 주밀하여 이같은 응험함이 있는 것이다. [爲學051] 忠恕所以公平. 造德則自忠恕, 其致則公平. 충서는 공평하게 하는 것이니, 덕에 나아감은 충서로부터 시작하고 이것이 지극하면 공평해진다. [爲學052] 仁之道, 要之, 只消道一公字. 公只是仁之理, 不可將公便喚做仁. 公而以人體之, 故爲仁. 只爲公則物我兼照, 故仁所以能恕, 所以能愛. 恕則仁之施, 愛則仁之用也. 仁의 道는 요컨데 다만 道에는 부족하지만 公자 한 자로 말할 수 있다. 공은 다만 인의 이치로 마땅히 공이 곧 인이라 해서는 안된다. 공으로써 인간의 체로 삼아야 仁이 되는 것이다. 다만 공평하면 물건마다 나를 겸하여 비추게 된다. 그러므로 인은 능히 용서할 수 있고, 능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인을 배풂이고 사랑은 인의 쓰임이다. [爲學053] 今之爲學者, 如登山麓, 方其迤邐, 莫不闊步. 及到峻處, 便止. 須是要剛決果敢以進.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마치 산기슭을 오르며 바야흐로 (처음엔) 줄지어 잘 가는 것이 활보하지 못함이 없으나 험준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멈춘다. 모름지기 중요한 것은 강하게 결단하고, 과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爲學054] 人謂要力行, 亦只是淺近語. 人旣能知見一切事皆所當爲, 不必待著意, 纔著意, 便是有箇私心. 這一點意氣, 能得幾時了. 사람들이 힘써 행해야 함을 중요하다 말하는데 이 또한 단지 천근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찍이 일체의 일들이 모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안다면 굳이 뜻을 붙여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뜻을 나타낸다면 곧 한낱 사심이 있게 된다. 저 한 점의 의기로 마칠 때를 얻을 수나 있겠는가. [爲學055] 知之必好之, 好之必求之, 求之必得之. 古人此箇學是終身事. 果能顚沛造次必於是, 豈有不得道理. 알아 갈수록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좋아할수록 구하게 되며, 구해 갈수록 반드시 얻을 것이니 옛 사람들은 이러한 학문이 종신토록 해야할 일이었다. 과연 능히 엎어지고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이렇게 한다면 어찌 도리를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爲學056] 古之學者一, 今之學者三. 異端不與焉. 一曰文章之學, 二曰訓詁之學, 三曰儒者之學. 欲趨道, 舍儒者之學不可. 옛날에 배우는 것은 하나였지만 지금에 배우는 것은 세가지로 이단은 포함되지 않는다. 첫째는 문장학이고, 둘째는 훈고학이고, 셋째는 유자학이니 도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유자학을 버리고서는 안된다. [爲學057] 問, 作文害道否. 曰害也. 凡爲文, 不專意則不工, 若專意則志局於此. 又安能與天地同其大也. 書曰玩物喪志. 爲文亦玩物也. 呂與叔有詩云, 學如元凱方成癖, 文似相如台類俳. 獨立孔門無一事, 只輸顔氏得心齋 此詩甚好. 古之學者, 惟務養情性, 其他則不學. 今爲文者, 專務章句, 悅人耳目. 旣務悅人, 非俳優而何. 曰古者學爲文否. 曰人見六經, 便以謂聖人亦作文. 不知聖人亦攄發腦中所蘊, 自成文耳. 所謂有德者必有言也. 曰游夏稱文學何也. 曰游夏亦何嘗秉筆 學爲詞章也. 且如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 此豈詞章之文也. 묻기를, 글을 짓는 것이 도에 해롭습니까. 답하기를, 해롭다. 무릇 문장을 짓는 것은 한결같지 않으면 공이 없게 되고, 온전할지라도 뜻이 여기에 국한될터인데 또한 어찌 능히 천지와 더불어 그 크고 넓음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서경에 완물상지(물건에 취하여 뜻을 잊다)라 하였으니 문장을 짓는 것도 또한 완물이다. 여여숙의 시에 배움은 원개(杜預)와 같으면 바야흐로 편벽해지고, 문장이 사마상여와 같으면 자못 장난스럽다. 오직 공자의 문하 앞에만 (그와같은) 한가지 일이 없으니, 다만 안회가 마음을 가지런히 함을 얻었음을 일러줄 뿐이다 하니 이 시가 매우 좋다. 엣날에 배우는 자들은 오직 情性을 기르는데 힘썼고 기타 다른 것은 배우지 않았다. 지금에 문장을 짓는 자들은 오직 장구에만 힘써서 사람들의 눈과 귀만 기쁘게하니, 처음부터 남을 기쁘게 하는데만 힘쓰니 俳優가 아니고 무엇이랴. 묻기를, 옛날에도 문장을 짓는 것을 배웠습니까. 답하기를, 사람들이 육경을 보고는 성인 또한 문장을 지었다 이르는데, 성인이 또한 흉중에 쌓인 것을 펼쳐놓은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묻기를 자유와 자하를 문학이라 칭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하기를, 자유와 자하도 또한 어찌 일찍이 붓을 잡고 문장을 짓는 것을 배웠겠는가. 또한 천문을 관찰하고 시변을 살피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의 교화를 이루겠는가. 이것이 어찌 문장하는 글이겠는가. [爲學058]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함양함은 모름지기 경을 쓰는 것이고, 배움이 나아감은 치지에 있다. [爲學059] 莫說道將第一等讓與別人, 且做第二等. 才如此說, 便是自棄. 雖與不能居仁由義者差等不同, 其自小 一也. 言學便以道爲志, 言人便以聖爲志. 道에서 장차 제일등(성인의 일)을 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 말하지 말라. 또한 제이등(현인의 일)도 만들지 말라. (纔=才) 조금이라도 이같이 말한다면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비록 인에 거하고 의를 행하지 못하는 자와는 차등이 있고 같지 않으나 그 스스로를 작게 여김은 한가지다. 학문에서 말하면 곧 도로써 뜻을 삼음이고, 사람에게서 말하면 곧 성인으로써 뜻을 삼아야 한다. [爲學060] 問, 必有事焉. 當用敬否. 曰敬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用集義. 只知用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又問, 義莫是中理否. 曰中理在事,義在心. 묻기를,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경을 써야합니까. 대답하길, 敬은 함양하는 한가지 일이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義를 쌓아서 써야하는 것이다. 단지 敬을 쓸줄만 알고, 義를 쌓을 줄 모르면 이것은 모두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또 묻기를, 義는 이치에 맞음이 아닙니까. 대답하기를, 이치는 일삼음에 있고, 義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爲學061] 問, 敬義何別. 曰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若只守一箇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且如欲爲孝, 不成只守著一箇孝字. 須是知所以爲孝之道,所以侍奉當如何, 溫凊當如何, 然後能盡孝道也. 묻기를, 경과 의가 어찌 다릅니까. 답하기를, 경은 다만 자신을 지키는 방도이고, 의는 곧 옳은지 그른지를 알아서 이치를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의라 한다. 만약 다만 한낱 경만을 지킨다면 의를 모으고 쌓음을 알지 못함이고 이는 곧 모든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 장차 효도를 하고자 하는데 단지 저 일개 효란 글자 하나만 지켜서는 이룰 수 없다. 모름지기 효도 하고자 하는 바를 깨우치고, 시봉하기를 어찌 해야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어버이를) 따듯하게 해드리고, 시원하게 해드림(예기곡례편)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연후에 능히 효도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爲學062] 學者須是務實, 不要近名, 方是. 有意近名, 則是僞也. 大本已失, 更學何事. 爲名與爲利, 淸濁雖不同, 然其利心則一也.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진실함에 힘쓸 것이지 명예를 가까이 함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바야흐로 옳은 것이다. 명예를 가까이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거짓이다. 큰 근본을 이미 잃었는데 다시금 어떤 일을 배울 수 있겠는가. 명예와 이로움을 위하는 것은 맑고 탁함이 비록 같지는 않으나 그 이롭게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기 때문이다. [爲學063]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只是無纖毫私意. 有少私意, 便是不仁. 안회가 그 마음에서 3개월이나 인을 어기지 않음은 다만 털끝만한 삿된 뜻이 없어서니, 작은 사의라도 있으면 이는 인하지 못한 것이다. [爲學064] 仁者先難後獲, 有爲而作, 皆先獲也. 古人惟知爲仁而已. 今人皆先獲也. 인한 자는 어려움을 먼저하고 얻음을 뒤로 하니,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 일어남은 모두 먼저 얻고자 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직 인을 행하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모두 먼저 얻고자 한다. [爲學065] 有求爲聖人之志, 然後可與共學. 學而善思, 然後可與適道. 思而有所得, 則可與立, 立而化之, 則可與權.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은 뒤에야 가히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다. 배우고 생각을 잘해야 가히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하여 얻은 바가 있다면 가히 더불어 설 수 있고, 서고 화해 가면 가히 더불어 권할 수 있는 것이다. [爲學066] 古之學者爲己, 其終至於成物. 今之學者爲物, 其終至於喪己.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고, 그 종국에는 만물을 이룸에 이르렀었다.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만물을 위하나 종국에는 지신을 잃는데에 이른다. [爲學067] 君子之學必日新. 日新者日進也, 不日新者必日退. 未有不進而不退者. 唯聖人之道無所進退, 以其所造者極也. 군자의 배움은 필히 나날이 새로워야 한다. 나날이 새롭다는 것은 나날이 나아감이고, 나날이 새롭지 않다는 것은 반드시 나날이 물러나게 된다. 나아감도 없고, 몰러남도 없는 자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성인의 도만이 진퇴하는 바가 없으니 그 배양하는 바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爲學068] 明道先生曰, 性靜者可以爲學.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성품이 고요한 자가 가히 학문을 할 수 있다. [爲學069] 弘而不毅, 則無規矩. 毅而不弘, 則隘陋. 넓기만 하고 굳세지 않으면 법도가 반듯하지 않고, 굳세기만 하고 넓지 않으면 좁고 누추하다. [爲學070] 知性善, 以忠信爲本. 此先立其大者. 성이 선함을 알아 충과 신으로써 근본을 삼으면 이것이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는 것이다 [爲學071] 伊川先生曰, 人安重, 則學堅固.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길, 사람이 편안하고 중후하면 학문이 견고해진다. [爲學072]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五者廢其一, 非學也. 넓게 배워 가고, 자세히 물어 가며, 신중히 생각해 가고, 밝게 분별해 가며, 독실하게 실행해 가야 한다. 다섯가지 중 하나라도 그만두면 학문이 아니다. [爲學073] 張思叔請問, 其論或太高. 伊川不答. 良久曰, 累高必自下. 장사숙이 물어 청하였는데, 그 논의가 혹 너무 높았다. 이천선생은 답이 없었다. 한참있다 말씀하시길 높이 쌓음은 반드시 아래로 부터이다 하였다. [爲學074] 明道先生曰, 人之爲學, 忌先立標準. 若循循不已, 自有所至矣. 명도선생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배워갈 적이 먼저 표준을 세우는 것을 꺼려야 한다. 만약 차례로 쫓아 그치지 않는다면 자연히 이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爲學075] 尹彦明見伊川後半年, 方得大學西銘看. 윤언명이 이천을 본 지 반년 후에야 바야흐로 대학과 서명을 보았다. [爲學076] 有人說無心. 伊川曰, 無心便不是. 只當云無私心. 어떤 사람이 무심을 말하자 이천이 말하기를 무심은 옳지 않다. 다만 마땅히 사심이 없어야 한다 말해야 한다 하였다. [爲學077] 謝顯道見伊川. 伊川曰, 近日事如何. 對曰, 天下何思何慮. 伊川曰, 是則是有此理, 賢却發得太早在. 伊川直是會鍛煉得人, 說了, 又道恰好著工夫也. 사현도가 이천을 뵈었다. 이천이 말하기를, 근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대답하기를, 천하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이천이 말하기를, 그것이 그러한 이치가 있음이 옳을 것이나, 그대가 다만 너무 일찍이 제멋대로 발설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천이 이 만남에서 바루어 사람을 단련시켜 말한 것이니, 또한 공부를 잘하도록 마음쓰신 방도이다. [爲學078] 謝顯道云, 昔伯淳敎誨. 只管著他言語. 伯淳曰, 與賢說話, 却似扶醉漢. 救得一邊, 倒了一邊, 只怕人執著一邊. 사현도가 이르기를, 옛날에 명도(백순)선생이 가르쳐 인도하실 적에 다만 그 말씀에 집착하였다. 백순이 말씀하시길, 그대와 말하는 것은 다만 술취한 사람을 부축하는 것 같아서 한쪽을 잡아주면 한쪽으로 쓰러지니, 다못 사삼들이 한쪽에 집착할까 두렵다 하였다. [爲學079] 橫渠先生曰, 精義入神, 事豫吾內, 求利吾外也. 利用安身, 素利吾外, 致養吾內也. 窮神知化, 乃養盛自至, 非思勉之能强. 故崇德而外, 君子未或致知也.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의리를 정밀히 하여 신묘함에 드는 것은 사리가 나의 내면에서 미리하여 나의 외면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치용을 순히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은 본디 나의 외면을 이롭게 하여 나의 내면을 길러 바치는 것이다. 신묘함을 궁구히 하여 조화를 아는 것은 이내 길러짐이 성대하여 자연히 이른 것이니 생각하고 힘써서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을 높히는 것 외에 군자는 혹 알아 둘게 없다고 하였다. [爲學080] 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 형체 이후에 기질적 性이 있다. 잘 돌이켜보면 천지의 性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질적 性을 군자는 (본래의) 性이 아니라 여긴다. [爲學081] 德不勝氣, 性命於氣. 德勝其氣, 性命於德. 窮理盡性, 則性天德, 命天理. 氣之不可變者, 獨死生脩夭而已.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덕이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性이 기질에 지배 되고, 덕이 그 기질을 이기면 性이 덕에 지배당하니, 이치를 궁구히 하고 性을 다하면 性이 하늘의 덕이 되고, 命이 天理가 된다. 기질은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죽고 나며, 장수하고 요절할 따름이다. [爲學082] 莫非天也, 陽明勝則德性用, 陰濁勝則物欲行. 領惡而全好者, 其必由學乎.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하늘(의 이치) 아닌게 없으나 양의 밝음이 이기면 덕성이 쓰이고, 음의 탁함이 이기면 물욕이 행해진다. 악을 다스리고 선을 온전히 함은 바드시 배움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爲學083] 大其心, 則能體天下之物. 物有未體, 則心爲有外. 世人之心, 止於見聞之狹. 聖人盡性, 不以見聞梏其心. 其視天下無一物非我. 孟子謂盡心則知性知天, 以此. 天大無外. 故有外之心, 不足以合天心.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그 마음을 크게하면 능히 천하의 물건들을 體認할 수 있다. 물건을 체인하지 못함이 있음은 마음이 밖에 있음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보고 듣는 편협함에 그친다. 성인은 성을 다하므로 보고 듣는 것에 그 마음을 질곡하지 않는다. 그 천하를 볼때 한 물건도 내가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맹자가 일러 말하길 마음을 다하면 성을 알고, 하늘을 안다고 함이 이같은 이유에서다. 하늘은 커서 밖이 없다. 그러므로 밖이 있는 마음은 天心에 부합하기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爲學084] 仲尼絶四, 自始學至成德, 竭兩端之敎也. 意有思也, 必有待也, 固不化也, 我有方也. 四者有一焉, 則與天地爲不相似矣.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중니의 絶四는 첫 배움으로부터 덕을 이룰때까지 兩端을 다한 가르침이다. 意는 생각함이 있이고, 必은 기댐이 있음이고, 固는 변화하지 못함이고, 我는 方所가 있음이다. 네가지 중 하나라도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서로 같지 않게 되는 것이다. [爲學085] 上達反天理, 下達徇人欲者歟.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길, 위로 통달함은 天理로 돌아감이고, 아래로 통달함은 人欲을 쫒음일 것이다. [爲學086] 知崇天也, 形而上也. 通晝夜而知, 其知崇矣. 知及之, 而不以禮性之, 非己有也. 故知禮成性而道義出. 如天地位而易行. 앎이 높음은 하늘(을 본받음)이니 형이상이다. 낮과 밤(의 이치)을 통달하여 알면 그 앎이 높아진다. 앎이 높아져 미치더라도 예로써 성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를 알고, 성을 이루어야 도의 뜻이 나온다. 마치 하늘과 땅이 자리함에 역이 행해지는 것과 같다. [爲學087] 困之進人也, 爲德辨, 爲感速. 孟子謂, 人有德慧術智者, 常存乎疢疾, 以此. 곤궁함(곤괘)이 사람을 나아가게 함은 덕됨이 분명하고, 감동됨이 빠르니, 맹자가 이르기를 사람이 덕이 자혜롭고, 술수가 지혜로운 자는 항상 재앙과 환난속에 있다 하였음이 이 때문이다. [爲學088] 言有敎, 動有法, 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본받음이 있고, 낮에 할 것이 있고, 밤에 얻을 것이 있고, 숨쉼에도 길러짐이 있고, 깜빡거릴 때도 보존함이 있어야 한다. [爲學089] 橫渠先生作訂頑曰,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 大君子, 吾父母宗子, 其大臣, 宗子之家相也. 尊高年, 所以長其長, 慈孤弱, 所以幼其幼. 聖其合德, 賢其秀也. 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 于時保之, 子之翼也. 樂且不憂, 純乎孝者也. 違曰悖德, 害仁曰賊. 濟惡者不才, 其踐形, 惟肖者也. 知化則善述其事, 窮神則善繼其志, 不愧屋漏爲無忝, 存心養性爲匪懈. 惡旨酒, 崇伯子之顧養. 育英才, 穎封人之錫類. 不弛勞而底豫, 舜其功也. 無所逃而待烹, 申生其恭也. 體其受而歸全者, 參乎. 勇於從而順令者, 伯奇也. 富貴福澤, 將厚吾之生也. 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 存吾順事, 沒吾寧也. 횡거선생이 정완을 지었는데 말하기를, 건을 아비라 칭하고 곤을 어미라 칭하니 내 이 몸이 아득한지고, 이내 혼연한 (천지의) 가운데 있도다.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이 나의 형체가 되고, 천지를 통솔하는 것이 나의 성이 되니, 백성이 나와 같은 친형제요, 물건이 나와 더불어 함께 한다. 대군자(군주)는 내 부모의 으뜸 되는 자식이요, 대신은 종자의 가신이라. 연세 높은 이를 존경함은 어른을 어른으로 섬김이요, 외로운 이, 약한 이를 사랑함은 어림을 어여삐 여김이라.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현인은 빼어난 이라. 무릇 천하에 고달프고, 늙고, 사납고, 괴로운 이들과 근심 많고, 외로운 홀아비, 홀어미 모두 내 형제로 근심이 잇닿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이라. 이에 보호함은 자식이 공양함이니 기쁘게 또한 근심치 않음은 효의 순실함이라. 이를 어김을 패덕이라 하고, 인을 해침을 적이라 하고, 악행을 더하는 자는 인재가 될 수 없으니, 그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으로 이루어진) 형체를 (깨달아) 실천함이 오직 (그 부모를) 닮는(본받는) 것이다. 천지조화를 알아 그 일을 잘 잇고, 신묘함을 궁구히 하여 그 뜻을 잘 계승하고, 집안 깊숙한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음은 (내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함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름은 (부모 섬김이) 게으르지 않게 됨이다. 맛난 술을 싫어함은 숭백의 아들(요임금)이 부모의 봉양을 돌아봄이고, 영재를 기름은 영봉인이 남에게 선을 베풀어 준 것이다. 수고로움을 게을리 하지 않고 기뻐함에 이른 것은 순임금의 공이요, 피하지 않고 팽형을 기다린 것은 신생의 공손함이다. (부모에게서) 그 받은 것을 얻어 행하고 온전히 되돌린 것은 曾參이고, 부모의 뜻을 따라 용감하게 명령에 순종한 것은 伯奇이다. 부귀와 복택은 장차 나의 생을 후하게 해주려는 것이고, 빈천과 우척은 그대를 옥(을 갈고 연마하듯)으로 완성시키려는 것이니, 살아서는 내가 (하늘을) 순히 섬길 것이요 죽으면 내가 편해질 것이다.(朝聞道夕死可矣) [爲學090] 將修己, 必先厚重以自持. 厚重知學, 德乃進而不固矣. 忠信進德, 惟尙友而急賢. 欲勝己者親, 無如改過之不吝. 장차 자신을 닦으려면 반드시 먼저 후중하게 스스로를 지켜야한다. 후중하고 배울 줄 알면 덕이 이내 진전되어 막히지 않을 것이다. 충신으로 덕에 나아감은 오직 벗을 높이고 현명한 이를 급히 사귐이다. 자신보다 나은 이가 친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허물을 고쳐 인색하지 않은 것 보다 더함이 없다. [爲學091] 橫渠先生范巽之曰, 吾輩不及古人. 病源何在. 巽之請問. 先生曰, 此非難悟. 設此語者, 蓋欲學者存意之不忘. 庶游心浸熟. 有一日脫然, 如大寐之得醒耳. 횡거서생이 범손지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고인에 미치지 못하는 병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범손지가 청하여 묻자, 선생이 말씀하시길, 이는 깨닫기 어렵지 않다. 이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뜻을 두고 잊지 않는다면 여러 유동하는 마음이 가라앉고 여물어서, 어느날 자연히 벗어남이 있을 것이니, 마치 큰 잠에서 깨고자 할 따름이다. [爲學092] 未知立心, 惡思多之致疑. 旣知所立, 惡講治之不精. 講治致思, 莫非術內. 雖勤而何厭. 所以急於可欲者, 求立吾心於不疑之地. 然後若決江河以利吾往. 遜此志, 務時敏, 厥修乃來. 故雖仲尼之才之美, 然且敏以求之. 今持不逮之資, 而欲徐徐以聽其自適, 非所聞也. 마음을 세울 줄 모르면 생각이 많아 의혹을 싫어하게 되고, 이미 마음을 세울 바를 안다면 배우고 다스림이 정미롭지 못함을 싫어하게 된다. 講治를 사고함은 학술 안에 없는 것이 없으니, 비록 수고로울지라도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가. 가히 하고자 하여 급한 까닭은 나의 마음을 의혹하지 않는 곳에 세우고자 함이니, 그런 뒤에야 마치 강하의 제방을 터놓음으로써 내가 가는 길에 이롭게 할 수 있다. 이 뜻을 겸손히 하고, 때로 민첩하게 힘쓰면 그 닦아짐이 이내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니께서는 재주가 아름다웠을지라도 또한 민첩하게 구하였으니, 지금에 뒤쳐진 자질을 가지고서, 천천히 기다리며 유유자적하는 것은 (내가) 들어본 바 없다. [爲學093] 明善爲本. 固執之乃立, 擴充之則大, 易視之則小. 在人能弘之而已. 선을 밝힘이 근본이 되고, 굳건히 잡아가야 확립되는 것이다. 확충해가면 커지고, 쉬이 보아가면 작아지니, 사람들이 능히 넓혀감에 달려 있을 뿐이다. [爲學094] 今且只將尊德性而道問學爲心, 日自求於問學者有所背否, 於德性有所懈否. 此義亦是博文約禮下學上達. 以此警策一年, 安得不長. 每日須求多少爲益, 知所亡, 改得少不善. 此德性上之益. 讀書求義理. 編書須理會有所歸著, 勿徒寫過. 又多識前言往行, 此問學上益也. 勿使有俄頃閑度. 逐日似此三年, 庶幾有進. 지금 우선은 마땅히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마음을 삼아 날마다 스스로 학문에 위배되는 바가 있는가, 덕성에 게으른 바가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뜻이 또한 박문,약례고, 하학,상달이다. 이로써 이것으로 일년동안 경책한다면 어찌 성장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매일 모름지기 많거나 적게라도 더하고자 할 것이니, 알지 못하는 것을 알며, 작은 불선이라도 고치고자 하면 이는 덕성에 유익해진다. 책을 읽으며 뜻과 이치를 구하고, 책을 엮음에는 모름지기 이치를 깨닫고 귀착시켜 저술하고, 배껴 써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옛람들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아는 것도 문학상에 유익하니 잠시라도 한가히 보내지 말 것이다. 이와같이 하여 3년이면 거의 진전됨이 있을 것이다. [爲學095] 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가신 성현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이으며,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어야 한다. [爲學096] 載所以使學者先學禮者, 只爲學禮, 則便除去了世俗一副當習熟纏繞. 譬之延蔓之物, 解纏繞卽上去. 苟能除去了一副當世習, 便自然脫灑也. 又學禮, 則可以守得定 배우는 자들에게 먼저 예를 배우게 하는 까닭을 싣자면, 다만 예를 배우면 곧 세속에서 곁따르는 습관에 얽매임과 둘러쌓임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뻗어나가는 물건이 얽히고 감긴 것을 풀어주면 곧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만약 곁따른 세속의 습관을 제거한다면 곧 자연히 씻겨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를 배우면 지킴이 안정될 수 있다. [爲學097] 須放心寬快公平以求之, 乃可見道. 況德性自廣大. 易曰, 窮神知化, 德之盛也. 豈淺心可得. 모름지기 마음두기를 관쾌하고 공평하게 구해 가야 비로소 도를 볼 수 있다. 하물며 덕성의 광대함에서랴. 역에 신을 궁구히 하고 화함을 앎이 덕의 성함이다 하였다. 어찌 앝은 마음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爲學098] 人多以老成則不肯下問, 故終身不知. 又爲人以道義先覺處之, 不可復謂有所不知, 故亦不肯下問. 從不肯問, 遂生百端, 欺妄人. 我寧終身不知. 사람들 대부분이 늙으면 아랫 사람에게 묻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알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이 도의적으로 먼저 깨닳은 것에 머물게 되어 다시금 알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아랫 사람에게 물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즐겨 묻지 않음에 따라 마침내는 온갖 단초가 생기고 사람들을 속이게 되니, 우리가 정녕 종신토록 알지 못하는 것이다. [爲學099] 多聞不足以盡天下之故. 苟以多聞而待天下之變, 則道足以酬其所嘗知. 若劫之不測, 則遂窮矣. 들은게 많다고 해서(견문이 넓다고) 천하의 소이연을 다할 수 없음이라. 만일 많이 들은 것으로써 천하의 변화를 기대(대응)한다면 도는 족히 그 일찍이 알았던 바에만 짝지어질 뿐이다. 만약 예측하지 못한 것을 들이대면 곧 궁함에 이를 것이다. [爲學100] 爲學大益, 在自求變化氣質. 不爾, 皆爲人之弊, 卒無所發明, 不得見聖人之奧. 학문을 함에 크게 유익함은 기질을 변화시키기를 구함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폐만 될 것이며 끝내 밝히는 바가 없어서, 성인의 심오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爲學101] 文要密察, 心要洪放. 글은 세밀하게 살핌이 중요하고, 마음은 넓고 크게 가짐이 중요하다. [爲學102] 不知疑者, 只是不便實作. 旣實作則須有疑. 有不行處是疑也.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다만 실제로 해보지 않아서다. 이미 실제로 해봤다면 모름지기 의심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행하지 못할 부분이 있음을 의심이라 한다. [爲學103] 心大則百物皆通, 心小則百物皆病. 마음이 크면 온갖 事物에 모두 통하고, 마음이 작으면 온갖 事物이 모두 병이 된다 [爲學104] 人雖有功不及於學, 心亦不宜忘. 心苟不忘, 則雖接人事, 卽是實行, 莫非道也. 心若忘之, 則終身由之, 只是俗事. 사람이 비록 공부가 학문에 미치지 못함이 있을지라도 마음으로는 마땅히 잊지 않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적어도 잊지만 않는다면 비록 인사를 접하더라도 바로 진실한 행함이 되니 도 아님이 없다. (학문하고자 하는) 마음을 진실로 잊는다면 종신토록 행함이 다만 세속의 일이 될 것이다. [爲學105] 合內外, 平物我. 此見道之大端. 안팎으로 합하고, 사물과 나를 공평히 하라. 이러하면 도의 큰 단서를 볼 것이다. [爲學106] 旣學而先有以功業爲意者, 於學便相害. 旣有意, 必穿鑿創意作起事端也. 德未成而先以功業爲事, 是代大匠鑿. 希不傷手也. 일찍이 학문에서 먼저 공업의 뜻을 삼음이 있다는 것은 학문에서 곧 서로 해롭다. 이미 (공업의) 뜻이 있다면 반드시 천착하고 창의하여 말썽이 일어날 것이다. 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공업을 일삼으면 이는 큰 목수를 대신하여 깍음이니 손을 다치지 않을 것이 드물 것이다. [爲學107] 竊嘗病, 孔孟旣沒, 諸儒囂然, 不知反約窮源, 勇於苟作, 持不逮之資, 而急知後世. 明者一覽, 如見肺肝然. 多見其不知量也. 方且創艾其弊, 黙養吾誠. 顧所患日力不足而未果他爲也. 내 일찍이 괴로웠다. 공,맹이 떠나신 뒤에 여러 학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음에, 요약을 되돌려 근원을 궁구히 할 줄 모르고, 용감히도 구차함을 짓고, 뒤쳐진 자질을 가지고서 후세에 알려지기에 급급하였다. 밝은 이가 한번 살펴보면 마치 폐간을 들여다 보듯 그러할지니, 다만 그 분수를 알지 못함을 나타낼 뿐이다. 바야흐로 그 병폐를 징벌하고, 묵묵히 자신의 성을 길러야 한다. 다만 근심되는 것은 날로 힘쓰기가 부족하고 과연 그렇게 하지 못함이다. [爲學108] 學未至而好語變者, 必知終有患. 蓋變不可輕議. 若驟然語變, 則知操術已不正. 학문이 지극하지도 못하면서 변통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필히 끝내는 우환이 있음을 알라. 진실로 변통은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된다. 만약 대뜸 변통을 말한다면 심술에 사로잡혀 이미 바르지 못함을 알 것이다. [爲學109] 凡事蔽蓋不見底, 只是不求益. 有人不肯言其道義所得所至, 不得見底, 又非於吾言無所不說. 모든 일을 가려서 밑바닥을 보지 못함은 다만 유익함을 구하지 않음이다. 사람들이 즐겨 그 도의를 얻는 바와 이르는 바를 말하지 않기에 밑바닥을 보고 얻지 못함이며, 또한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도 아니다. [爲學110] 耳目役於外, 攬外事者. 其實是自惰, 不肯自治, 只言短長, 不能反躬者也. 눈과 귀가 바깥 것에 부림을 받아 바깥 일을 가려 취하는 자는 참으로 자신을 소홀히 함이요, 즐겨 자신을 다스리지 않음이니, 단지 장단점만을 말하며 몸소 행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자이다. [爲學111] 學者大不宜志小氣輕. 志小則易足, 易足則無由進. 氣輕則以未知爲已知, 未學爲已學. 배우는 자는 크게 뜻이 작다거나 기질이 가벼워서는 마땅치 않다. 뜻이 작으면 쉽게 만족하고, 쉽게 만족하면 말미암아 나아갈 수 없다. 기질이 가벼우면 알지 못하면서 이미 안다 하니, 배우지 못한 것을 이미 배웠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