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칸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송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게 좋다 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려 재상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 겁을 잔뜩 주었고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7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수 없이 반부(潘阜)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데다 교토의 덴노를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몽골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가서 섬사람 두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듯. 쿠빌라이는 섬 사람 두 명을 잡아온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 섬사람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섬사람 두명을 돌려보낸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하며 고려에 병선의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 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조양필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덴노와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죠 토키무네였는데 호죠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지방관)와 지토(슈고보다 하위 계급)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쿠빌라이는 일본이 말로는 도저히 안된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1272년,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삼별초를 토벌했다. 1273년,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이 건조됐다.
지휘관은 원측은 몽골인 흔도, 귀화한 고려인 홍다구, 송나라 유복형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이 2만 5천,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7백이었다. 1274년음력 10월 5일 여몽연합군은 출항 이틀째인 쓰시마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해 2시간만에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음력 10월 14일, 이키 섬에 몽골군이 상륙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 대리인 다이라노 가게다카에게 전해졌다. 다이라노 가게다카는 가신 100명을 이끌고 출전했고 연합군과 조우해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참패했다. (아래 무력차 항목 참조) 다이라노 가게다카는 이키 섬의 본거지인 히츠메 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작했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커 결국 함락됐고 그는 다자이후에 전령을 보내 위급함을 알린뒤 목을 매고 자결했다. 음력 10월 17일,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의 아오우와 후네가라쓰에 상륙했다. 막부 무사들도 급히 다카시마에 상륙해 산성을 구축하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전황은 모든 것이 일본에 불리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몽골군이 쓰는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압도당했다. 이어 여몽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이미 쓰시마 섬과 이키 섬에서 전한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카타 지구에는 총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케스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은 대략 1만 7천명 이상이었다.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삼랑포(現 사와라)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대로 적군을 쓰러뜨렸다. 몽골군 지휘관 흔도조차 감탄할 정도였던 고려군은 선봉에서 크게 활약했고 몽골군 주력부대 또한 막부군을 패퇴시킴으로서 막부군의 하카타 만 해안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 지구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으니 전선 사령관 쇼니 가케스케는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몽골군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 성에 집결했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군은 추격을 해오지 않았다.
음력 10월 20일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 그런데....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전함중 200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여부는 의미없었고 오직 철수뿐이었다.
참고로 Discovery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너무 빨리 배를 건조하는 데 발생한 내구도 문제와, 배가 부족한 나머지 항해에 부적합한 강가용 배를 징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