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백제의 유적을 찾아서 / �
고도 익산의 산성과 왕릉
이신효
익산지역의 문화유산을 소개한다고 계획하고 몇 차례 백제 무왕대의 고도 익산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다. 워낙 글 솜씨가 없어서 개인적으로도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있다. 이번 호에서 익산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할 계획이어서 고도 익산의 문화유산 중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익산은 백제 무왕대 왕도로써 필요한 요건인 왕궁과 국립사찰, 산성, 왕릉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 중 왕궁리유적과 국립사찰인 미륵사지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하였고 이번에는 산성과 왕릉에 대해 알아보자.
1. 산성의 종류
산성은 고대국가에서는 전쟁이나 변란 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한 방어시설이다. 삼국시대와 같이 전쟁이 빈발한 시기에는 왕이 거처하는 수도 외곽의 중요 지점에 산성을 쌓고 요충지에는 산성과 산성 사이를 연결하여 수도의 방어선을 설정한다. 수도의 내부에는 왕이 거처하는 곳에 궁성을 설치하는데, 산성과는 달리 궁성은 평지나 구릉에 위치하여 방어개념보다는 행정적인 성격이 더 크다.
산성을 만드는 재료에 의해 토성, 석성, 토석혼축성 등으로 구분되고, 성곽의 위치에 따라 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도는 테머리 또는 테뫼식 산성과 골짜기를 감싸고 만드는 포곡식 산성, 산의 정상부와 골짜기를 동시에 아우르는 복합식산성 등으로 구분된다. 백제시대의 산성은 초기에는 산의 정상부에 백제의 전통적인 기초 공법인 판축에 의해 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토성으로써 테뫼식산성이 많이 만들어지다가 후에는 토성보다는 석성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산성의 위치도 물의 공급이 쉽고 넓은 면적을 확보할 수 있는 복합식 또는 포곡식산성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2. 익산지역의 산성
익산은 지형적으로 동북 측의 천호산이 해발 500m로 가장 높다. 익산의 중앙부에는 약간 북측으로 치우쳐 있는 해발 430m의 미륵산과 해발 342m의 용화산이 위치한다. 시의 서측 금강 변을 따라서 해발 200m 내외의 산들이 이어지고 있다. 익산의 남측은 평야지대로 해발 10m~15m 내외의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의해 익산지역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산성은 미륵산과 용화산, 천호산 주변의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미륵산성, 용화산성, 성태봉산성, 선인봉산성, 낭산산성, 천호산성, 학현산성, 당치산성 등 10개의 산성이 자리한다. 금강변의 함라산에는 함라산성과 어래산성 등 2개의 산성 있다. 이 중 백제 무왕대의 왕궁 방어를 위해서는 익산토성과 미륵산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왕궁 방어를 위한 산성
익산토성은 일명 오금산성 또는 보덕성으로도 불린다. 익산토성은 둘레 660m의 테뫼식산성으로 백제 왕궁터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해발 125m의 오금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금산성이라고도 한다.신라에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하였는데 안승의 치소를 이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익산토성에 올라가서 보면 백제 왕궁터와 함께 주변의 삼례, 전주, 김제까지 평야지로 이어진 움직임을 모두 관측할 수 있다. 다만 백제 왕궁터의 남측으로는 산성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으로인해 산성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익산토성은 발굴조사 결과 백제 말기에 토성으로 축성된 뒤 통일신라기에 석축성으로 개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익산토성의 남서 측으로는 무왕릉과 왕비의 능으로 전하는 쌍릉이 위치하여 익산토성이 백제 무왕대에 방어를 위한 중요한 산성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미륵산성은 미륵산의 정상부와 동측 계곡을 둘러싸는 복합식산성이며, 익산지역에서는 가장 큰 산성으로 둘레는 1,822m이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건립되어 조선 태종대까지 4차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었다. 미륵산성은 산성의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산 정상부가 포함되어 방어에도 유리하고 물 공급도 용이하여 장기간 농성에 적합한 산성으로써 익산토성과는 다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산성의 배후에는 용화산성, 성태봉산성, 선인봉산성, 낭산산성 등이 연결되어 백제 무왕대에 이러한 많은 방어선을 뚫고 지나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4. 무왕릉과 왕비릉
능陵은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무덤을 말한다. 즉 왕과 왕비의 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익산에는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전하는 쌍릉이 있는데, 백제 왕궁터에서 서측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쌍릉이라고 하면 두 능이 바로 옆에 붙어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왕릉과 왕비의 능은 동서로 4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있어서 이 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쌍릉의 기록은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익산군 고적 쌍릉조에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수백 보 되는 곳에 위치하며, 고려사에 후조선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으로 속칭 말통末通대왕의 능이라고 전하며 또한 백제 무왕의 어린시절 이름이 서동임으로 말통은 곧 서동이라 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쌍릉의 주인공은 분명히 백제 무왕의 능과 왕비의 능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후조선 무강왕을 고조선 마지막왕인 준準왕으로 보아 쌍릉의 주인공을 고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의 능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방법에 의하면 이 두 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 고고학적 방법에 의한 해석
쌍릉은 고려 충숙왕 16년에 왜구에 의해 도굴된바 있으며, 1917년에는 일본인에 의해 수습·조사 되었다. 조사결과는 조선고적도보에 보고하였는데, 원형의 봉토의 돌방무덤(석실분)으로 봉토 주위에 호석을 두른 석렬 흔적이 확인되었고 돌방(석실)과 입구(연도)는 잘 가공된 큰 화강암 판석을 결합하여 만들어 부여 천도 후 왕릉으로 보이는 능산리고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무왕릉의 내부에서는 부식된 목관木棺편과 완형토기 1점, 옥제장신구, 치아 3점 등이 수습되었고, 왕비릉에서는 도금된 관장식鍍金棺裝飾, 금교구편, 관못棺釘, 금동투각금구金銅透刻金具 등이 출토되었다.
능의 외형인 봉분의 규모는 후대에 보토를 하여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쌍릉의 봉분이 유실되어 1960년대의 형태와 같은 형태로 복토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돌방의 형태와 내부 규모를 살펴보자.
돌방을 만드는 재료는 큰 화강암 판석을 사용하여 돌방의 형태와 만드는 재료가 백제 최후기인 부여 천도 이후의 왕릉으로 전하는 능산리고분의 형태와 재료가 일치한다. 유물에 있어서도 부여 능산리고분이나 무령왕릉의 목관과 같은 종류인 일본산 금송인 고우야마끼를 사용하였고 관장식, 금교구, 금동투각금구 등의 형태나 문양이 모두 부여 능산리고분의 출토품과 일치하고 있다. 돌방의 규모를 부여 능산리고분과 비교해 보면 무왕릉이 돌방의 길이가 380cm이며, 왕비의 능은 320cm이다. 능산리고분의 길이가 327~288cm임으로 무왕릉은 능산리고분에 비해 훨씬 큰 편이다. 왕비의 능은 비교적 큰 쪽에 포함되어 능의 형태나 만드는 재료, 출토유물 등에 있어서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은 백제 말기의 능이지만 돌방의 규모에 있어서는 익산의 쌍릉이 더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준왕의 남래는 기원전 194년의 일로써 백제 무왕과는 800년 이상 차이가 있다. 그 당시의 무덤 형태는 철기시대나 마한시대의 초기 무덤 형태인 토광묘나 토광목관묘로써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과는 만드는 재료나 형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쌍릉을 고조선 준왕의 능으로는 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A.D 600년경 익산지역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부여지역의 왕릉과 비슷한 규모로 능을 세울 수 있는 인물은 무왕과 왕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인물을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단지 쌍릉 안에서 누구의 능라라는 묘지 등의 기록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쌍릉은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밖에 볼 수 없다.
6. 맺음말
역사는 개인이나 가문 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될 경우 그것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많은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근거와 고증, 비판적인 안목과 검토를 통해 해석해야 한다. 또한 한 번 해석된 역사라고 하여 고정불변의 진리와 같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새로운 자료에 의해 수정 보완될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들어서 익산지역에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미륵사지 석탑(서탑)에서 귀중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됨으로써 미륵사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고 탁월한 백제 공예품을 접할 수 있었고, 진신사리도 함께 발견되어 향후 많은 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삼국유사 서동설화와 관련된 내용을 후대의 창작이라고 왜곡하여 선화공주를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는 혼란도 겪어야 했다.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쌍릉이 무왕릉과 왕비릉이 거의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준왕의 능으로 보려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익산 지역에 백제 무왕대의 왕궁과 국립사찰, 산성 왕릉 등 고대국가의 왕도로써 필요한 많은 유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도로의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왕궁 주변의 도시 유적에 대한 조사와 함께 방어체계에 대한 검토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신효 / 1960년에 익산에서 태어났으며 주요논문으로 「익산 백제왕궁의 궁제에 관한 시론적 고찰」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왕궁리유적 전시관 학예연구 담당자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