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 강단에 서면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온몸으로 느껴온 사람들이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미래에 필요한 인재는 어떤 사람일까. 그 고민의 결과물이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이다. 지역과 지구촌 전체를 교육 현장으로 하고 개인과 사회, 개인과 현장을 연결하며 배움의 공공성을 실현하는 학교. 미지행을 사회디자인학교라고 이름 붙인 이유다. 지난 5월 28일에 있었던 입학 설명회에서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신혜원 ‘로컬디자인’ 대표와 함돈균 문학평론가를 만났다. 이들이 꿈꾸는 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취재 조진경 리포터 jinjing87@naeil.com 사진 전호성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신혜원, 함돈균 총괄 디렉터
지금의 대학 교육, 만족하세요?
함돈균씨와 신혜원씨는 각각 문학평론가와 건축가로서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다. 강단에 서면서 가장 답답했던 것은 산업 예비군을 양성하는 곳으로 전락해버린 대학의 모습이었다.
“항상 마음속으로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이 갖는 이상이나 전망이 없어 보였어요. 우리 역시 만족스럽지 않은 교육을 받은 세대죠. 교육은 변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우리 자식 세대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충격이었죠. 현재의 대학 시스템에서는 이런 상황이 바뀌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고2인 딸이 어느 대학을 가면 좋을까 생각해봤더니 보내고 싶은 대학이 한 곳도 없더라고. 실제로 함 디렉터의 딸은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현재 전 세계를 여행하며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총괄 디렉터 신혜원 대표는 영국 건축학교인 AA스쿨을 졸업, 데이비드 치퍼필드, 렘 콜하스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2006년 귀국했다. 2008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작가로 참여하고 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여하는 등 공공 디자인에 전념해온 건축가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해도 지금의 대학처럼 수업이 빡빡하지 않았어요.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교수들은 이런저런 일로 항상 정신없이 바쁘고 학생들은 예전보다 더 수동적인 자세로 수업을 받더라고요. 건축은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열린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교실 안에서 책으로 지식을 쌓으려는 태도에 의문이 들었죠.”
각자의 영역에서 바쁜 두 사람이 새 학교를 세우겠다고 나섰다. 신 대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함 디렉터를 만났고 두 사람은 함께 의기투합했다. 새로운 학교를 위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전공이 없고, 교실이 없고, 여러 학문 융합하는 수업
새 학교는 이론과 실무가 결합하고, 여러 분야의 학문이 융합하며, 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할 수 있는 ‘소셜 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한다. ‘수업은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라는 구체적인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교실 안에서 하는 공부를 벗어나 사회적 토대나 구조,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현장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지행은 일반대학처럼 전공을 결정하지 않는다. 여러 영역을 두루 배워 전체를 보는 시각을 넓히기 위해서다. 학기말에는 두 가지 분야를 융합한 연구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 수업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선생님이 학생을 일대일로 튜터링하며 대화, 토론, 탐구, 발표 등으로 진행된다.
신 대표는 “자신이 배운 내용이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볼 수 있도록 한다. 실무와 공부하는 내용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필드의 상황과 맞춰가면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건축은 많은 사람들과 협업해야 하는 작업이라 다른 관점으로 보는 트레이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대학이다 보니 미국에서 시작한 미네르바스쿨과 비슷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참고는 했지만 미지행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탄생한 학교다. 함 디렉터의 얘기다.
“미지행은 대안학교가 아닙니다. 이 시대에 맞는 새학교죠. 교육 형태를 새로 만들려는 움직임은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 해법을 찾고 있는 중이고요. 교육 모델이 19~20세기 초의 산업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지금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학교가 생기면 종래의 학교 시스템에 영감과 긴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 안에서 대학의 모습 고민한 흔적
미지행의 설립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아직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라는 점에서 일반대학 대신 미지행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졸업 후 취업도 선택의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 함 디렉터의 얘기를 들어보자.
“부모님 같은 기성세대는 그런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학부모는 대학 졸업장이나 학벌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한 대기업의 디자인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능력을 보지 학벌을 보지 않습니다. 산업 현장은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회사에서는 혼자 똑똑한 사람보다 협업할 수 있고 다른 분야에도 해박하고 독창성이 있는 인재를 요구합니다. 저희는 주도적인 자세로 사회를 디자인할 수 있는 능동적 인재를 키우고자 하고, 이런 역량이 갖춰진다면 취업에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미지행은 내년 9월 개교를 목표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 학년에 30~40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등록금은 일반대학 수준으로 책정될 예정이다.
홈스쿨링이나 검정고시를 포함해 고등학교 졸업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지원할 수 있다. 1+4학년제로 1년 동안 파운데이션 코스를 경험해보고 프로그램에 확신이 서면 정식으로 4년의 과정을 이수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영국, 스웨덴, 모스크바, 보스니아 등에서 태동하고 있는 교육 스튜디오들과 ‘Global Free Unit’ 을 결성, 외국에서 수업을 받으면 그 과정을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스웨덴 학생이 우리나라에 와서 수업을 받으면 7학점을 인정받는다. 연합하는 학교와는 학점 인증을 받는 데서 나아가 졸업장을 받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 나중에는 교육부 인가를 신청할 계획도 있지만 당장은 아니다. 인가를 받으면 규제를 받게 되고 원하는 형태의 커리큘럼을 짜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졸업장을 바라고 지원하지는 말아달라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전문가들을 모시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았어요. 다들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했기 때문이죠. 앞으로 더 많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할 예정입니다. 보통 학교가 세워진다고 하면 돈과 건물을 먼저 생각하는데 저희는 뜻이 같은 사람들이 먼저 모였고 재정적 지원이나 후원 없이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저희 학교 교수진들은 현장에서는 자타공인 최고의 분들이라 수업의 질은 정말 높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저희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주세요.”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미지행 사람들. 사회에서 인정받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교육의 미래를 위해 도전을 시작한다. 미지행은 이 과정에 함께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학생을 기다리고 있다.
미지행 시범학기 프로그램은?
미지행이 추구하는 학교의 모습은 다음의 세 가지다. 먼저 움직이는 학교다. 지역과 지구 전체를 교육 현장과 연구 활동의 대상으로 한다. 현장을 캠퍼스로 삼겠다는 의도다. 둘째는 잇는 학교다. 개인과 사회, 동네와 국가, 학교와 현장, 지역과 지구촌을 연결하고자 한다. 셋째는 말하는 학교다.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배움의 공공성을 실현하고 사회적 공론장이 되고자 한다.
올 7월부터 3개월가량 진행하는 시범학기에서 미지행의 수업 방식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다. 이번 학기의 주제는 ‘다른 현대, 다양한 커뮤니티’로 서울 서촌 일대를 중심으로 강의한다. 인문, 몸, 도구, 미디어, 소통, 공간 등 6개 분야에서 건축가 송률·크리스티안 슈바이처, 무용가 안은미, 윤종영 국민대 소프트웨어 융합대학원 교수, 정재경 MIT 예술문화기술대학원 박사, 조현수 Insigniam 컨설턴트, 조병영 피츠버그대 교육학과 교수 등이 각 분야의 강의를 맡는다.
각 분야는 기본 수업인 바탕 수업과 심화 수업인 디딤 수업으로 나뉜다. 자세한 커리큘럼은 미지행 홈페이지(www.mijihaeng.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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