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플라톤의 언어 철학
1)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 비판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 나타난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는 더 나아가 서구 철학이 처음부터 음성중심주의 라고 합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으로까지 소급해 올라 갑니다.
음성중심주의 관련 플라톤 문서는 “파이드로스” 대화편입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대화는 언어학과 상관이 없고 이데아설과 시인추방론으로 연결이 됩니다. 시인추방론이란 플라톤의 국가 편에 나오는 사상입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이데아 세계를 모방한다고 합니다. 이를 이데아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다시 그 현실을 모방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작업은 모방의 모방입니다. 즉 문학이나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참다운 존재의 세계인 이데아 세계를 불완전하게 반영한다. 특히 시인들은 여러 가지 하구를 창조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혼란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2) 파이드로스 편 요약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의 주제는 사랑과 수사학 (rhetoric) 및 변론술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동성연애를 말합니다. 고대 희랍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관대함과 자유로움은 잘 알려진바 있습니다. “파이드로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최민홍 선생님은 그 내용을 대략 1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신화나 옛 전설에 대한 해석에 정력을 소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이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는 역시 인간이다.
2. 당시의 변론가나 수사가들의 사상은 물론, 그들이 자랑삼는 수사술도 보잘 것이 없다. 3. 연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하나는 고상하고 하나는 비천하다.
4. 신성한 광기(狂氣)는 예언, 정죄(淨罪), 시가, 인애의 네 가지 면이 있으며, 결코 배격할 것은 못된다.
5. 연애는 아름답다.
6.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는 그 고귀한 기질이 피차간에 교류되어 진리와 미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영혼이 비상하여 하늘에 오르게 된다. 7. 영혼은 윤회한다.
8. 진리를 본 정도에 따라 전생(轉生)의 등급이 따르며 철학자가 제 1위, 제왕이 제 2위, 시인과 예술가는 6위, 정치가는 8위, 폭군은 최하위인 9위에 속한다는 것이다.
9. 시인, 정치가, 변론가 등이 저술을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더라도, 진리의 토대위에 서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이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여야 한다.
10. 위대한 연설가나 수사가가 되려고 하면 천재적인 소질과 고상한 사상을 지녀야 한다.
11. 수사술 (修辭術)은 인심을 기만하고 현혹시킨다.
12. 진정한 저술은 언어로 고귀한 정신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 주는 것이다.
3) 문자의 기원과 그 결점
파이드로스는 이처럼 사랑과 영혼 그리고 언어와 수사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라톤은 문자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소크라테스 : 내가 듣기에는 이집트의 나우크라티스 부근에, 그곳 토착신들 중에 한 신이 있는 데, 이른바 이비스라는 성조(聖鳥)도 이 신을 섬기는 것이었네. 신령한 자신의 이름은 테우트라고 불렀네. 이 신(神)은 수와 계산과 기하학과 천문학을 발견했으며, 아울러 장기와 골패를, 그리고 특히 문자를 발견했다고 하네. (274 c)
이비스(Ibis)란 새는 성조(聖鳥)라고 합니다. 이 새는 지혜를 가졌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테우트(Theuth)라고 하는 지혜의 신은 다른 곳에서는 토트(Thoth) 라고 합니다. 회화에서 종종 토트의 머리는 이비스의 머리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새 대가리란 머리가 나쁜 사람을 말하는데 비해서 이집트에서는 새 머리가 지혜를 상징했습니다.
문자를 발명한 테우트 신은 당시 이집트의 왕이었던 타모스에게 학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자에 이르자 테우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네. “이 학문은 임금님, 이집트인들을 더욱 현명하게 하고, 또 그들의 기억력을 크게 증진시킬 것입니다. 문자는 기억과 지혜의 수단으로 발견된 것이니까요” It is an elixir of memory and wisdom that I have discovered.”
즉 테우트는 문자가 기억과 지혜의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단”으로 번역한 부분은 영어로는 elixer 즉 약(藥)입니다. 즉 인간의 기억은 극히 제한적인데 문자 기록을 통하여 기억이 보존됩니다. 이처럼 문자는 기록과 기억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문자를 발명한 테무트 신은 문자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타모스 왕은 문자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즉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은, 쓴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이질적인 기호에 의하여 상기되고, 내부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상기하지 않게 되며 기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문자는 배우는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의 습성을 갖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의 수단이 아니라, 상기시키는 수단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니라 외형적인 지혜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사실은 당신에게서 배우는 것은 없고 글을 읽기만 하며, 따라서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력이 없는데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275a)
위의 인용문에서 타모스 왕은 “문자가 영혼에 대해서 외부적인 것이다” 라고 논의합니다. 그렇다면 소리는 영혼의 내적인 부분이라고 해석됩니다. 이를 데리다는 음성중심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타모스왕은 “문자는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외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라고 합니다. 확실히 음성이나 발성은 나의 일부입니다. 이는 물리적, 신체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입니다. 이에 비해서 문자는 공공적 public 이며 객관적 objective 입니다. 또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음성과 달리 문자는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합니다. 즉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습득이 됩니다. 물론 말도 배워야 합니다. 단 말은 자연적으로 배우고 글은 인위적으로 배웁니다. 예전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문맹(文盲)들이 있습니다.
타모스왕은 “문자는 배우는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의 습성을 갖게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문자를 발명한 테무트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지혜를 가르쳤다라고 타모스가 비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지적할 것은 음성과 문자가 그렇게 이질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 언어학이 밝히는 것은 사람의 말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음과 모음의 분리 및 결합이라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음성언어가 기호화 문자언어화 가능성은 선천적으로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수많은 세계의 언어들이 결국은 비슷한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분절된 음성 articulated speech 라고 합니다. 분절음 分節音 이란
음절을 더 쪼개어 나오는, 음절보다 한 단계 작은 언어학적 단위. 자음과 모음을 이르는데, 음절 ‘말’은 ‘ㅁ’, ‘ㅏ’, ‘ㄹ’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여간 이것은 필자의 관점이고 플라톤의 문헌에는 문자는 음성에 대해서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4) 문자의 불특정성
타모스 왕은 문자의 사용이 기억력을 향상시키지는 못한다고 문자를 비판합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대화와 달리 글은 한번 기록이 되면 현장성을 상실하고 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되기는 하나 그 메시지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문자가 말의 진리를 도리어 방해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논변을 제기합니다. 즉 문자로 표현된 사상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취지입니다. 즉 문장 해석의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파이드로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말이 일단 문자로 씌어지면, 모든 글은 문자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내동댕이쳐짐으로써, 누구에게 알려야 하고 누구에게 알리지 말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네. 또한 오해를 당하거나 부당하게 비난이라도 받으면, 언제나 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네. 글 자체가 스스로 방위하고 스스로 도울 수는 없거든 (275e)
여기서 플라톤이 문자 언어 즉 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해석의 어려움입니다. 즉 원래 저자가 무슨 의미로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문장이 언급된 상황을 제대로 모르면 그 뜻을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느끼는 것은 그런 사정은 비단 글 뿐아니라 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대화에서도 왕왕 오해가 일어납니다.
문장 해석의 어려움은 우리가 항상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문장이란 마치 그림과 같다고 합니다. 그는 본문에서 “그림은 살아있는 듯이 걸려 있지만, 어떤 질문이라도 던지게 되면 매우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네” 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의 뜻을 모르면 우리는 글의 저자에게 직접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에서 플라톤은 언제나 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란 글을 쓴 사람이나 혹은 그 글의 관련자를 말합니다. 즉 그 글을 만들고 사용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글의 내용을 누구에게 알려야 하고, 누구에게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은 가령 편지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합니다. 즉 편지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모르는 제 3자가 편지를 볼 때 편지 글의 의도와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기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어려움은 글이 그 씌어진 상황을 떠나서 유포되기 때문입니다.
혹은 무슨 계약서나 법조문 등의 경우 계약의 당사자나 쟁송의 당사자가 있습니다. 문서의 의미가 불확실하면 결국 계약이나 재판의 당사자가 나서야 합니다. 가령 무슨 문서에서 누가 나를 비판할 경우 그 글을 쓴 사람을 불러 내야 합니다. 글로 인해서 발생하는 오해와 비난 등은 결국 그 글을 쓴 사람을 불러 내어 따져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행정 서류나 법적 쟁송, 고소장 혹은 계약서 같은 실무적인 문서에서 많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글 즉 문자언어의 태생적인 취약점을 지적한 플라톤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플라톤의 핵심은 꼭 말이나 연설(speech) 등 음성언어 사용만이 정답은 아니고 실은 철학적인 방법과 목적이 핵심입니다. 이를 그른 변증술 dialectic 이라고 부릅니다.
즉 철학적인 글이 답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담화만이 진리와 지혜를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도중에 플라톤은 재미로 글을 쓰는 일을 언급합니다. 즉 오락이나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를 말합니다.
플라톤 대화편은 철저한 철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분석이라기 보다는 수필식으로 주제가 분산되는 곳이 자주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화려한 주제의식의 변화와 이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법은 감탄할 만합니다.
5. 아도니스의 정원(庭園) 과 변증술(dialectic)
이제부터는 말과 글이 구별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둘 다를 그냥 담화 (discourse)라고 뭉뚱거려 말하겠습니다. 파이드로스 276b부터 농부와 작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가는 농부에 비유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결실을 거두듯이 작가 역시 글이라는 씨를 뿌려 독자들의 마음의 결실을 거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논과 밭에 바로 뿌리는 것을 산종(散種)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데리다의 유명한 개념인 산종(散種)이 나옵니다. 이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우선 두 종류의 농부 혹은 재배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선 여름에 씨를 뿌린 뒤 곧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이를 즐거워하는 화훼(花卉) 놈부가 나오고 둘째는 씨를 뿌리고 난 뒤 오랜 시간 후에 결실하기를 바라는 경작(耕作) 농부가 있습니다. 전자는 씨앗을 여름에 아도니스의 화원에 뿌려 8일 동안 자라게 한 뒤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을 좋아하는 농부입니다. 작중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
소크라테스 : 그렇네. 그럼 다음을 묻고자 하네. 지각이 있는 농부는 스스로 북돋워 결실을 바라는 씨앗을 한여름에 아도니스의 화원(花園)에 뿌려, 8일 동안에 아름답게 자라서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기뻐할까?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유희기분으로 하는 것이요. 사실은 농업기술을 이용하여, 적당한 땅에 씨를 뿌리고, 8개월쯤 지나서 그것이 결실되면 만족하지 않겠나? (276b)
아도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즉 아프로디테가 총애(寵愛)한 미소년입니다. 아도니스의 화원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위에서 말한 바 화훼농부입니다. 글로 말하면 시인과 문학가에 해당합니다.
이런 농부는 유희(遊戲) 기분으로 경작을 합니다. 취미나 오락으로 글을 쓰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파이드로스”의 역주(譯註)에 의하면 아도니스의 화원이란 여름철에 초목이 순식간에 개화했다가 곧 시들어 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반면 경작(耕作) 농부는 농업 기술을 이용하여 적당한 땅 in fitting ground 에 씨를 뿌리고, 8개월이 지나서 그것이 결실되면 만족한다고 합니다. 이 농부는 실은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에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 반면 화훼 농부는 스스로 도움도 주지 못하고 또 진실을 충분히 가르칠 수도 없는 말을 사용하여, 잉크와 펜으로 마구 씨를 뿌리는 식으로 글을 쓴다고 합니다. 글에서 말하면 이런 농부는 결국 시인이나 작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취미 농부는 “국가” 편의 시인(詩人)추방론과 연결됩니다.
경작 농부는 철학자에 비유되고 화훼 농부는 시인 · 문학가에 해당합니다.
시인들은 글자의 정원 (garden of letters)에서 유희 기분으로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고, 늙어서 잊어버렸을 때 상기하기 위하여 쓴다고 합니다. 그는 그런 유희와 오락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합니다.
글자의 정원에서 유희 기분으로 씨를 뿌린다는 플라톤의 아이디어를 아마 데리다가 차용한 듯 합니다. 글자의 밭에다 생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플라톤의 산종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산종 즉 씨뿌리기는 두 가지입니다.
그 목적은 진지한 지식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희입니다. 오락이고 즐거움입니다. 이런 산종을 플라톤은 유희와 즐거움을 위한 씨뿌리기로 보았고 그 반면 추수의 목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을 진리와 지혜를 낳기 위한 씨뿌리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플라톤 역시 이런 쾌락 목적의 씨뿌리기 혹은 글쓰기를
마냥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고 단지 진지한 철학적 탐구, 변증술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 뿐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문학적인 작품에는 참과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허구 fiction 입니다. 실제 벌어진 사건을 서술하면 그것은 역사 history가 되어버립니다. 달리 말하면 문학적 언어에는 진리치 truth value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의 유희인 시나 문학에 비해서 철학의 언어와 문장은
진리와 지혜를 영혼에 심는 것이고 따라서 문학이나 시(詩)보다 더욱 아름다운 결실을 거둔다는 것이 플라톤의 일관적인 주장입니다. 그래서 작중의 화자인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소크라테스. 그건 그렇네, 파이드로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노력이 훨씬 더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은, 대화술을 (dialectic method) 사용하여 영혼에 다음과 같은 말을 심을 경우일세. 즉 그 말 자체를 심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으매, 그 씨앗에서 말들이 마음 속에 각각 싹터 그것을 영원히 살게하고, 또 그 소유자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경우 말이네. (277a)
이 문단에서 우리는 젊은 시절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얼마나 큰 감화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했는지 하는 장면이 상기됩니다. 원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정치에 뜻을 두었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의 만남과 특히 후자의 산파술을 통해서 엄청난 지적인 성장을 합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출산하는 것일세" 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기성 세대의 거짓이 폭로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비판적인 논점을 개발하고 창의적인 생각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idwifery)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그렇게 글보다는 말을 더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최고의 스승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청년 플라톤은 숱한 진리와 사상을 잉태하고 산출하여 서양 철학의 큰 저수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배움이 이제는 철학으로, 변증법으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변증술을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말하거나 쓰는 것에 대해 세밀한 진실을 알고, 또 전체를 그 자체로서 정의(定議)할 수 있고, 정의를 내린 후에는 더 분할할 수 없는 데까지 분류할 수 있으며, 영혼의 본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통찰하고, 각각의 영혼에 적합한 말을 발견하여, 다채로운 영혼에는 다채롭고 적합한 말을 사용하고, 단순한 영혼에는 단순한 말을 사용하여 정리할 때까지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설복하더라도 의론의 성질이 변론술의 치하에 있는 이상, 그는 변론술에 따라 의론을 진행시킬 수 없네 – 이것이 전에 이야기해 온 의론의 개요가 아니겠나? (277c)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 싶은 것은 교육자의 태도 및 방법론 등입니다. 우선 그는 철학적 담화의 방법으로서 정의(定議)와 분류(分類)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정의입니다. 달리 말해서 개념 규정입니다. 대상에 대한 정의(定議)에 있어서 또 필요한 것이 분류입니다. 가령 동물에 대해서 학적인 탐구를 할 때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동물의 정의를 내립니다. 가령 동물은 움직이는 생물이다, 라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각종 동물들 간의 관계를 분류를 통해서 규정합니다. 포유류, 파충류 등등 이 있습니다. 아런 과정을 통틀어 변증술 (dialectic)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상의 영역과 정의를 밝힌 다음 플라톤은 이번에는 학생들의 영혼에 대한 분류를 합니다. 즉 위의 문단에서와 같이
“각각의 영혼에 적합한 말을 발견하여, 다채로운 영혼에는 다채롭고 적합한 말을 사용하고, 단순한 영혼에는 단순한 말을 사용하여 교육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자의 영혼과 상태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어려운 변증술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아마도 단순한 지성을 가진 학생들에게는 철학적인 담화를 할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변증술은 바로 철인왕 (philosopher king)을 가르치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국가” 편과 연결이 됩니다.
97.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언어 이론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의 주제는 사랑과 수사학 (rhetoric) 및 변론술입니다. 파이드로스는 이처럼 사랑과 영혼 그리고 언어와 수사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라톤은 문자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문자를 발명한 신은 이집트의 테우트 라고 합니다. 그는 문자가 사람들을 현명하게 한다 기억을 보존해준다 라고 하며 문자의 장점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타모스 왕은 문자는 배우는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의 습성을 갖게 한다 라고 합니다. 문자를 배우는 사람은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하고 외면적인 지식만을 배운다 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참된 지식은 글이 아니라 말 곧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 다음 주제는 글쓰기에 있어서 두 가지 종류를 제시합니다. 즉 문학과 시를 쓰는 것과 철학을 쓰는 것입니다. 이를 변증술이라고 합니다. 전자는 재미와 유희로 하는 글짓기이고 후자는 진리와 지혜를 산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이데아설과 시인추방론과도 연결이 되는 플라톤의 사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