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개 ‘힘들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공부의 길은 무척 고단하다. 고등학생만이 아니라 초등학생에서부터 보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쓴다. 학생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관여하여 그야말로 온 집안이 ‘힘듦’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그러면 이렇게 총력을 기울여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대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더 나은 조건의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하여 사투를 벌이듯 공부를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하여 이후 사회에 진출하고서도 그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직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생존하기 위하여 ‘자격증을 딴다, 외국어를 공부한다’ 등등 공부의 쳇바퀴 속에서 자신의 여가 시간까지 쏟아가며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부의 광풍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면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원래 공부란 이렇게 힘든 것일까?” 이에 떠오르는 『논어』의 한 구절이 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우리들은 이렇게 힘든 공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데,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공부는 ‘즐거움’이라고 선언한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구절인가! 공부라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즐겁다고 하다니....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왜 공자가 하는 공부는 즐겁고, 우리가 하는 공부는 이렇게 힘든 것일까? 공자는 15살에 공부에 일평생을 바칠 것을 마음으로 다짐하였다.[十有五志于學] 그리고 15년이 지난 뒤 공자는 자신의 공부의 성과를 가리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적 관점, 즉 세계관을 확립하였다[三十而立]’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10년의 적공(積功)을 더하여 공자는 ‘세상사에 한 점 의심이 없는 경지[四十不惑]’에 도달하였고, 여기에서 더 10년의 공부를 하고서는 마침내 ‘우주의 이치를 알 게 되는 경지[五十知天命]’를 성취하였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공자의 공부는 오늘날의 공부와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공부가 사물의 분석과 지식의 축적에 중심을 맞추고 있다면, 공자의 공부는 자신의 내면으로 그 중심이 쏠려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공부가 지식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외적 성취를 추구한다면, 공자의 공부는 자아의 성찰을 통한 내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에서는 전자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하며, 후자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한다. 자아의 정신적 성취가 위기지학의 목표라면, 앞서 본 공자의 공부의 진경(進境)은 위기지학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5세에 학문을 시작한 이래, 내면의 자아를 튼실하게 세워 마침내 50세에 세계가 운행되는 이치를 알게 되는 경지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의 위기지학은 60세에 다시 자기 내면으로 회귀하여, ‘타인의 칭찬과 비방에 초연한 경지’, 즉 ‘세상사의 시비에 무심한 경계’인 ‘이순(耳順)’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가 어찌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보다 더 우월하냐고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근세 한국불교의 위대한 선승(禪僧)이 ‘물욕’, ‘색욕’, ‘수면욕’ 등 인간의 욕망과 오감을 자극하는 번뇌를 모두 극복하였지만 끝내 남는 것이 ‘명예욕’이라고 술회한 것을 보면, 어쩌면 세상의 시비에 초연한 ‘이순’의 경지는 인간으로서 진정 도달하기 어려운 경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위기지학의 공부는 그가 70세에 도달한, ‘욕망과 이성의 불협화음이 없는 평화[七十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도달하였다고 할 것이다.
공자는 젊은 시절, 돈을 벌기 위하여 회계와 출납을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진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다. 공자도 세상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공부의 어떤 부분은 이처럼 생존을 위해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공부는 근본적으로 자아의 내면적 성취를 목표로 하는 위기지학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었다. 우리가 살펴 본 15세의 ‘지학(志學)’에서 70세의 ‘종심(從心)’에 이르기까지의 공자의 공부 역정이 이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은 공부를 ‘위인지학’ 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면, 공자의 위기지학은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수단으로서의 공부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한,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역을 설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착역 없는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피로한 심태가 바로 위인지학으로서 공부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에 비해 공자의 위기지학은 공부를 하는 순간이 바로 내면의 자아가 자라나고 성숙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달리 목적지를 향해 갈 필요가 없이 공부를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자아가 자라나는 시간이요, 자아의 자라남은 매 순간 내면의 깨우침을 통한 즐거움을 동반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공부는 괴롭고, 공자의 공부는 즐거운 이유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어디 이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할 시간이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고 사는 것으로 절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여유를 이런 데다 쓸 마음이 없을 뿐이다.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굳이 이런 위기지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살이를 들여다보면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번민이 더 많다. 살아가다가 ‘나는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한데,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면, 그때가 바로 공자의 위기지학으로 공부를 한번 해 볼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