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시를 읽고
내가 읽은 좋은 시(55)-신세훈의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이승하 ・ 2026. 9. 10. 1:22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신세훈
형성기 온 데 지적 갈라진 퍼런 불허리 돌바람에 숨끊어질 무렵. 구렁으로 분출된 용암 식어 바닷속을 뻗은 지맥으로 불기둥 치받혀 의로운 섬으로 솟아난 땅. 땅 위에 어떤 중량의 의미와 생명감으로 마침 목을 뽑아 울리며 신록 풍성한 한여름 너 앞에 내가 마주 섰을 때. 후둑후둑 성긴 소나기가 왔다야.
그 시절 항시 물줄기만 눈앞을 담담히 흐르고 바람은 침묵한 깊은 계곡이며 어느 산허릴 불어가 영 높은 한 화산의 혈맥과 뜨거운 그늘 모퉁일 돌아 놀 속 목숨으로 피어난 구름꽃의 입김이 내 영혼에 엉겨붙어 황금빛 하늘 아래 해바라기 웃음으로 형상된 생성의 울타릴 돌아오는 바람 떼로 출발했다야.
해바라기. 징처럼 안으로 출렁이어 소리 내 오는가 알 수 없는 누런 놋색 꽃잎 둘레는 원광의 미소같이 무지개 달무리로 원만한 물뱀을 지으며 꿈을 꾸는 물매화를 건드리다 강 건넌 씁쓸한 바람결에 서그럭 흔들리는 몸짓을 가누고 고향 떠난 너의 하늘색 옷자락을 적셔 조금은 마음색이 섧은 나의 입상이다야.
전쟁을 치른 너 입술 위에 피멍 든 아픔만 서리지 않았더라면 짙은 비극의 흔적 없이 딴 꽂대롱 물줄기로 가난한 이야길망정 피릴 불어 공중에 피워보겠다야.
지금은 바람 파편에 튀어버린 물방울같이 씨를 다 흩어버린 빈 빈 가슴팍을 파서 가을이 꽉 안긴다. 서러운 눈의 내가 나에게 가서 꽉 안긴다. 이제 빙빙 이 빠진 얼굴을 이고 스스로를 가늠하면 고개를 저으며 사방 시월의 춤노래 속에서 메마르게 눈물 나는 광활한 광장에 내가 나를 안고 서서 울까보다야.
어쩌면 내부를 흐르는 바람의 갈갈한 울음으로 꽉 차 있을 나와 너는 밤의 계절을 튀어나와 아침을 맞아야 한다. 몸을 씻어야 한다. 하지만 갈 길마다 갈린 엇길에 여러 마리 꽃실배암 따비 뜯고 지싸우는 마른 풀 두렁을 지나 낮닭도 울었던 마을에 하나둘 등잔불 꺼져 가면 내사 원을 쳐다 보거나 겨울잠 안 자던 배암을 생각한다. 물먹은 바람은 조용히 달무릴 돌아가고 해바라기 이 빠진 가슴 강물처럼 그리 길게 울 것다야.
끝 간 데 없는 수류 따라 밤무지갤 그려 쫓아 전설의 식물 여름 동안 물오른 목줄기가 제 씨앗을 사랑할 추수기에 씨통을 공간에다 흔들어 버린 얼마 후. 싸늘한 까치놀로 뻗은 가을 가지들 겨우내 바람을 찢어야 물줄기 외로운 우리 영토 휘감아 휘휘 달음치고 다시 봄맞이 얼음꽃이 녹을 즈음 나무 피부 속으로 봄여름 나무같이 꽃물 오르겠지만 고운 언어로 기별 약속만 전갈한 뒤로 영영 겨우낸가 이야기가 없다야.
ㅡ<조선일보>(1962.1.1)
<감상>
고 신세훈 시인의 등단작을 어느 인터넷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고 AI도 모른다고 하기에 전문을 타이핑한다. 박목월과 양주동이 심사했는데 끝까지 이 작품을 지지한 심사위원은 한 편의 작품에서 50여 개의 새로운 말을 빚어낸 이 천재적 시재를 지닌 이는 시단에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선소감을 받아보니 1941년생, 21세의 대학생이었다. 신세훈 중앙대학교 2학년 학생은 이 시 당선으로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된다. ROTC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지난 8월 19일 작고했을 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시는 흡사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한반도가 형성될 때의 엄청난 지각 변동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나가는 초반부의 장엄함과 역동성은 입을 딱 벌어지게 한다. 한반도는 해바라기처럼 향일성을 지니고 밝음을 추구해 왔는데 제4연에 이르면 ‘전쟁’이라는 시어가 나온다. 이 반도에서 살아가던 한민족이 겪은 전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날만 새면 전쟁이요 눈만 뜨면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전쟁은 과거지사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광명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희망찬 송가로 마지막 연을 장식한다. 전체적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 시가 발표된 때가 4ㆍ19혁명과 5ㆍ16쿠데타를 겪은 후임을 생각한다면 제3공화국에 대한 기대감도 분명히 갖고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어떻든 이 신춘문예 당선작은 새로운 개벽을 기다리는 한 젊은이의 가슴 벅찬 기대감이 느껴지는 웅장한 교향곡이다.
신세훈 시인은 민조시를 창안해 냈다. 과천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자유문학》지 등을 이끈 행보를 보면 등단작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에서부터 하면 해낸다는 각오를 갖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전쟁터를 1년 동안 누볐으므로 의무 연한이 끝났는데 연장 근무를 신청, 6개월을 더 베트남에 있다가 귀국하였다. 그의 애국심은 등단작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 신세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