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블-->보스포로스-->돌바마흐체궁전-->성소피아성당(5월13일)
이스탄불에서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중북부인 콘야로 날아가 카파도키야와 카루스산맥을 넘어 남부인 에페소 이즈미르를 들러 다시
이스탄불까지, 얼마를 달렸을까 모르지만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돌았다. 터키 국토의 반 정도를 돌았을까? 우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즈미르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왔다. 오늘은 마지막날 이스탄불 보르포러스 해협 유람선 여행이 첫 일정이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마르마라해와 접한 도시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스탄불로 그 이름이 여러 번 바뀌며 역사와 함께 해온 곳이다. 그 속에 아름다운 건축물 ‘아야소피아’가 있다.
천장높이가 56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 엄청난 양의 금이 들어갔다는 내부의 장식들, 초기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들은 이슬람 점령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어지며 벽면에 회칠을 하였으나 근래에 복원되면서 일부 프레스코화들을 볼 수 있다.
WORLD PARK 호델
이렇게 고풍스럽고 고급스런 호텔옆에 아래같은 흙돌담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 이스탄불이라고 생각된다
호델로비
벌써 마지막날 이스탄블 관광을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친절하고 상냥한 터키 아가씨가 자리를 내어주며 함께 사진도 찍어준다.
유람선 선착장
갈라타 브리지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가는데, 멀리 또는 가까이 화물선과 여객선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골든 혼 입구의 구시가지 실케지 역은 '기차들의 왕'으로 불리던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종착역이라고 한다.
갈라타 브리지
아침 출근길 이스탄불의 교통수단의 하나인 배를타고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이 선착장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다리위에선 낙시군들이 신이난 모습이다. 이 지역은 황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골든 혼, 정말 좁고 길게 보인다.
유람선 선착장
미리 예약된 유람선에 오르니 스피커를 통해 우리 권사범의 오전강의가 시작되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돌마바흐체궁전
좌로 보이는 건물이 가득찬 정원이라는 "돌바흐체 궁전" 많은 입장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보스포러스해협에서 배를 타고
바라보니 보스포러스해변을 흙과 돌로 매립해서 지반을 다지고 세운 건축물이 마치 바다위에 궁전이 떠 있는 모습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제국의 말년을 재촉한 원인이기도 한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협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좋고, 내부의 각종 장식물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고한다.
선상에서
이스탄불에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오스만 왕조가 사용했던 몇 개의 궁전이 연이어 있는데, 특히 츠라안, 베이레르베이,
그리고 돌마바흐체가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츠라안은 호텔로, 나머지 두 개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돌마바흐체는 카펫과 샹들리에, 그림들로 장식된 '부의 상징'이라고 들었기에 터키의 또다른 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다.
츠라안 궁전호텔
11시 방향에 보이는 저 궁전은 현재 호텔로 사용중인 츠리안 호텔. 방이 여섯 개 밖에 없는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방문시 저호텔을
이욯했으며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고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바닷물이 푸르고 아름답다.
오르타쿄이
오르타쿄이는 보러포러스를 따라 있는 지역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각종 종교과 관대하게 받아들여 지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원을 비롯한 유대교 회당, 그리스 정교교회 이 조그마한 지역에 공존하고 있으며,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고한다.
보스포러스 브리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라는 말은 세계에서 오직 한 곳, 이스탄불에만 있는 저 다리.
동서양 문명의 접점 이스탄불. 중국. 티베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페르샤 지역,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종점. 그리스, 불가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두 대륙의 교차점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른
브스포러스 브리지의 웅장한 모습이 신비스럽게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아타튜르크 브리지"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터키 공화국 수립 50주년이 되던해인 1973년 10월 29일 완성되었는데,
독일의 기술자 35명과 터키의 노동자 400명이 참여하여 길이1,560미터 넓이 33미터 다리 양쪽에 세워진 사각의 폴높이 64미터의
현수교로 하루에 200,000대의 차량과 600,000명의 사람이 통행하는 유럽에서 4번째로 긴 현수교이며 세계 7번째로 긴 다리라고 한다.
언덕위의 주택과 별장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기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는데
해협 언덕위에 보이는 저 저택들이 우리돈으로 120억정도 된다고 하는데,좋은 전망에 모든것을 갖추고......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루멜리 히사르 요새
콘스탄틴노풀을 정복하기위해 다누베와 흑해를 통해가는 원조공급원을 차단하기위해 술탄 메흐멧이 유럽쪽에 세운 루멜리 히사르
성벽 앞을 지난 화물선이 흑해로 들어가고 있다, 이 곳은 현재 대포가 진열되어 있으며 여름이면 콘스터 장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매년 50,000척의 화물선, 대규모의 탱크들, 그리고 커다란 크루즈 선박들이 운행되고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복잡하며 가장 위험한 바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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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신 시가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등 유적지가 모여있는 곳
보스포르스 유람선상에서 바라본 유럽쪽 신시가지모습, 이제 하선 하게되면 돌마바흐체 궁전을 정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돌마바흐체 시계탑
하선후 조금 걸으니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앞에 돌마바흐체 시계탑이 아름다운 위용으로 버티고 있다.
시계탑은 1890년 술탄 압듈하미트의 명령으로 건축가 사르키스 발얀에 의해 궁전의 정문 바로 앞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27미터인 4층으로 되어 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윗 부분은 돌덩이로 만들어졌으며. 탑의 사면 꼭대기에는
프랑스 폴 가르너의 시계와 오토만 제국왕실의 상징인 엠블럼이 있는데. 유럽 어느 도시에나 서있는 시계탑은 고대도시에서
세금을 받기위해 시간과 일자를 알려주려 세운 해 시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궁전의 문
돌마바흐체궁전은 1843~1853년에 술탄 압둘메지트의 어머니 베즈미 아렘 발리데 술탄을 위해 아르메니아인인 니코오스 발얀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이 궁전은 톱카프 궁전 못지않게 285개나 되는 많은 방들이 있다.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으로 장식한 초호화판 실내장식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나서 몰락한 루이왕가와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분수대에서
국가재정과 국력이 쇠퇴한 오스만 제국의 말기에 무리하게 건축된 이 궁전은 서구 열강들의 개방 압력과
국내 소수민족들의 반란 등을 유발시켜 오스만제국이 몰락으로 가는 길을 부채질했다.
바다로 향한문
문이 참으로 많은데 방금전 유람선으로 돌았던 바다로 향한 문도 있다.
궁전내부
궁전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렇게 신발을 감싸야 한다. 실내 에서는 사진을 촬영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그냥말순 없지 12시간을 날아왔는데 5불의 비용을 지불하고 비표를 받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실내가 어두워 촬영이 쉽지 않다.(관리자가 살며시 다가와 조용한 한국어로 후레쉬 안데요”그리곤 계속 따라다닌다.)
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왕궁인 이궁전은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43 ~ 1856년에 걸쳐 석조 궁전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내부가 온통 붉은 색으로 되어 있는 '빨간색 방'은 술탄이 각국 대사들과 긴밀한(?) 만남을갖는 장소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톱카프에서 보았던 아시아, 중동 스타일의 접견실과는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궁은 세부분으로 나뉘는 데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던 공공빌딩과 왕좌가 있는 홀이 가운데 있고 홀 옆으로 하렘이 있다
이 궁은 오스만제국의 약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시점에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할 목적으로,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건립 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는 왕궁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궁과 궁의 각방을 꾸미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나폴레옹이 선물한 피아노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과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방의 벽들을 보면 호화스런 생활과
화려함의 극치를 느길 수 있다.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바닥의 마루를 별로 볼 수 없었는데 가끔 드러나는 맨바닥엔 이렇게 나무 조각을 짜맞춘 멋진 마루가
깔려있는 곳도 있다. 이 궁전에는 일부러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게 마루를 깐 곳들이 있는데 누가 몰래 다가와서
대화를 엿듣거나 하지 못하게 그리했다고 설명들은 것 같습니다.
벽시계
궁전 내의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공화제가 확립된 후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1938년11월10일 집무중 쓰러지면서 저 시계를 잡으면서 죽었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기울어진모습그대로 그시간 이라고 한다.
탁좌 뒤로 보이는 저 신사가 우리일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서투른 한국말로 우리를 감시한 그 관리자다.
통 로
궁전 내부는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 하렘으로 나눠지는데 하렘쪽으로 가려면 이렇게 긴 복도를 지나게 되는데,
바깥족에 창문이 있어 바다가 보이고, 안쪽엔 액자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 시대의 하렘의 여인들은 창살 사이로,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을 동경하며 살았을까?
아타투르크가 오랜 투병끝인 1938년 이곳에서 사망한 후 궁전은 새로이 복구 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유럽의 대사와 고위관직들에게 유럽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버킹검 궁전을 모방하여
세워진 이 건축은 오토만 르네상스식이라 한다
오르간
천정의 모습들
이렇게 높은 천정을 가진 거실들도 있으며. 천정 장식이 너무나 화려하다는 생각이든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조각은 아니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그림도 있는데, 유럽의 왕궁마다 흔히 사용하는 천정 마감 기법이라고 한다.
방 중앙에는 너무나 큰 샹들리에가 높은 천정에서부터 길게 매달려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선물이라는데 무게가 4.5 톤이나 되고 750개의 등이 달려있다고하는 이 역시 프랑스 바카라 제품이라고.
당시 두 나라의 자존심 싸움이 이런 선물을 주고받게 했나 봅니다, 술탄이 빅토리아 여왕의 화끈한 선물에 얼마나 감탄했었을까?
외국 원수의 주요 영접 장소였던 이 궁전을 다녀간 근세 지도자로는 독일의 빌헬름 2세, 영국의 에드워드 8세, 페르샤왕 레나 팔레비,
이락의 왕 파이잘, 불란서 영웅 나폴레옹 3세의 부인 등이 있다고 한다.
궁에는 대략 250개가 넘는 방과 43개의 홀이 있으며 각 방의 실내장식을 각각 다른 분위기로 꾸미는 화려함을 보인다.
탁트인 홀에 매달린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헌상품으로 무게는 4.5톤이며 750개의 촛불 램프가 켜져 있다.
궁에서 사용한 금그릇
여기서부터 돌마바흐체 외부
터키의 학생들
너무나 순진해 보이는 터키의 학생들 우리의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데 함께 사진하번 찍자고 하니 모두가 모여든다.
이스탄블의 버스들
서 울 정
해외에서 한식당을 찾으면 대부분이 "서울식당" "아리랑" "한국관"이란 이름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곳 이스탄블에 오래전 자리잡아
성공한 서울정의 주인은 이곳 "터키인 들에게 삼촌으로 불린다"란 제목으로 한국에 TV에도 방영되었다고 한다.
근 1주일 만에 식당 2층에서 돼지불고기를 맛잇게 먹고 1층에서 사장님과 그의 성공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세계적인 관광명소 주변이라서인지 서울정 부근엔 펜션같은 다양한 모습의 숙박업소와 음식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성 소피아성당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성소피아성당, 오랜 세월동안 가장 큰 교회 건물이었고 지금도 밀라노의 두오모 다음으로 큰 교회 건물인
성소피아성당은 1500년이 넘었음에도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하고있다. 이슬람제국 당시 이스탄불의
서양 건축물은 모두 파괴했으나 이 건물은 너무도 아름답고, 크고, 좋아 남겨서 사방에 탑을 세워고 이슬람사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한 첨탑
비잔틴 시대에는 국가의 중심교회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이 무너질 때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된 한 건물에 공유할 수 없는
두 종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소피아의 원래 이름은 Hagia Sofia이다. 오늘날 문명의 충돌로 내홍을 앓고 있는 두 종교 사이에
몇 백 년에 걸쳐 서로 피튀기는 전쟁을 하며 흘러 왔어도 파괴 되지 않고, 사이좋게 그대로 서있다는 것이 더욱 감동 적이고.
종교를 초월해서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며 보존하는 이스탄불의 정신이 세계인들을 매료 시키고 감동 시키는 모양이다.
지친 모습들
먼 이국땅에서 시차와 음식과 기후를 이기며 이제 마지막 여행지 모두가 지친 모습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로서. 이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는 100여명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는데,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는데,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며.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일단 들어가 보자
외 랑(나텍스)
본당으로 들어가기전 마음을 정돈하는 외랑의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천정의 금박 모자이크, 벽면과 대리석 바닥)
외랑 천정
터키사람들은 Aya Sofia('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라고 부르기도 한 성 소피아 성당은 천장높이가 56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엄청난 양의 금이 들어갔다는 내부의 장식들, 초기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들은 이슬람 점령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어지면서
벽면에 회칠을 하였으나 근래에 복원되면서 일부 프레스코화들을 일부 볼 수 있으며. 엄청난 크기와 규모와 장식에 놀랄뿐이다
성당 내부
황재의 문으로 들어서니 왼쪽에 돌항아리 같은 것이 보이고,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인다. 아래에 둥그런 미랍이 보이는데,
이슬람교때 상용한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게 보이는데,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교사원은 메카 방향을 향해서 지어져 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범죄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는데.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으며.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는데.
조명등
당시에 촟불을 올렸을것 같은 대형등에 지금은 전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기 둥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대리석 바닥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무늬를 보면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엄청나게 큰 원판을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전면 중앙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다고 한다.
365일 내내 부분적으로 수리보수 한다고 하는데 현재도 본당 4분의 1을 보수하기 위하여 작업대가 설치된 이 성당은 기본적으로는
라틴십자형플랜의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에 대원개를 씌운 원개식 바실리카형 성당인데, 중앙에 대원개를 둔다고 하는 당시의
건축가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안깊이 77m, 나비71.7m로 하였으므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십자형플랜에 가깝게 보인다.
중앙 돔
지름 33m, 바닥면으로부터 56m 높이인 대원개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4개의 큰 지주와 대아치, 삼각궁우(穹隅)를 채용,
동서로 원개와 같은 나비를 가진 2개의 반원개를 설치하는 등, 독창적인 구조로 이루워진 건물이다.
조명 창
엄청나게 큰 규모의 실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창문인데 그 곳에서 쏱아지는 빛은 축구장의 조명탑처럼 아주 밝으 빛이다.
교회의 면적은 총 7570m²이다. 터키인들이 이스탄불을 얻기까지 정교회 (오스독스: 정통이란뜻) 교회로 916년 사용 되어지다가,
이스탄불 정복 후에 회교사원 (모스크)으로 바꾸어진다. 그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지게 된다. 참고로 이슬람교는
일체의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원에서는 어떠한 그림도 조각상도 찾아 볼 수 없다. 다행인 것은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아타투루크 (터키의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로 현재도 파손이 되긴 했으나,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다
모자이크 성화
2층 갤러리에 도착하게 되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 쪽에는 세례요한이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범죄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는데.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으며.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는데.
이 교회의 면적은 총 7,570m²이다.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자이크의 맞은편에는 제4차 십자군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 십자군의 사령관 단돌로의 무덤이 있다.
북쪽 방향의 본당 벽을 보면 요한 크리소스톰과 익나티우스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프래스코를 볼 수 있다
현재는 무종교의 박물관이 되어 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고고학단원의 청소작업으로, 이슬람교 지배 아래 오랜동안
석회칠로 덮여 있던 모자이크벽화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헌당 당시의 것은 장식모티프 등의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가마를 타고 올라가는데 흔들리지 않도록 수십미터 높이의 이층까지 올라가는 길이 계단이 아닌 지그 제그 경사길로
이어저 주차장 올라가는 길같은 분위기가
2층 겔러리
이슬람에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는 남자의 앞에 자리할 수가 없어서 왕비같은 왕족의 여자들이 이곳 2층에서
기도한 곳이라고 권사범이 설명하는데 처음들어오던 외랑의 윗 부분같다.
비잔틴 제국 포럼 모형도
비잔틴 황제 유스티안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아침예배를 마치고 황궁으로 향하자 황제
행차 행렬이 황제를 에워싸고 있다. 이같은 행렬은 종교 대축일이나 민중 축제날에 항상 거행되었다.
황제의 지위가 이처럼 높은 위신과 영과을 누리는 것은그가 동방교회의 수장으로서 기독교 신앙에서
신과 지상의 살아 있는 중재자로서 봉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블루 모스크
소피아 성당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여섯개의 첨탑(Minaret)이 하늘로 높이 마음껏 솟아올라 있는 블루모스크는 하늘을 찌를 듯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아야 소피아 성당과 마주보고 서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 술탄 아흐메드 1세가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사원을
짓고자 했던 야심작. 우매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도 과연 거대하고 웅장하고 언젠가 카렌다 또는 액자의 사진으로 보앗을 것같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뒤로하고 좌우대칭으로 크고 작은 안정된 돔과 뾰쪽한 미나렛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공항에서
이스탄불을 떠나기위해 모든 수속을 마치고 공항까지 김밥을 배달온 김밥 아주머니에게 셔터를 부탁해 가이드포함한 모든 일행이다
터키의 수도는 내륙에 위치한 앙카라 이지만 실질적인 제 1의 도시는 인구 1000만 명에 달하는 이곳 이스탄불이다.
역사의 주인공과 함께 운명을 달리했던 도시, 이스탄불은 무려 1600년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685년경 그리스인
비자스가 처음으로 도시를 세운 이후 비잔티움이라 불렸던 이 도시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명명(330년)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황제로 콘스탄티노플은 1000년이 넘게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도시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뀌어 역사의 흐름과 함께 주인공이 바뀌었던 운명의 도시 이스탄불.
동서양 문화의 교차로이자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터키 제 1의 도시 이스탄불로 여행을 마지막으로.
터키 여행을 마치면서 느끼는 건 터키야말로 지역마다 특색있는 볼거리가 너무나 많았다는 것과
그 땅의 역사가 한번의 방문으로 기웃거리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찬란하다는 점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오고싶은 곳이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김밥으로 터키에서 마지막 식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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