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 09. 11.
▲경복궁 근정전의 천청 문양
조선의 6대 왕 단종 대왕(1441~1457) 이홍위는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임금이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이라 말한다.
할아버지인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은 단종대왕이 10살 되던 해에 승하하였다.
할머니인 세종대왕의 왕비 소현왕후는 단종대왕이 6살 되던 해에 승하하였다.
아버지인 조선의 5대 왕 문종대왕은 단종대왕이 12살에 되던 해에 승하하였다.
어머니인 현덕왕후(추존)는 단종대왕을 낳고 돌아가셨다.
단종은 후궁들의 손에 의해 커왔다.
조선의 6대 왕으로 등극한 단종대왕의 옆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어린 왕 단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해 줄 할머니(대왕대비)와 어머니(왕대비)마저 없었다. 후궁은 수렴청정할 권리가 없었고, 대군 등 종친은 국정에 관여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단종은 어렷을 때부터 영민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할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12살이란 나이로 한 나라의 정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버지 문종대왕도 왕세자 때 의정부서사제 체제의 대리청정을 하였다.
문종에게는 비록 병석에 누워계셨지만, 옆에는 아버지 세종대왕이 있었고 나이도 20대였다.
단종대왕 역시 아버지 문종대왕처럼 의정부서사제 대리청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라 살림의 국정운영과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삼정승이 내부적으로 결정한 문서에 임금이 형식적으로 재가를 해주는 이른바 황표정사(黃票政事)로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어린 임금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왕권을 농락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도 비판했다.
당시 상황은 권력의 공백기였다. 권력에 욕심 있는 자에게는 무주공산과도 같았다.
그리고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대결이었다.
세종대왕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어 나갔던 태평성대는 끝나고 조선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와 수양대군 이유는 격돌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친동생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하고 일가를 노비로 만들었다.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스스로 영의정(이조판서, 병조판서 겸직)에 오른 수양대군은 자신의 심복을 조정 요직에 두루 앉힌다.
그리고 1454년 아직 상중(喪中, 삼년상)인 14살의 단종대왕에게 왕비를 맞아들이게 했다.
열다섯 살에 조선의 6대 왕 단종대왕의 왕비가 된 여산 송씨 정순왕후다.
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 수양대군의 수하들은 임금 앞에서 대놓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라고 한다.
1455년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며 전위(傳爲)를 한다. 형식은 전위였으나 왕위 찬탈이었다.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는 상왕 단종에게 공의온문(恭懿溫文), 정순왕후에게는 의덕(懿德)의 존호를 올리나 단종과 정순왕후는 받지 않았다.
1456년 사육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단종 복위을 준비하다 발각된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6대 왕 단종대왕은 상왕에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고 이후 노비가 된다.
▲영월 장릉(寧越 莊陵: 단종 묘) / ⓒ인터넷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지번: 영월읍 영흥리 1090-1)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능침이다.
단종이 승하 하셨을때, 시신을 수습하는 이가 없자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 바로 장릉이다.
이곳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에 절을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 ⓒ인터넷
청령포는 1456년 6월 22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지내던 곳이다.
청령포는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싸여 있는데다가 , 한쪽 면은 벼랑에 가로막혀 배로 이용
하지 않고서는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천연의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인터넷 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