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22. 5. 26. 15:56
우러러 생가해 보건대 우리 세종대왕께서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고 더욱이 모든 옥사(獄事)에 치중하여 조정 신하 중에 크게쓸만한 자를 마음속에 골라 두고 반드시 지방장관을 삼아 늘 시험해 보았다. 영남 경상도는 옛 신라의 강토로 동쪽에 바다를끼고 있다.
바다의 섬(島)이 남으로 일본에 닿고 서북으로는 전라도에 접속되며,빙돌아 관동 강원도에 이르러 지방이 크다.한감사 밑에 명령을 듣는 고을이 대소를 합해 칠십 여 고을이 되어 정치하기 어렵다고 호가 났다.
을사(一四二五년)에 대사헌 하공(河公)을 임명하여 부임하자 정치가 현명하고 성적이 좋았다. 판결하는 일이면 다 적당하였는데 하루는 묵은 문서를열람하다가 크고 작고간에 의심스러워 밀린 일이 한 상자나 됐다. 조정 관료들 중에 재간이 있어 판결하는 데 참견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의심스런 것을 판결하는 데는 공(公)이 처리하고도 넉넉히 남는 바이라 특히 겸손하여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이 라도 혹은 잘못되어 감사의 직책을 옳게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영리치 못한 내가 아쉬운 대로 막하에서 보좌 하게되었다.
인사가 끝난뒤에 알만한 일은 내가 하고 물어야 될 일은 공에게 품신하니 공이 또한 이의하지 않고 판단력이 있다고 칭찬하며, 나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사귐을 허여하니 비록 공은 나를 잘못 알았지마는 나는 얻은 것이 컸다. 그듸 수십년이 지나 을축(一四四五년)에 우의정(빠진 글이 있음) 공이 덕망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정묘(一四四七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기사(一四四九년)에 나도 외람되게 의정 당상에 올라가게 되니 공이 나에게 이르기를 『수령관(首領官)인 늙은 감사(監司)가 만일에 미끄러졌으면 말이 못될 것이라』하니 이것은 영남 막부에 있으면서 서로 좋게 지내다가 이때에 와 황각(黃閣)에 발길을 나란히 하였다는 것이다. 공(公)이 나에게 희롱하면서 기쁜 마음을표시한 것으로 알겠다.
슬픈 일이다. 공(公)이 벌써 돌아가고, 나 또한 바람 병으로 말을 잘 못하는데 공(公)의 아들 우명(友明)이 나에게 비문요청하니 문장은 내가 능하지 못하다. 대개 글이라 하여도 그 말을 다하기는 어렵고 말을 한다해도 그 뜻을 다할 수 없는데 더구나 문장도 능하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나로서 병이 발작할 때면 하던 말도 혹은 잊어 버리니 어찌 공(公)의 묘지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공에게 알음을 받아 공의 덕업을 사모하고 공의 훈계를 지켜서 마음 속에 간직한 것이 한 두가지 잊지 않은 일이 있기에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여 쓰기로 한다. 삼가 살펴보면, 공의 휘는 연(演) 이요,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원대 조상으로 복야공(僕야公)이 있으나 휘가전해 오지 않았고, 보첩 세계에 휘 진(珍)이 있으니 벼슬이 사직(司直)이다. 그 뒤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휘 즙(楫)에 이르러 진천 부원군(晉川府院君)을 봉하고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며, 원정공이 휘 윤원(允源)을 낳았으니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봉하고 호는 고헌(苦軒)이다.
고헌공은 휘 자종(自宗)을 낳아서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의정(左議政)에 증직하였고 호는 목옹(木翁)이며 홍무 구년(洪武九年) 병진(고료 우왕二년,一三七六년)에 공(公)을 진주 이구산(晉州 尼丘山) 밑에서 낳았다. 자라서 정포은(鄭圃隱) 선생에게 수학하여 약관(弱冠) 시절에 벌써 사림들의 명망을 받았다.
병자(一三七六년)에 생원진사(生員進士)과에 다 합격하고, 또 병과 문과(丙科文科)에 제사등(第四等)으로 급제하여 청환(淸宦)을 차례로 지내 한림(翰林)으로부터 대각(坮閣)에 들어 갔다. 태종대왕 정유(一四一七년)에 홀로 바른 말을 올려 법을 밝혔다고 표창하여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승급시켰고, 세종대왕이 선위를 받자 지신사(知申事)에 승진 하였다.
조심하고 공경으로써 두 임금에게 융숭한 대우를 받고 쓰이게 되었다.춘방(春坊)에 문학,예부(禮部)에 참판 판서, 사헌부(司憲府)에 대사헌,예문관(藝文館)에 제학 대제학 정부(政府)에 참찬,좌찬성은 다 일대의 좋은 벼슬이다.
지방관으로는 군수가 두 번, 감사가 네 번인데 영남인즉 사무가 번잡한 곳이므로 명찰한 관계로 감사를 시킨 것이요, 관서(關西)인즉 국경의 중요한 지대이므로 의뢰하기 위하여 도진무(都鎭撫)를 주어 삼도(三道)를 겸해 영솔하여 국내를 편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데 문무(文武)겸재를 등용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이력(履歷)중에 큰 일이다.
중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중국에 가서 금,은(金,銀)으로 조공(朝貢)바 치는 것을 면해주기를 청하고,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대사헌(大司憲)으로써 구담 (瞿曇)이 임금과 부모를 배반하였으니 절에 시주하는 법을 혁파하여 백성에게 후하게 하기를 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얻었다.
천안(天安)에 귀양간 일은 말한 자의 잘못이요 공의 과실이 아니지만은 공은 자신의 과실인양 하고 아무런 기미의 빛도 없었다. 임금께서 그 충성과 신의를 알고 일년이 못되어 불러 왔으며, 귀양살이로 있을 때도 넉넉하게 보살펴 주셨으니 특별한 은혜이다.
공(公)이 어렸을 적부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한 번도 실수가 없었고, 장성한 뒤에 조정에 벼슬하여 경재상(卿宰相)이 되었지만은 조석으로 효성을 다하여 조그마한 일도 자식,조카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부모를 모시고 명절이나 생일에는 형제가 차례로 헌수(獻壽)하니 사대부가 부러워하여 시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었다.
상주(喪主)가 되어서 백발에 상옷을 입고 지나 치게 슬퍼하였으며 상이 끝나자 구경당(具慶堂) 이름을 고치어 부모를 길이 생각하는 뜻으로 영모당(永慕堂)이라 하고 장구(杖구)와 도서(圖書)를 부모가 계실 때와 꼭 같이 해두었다. 자제(子第)들이 영모당(永慕堂)에 띠로 덮은 것을 기와로 갈자고 청함을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선인이 거처하시던 집이라 고칠 수도 없으며 또 자손들로 하여금 선인 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하였다.
경오(一四五十년)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이 즉위하자 대자암(大滋庵)을 중수하려 할 때 공(公)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공(公)이 사부(篩傅)로 있을 적부터 문종께서 공(公)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중지하였다. 조금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하여 노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신미(一四五一년)에 비로소 치사(致仕)함을 허락하였다.
금상(今上) 원년 계유(단종 원년.一四五三년)팔월 십 오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여 그해 시월에 인천 소래산(仁川 蘇來山)자좌(子坐)에 장사지내고 유언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않았다. 태상시(太常寺)에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인자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여』문효공(文孝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부(師傅)였던 옛 은의로써 명하여 문종 묘정(文宗 廟庭)에 배향(配享) 하였다.
아! 장하다!공(公)이 늙고 덕있는 국가 원로(元老)로써 어진 임금을 만나 묘당 정략을 경륜(經綸)하고 시대에 적당한 일을 논주(論奏)한 것은 국사(國史)에 기재하고 여론이 칭송하니 덧붙여 말할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미천한 나로서 나라 은혜를 입어 지중한 고탁(顧託) 받고서도 백분의 일도 다하지 못하였다. 공과 같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퇴폐한 풍속을 진정하여 국가를 태산 반석 같이 편케 할 것이고,이와 같이 졸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의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일세에 뛰어나 지은 것은 반드시 자필(自筆)로 쓰니 한 조각 편지를 얻은 자는 소중히 하기를 아름 되는 구슬 같이하였다. 지난 병인(一四四六년)에 내가 소헌성후(昭憲聖后)의 수능관(守陵官)이 되었는데 공이 욕되게 시(時)를 지어주니 그 때 제공(諸公)들이 다 화답(和答)하여 축(軸)이 이뤄졌다. 지금 상자 안에 있어 대대로 전하며 보배로 삼을 것이니 공의 비문(碑文)을 지으려 함에 더욱 감개(感慨)한 바가 크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농서(농西)이고 개성 부윤(府尹) 존성(存性)의 따님이다. 아들 셋 딸 둘을 낳으셨는데 맏이는 효명(孝明)이요 벼슬이 부정(副正)이며, 둘째는 제명(悌明)이요. 벼슬이 좌랑(左郞)이며 막내는 우명(友明)이니 즉 비문(碑文)을 청하러 온 사람이다.
이도 지극한 효성이 있어 능히 공의 옛 명성을 이어 받았으며 맏딸은 문화(文化)사람 호군(護軍)유경생(柳京生)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안동(安東)사람 감찰(監察)김맹렴(金孟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증손자 누구 누구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경태 사년 계유(一四五三년),
좌의정, 의령 남지(南智)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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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神道碑文 - 南智
緬惟我世宗大王勵精治道。尤致詳于庶獄庶愼。凡廷僚之可大用者。旣簡在心。必試之方岳。嶺。新羅舊疆。東邊海。海之島南極于倭。西北接兩湖。迤至于關。地踔遠。環一節聽治大小七十有餘邑。號難治。歲乙巳。命大司憲河公。旣之任。政明修擧。治成績煕。有決輒當。一日。閱久牒得細大疑滯凡一笥。以狀請于朝。擇庶僚之有才幹可參決決疑。公所恢恢爾。特謙邦不自專。恐一事或誤。致曠分憂也。余不佞承乏佐幕。幕禮畢。可辨者專。可質者覆。公亦不異焉。遂猥推詡器局。賜交忘年。雖公之誤知余。而余之得幸於嶺大矣。後數十年乙丑。右揆缺。公以宿德拜右揆。丁卯。陞左。己巳。余亦濫躋政府。公謂余曰。首領官老監司。萬一蹉跌。不可說也。蓋用嶺幕相得。至是而幷武黃閣。公之戲余而寓其喜。可知也。嗚呼。公旣歿。余又崇風瘖。殆不能言。公之胤子友明請余以幽竁之文。文又余不能。夫書者未必盡其言。言者未心盡其意。顧兹文不能言不能。疾病之來。又或忘其言。何能誌公。第余受知於公。慕公德業。佩公良箴。藏之在心。猶有一二事不忘。義不敢辭。謹按公諱演。字淵亮。號敬齋。晉州人。遠祖有僕射公。諱不傳。自譜系來。有諱珍。官司直。歷世簪紳。至諱楫。封晉川府院君。諡元正公。元正生諱允源。封晉山府院君。號苦軒。苦軒生諱自宗。知淸風郡事。贈左議政。號木翁。以洪武九年丙辰。生公于晉之尼丘山下。及長。受學於鄭圃隱。弱冠。已負士林望。丙子。中生進。又登丙科文科第四人歷敭淸要。自翰苑入臺閣。太宗大王丁酉。褒獨奏揚憲。擢拜同副代言。逮世宗受禪。陞知申事。小心莊敬。以誠力受知兩上。際遇交隆。遂秉用焉春坊之文學。禮部之參判,判書。憲府之大司憲。藝館之提學,大提學。政府之參贊,左贊成。皆一代極選。前後在外。再膺郡牧。四受藩鉞。若嶺南劇務。以綜明擧。關西重地。以倚卑。授都鎭撫之命。兼領三道。內綏外禦。用文武才略。此皆履歷之大也。間嘗以禮參赴京。請免金銀貢。竣還。以大憲。論瞿曇棄君父。罷舍施以厚民。得允。至若天安之謫。言者過言。非公過也。公自過。無幾微色。上察公忠諒。不一年召還。在謫亦優恤。蓋異恩數也。公事親孝。自幼未嘗有子弟之過。長而立身王朝。致位卿宰。晨昏惟誠雖小事未嘗使兒姪。作具慶堂。佳節晬辰。晜弟迭次獻壽。搢紳艶稱。歌詠以志之。一世榮之。及丁憂。衰白帶絰。哀毀踰禮。服闋。改具慶爲永慕。杖屨圖書。一如親在時。不許子弟以瓦代茅茨曰。先人舊居不可改。且使子孫法先人儉德也。庚午。文宗卽阼。欲修大慈庵。公固執不可。上自公爲師傅時雅敬公。遂不果。俄陞領議政。以老疾乞退。辛未。始許致仕。今上元年癸酉八月十五日。考終于正寢。十月日。葬于仁川蘇萊山甲坐。遺命不作佛事。太常攷行。勤學好問曰文。慈惠愛親曰孝。遂賜諡文孝公。論師傅舊恩命配文宗廟。嗚呼。公以耆德元老。遭値聖明。其經綸廟略。論奏時宜。國史載之。輿誦記焉。尙安所贅已。第恨賤臣叨荷國恩。負重顧託。百不能有爲。安得如公者在。必有坐鎭頹俗。措國磐泰。不如是湔劣也已。公文章筆藝。妙絶一時。有作必自書。得片翰者。寶重如拱璧。記昔丙寅余守昭憲聖后陵。公辱以詩。起居同朝諸公亦和之。成軸今在篋。擬以爲傳家寶。今於誌公之文。尤有所感慨耳。配貞敬夫人李氏。系隴西。開城尹存性女。生三男二女。男長孝明。副正。次悌明某官。季友明卽乞文者也。有至孝。能業公舊聞。女長適文化人護軍柳京生。次適安東人監察金孟廉。孫曾某某。不能盡記。景奉四年月日。宜寧南智撰。<끝>
경재집 > 敬齋先生文集卷之五 / 附錄 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