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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김문기 유허비( 沃川 金文起 遺墟碑) /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3길 44-29 (백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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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34권 / 비(碑)
백촌 김 선생 유허비(白村金先生遺墟碑 丙午)
병오년(1846, 헌종 12)
아아, 이곳은 고(故) 충신 대총재(大冢宰 이조 판서) 김 선생(金先生) 휘 문기(文起)의 유허이다. 옥천군(沃川郡)의 남쪽 20리 지점에 사단동(社壇洞) 백지리(白池里)가 있으니, 바로 선생의 외구(外舅 장인) 이조 판서 김공 효정(金公孝貞)의 고향인데, 선생이 여기에 머물며 호를 백촌(白村)이라고 하였다.
백촌은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사이에 자리하면서 산수의 승경을 차지하고 있고 또 말처럼 생긴 높다란 바위가 있다. 선생이 일찍이 그 꼭대기에 정자를 마련하여 깨끗한 시내를 굽어보고 달 뜬 산을 감상하며 참된 즐거움을 붙였다. 선덕(宣德) 병오년(1426, 세종8)에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청현(淸顯)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또한 일찍이 관북(關北) 지역을 안찰(按察)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세조 병자년(1456, 세조2) 5월에 이르러 성 충문공(成忠文公) 삼문(三問), 박 충정공(朴忠正公) 팽년(彭年), 이 충간공(李忠簡公) 개(塏), 하 충렬공(河忠烈公) 위지(緯地), 유 충경공(柳忠景公) 성원(誠源), 유 충목공(兪忠穆公) 응부(應孚)와 함께 상왕(上王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서 육신(六臣)과 함께 화를 당하였고 아들 현감 김현석(金玄錫) 또한 죽음을 당하였으며 손자와 증손이 모두 수노(收孥)되었다.
영종(英宗 영조) 신해년(1731, 영조7)에 명하여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정종(正宗 정조) 무술년(1778, 정조2)에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의(忠毅)’의 시호를 내렸다. 신해년(1791)에 명하여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하고 김현석은 조사단(朝士壇)에 배향하였으며 종백(宗伯 예조 판서)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사림들은 또 섬계(剡溪)에서 선생을 제향하였다. 상하에서 높이고 보답한 바가 또한 지극하다.
선생은 김해(金海)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효기(孝起)이다. 조고는 휘 순(順)이고 선고는 휘 관(觀)이니 모두 대관(大官)을 지냈다. 선비(先妣) 관성 육씨(管城陸氏)는 관찰사 비(埤)의 딸이다. 선생은 빼어난 자질을 타고나서 윤리에 돈독하였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라서 거상(居喪)할 적에 몸을 훼상하여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날마다 성묘하며 애타게 호곡하니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 붙여 ‘효자동(孝子洞)’이라고 하였다. 체포되었을 적에 제공들은 서로를 끌어서 대었으나 오직 선생은 자복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강직하다고 여겼다.
살아서 그 직분을 다함은 의(義)이고 죽어서 그 바름을 얻음은 영화이다. 친한 무리들과 웃음을 머금으며 함께 선(善)하기를 바란 것은 제공의 뜻이고, ‘나는 따로 정한 것이 있으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여긴 것은 선생의 뜻이니, 이를 어찌 달리 보겠는가. 무릇 삶이란 사람이 매우 욕망하는 바인데 식구 백 명의 목숨을 버려 가며 기꺼이 만 번을 죽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은, 군부(君父)는 결코 배반할 수가 없고 명교(名敎)는 결코 저버릴 수가 없고 강상(綱常)은 결코 훼손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뜻이 격동함에 도거(刀鋸)와 정확(鼎鑊)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였고 삶을 얻는 것이 편안하다고 기필하지 않았다. 지금 선생의 세대로부터 삼백여 년이 지났는데 충성스럽고 강직한 기운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늠름하여 일월에 닿고 천지를 진동시키니 마땅히 세 상신(相臣), 여섯 충신과 함께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아, 훌륭하다.
선생의 전택은 모두 국가에 몰수되었으나 오직 정자와 누대의 옛터만큼은 우뚝하게 남아 있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이에 오히려 선생의 유풍과 여운이 세상에 떨쳐져서 이를 통해 애도하고 경앙할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후손을 사칭하는 자가 마치 두정륜(杜正倫)이 성남(城南)을 한 집안이라고 하고 곽숭도(郭崇韜)가 분양(汾陽)의 묘에서 통곡한 것과 같이 해서 적통을 빼앗기를 도모하여 거짓말을 하고 간계를 부리다가 끝내 계획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비(碑)를 자르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선생의 남은 후손들이 차마 황폐한 채로 내버려 두지 못하여 다시 비(碑)를 세울 것을 도모해서 나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의 병자년은 바로 명(明)나라의 임오년과 같다. 선생은 방효유(方孝孺), 철현(鐵鉉) 등의 제현과 세대를 초월하여 행적이 똑같으니 어찌 자취가 매몰되어 일컬어지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또 선생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편안하게 죽음에 나아간 것은 천리(天理)의 당연한 바이니 어찌 사후의 이름에 상관함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구구한 석 자의 비(碑)가 또한 선생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는 억대의 뒤에도 충신이 살던 곳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절해(絶海)에 유배될 적에 방한시(放鷴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비장하니 이는 단묘(端廟 단종)가 지은 〈자규사(子規詞)〉의 갱가(賡歌)가 될 것이다. 아아, 애통하다. 이를 써서 돌려주어 비(碑)의 뒷면에 새기게 하는 바이다. <끝>
[註解]
[주01] 수노(收孥) : 죄인의 가속(家屬)까지 연좌시켜 노비로 삼는 것을 이른다.
[주02] 섬계(剡溪) : 경상북도 김천(金泉)에 위치한 섬계서원(剡溪書院)을 이른다. 섬계서원은 1802년(순조2)에 김문기(金文起)의 충절
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金玄錫)도 함께 배향하였다.
[주03] 세 상신(相臣) : 상신으로서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죽음을 당한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 세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1791년(정조15)에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주04] 여섯 충신 :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으로, 1456년(세조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인 이개(李塏), 하위지
(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성삼문(成三問), 유응부(兪應孚), 박팽년(朴彭年)을 이른다.
[주05] 두정륜(杜正倫)이 …… 하고 : 두정륜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성남(城南) 두고(杜固) 지역에 사는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에
게 동보(同譜)하기를 청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이에 원망을 품고서 집정(執政)한 뒤에 두고 지역을 파서 수로(水路)를 만들게 하
였는데 냇물이 10일 동안 핏빛으로 변하더니 그 뒤부터 두고의 두씨들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1 人倫部
不許通譜》
[주06] 곽숭도(郭崇韜)가 …… 것 : 곽숭도는 오대(五代) 후당(後唐) 때의 사람이다. 분양(汾陽)은 당(唐)나라 때의 명장(名將)으로, 분
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곽숭도가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용사(用事)할 때에 재상 두노혁(豆盧
革) 등이 모두 그에게 아부하여 그의 성이 곽씨(郭氏)인 것을 들어서 곽자의의 후손일 것이라고 부추겼는데, 곽숭도는 마침내 그것
을 사실로 여겼다. 곽숭도가 뒤에 촉(蜀)을 정벌하러 갔을 때에 곽자의의 묘를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통곡을 하고 떠나니, 이를 들은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다. 《新五代史 卷24 郭崇韜列傳》
[주07] 우리나라의 …… 같다 : ‘우리나라의 병자년’은 1456년(세조2)으로, 이해에 일부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세
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 다수가 처형되거나 중형을 받았다.
‘명(明)나라의 임오년’은 1402년(태종2)으로, 이해에 명(明)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당시에 연왕(燕王)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의 황위를 찬탈하였다.
[주08] 방효유(方孝孺) : 1357~1402. 명(明)나라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희직(希直), 호는 손지(遜志)이다. 서실(書室) 이름
이 ‘정학(正學)’이었기 때문에 흔히 방정학으로 불린다. 송렴(宋濂)에게 수학하고, 건문제(建文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서 당대 제일의 학자라는 중망을 누렸으나, 1402년에 연왕(燕王), 곧 영락제(永樂帝)가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한 뒤 등극 조서를 작
성할 것을 명하자, 이를 거부하다가 집안 전체가 죽음을 당하였다.
[주09] 철현(鐵鉉) : 1366~1402. 명(明)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자는 정석(鼎席)이다. 건문제(建文帝) 초기에 산동 참정(山東參政)을 지
냈다. 연왕(燕王), 곧 영락제(永樂帝)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남(濟南)을 수비하면서 누차 반란군을 무찌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에 올랐는데, 뒤에 반란군에게 붙잡혀 굴복하지 않다가 처형되었다.
[주10] 자규사(子規詞) :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로 유배될 때에 자신의 신세를 두견새에 비유하여 읊은 칠언율
시(七言律詩)이다.
[주11] 갱가(賡歌) : ‘갱(賡)’은 잇는다는 뜻으로, 순(舜) 임금과 고요(皐陶)가 군신간에 화답하여 노래를 이어 불렀던 데에서 창화가(唱和
歌)를 의미한다. 《書經 虞書 益稷》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 / (사)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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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白村金先生遺墟碑 丙午
嗚呼。此故忠臣大冢宰金先生諱文起遺墟也。沃川郡南二十里。有社壇洞白池里。卽先生外舅吏曹判書金公孝貞之鄕。而先生館焉。因號白村。白村介於湖嶺。擅泓崢之勝。且有穹巖如馬。先生嘗置亭於其巓。臨淸溪挹月岳。用寓眞樂。宣德丙午。闡小大科。由翰林歷敭淸顯。止吏曹判書。亦嘗按節關北。克壯鎖鑰。及世祖丙子五月。與成忠文公三問,朴忠正公彭年,李忠簡公塏,河忠烈公緯地,柳忠景公誠源,兪忠穆公應孚。謀復上王事覺。同六臣被禍。子縣監玄錫亦死。孫曾幷收孥。英宗辛亥。命復先生官。正宗戊戌。贈左贊成謚忠毅。辛亥命配食于莊陵忠臣壇。玄錫與享朝士壇。遣宗伯致侑。士林又俎豆於剡溪之上。上下之所崇報亦至矣。先生金海人。初諱孝起。祖諱順。考諱觀。俱大官。妣管城陸氏。觀察使埤之女也。生稟異質。篤於倫理。喪祭壹遵文公家禮。居瘠幾不全。而日展墓號絶。人名其所曰孝子洞。及被逮諸公。互相援引。而獨先生不服。人尤以爲烈。生而盡其職義也。死而得其正榮也。欲與親黨含笑而偕臧者。諸公之志。我自有定。何用言爲者。先生之志。是豈差殊觀哉。夫生者人之所甚欲。而捐百口之命。甘萬死而靡悔者。以君父决不可背。名敎决不可負。綱常决不可虧。意義攸激。不知刀鋸鼎鑊之可畏。不必以得生爲安也。今去先生之世。餘三百年。而忠剛之氣。凜然如生。薄日月震乾坤。當與三相六忠。彌遠而彌彰。於乎盛哉。先生田宅。俱沒入于官。而惟亭臺舊址。巋然獨存。鄕人士樹碑以識之。猶見遺風餘韻。披拂人間。得以憑吊景仰。有冒稱先生後屬者。如杜正倫之族城南。郭崇韜之哭汾陽。謀奪宗嫡。打訛閃姦。竟不能售。則至斷碑而極矣。先生殘(由+巳)
剩裔。不忍其荒廢。爰謀改竪。謁文于不佞。不佞作而曰吾東之丙子。卽皇明之壬午。先生與方鐵諸賢。曠世一致。何憂堙滅而不稱哉。且先生以身殉國。蹈死如歸者。天理之所當然。何有於身後之名哉。然則區區三尺之刻。亦何與於先生乎。要使億世之下。猶知有忠臣攸芋也。先生曾流絶海。有放鷴詩。辭氣悲壯。是爲端廟子規詞之賡歌歟。嗚呼欷矣。書此以歸之。俾鐫于碑陰。<끝>
ⓒ한국문집총간 |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