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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어버이와 스승의 주일 설교
제목 : 부모와 자녀 모두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본문 : 신명기 21장 21절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서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 새번역>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 일요일에 교회와 절을 함께 다니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전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너무도 재밌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반겨주고,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고, 악기도 배우고, 재밌는 놀이도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때 한참 성경 읽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서 보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던 저에게 성경책은 정말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 시편을 통독했을 때와 4복음서를 통독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기가 즐거운 와중에도 좀처럼 쉽게 넘어가지 못했던 몇 가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가 아니라(차라리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은 어렵다고 그냥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가시가 걸린 듯 답답하게 느껴진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구절이 바로 창세기 22장 2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새번역>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하나님보다 아브라함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를 위해 준비한 시간임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요구를 하실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지?’ 라는 생각이 더 깊게 들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라면 아들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단 한 번이라도 ‘안됩니다!’ 라고 단호한 말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삭을 죽이실 바에는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대사가 아닐까요? 무슨 이런 아버지가 있지 답답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이길래 아들까지 포기해가면서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이 믿음처럼 보이지 않고, 나쁜 것에 홀려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 같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구절은 더욱 답답한 구절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읽었던 말씀 신명기 21장 18~21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다 같이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거든, 그 부모는 그 아들을 붙잡아, 그 성읍의 장로들이 있는 성문 위의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하고 호소하십시오.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서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 새번역>
아니 어떻게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모세의 유언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니! 그것도 21세기가 아니라 광야 시대에 이렇게까지 기록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조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말을 듣지 않고, 아무리 반항을 하고, 아무리 고집이 세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 듣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부모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식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 그동안 속 썩인 모든 것이 다 후련하게 해소되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인지 답답했습니다.
자식의 입장일 때는 이 두 구절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자식의 입장 밖에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되어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과 모세의 마음이 제 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자식의 입장일 때는 알지 못했던 성경의 의미를 조금씩 어른의 입장이 되고, 부모의 입장이 되면서 깨닫고 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헤아리고 헤아려 봐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가 창세기 22장과 같이, 신명기 21장과 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는, 반항하고 말도 안 듣고 방탕한 자녀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행동해야 할 때 찢어지는 부모의 마음을 결코 자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을 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이삭의 이름처럼 모두가 웃음을 머금은 행복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모두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흔들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믿고 따라와 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을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얻은 자녀도 세상 어떤 존재보다 귀한대 100세와 90세가 된 부모에게 자녀는 얼마나 귀한 존재일까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부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시니, 아브라함 입장에서도 듣자마자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당장이라도 하나님께 욕을 하면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냐고 믿음을 철회하고 싶은 아브라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요구를 하는 신이 내가 믿어왔던 신이라니 회의감이 찾아 들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떤 말로도 범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된 아브라함이고, 이삭의 부모로서의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그리고 이 일이 아들 이삭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새번역>
그렇다면 어머니 사라는 어땠을까요? 저는 사라 역시 담담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기적을 체험했기에, 이렇게 어렵게 주신 약속의 자녀를 향한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을 믿으며,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눈물로 기도하며 보내 주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아들 이삭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삭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이렇게 위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 새번역>
이 이야기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 부모의 순종에 진심의 박수를 보냅니다. 진정으로 아들 이삭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이 이삭을 주신 이유와 이삭을 대하는 방법과 진정으로 이삭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초보 아빠 아브라함과 초보 엄마 사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먼 훗날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신명기 21장에 등장하는 이 충격적인 고발 역시 동일합니다. 이 구절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분명한 선을 그어주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돌로 쳐서 죽을 자리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아무리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고, 고집이 센 자식도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십시오. <신명기 27장 16절, 새번역>
여기에 등장하는 저주까지도 대신 받으려고 하시는 존재가 바로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지독한 사랑이 자녀를 죽이는 것인 줄도 모르고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모의 마음 역시 너무도 잘 아시기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본인도 자녀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견디시는 분이시기에! 얼마나 우리라는 자녀들을 사랑하시면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17절, 새번역>
먼저는 자녀들을 위해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녀, 반항만 하는 자녀, 고집이 세어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자식을 향한 안타까움만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 볼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게 되면 도무지 방법이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어 속이 타들어 가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도 없어 마음의 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자녀들이 이런 모습이라면 이런 형벌까지 줄 수 있음을 자녀들로 하여금 인지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절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실제로 성경의 기록에는 이 일이 집행된 경우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자녀 여러분, 우리는 신명기 21장 21절 말씀을 이정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하고, 반항을 접어야 하고, 고집은 꺾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모에게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악’이라고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을 향해서도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자녀가 이런 모습까지 보인다면 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아브라함과 동일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호소할만큼 나쁜 자녀로 만들지 않도록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부모라도 절대 돌로 쳐 죽이는 그 자리만큼은 자녀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지 하나님은 부모들에게도 말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청지기로서의 부모가 되어 단호함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안타까운 일에 대해서 가장 좋은 예로 사무엘하에 등장하는 다윗과 첫째 아들 암논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와 그들의 아버지 엘리제사장도 있지만 더 안타까운 일은 다윗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이복 여동생 다말에게 나쁜 짓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곧 다윗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십니까?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지만, 암논이 사랑하는 맏아들이라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엘하 13장 21절, 공동번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묻어두게 됩니다. 자신이 우리야에게 했던 행동처럼 그저 묻어두면 된다고 생각했던 착각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자녀였던 암논에게 아무 말도 못한 아버지 다윗 때문에 더 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친여동생 다말에게 못된 짓을 한 이복형 암논과 다른 이복형제들을 다 죽이려고 하는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한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는 사이에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 <사무엘하 13장 39절, 새번역>
분명 다윗은 부모로서 해야 할 행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이유로 더 안타까운 일들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1장 18~21절의 말씀을 통해 자녀들에게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통해 부모와 자녀가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다윗이 기억했다면 결코 암논에게, 압살롬에게 그냥 묻어둠은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암논도, 압살롬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다윗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녀를 향한 마음, 그 사랑이 언제나 미움과 화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정말 어려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저를 포함한 모든 자녀 여러분, 부모님들이 바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이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된다면 부모의 마음을 훨씬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닫혀 있는 귀를 열고, 반항을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게 되면 그 손해는 결국 자신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고집이 셀 때 볼 수 있는 것은 부모의 눈물과 흰머리 밖에는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결코 이용하지 마시고, 이해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면 그 사랑으로 보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반항을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고집을 내려놓고 타이름에 감사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방탕함을 끝내야 할 때입니다.
부모를 여읜 모든 자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진리의 말이 있습니다. “살아 계실 때 잘해라!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입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오늘 성경 본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녀라면 이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공동번역>
그리고 부모들도 명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부모이자 스승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에베소서 6장 4절, 공동번역>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도 노력해야 하지만, 자녀들도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하나님 주시는 복으로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결단찬양 - 손잡고 함께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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