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0 (충효천길 64-10)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609년(진평왕 31)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大梁州: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買利浦城)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김유신 [金庾信]장군은 595(진평왕 17)~ 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 전체를 지배하려 했던 당나라를 물리쳤다.
신라 어느왕릉보다 화려한 김유신장군묘
내가 답사한 왕릉중에 신문왕의 아버지 (성덕왕 33대왕)36간 통치한 왕릉보다 화려함이 더하다.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을
진압했다.
그해 10월에는 압량주군주로서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竹旨)·
진춘(陳春)·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과사전자료에서...
김유신 묘는 송화산(松花山)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경주 시내에서 영천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고속버스터미널 옆 서천교를 건너 사거리에서 오른편 송화산 쪽으로 1.2km 정도 가는 곳에 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불과 2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데다, 형산강을 끼고 경주시를 바라보며 찾아가는 길 맛도 좋아 한 번쯤은 찾아갈 만한 곳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 일명 김구형(金仇衡))의 증손이며, 신라의 명장이었던 서현(舒玄)의 아들로 태어나 15살에 화랑이 되어 무예를 닦고, 35살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게 도왔고,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켰다.
또한 문무왕 8년(668년)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지위를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아무리 당대의 명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왕릉을 능가하는 호화스러운 묘를 과연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유신이 죽은 뒤 비록 문무왕에겐 외삼촌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호화스럽게 묘를 련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자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