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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4 - 아브라함의 후손인 요셉은 이집트를 정복한 힉소스인 인가?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의 거주지인 우르에 살았는데.... B.C. 2900년경 우루크
1왕조가 시작된 이래 BC 2330년 아카드에 정복됐고 이후 우르 제3왕조 시대인 BC 1760년
경에 아브라함은 가족들과 함께 북상해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와 아들 이사악을
거쳐 손자 야곱의 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은 편애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요셉은 궁전관리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파라오의 꿈에 대한 해몽을 해준
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훗날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찾아온 현제들을 시험해
보고 용서하니 아버지 야곱등 일족이 모두 이집트로 이주해서 고센에 거주하게 되는데
요셉이 죽은후 이방인에 노예 취급을 받는 중에 힉소스인들이 침입해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는 오래 전인 고대에 기원전 36세기 부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서
국가가 등장했으며... 기원전 3세기 마네토가 쓴 기록에는 기원전 3100년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처음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했으니 고왕국 시대로
1왕조의 수도는 멤피스이고 제트(Djet) 는 구리 확보로 시나이반도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제2왕조에서 상형문자가 완성되고 기원전 2650년 제3왕조에서 피라미드 건축이 시도되었으며 토목
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
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는데 제4왕조에서는 기원전 2550년에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습니다.
기원전 2180년 제6왕조시기에는 가뭄과 기근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니...... 수많은 파라오가 난립한
제1 중간기 라고 부르는데... 140년간의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왕조로 멘투호테프 2세가 통일
을 이루니 중왕국으로 분류하는데, 수도는 하류의 멤피스에서 상류인 룩소르(테베)로 옮겼으며 누비아
나 시리아, 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루어졌고 아몬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들의 힘이 강해집니다.
기원전 17세기경 복합궁 활과 전차를 가진 힉소스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되었으니 이 시기를
제2 중간기라고 부르는데... 나일강 하류 삼각주(델타)가 정복당했다고 하더라도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건재했으며 이들은 힉소스 지배층에게 때로는 협조하고 반항하면서 공존했던 것
으로 보이는데 힉소스인들은 파라오를 자칭하였으니 100여년 정도 존속한 제15왕조로 인정됩니다.
제15왕조는 테베에 있던 16왕조에 이어 17왕조와 혼인을 맺기도 하였기 때문에 15, 16왕조의 둘,
혹은 넓게 잡아 17왕조까지 셋을 힉소스 계열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는데.... 애초에 16~
17왕조는 테베계열 출신이며 특히 17왕조는 힉소스 정권인 15왕조와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
과정에서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 2세는 힉소스와의 전투 중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기 까지 했습니다.
결국 세케넨레 타오 2세의 아들이자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Kamose)의 동생
인 아흐모세 1세(Amosis I)가 힉소스인의 정권을 1세기 정도만에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해 신왕국을 건설하는데, 제2중간기는 정복당한 시기
이지만 동시에 아시아에서 수레, 청동기 등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온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힉소스(Hyksos)인들은 서부 셈어를 쓰는 종족으로 이집트의 북동쪽 가나안으로 부터 나일강
델타 지역의 동부를 침략하여 고대 이집트의 제 2 중간기를 개창한 아시아 계통의 호전적
인 인종으로... 이집트인들에게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민족을 처음 대했기에
쉽게 정복되고 말았으니 기원전 17세기에 하이집트와 중이집트를 108년간 통치했습니다.
이집트 제2중간기는 두번째로 혼란에 빠진 중왕국의 끝(제12왕조)인 기원전 1800년경 부터 기원전
1570년경 신왕국(제18- 20왕조)의 시작 사이를 말하는데, 힉소스 왕조는 고대 이집트의
제15왕조 및 제16왕조 시대로 기원전 1663년 부터 기원전 1555년 사이이니 그들은 이집트에 새
복합궁 활과 말이 끄는 전차 등 신무기를 들여왔으며 유대인들의 출애굽기와 연관이 깊다고 봅니다.
힉소스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2000년경 부터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동지중해 연안으로의
대규모 민족 이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 동부 나일 삼각주가 기원전 18세기 후반
에 레반트로 부터 상당한 침투나 침입을 받았다는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고,
이는 타니스에서 발견된 세트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로 더 믿을만해졌습니다.
4200년전 기후 변화 사건 이후 점차 추워졌고 이는 북쪽 유목민의 이동을 초래했을 것이니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동지중해 연안의 셈족들은 북쪽에서 이동해 오는 후르리인,
카시트인, 인도- 아리아계의 종족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300~500년경의 게르만족 이동과 중국의 5호 16국 상황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테베의 아모세 1세(제18 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힉소스 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시대’
를 열었으니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는 제국에 걸맞은 권력과 영광의 새로운 정점에
올라섰는데, 이집트 원주민 세력의 대 힉소스 전쟁은 제 17왕조의 세크넨라 부터 제 18왕조
의 아모세 1세 통치 제 20년 까지 약 30년 (기원전 1560-1530) 가까이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에 이스라엘인의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 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니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는데, 헤카타이오스는“출애굽기”라는 유대인
전승과 다나오스 및 카드모스의 이주라는 그리스 전승은 모두 힉소스의 축출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집트 제2중간기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두번째로 혼란에 빠진, 중왕국의 끝 (제12왕조의 끝) 인
기원전 1800년경부터 기원전 1570년경 신왕국(제18-20왕조)의 시작 사이를 말하는데, 이때 힉소스
Hyksos 인이 이집트에 나타나 나일강 동부의 델타(Delta) 유역을 점령하고 이집트 제15왕조를 만들어
통치했는데 당시 기후변화에 따른 한랭화로 인한 대규모 민족이동이 역사적 배경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힉소스(Hyksos) 라는 이름은 ‘외국 땅의 지배자’ 라는 뜻의 이집트어 헤카 카수트 (heqa khsewet) 에서
유래한 말로써,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사제 마네토 Manetho 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이름의 원형인 헤카 카수트는 힉소스 시대만이 아니라 그 전후의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힉소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힉소스는 가나안어를 말하는 인근 팔레스타인 주민만이라고 주장
하는 사람들은 ‘힉소스’ 또는 헤카 카수트라는 칭호는 족장 또는 지도자의 의미를 담고
있지 특정 인종에 대한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편은 힉소스는 북시리아
와 동코카서스로 부터 온 북후르리적인........ 또는 아리아적인 요소도 포함한다고 믿습니다.
야만인의 공격이나 정복은 급격히 발생했다가 사라지거나 빠르게 동화되니 체계적인 발굴은
어려우며 ‘외부의’ 야만인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내부의’ 야만인을 부추겨 부유한
문명권을 침입하게 하니... 훈족이나 터키어를 말하는 자들은 로마제국에 침입한 경우
가 별로 없지만 훈족의 출현으로 고트족과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시리아~팔레스타인 및 하이집트에서 발굴되는 기원전 1750-1570년 사이의 고고학적 증거와
마네토의 전승, 스페오스 아르테미도스 비문, 기원전 18세기 시리아로 후루인의 팽창,
미탄니의 말과 전차에 대한 관계등을 보면 먼저 후루리어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자
들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고 가나안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잘 확립된 제12왕조의 연표와 달리 13왕조는 혼란스러운데..... 기원전 3세기 사제 마네토는 “역사” 에서
제15·16·17왕조를 힉소스 왕조로 언급했으며 제14왕조는 서부 삼각주 지역의 지배자로 간주했지만
‘제17왕조’ 는 테베의 이집트인 출신 왕조로 보니 그 후손이 힉소스를 쫓아내고 나라를 재통합하면서
제18왕조를 확립했으며 힉소스 통치자들은 제14왕조 및 ‘제17왕조’ 와 함께 수십년간 공존했다고 봅니다.
힉소스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2000년경 부터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동지중해 연안으로의 대규모 민족
이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니 동부 나일 삼각주가 기원전 18세기 후반에 레반트로 부터 상당한 침투
나 침입을 받았다는 데는 타니스에서 발견된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로 입증되었습니다.
힉소스 민족의 기원은 셈족(Semites), 히브리인,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하던 후르리인
(Hurrian), 인도- 아리안계(Indo-Aryans)의 아시아인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되는데
마네토의 『역사』에서 힉소스와 관련된 구절은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람인..... 아피온의 반유대주의적인 저술에 대한 요세푸스의 논박 속에 보존되었습니다.
“투티마이오스 치세에 신의 광풍이 우리를 쳤다. 예기치 않게 동쪽에서 불분명한 종족의 침입자가 우리땅
으로 진군했으니 쉽게 우리 땅을 점령했는데.... 우리 지배자를 제압한후 그들은 도시를 무자비하게
불태웠고, 신전을 무너뜨렸고 모든 주민을 잔혹한 적대행위로 다루어 학살하고 그 처자를 노예로 삼았다.
마침내 그들은 살리티스라는 인물을 왕으로 뽑았으니.... 그는 멤피스에 거처를 잡고, 상 ·
하이집트에서 조공을 받아들이고 요충지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는데.... 그는 나일강의
부바스티스 지류 동쪽에 도시를 건립하고 고대 종교 전통에 따라 아바리스 라고
명명했다. 그는 재건축하고 육중한 성벽으로 요새화했으며 19년간 통치하다가 죽었다.
두번째 브논 Bnon이 승계하고 44년간 통치했다. 아파크난이 왕위를 잇고 36년 7개월간 지배했다.
그후 아포피스가 61년간을 야나스가 50년 1개월을 마침내 아시스가 등극해 49년 2개월간
지배했다. 그들의 첫 번째 지배자들인 이 여섯명의 왕은 이집트 종족을 근절시키기 위해 점점
더 열심이었다. 그들 종족은 전체로서 힉소스 Hyksos라고, 즉 ‘양치기들의 왕’ 이라고 불렀습니다.
힉 hyk 은 신성한 언어로 왕을 의미하고 소스 sos 는 일상어로 ‘양치기’ 또는 ‘양치기들’ 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힉소스’는 복합 단어이니 혹자는 그들이 아라비아 사람
이라고 말하는데 그 복합어는‘포로-양치기들’과 관련되었다는 것이며 이집트어에서
힉 hyk 은 일부러 기음 氣音(h) 을 내면 학 hak 이 되는데, 이는 ‘포로들’을 의미합니다.
기원후 19세기 말까지 학자들은 요세푸스가 발췌한 마네토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힉소스를 단 한번의 폭력적인 침입으로 이집트에 들어왔던 민족으로 보았으며 일부
학자들은 마네토의 기록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체류’또는‘포로생활’사이의 유사점을
보고 침입자는 이스라엘인이거나 원이스라엘인, 어쨌든 셈족 사람들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는 대체로 아리아 인종의 방식으로... 이집트를 휩쓴 민족이
셈인종으로, 적어도 유대인에 관련된 인종으로는 여겨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훨씬 북쪽에서 왔고 아마도 아리아 인종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점증했습니다.
1925년 에두아르트 마이어는 인도유럽인과 후루인들이.. 셈족인 힉소스가 시리아, 이집트,
에게해권으로 이동하는 데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으니 『고대사』의 1928년
판에서 마이어는 널리 퍼진 유물의 발견을 키얀이라는 이름과 연관시키며 힉소스
제국이 크레타와 시리아로 부터 이집트와 수단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고 추론했습니다.
1936년 출판된 이집트의 이집트학 학자 파호르 라비브(Pahor Labib) 의 논문 「이집트에서
힉소스의 지배와 그 몰락」은 그 주제에 관한 금석학적 · 문헌적 전거에 관한 상세한
연구였는데..... 라비브는 셈어적 왕의 이름으로 힉소스는 셈족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1951년 스웨덴 학자 세베-쇠데르베르그는‘북쪽 사람들’의 침입은 물론 또는 침입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고 주장했는데 그에 따르면,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는 아시아인에 의한 내부 봉기의 결과였으며
그들은 원주민 이집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수 세기에 걸쳐 이집트에 정착했던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세베-쇠데르베르그는 프랑스 셈학 학자 롤랑 드 보, 독일 셈학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의 지지
를 받았으니 셈어를 말하는 아모리인이 시리아 사막에서 레반트와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생겨난 결과였다는데, 알트는 이러한 흔적이 제13왕조의‘저주의 문서에 나타난다고 주장
했으니 그 문서에서 이집트인은 내륙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군주의 이름을 저주했습니다.
셈인종인 팔레스타인 사람과 아모리족의 이동으로 힉소스를 보는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세하니 이것은 제2중간기 전문가인 독일의 위르겐 폰 베커라트와 캐나다의
존 반 세터스에 의해 그리고 『캠브리지 고대사』의 윌리엄 헤이즈 및 존 반 세터트가
주장하는데 델타 지역에 사는 셈계 주민 일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차지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볼프강 헬크는 힉소스 중에는 후르리인의 요소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마네토의 기술
에서 ‘불분명한 인종’ 또는 ‘동쪽의 지역에서 온’ 이라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믿었으니,
그럼에도 셈어를 사용하는자가 다수였으며 힉소스의 수도인 현재 텔 엘 다바(아바리스)
문화는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중기청동기Ⅱ 문화와 이집트 중왕국 후기 문화가 뒤섞였습니다.
힉소스는 특별히 세트를 섬겼고 아바리스 Avaris (현재의 텔 엘 다바)에 세트 신에게 봉헌된 중요한 신전
이 있었으니 『블랙 아테나』 에서 마틴 버낼은 포세이돈이 황야와 바다의 신으로서 힉소스의 숭배를
받았던 이집트의 세트(Seth), 그리고 셈족의 얌(바다) 및 야훼(Yahweh) 와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18 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테베의 아모세 1세는 힉소스 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
시대’를 열었는데.... 신왕국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는 제국에 걸맞은 권력과 영광의 새로운
정점에 올라섰고 이집트 원주민 세력의 대 힉소스 전쟁은 제 17왕조의 세크넨라부터 제 18왕조
의 아모세 1세 통치 20년 까지....... 약 30년 (기원전 1560-1530) 가까이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 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인데.... 힉소스의 주류가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 말에 저술활동을 한 압데라의 헤카타이오스는 「출애굽기」라는 유대인 전승과 다나오스
및 카드모스의 이주라는 그리스 전승은 모두 힉소스의 축출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는데,
마네토는『역사』에서 제18 왕조의 첫 파라오를 테트모시스 Tethmosis 라고 부르면서
그가 ‘양치기들’ 을 축출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양치기들 ’을 지도자 모세와 ‘유대인’ 이라 부릅니다.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반유대주의자인 아피온과 그의 논적 요세푸스가 힉소스
와 유대인을 동일인으로 다루었으니 요세푸스는 힉소스를 “양치기들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조상”으로 기술했는데... 힉소스를 유대인과 연관시키는 것은 요세푸스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로마 시대 이집트 역사가들의 보편적인 역사관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인종 집단이 아닌 보통 명사로 ‘외국의 통치자’ 로서 힉소스에 대한 언급은... 기원전
19세기 초의 중부 이집트에 있는 베니 하산에 위치한 영주 크눔호텝 Khnumhotep 2세
의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니, 포제네(Posener)는 베니 하산의 분묘 벽화에 그려진 아시아인
은 수행원을 거느린 부유하고....... 아마도 교역이나 공식 임무를 띤 족장임을 제시했습니다.
BC 1522년경에 도착힌 37명의 아무 사람들(Aamu)이 그에게 메스젤트(Mesdjemt, 눈 화장품)를
가져왔는데.... 그들은 화려한 채색옷과 독특한 수염 때문에 이집트인들과는 쉽게
구별되는지라, 야곱 가족들의 이집트 방문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Aamu’ 는 ‘아시아인들' 로 번역되었는데 정확한 번역은 ‘레반트인들’ 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Kamose)의 통치 기간은 3년이니 확인된 카모세 기록물
은 세종류의 석비(K1, K2, K3)를 비롯하여 한 점의 서판(카르나르본 서판) 등 모두
네점으로 힉소스 추방 자체 그리고 그 사건 전후의 이집트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했는
데..... 아시아적 기원에 대한 언급은 대다수의 힉소스인들이 가나안이 배경이라는 것입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사람 또는 힉소스가 이집트 동부 삼각주에서 기원전 18세기 에 힘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은 텔 엘 다바의 북쪽에 있는 타니스 Tanis 에서 발견된 세트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
가 있으니...... 힉소스는 특별히 세트를 섬겼고 아바리스에 그 신에게 봉헌된 중요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타니스 석비’를 건립한 제19왕조의 파라오인 세티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하렘헤브
치세에 관리를 지냈는데... 하렘헤브는 기원전 1348~ 1320년간 통치했다고 일반적
으로 생각되고 있으니 타니스 석비에 각인된 400년이라는 기간의 정확성에 관해 의문
이 있었지만 그 신전은 기원전 1748년과 1720년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간주됩니다.
힉소스(Hyksos)라는 이름은‘외국 땅의 지배자’라는 뜻의 이집트어(헤카 카세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들은 북쪽에서 온 침입자니 기원전 1720년부터 1575년
까지 적어도 하 이집트를 정복하고 통치했는데 비록 후르리어 같은 다른
요소가 섞여 있었다고 보이지만..... 힉소스인들은 압도적으로 셈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는 외부 세계의 신이자 사막의 신이며, 그곳에 사는 야생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자들의 신이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바다의 신이었습니다. 힉소스의 정복이
성서에 나오는 이집트 체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힉소스의 세트가 곧
황야와 화산, 사나운 바다의 신인 이스라엘의 야훼였다고 여길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