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미타불의 인지법행-하 / 이제열의 아미타경 강설
설화 속 가르침, 실천 통해서 현실로 구현
▲ 지은원 관경변상도.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 이야기는
설화를 통해 불법의 진실을 밝히려는 방편 교설이다.
심청전 읽은 아이 효자 되듯, 설화 통해 진실 발견이 중요
전생 선근공덕이 현재 좌우, 부처님의 전생은 왕족 출신
석가모니도 왕족 출신이기에, 당시 인도에 큰 반향 일으켜
설화는 단순한 설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설화 속에는 인간이 추구하고 행해야 할 고귀한 가르침이 있고
그 고귀한 가르침은 설화를 접한 사람을 통해 실제적 실천으로 구현된다.
마치 ‘심청전’을 읽은 아이가 자라서 효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설화는 단순히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실제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법장비구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법장비구의 설화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누구라도 법장비구의 일화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진실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살아 있는 법장비구라 할 수 있다.
법장비구와 같은 예는 ‘정토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법장비구와 비슷한 인물들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유마경’ ‘승만경’ ‘법화경’ ‘화엄경’ 등에
나타나는 수많은 구도설화는 가상의 이야기들을 현실화시킨 것들이다.
법장비구는 본래 출가하기 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왕의 신분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출가의 동기는 세자재왕여래를 만나 수많은 불국토를
친견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세자재왕여래의 위신력에 의해 펼쳐진 210만억 불국토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수행해 하나의 불국토를 세우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세자재왕여래는 이 세상에 출현한 여러 부처님들 가운데에
54번째 출현한 부처님이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내용처럼 과거에 칠불이나 이십사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들이 출현했고
앞으로도 수많은 부처님들이 출현한다.
세자재왕여래는 이러한 부처님들 중 한 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장비구의 신분이 왕이었다는 점이다.
법장비구가 평민이나 천민이 아닌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살펴보고 갈 필요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의 인지법행에 해당하는
법장비구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에 등장하는 부처님들의
전생 신분에 대해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좀 더 시각을 넓혀 경전들을 들여다보면 경전에 등장하는
모든 부처님의 전생인물들이 거의 높은 신분을 지닌
존재였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신분이 왕자였음은 물론이고
과거칠불들도 왕 아니면 왕자 혹은 브라만과 대신 같은
상류층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
‘화엄경’의 선재동자와 ‘유마경’의 유마거사는 대부호 출신이고
‘승만경’의 승만부인도 왕비로 왕족 출신이다.
심지어는 달마대사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전해지고 있다.
경전을 보면 모든 부처님의 전생구도 시절의 신분은 이렇듯 높기만 하다.
태생이 평민이라거나 천민의 형태를 띠고 있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님의 신분은 이렇게 높기만 한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복력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란 크나큰 복력을 닦아 이룩된 존재이기 때문에
빈곤한 모습이나 추한 모습을 띠고 세상에 나올 수가 없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과거 생에 지은 업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다.
즉 생명들은 이 세상에 오기 전 선업과 악업을
어느 정도 닦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몸을 받고 부모와 환경이 주어진다.
그런데 모든 부처님은 과거로부터 무량한 선근공덕을 닦아 성취된 존재들이다.
무량한 선근공덕을 닦은 존재들이
어떻게 낮은 신분과 비루한 모습을 지니고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의 전생구도 시절의 모습이 귀하고
높게 그려지는 것은 복력과 관계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부처님의 전생 신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문제가 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가와 관련한 문제이다.
모든 부처님들이 과거에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버리고 출가를 시도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들의 구도심이 보통 사람들이 발하는 구도심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중생은 욕망의 존재이다. ‘아함경’ 말씀대로 중생은 감각적 쾌락에
입각한 이익과 명예와 환대를 기준으로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이익과 명예와 환대를 원하다.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출가의 방향은 그렇지 않다.
중생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역행하여 쾌락에 입각한
이익과 명예와 환대를 포기하고 청정하고 고요한 열반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중생 중 이런 수행의 길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더구나 평민도 아닌 왕이나 대 부호처럼 부귀에 맛 들린 사람이
이를 포기하고 출가를 감행하는 것은 참으로 드물다.
거지들에게 설법을 하고 거지노릇 그만하고 출가해 보라고 권해 보라.
(실제로 거지들에게 불교를 설명하고 출가를 권해 본적이 있음)
그들은 거지노릇을 할망정 출가하겠다고 따라 오지 않는다.
하물며 거지도 하기 어려운 것이 출가인데
왕위와 큰 재산을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은 보통 큰 사건이 아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은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진리를 성취하여 중생들을 제도하고 싶다면서 출가를 선언했다고 치자.
또 대기업 회장이 언론에 등장하여 모든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고
나머지 생을 구도자로 살겠다고 공언했다 치자.
아마 역사적 사건이 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대통령의 지위를 포기하고 막대한 재산을 버리고 출가를 감행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볼 때 엄청난 용기와 결단력이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부처님들의 전생신분이 높고 귀한 것은
불도가 무한한 복력과 결단력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한 이유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의 깨달음이 위대했어도 부처님이 평민출신이었다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법장비구가 왕족 출신이었다는 경전의 내용을
우리는 그냥 읽고 내려가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분명 우리들이 마음속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야 할 원리가
깃들여져 있다. 극락정토를 비롯한 모든 부처님 나라는
수많은 선근공덕과 왕위를 버릴 만큼
원대한 출가정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8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