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언군은 죽었지만, 그의 차남과 삼남은 살아남았다. 물론 주거지는 여전히 강화도였다. 그렇게라도 조용히 지낼 수 있었으면 좋아겠지만, 세상을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1812년, 홍경래의 난이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 도성에서도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박종일, 이진채 등이 그 주동자들로, 그들은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은언군의 아들을 추대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역모의 주동자들은 처형당하고, 그리고 역시 당연히도 은언군의 아들들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하지만 순조는 은언군을 끝내 보호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서인지, 은언군의 아들만큼은 끝내 보호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촌형제들에 대한 배려를 조금식 더 강화한다. 1817년에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옮겨준다. 여기에도 반발이 있었지만, 순조는 “아주 풀어주는 것과는 다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면서 넘어간다.
그리고 1822년에는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강화도 밖으로 나와 살게 되어, 1831년에 출생하여 훗날 철종으로 즉위하는 은언군의 손자도 한양 경행방(慶幸坊·낙원동 일대)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집안은 무슨 역모와 인연이 그리 깊은지, 순조가 죽은 이후인 1836년(헌종 2년) 또 한번 역모사건에 연루된다. 이번에는 남응중(南膺中)이라는 자가 주모자였다. 남응중은 남경중(南慶中) ·문헌주(文憲周) ·남공언(南公彦) 등과 함께 역모를 꾸며 은언군의 손자를 추대하고자 계획하였다. 남응중은 도집총(都執摠)을, 남경중은 좌집총(左執摠)을 자칭하면서 경상도 울릉도에서 군사를 동원, 청주(淸州)를 점거하고 이 곳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인 천기영(千璣英)이라는 자가 고변하여 발각되었고, 남응중은 동래 왜관으로 달아나서 투서하여 조일관계를 악화시키려고 획책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왜관의 일본인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조선 관아에 넘기면서 실패하였다. 물론 천기영은 후한 포상을 받았다.
이 때는 그래도 은언군의 손자들도 큰 피해를 보지 않고 넘겼지만, 역모와의 질긴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844년(헌종 10년), 또 한번의 역모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민진용은 당시 정권의 수장이었던 김유근과 김홍근이 은퇴하여 권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이용하여 역모를 꾸몄다. 그는 부여 출신으로, 충청도 출신을 중심으로 서얼, 무인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의술이 뛰어나 이 점을 잉요하여 사람들을 모았다. 이 중에는 이원덕(李遠德)이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는 은언군의 삼남 이광의 장남인 이원경(李元慶)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민진용은 이원덕을 통하여 이원경과 연결,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역모계획 역시 사전에 발각당하여 민진용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능지처참을 당한 것음 물론, 이원경 역시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지 못하고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원경의 두 동생인 경응,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만다.
그리고 정국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거기서 일반 백성처럼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겠지만, 사정은 달랐다.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차기 왕위를 누가 잇느냐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선조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의 후손 이하전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는 벽파와 가까워 시파인 안동김씨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어 제외된다. 그래서 다음 후보로 떠오른 것이 바로 강화도에 유배되어있던 원범. 가족들이 수없이 역모에 연루되었던 그가 졸지에 차기 국왕으로 지명된 것이다.
이 때 원범은 역적의 가족이었기에 변변한 작위 하나 없었다. 그래서 우선 그를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여 구색을 갖추고, 그 뒤에 국왕으로 즉위를 시킨다. 그리고 아무리 안동김시 정권의 꼭두각시로 즉위하는 거라고 해도 왕은 왕. 왕의 가족들을 역적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은언군, 큰아버지 상계군의 작위가 복권되고, 은언군의 차남에게도 풍계군이라는 작위가 내려졌으며, 철종의 아버지는 전계군으로 봉해진 후,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봉해진다.
물론 철종의 두 형들에게도 작위가 내려져 원경은 화평군, 경응은 영평군으로 책봉된다.
그런데 철종의 즉위에는 사실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위의 가계도에서 보는 거 처럼, 철종은 사실 촌수상으로는 헌종의 삼촌뻘 되는 관계로, 종묘에 제사를 지내면 숙부가 조카에게 제사를 지내는 꼴이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간단히 무시되었고, 이 점을 들어 철종 즉위에 반대한 권돈인과, 그에게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추사 김정희는 유배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철종의 가족사는 순탄치 않았다. 1858년(찰종 9년)에는 원자가 탄생하였다. 이듬해에는 직접 원자롤 안고 나오니, 영의정 정원용이 경하하는 말을 올렸지만, 그로부터 한달도 되지 않아 원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마저도 박영효와 결혼 후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인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친정의 배경에도 정치에 간섭하진 않았다는 정도였다.
철종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는 국정을 파악하면서 즉위 전 경험을 되살린 정치를 펴려고도 했지만, 별 결싱을 보지 못하고, 결국 말년에 임술농민봉기를 경험하고 승하한다.
즉위 이전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에 역모에 연루되고, 즉위 후에는 역모에 연루된 가족들은 모두 복권되었지만 대신 자녀운이 전혀 없었으니, 참 불행한 가족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