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다는 이 현상은 고대 사회 특히 원시사회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토기를 많이 씁니다. 만드는 것도 여러분이 거의 다 본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몇 가지 깊은 하나님과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고 우리 인생은 그 손에 있는 진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시오, 조물주 시오, 우리 인생은 그 손에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올시다.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고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하고 아무리 권세가 많다고 하지만, 자기 스스로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궁극적 운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거나 알지 못하거나 거기에 분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들도 조금도 분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고 그 일생의 운명이 결국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라고 할 때에 올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하게 할 때에 일시로 성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 찍어서 그 푸른 잎이 마르고 잎사귀가 떨어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 때에 그의 일정한 뜻에 의지해서, 목적과 고안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듭니다.
우리 한국으로 말하면 동이 같은 것도 만들고 혹은 항아리 같은 것도 만들고 혹은 약탕관(藥湯罐) 같은 여러 가지 큰그릇과 작은 그릇, 귀하게 쓰는 그릇, 천하게 쓰는 그릇, 여러 가지 그릇을 토기장이가 그 뜻과 목적과 고안에 의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실 때에, 어떤 개인의 생명을 이 세상에 지어서 보내실 때에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에 의지해서 일정한 고안에 따라 인생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로, 어떤 사람은 여자로 지으시고, 어떤 사람은 백인종으로 지으시고 어떤 사람은 황인종으로 지으시고, 각각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의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인생을 지으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부여되는 재주도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재주, 또는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재주, 또한 재주의 분량에 있어서도 각각 달라서 어떤 사람에게 금 열 량 중, 어떤 사람에게는 금 다섯 량 중, 어떤 사람에게는 금 한 량 중을 맡기를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받은 바 재주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적당하게 일정한 직업과 방면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그 사람의 사는 환경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유럽에 나고, 어떤 사람은 미국에 나고, 어떤 사람은 한국 같은데 나고, 한국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북한에 나고 어떤 사람은 남한에 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 우리 인생은 이유를 충분히는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에 의거해서 우리 인생을 각각 다르게 빚어서 만드십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질그릇이 자기를 만드는 토기장이에게 대해서『어찌해서 당신은 나를 이런 그릇으로 만드셨습니까?』불평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뜻과 그 사람을 만드는 배후에는 각 목적이 있고 그 사람에게 준 사명이 있어서 그와 같은 시대와 환경과 자리에 만드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나라, 어떤 종족, 어떤 환경, 어떤 재주를 타고났든지 그 종족과 그 시대와 그 환경 가운데서 내 사명을 바로 찾아서 거기에 충성을 다라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가령 집을 비교해 보면 서까래가 스스로 한탄하기를 자기는 왜 보로 만들지 않고 서까래로 만들었는가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서까래는 서까래로 만들어 준 대로 책임만 다 하면 그만입니다. 보가 되었으면 보가 된 책임을 다 했으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떤 처지에서 어떤 재주로 어떤 시대에 살게 되든지 내 사명을 바로 찾아서 거기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첫째로 나 자신에게 대해서도 제일 기쁘고 행복 된 일이올시다.
여러분,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제일 기쁘게 살고 행복 된 생활을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재주와 역량과 사명을 깨달아서 그 방면으로 충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자기의 자아를 최대한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찾지 못하고 딴 길을 가서 어물거리며 딴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그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낙심과 실패가 거듭될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행복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서까래는 서까래의 책임만 다하면 최대의 봉사를 한 것입니다.
뱁새가 황새의 걸음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역량을 맡겼든지 그 역량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받을 바 상급은 일반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하여 음악의 재주를 주셨으면 그 음악을 발전시켰으면 그 뿐입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하거나 설교에 은혜가 없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에 대하여 최대의 봉사인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결국은 최대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무슨 특별히 별다른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잘하면 이것이 다 연합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으로 변해서 하나님 보좌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 여기 보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데 잘못하면 그릇이 상합니다. 파상(破傷)되는 그릇이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로 그릇이 파상 된다고 설명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줄로 압니다. 그 진흙 가운데 섞이지 않을 것이 섞이면 그릇이 상하기 쉽겠습니다. 가령 돌이라고 한다든지 모래라고 한다든지 조그만 나무 조각 같은 것들이 섞인다고 하면 그것이 거의 되었다가도 녹로(塶爐)에서 뱅뱅 돌아가는데 모래 같은 것이 있으면 구멍 뚫어지기 쉽고 거의 다 된 그릇도 상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의 고안과 섭리에 의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으로 만들려고 애쓸 때에 우리 사람은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거슬러 가서 섞이지 아니해야 할 죄가 섞이면 하나님의 고안이 깨어집니다. 분명히 파상 됩니다. 그 인격이 훼파(毁破)됩니다.
성경 역사를 보든지 교회 역사를 보든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잘 지음을 받아 나가다가 섞이지 아니할 죄가 섞임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깨어져서 그 심령이 말할 수 없는 파상한 자리에 들어간 가련한 심령을 우리가 많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신약을 읽을 때 막다라 마리아에 대해서 다 읽은 줄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올시다. 여러 가지 기록을 보아서 인물도 잘 생기고 여러 가지 재주도 있던 그런 여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사귀(邪鬼)가 일곱이 들었습니다. 이 일곱 사귀를 우리가 해석할 때에 흔히 일곱 죄악으로서 해석됩니다. 여러 가지 죄에 빠졌습니다. 섞이지 아니할 정욕, 섞이지 아니할 허영심, 섞이지 아니할 물욕, 여러 가지로 섞이지 아니할 것이 섞여서 일곱 가지나 섞이게 되었습니다. 그만 하나님의 거룩한 아브라함의 딸로서의 얼굴이 파산되고 변모가 되어서 더러운 여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받는 d자가 되어 죄인이라고 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여자가 예수 님 앞에 나와서야 파산된 인격을 다시 어루만져 회복함을 받아서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와 같이 상한 그릇, 파 상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삭게오의 생활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삭개오도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올시다.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재웠습니다. 그렇지마는 점점 자라나서 물질과 세상의 권력, 지위에 욕심이 끌려서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양심도 팔아먹어 결국은 자기의 민족을 압제하는 로마 정부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관리가 될뿐더러 책임을 바로 감당하지 아니하고 토색(討索)해서 많은 사람을 착취하고 자기의 사복을 채우는 불의 한 공무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의 얼굴은 아주 더럽게 되었습니다. 상해서 얼굴은 아주 알아볼 수 없게 변모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이와 같은 삭개오도 예수 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그의 시선이 예수 님의 시선과 마주치고 그의 집이 예수 님을 환영하고 그의 마음이 예수 님을 환영할 때에 예수 님의 만능의 손을 상한 삭개오의 심령을 다시 빚어 완전한 심령을 만들어서,『오늘날 너의 집게 구원이 이르렀다. 너도 완전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깨어진 심령의 회복은 우리 주님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 생활이 더러워지고 내 인격이 파산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다시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영국 런던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했답니다.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은혜를 영국이 크게 받았다고 하는데 매일 저녁 모이는 수가 三, 四만 명에 이르렀고 맨 마지막 저녁에는 큰 스타디움에서 한 모양인데 十二만 명이 오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데 어느 날 저녁에 어떤 목사 부인이 그 부흥회 구경을 가서 어떤 뒷자리에 앉았는데 자기 옆에 어떤 한 남자가 와서 앉았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도무지 믿는 냄새가 나지 않더라고 합니다. 조금 있더니 그 옆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앉았습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목사 부인이 가만히 들으니까 더러운 이야기로 부흥하는 목사 융만 보면서 자기는 구경하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도무지 믿으려 온 사람이 아니고 비방하려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섭섭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목사 부인은 그냥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가 두어 시간 계속되는 데 따라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적어져 갔습니다. 점점 이야기가 드물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설교를 잘 듣더랍니다.
설교를 다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그래함 목사가 누구든지 이제부터 예수를 믿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많이 일어나서 나가는데 그 목사 부인이 보니까 뜻밖에 자기 옆에 앉았던 사람이 벌떡 일어선단 말입니다. 일어서면서 자기 옆에 앉은 사람보고『나는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당신 나갈 마음 없소?』하고 물어보더랍니다. 그 옆의 사람도 좀 우물우물하더니『예, 저도 나가지요』하면서 일어나서는 자기 양복 속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냈습니다.『이 돈지갑부터 먼저 받으시오.』『웬 돈지갑이요?』『나는 소매치기요 절도입니다. 이것이 당신 돈지갑이요, 이 자리에서 내가 당신 돈지갑을 도적질했는데요, 내가 이제 나가면서 당신 돈지갑을 도로 드립니다.』훔친 돈지갑을 돌려주며 앞으로 나가더랍니다. 이런 회개가 바로 하는 회개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읽을 때에 두어 가지 위로 받았는데, 첫째 하나는 영국에도 절도가 있는 모양이고 하나는 그런 절도라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아무리 변모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심령이 아무리 파상 되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고 그 파상된 심령, 그 더러운 심령을 다시 씻어서 깨끗한 심령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기에 예레미야가 그 때에 특별히 본 것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아주 많이 파산되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아주 만들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많이 파산되었기 때문에 아주 부서지고 말았어요. 부스러뜨리더니 아예 딴 그릇을 만들어 놓는단 말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죄를 너무 많이 지었습니다. 상한 것을 조금 고쳐 도로 회복할 가망이 아주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스라엘 나라도 유대 나라도 아주 망하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아주 부스러뜨렸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가게 내버려두었습니다. 70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 동안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주 부스러뜨리고 진흙을 다시 이겨서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그 동안, 七十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야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서 다시 돌아와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한국 민족인 우리로서 두려운 마음이 마음 가운데 들어옵니다. 생각건대 하나님께서 이조 5백년 이래 여러 가지 당쟁과 죄악이 관영 되어서 지금부터 50년 전에 우리 한국을 아주 부스러뜨렸습니다. 아주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본 사람에게 압제를 받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다시 빚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38선이 막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아직까지 완전히 회개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언제 과연 우리 민족이 복을 받으며 남북이 통일되어 새로운 민족으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도 있지만 여기 앉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잘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다시 만드는 일에 죄를 회개하며 협력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님께서 나다나엘이라는 청년이 자기에게 올 때 그 청년을 보고서 기뻐서 하시는 말씀이『여기 참 이스라엘이 있구나. 이 청년에게는 간사함이 없다』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간사함이 없는데 그 때에 모든 유대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참 한국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 세계에 나타난 한국인의 모습이 어떤 거인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한국인은 거짓말 잘하는 사람, 도적질 잘하는 사람, 한국인은 의복이나 가 거쳐가 더러운 사람이라고 이렇게 세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한국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민족은 아닙니다. 한국 민족은 이런 민족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습니다. 파산했습니다. 배달 민족이 변형되었습니다. 이 변형되고 변모되고 깨어지고 업신여김을 받는 민족을 어떻게 하여야 회복하겠습니까? 깨어진 심령, 깨어진 민족, 국가를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회개하고 새로운 민족이 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가서 길게 말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토기장이가 어떤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려고 하는데 진흙에 너무 나쁜 것이 많이 섞여서 도무지 그릇을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못쓰게 되었다고 획 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내버린 민족과 아주 망친 국가가 많습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끝까지 반항하고 끝까지 회개 안하고 끝까지 죄 지으면 마지막에는 내버리십니다. 영원한 지옥 불에 내버려지는데 그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했습니다. 두렵습니다.
다윗이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다 파산되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창조라는 말은 온전히 새로 지어달라는 말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정직한 심령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조하셨습니다.『너희는 나와 같이 의논하자. 내 죄가 비록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해 주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파산되지 아니한 심령은 별로 없을 줄 압니다.
옛날 동양에서 고래로 내려오는 말 중「인수무과」(人誰無過) 즉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요 라는 뜻입니다. 고치면 다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을 고쳐 주시고 회복하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