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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를 존경하면서도 그 중생론을 비판하고 있는 로버트 레이몬드|연속적/순간적 중생론 토론
새로운 조직신학, 907쪽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머레이의 견해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대지도 않으면서, 그것만이 실제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며, 또 중생을 포함하여 그 이후 따라 오는 다른 모든 내적으로 역사하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이 그리 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리에는 중생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안에 있는 유효한 힘이라고 분명히 하듯 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후에 오고 또 사람의 반응 전에 오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또 그 사역이 "그 부르시모가 부르심을 받는 사람 편에서의 반응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I believe, however, that Murray is too restrictive in his view of what God's summons effects. He insists, but offers no scritptural support for his contention, that it only actually unites one to Christ, and that it is from this actual union with Christ that every other inwardly operative saving grace, including regeneration,thereafter flows. Murray conceives of regeneration, not as the effecting force in God's effectual summons as the Confession of Faith plainly does, but as a divine work which comes after God's effectual call and before the human response, and which "provides the link between the call and the response on the part of the person called."
holyjoy 09:15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정확하게 이 점을 피터 마스터스목사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붉은 색은 레이몬드박사의 것. 중생을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머레이교수의 견해를 restrictive 한 것이라 보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 벗어났는데도 성경적 근거없이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로버트 레이몬드는 중생을 유효한 부르심 이후에 일어나는 인간편에서의 반응도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분명합니다.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마스터스목사의 School of Theology에 로버트 레이몬드박사가 자주 강사로 등장하는 것에는 분명히 이런 연관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로 09:48 요사이, 칼빈이 자유의지에 대해 피기우스를 논박하는 글을 읽고 있습니다. 칼뱅은 '노예의지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본성의 전체적인 자유의지는 필연적이도고 끊임없이 비록 성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영에 대항하고 길들여지지않은 야생동물처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이다. 칼뱅은 자유로운 의지와 강제된 의지의 입장을 버리고 '자기결정적 의지'와 '노예의지'를 주장한다. "다만 그의 의지가 타락했기 때문에 죄의 멍에에 사로잡혀 있어서 필연적으로 악한 방식으로 의지를 행사한다."고 말한다. 노예의지는 자발적 필연으로서, 우리가 죄를 짓는 필연은 의지의 타락에서 온다. 결국 노예의지는 자기 결정적 의지와 ┗ 하나로 09:38 만나게 된다. . . 교부들의 전반적인 실수는 타락전의 의지와 타락후의 의지를 구별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 . . 교부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능력사이의 구별"이 없으며,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에게 남겨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쾌하지 않다. 칼뱅은 다만 이것을 지적한 것 뿐이다. ┗ holyjoy 09:47 칼빈의 자유의지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로님이 언급하신 대로, 필연과 강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 두 개념 간의 차이를 정확하게 분간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의 자유는 강제와는 병행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필연과는 병행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선하심의 필연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절대자유하신 분이시고, 악함의 필연을 가진 사탄이 자신의 자유로 악할 수 밖에 없는 필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그렇게 보면 구원받지 못한 자가 악함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유, 그래서 자신의 자유로 악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것을 이해해야 할 듯 합니다. ^^ 하나로 09:49 쟁점을 씨-중생을 일치로 보는가, 씨-중생 or 씨-과정-중생으로 보는가에 대한 것으로 압축해보면, 1) 순간론이 전체적인 것은 심플하고 좀더 공감이 가는데 비해 씨,즉 씨와 중생이라는 것에 과도한 비약을 내포함으로 개혁주의같지 않은 신비적인 은혜로만 방임하는 듯하여 납득이 어렵고, 2) 연속론은 씨가 떨어짐에도 성령내주가 아니라는 것에 납득이 잘 안됩니다. 혹시, 성령이 씨를 뿌렷는데, 아직 새의지에 정착이 안되서 씨는 거둬가고, 성령의 전에 없으니 내주가 안된다? 이렇게 하면 좀 납득이 될수가 있을까요? 이것에 대한 근거(?)가 있을까요? ┗ holyjoy 09:49 연속론의 주장은 씨가 떨어질때 성령이 내주하시는데(아니 선택자에게는 훨씬 이전부터 내주하는 셈입니다!) 그 내주하심이 실제적 내주하심이 아니고 원리적 내주하심이라는 것이 로버트 레이몬드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연속론은 결코 씨가 떨어질때 성령내주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 오해가 없으시기를...
┗ 하나로 10:03 오~~ 그러신가요. ^^ ****은 그렇게 말씀안하던데요. 연속론은 회심(넓은 중생)전에 씨가 심겨진이후 성령내주를 설명할 길이 없다라고 하신것 같은데요. 이거 이상합니다만....ㅠㅠ ┗ 하나로 10:02 순간론의 씨 즉 중생이라는 것은 무언가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씨...>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좀더 깊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씨..................씨 자체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원리? 영? .........성령자신이라고 하면 신인합일이 될것이고,,,,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구성요소여야 하는데, 인간편에서 본다면, 영,혼,육. . . 의 구성중에서 원리만 심겨진 중생이다? 중생은 전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씨는 사람의 부분으로 보아야 하는데.........씨가 영에 떨어졌다? 씨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어렵네요. ㅠㅠㅠ ┗ holyjoy 11:01 씨라는 것은 그 안에 앞으로 자라서 성장하게 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라고도 합니다. 원리가 심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심어진 것이 참된 생명의 씨앗이라고 하면, 그 생명의 '원리'에 의해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씨가 땅에 심겨지면 바로 발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씨가 발아하기 전에 씨의 원리에 따라서 적당한 온도와 땅의 영양상태에 따라서 발아하게 되고, 그 발아한 것이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는데도 씨의 성격(원리)에 따라서 다양한 기간을 걸쳐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것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와 열매는 그 성질상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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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에 댓글에서 믿음은 의지의 행위를 포함하는 것에 동의하셨는데, 회심전에 중생전에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이 오기전에 인간의 자율적 의지를 통해 믿음이 완결되는 의미에서의 질문이었는데,
믿음은 의지의 행위를 포함한다는 의미는 먼저 <의지의 행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 전에 <인간의 자율적 행위>를 인정하신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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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이글을 올린후에 홀님께서 글을 직접 올리지 말고, 제가 이해한대로 올려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해서, 개인적인 부분들은 삭제했습니다. 참고해주시고, 조금이나마 논쟁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적인 측면에서만 보아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려 봅니다.
어울림 님이나 그레이스 님이나 제가 위 맨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드렸습니다.
하나로 님, ‘연중론’에 관한 제 글, 최근에 쓴 글들은 다 읽으셨습니까?
시간이 많치 않아서 글을 모두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글이 있었나요? 대강 위치라도. .
제가 보는 큰 의견차이는
1) 자율적 의지문제
+ 순중론측 : 인정한다? / 물론, 수태와 중생을 동시에 보니, 수태이전 일반소명과 중생이후 성화로 인정한다 이겠지요.
그런데, 수태와 회심사이의 간격에서는 없으니 인정한다는 말이 의미가 없는데, 혹시, 동시적이라는 것이 1시간 및 1일은 허용을 하는 것인가요?
+ 연중론측 : 인정한다
2) 성령내주문제
+ 순중론 : 수태부터 성령내주이고 , 연중론은 회심(넓은 중생)이니 그 이후부터 성령내주이다.
+ 연중론 : 수태부터 성령내주이다. 다만, 원리적내주와 실제적 내주.
홀리님이 제가 연중론을 잘이해하는줄 속았다네요 ㅎ 제가속인건가요? 참...
아직도 말하는 태도에서 회심의 열매를 느끼기가 힘드네요.ㅠㅠ
내주에 있어서 원리적내주 실제적내주라는 말장난에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성령의내주가 원리적내주면 실제로 내주한다는겁니까 아니라는겁니까.?
혹시, 이 글때문에 감정이 상하셨다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ㅠㅠ 조금만 더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논점은 수태와 회심의 간격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있는데, 만일, 연중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태와 회심사이의 간격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하다보니 오해가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중생전, 수태이후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물론, 순중론에서는 의미가 없겠지만요.
그런데, 어디선가 본것 같기도 한데, 순중론은 수태와 넓은의미의 중생(회심)사이의 간격을 1시간, 1분도 전혀 허용을 하지 않는 것인지. 그정도는 인정한다는 글이 어디선가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순중론의 <한순간>이 1분도 허용을 안한다는 것인가요? 혹시 이것과 관련된 글이 어디 있을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순간>이라는 것이 일단 <간격>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동일한 시간의 순간, 즉 동시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풀핏님께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로 보입니다. 믿음이 한번은 있어야 하고, 그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한들, 죽기도 하는데요...^^
제가 하나로 님에게 해 드릴 답은 ‘<디모데의 회심: yohan 님 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황영철 <루디아의 회심>’에 나와 있습니다.
홀리조이 님 《씨가 땅에 심겨지면 바로 발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씨가 발아하기 전에 씨의 원리에 따라서 적당한 온도와 땅의 영양 상태에 따라서 발아하게 되고, 그 발아한 것이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는데도 씨의 성격(원리)에 따라서 다양한 기간을 걸쳐서 올라오게 됩니다.》 → ‘믿음의 씨’에 대해 김홍전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김홍전 <단번에 주신 믿음: 믿음의 씨(semen fidei)>’를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로/ 홀리조이가 말한 씨 -> (온도, 땅의 영양상태) -> 발아 -> (지표면에 다양한 기간) -> 떡잎...
일반은총을 가지고 특별은총을 설명하는 것은 특별계시에 대한 이해를 못한 비상식적인 발상이다.
여기 <씨>는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 즉 복음(기쁜소식)이다.
이 말씀을 유효적 소명(내적 소명)으로 성령께서 순간적으로 중생케 한다.
이것은 일반은총인 시간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에 대하여 <내주에 있어서 원리적내주와 실제적내주>는 성경에 있는가?
중생케 되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원리적 내주>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없는 말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레이스님! 하나로님이 댓글의 내용을 가지고 그레이스님에게 한 질문의 내용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저는 이상해보이는군요!
말이 안되죠. 성령의 내주가 원리적으로 있다가 회심하면서 실제적으로 내주한다는게 말이나 되는지요? 만일 구원이 원리적으로 되다가 실제로 구원이된것이다라고 할려면 창세전에 예정된자는 원리적으로는 구원되었지만 중생할때에 구원이 되는것이다라고 적용가능할까요? 원리적 실제적으로 말하려면 성령의 내주가 원리적으로는 창세전이고 실제적으로는 회심할때가 되는것이고 중생의 씨가 심겨질때에는 당연히 실제적으로는 내주가 되는것입니다,, 홀리죠이님이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것입니다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이상하다고 한 것은, 하나로님이 올린 마지막 댓글의 내용을 보면, 하나로님은 폴 헬름의 글을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질문의 내용을 바꾸지 않는가요?
좀 그런거 ㅅ같아요,
폴 헬름이 칼빈의 글을 인용한 건가요? 하여튼 중요한 것은, 질문의 내용이 바뀐 것을 발견 못하셨나요?
어제까지 스마트폰으로만 읽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어요.
아바드님..제가 올린 질문에 민감하신 것같은데,
처음에는 폴 헬름의 글을 인용하여 질문을 한 것이고, 그레이스님이 문제가 없다고 하자...나중에 좀 더 정리하다보니, 그 글을 인용하여 위에 두고, 아래의 글은 <질문이었는데....>하면서 재차 질문을 다시 한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의 질문만으로는 제가 하고자 했던 질문의 취지가 어긋나서 그레이스님이 그렇게 답변했겠구나하고서 <동의 하셨는데. . .>하면서 아래에서 다시 수태와 회심사이에서의 자율적의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취지입니다. 이것이 왜 이상할정도까지 인가요? 좀 서툴렀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