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좌(李周佐)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가문이 한미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좌복야(左僕射) 이성공(李成功)이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에 한눈에 보고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겼다. 돌아올 때 그를 데리고 개경에 와서 국학(國學)에 입학시켰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상주목(尙州牧)의 기실참군사(記室叅軍事)로 발탁되었으며, 〈다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되었다. 현종(顯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옮겼고 〈외직으로〉 나가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아뢰기를, “삭방도(朔方道)의 등주(登州)·명주(溟州) 관내의 삼척현(三陟縣)·상음현(霜陰縣)·학포현(鶴浦縣)·파천현(派川縣)·연곡현(連谷縣)·우계현(羽溪縣) 등 19개 현은, 모두 번적(蕃賊)의 침탈을 당해서 생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청하옵건대 〈그들에게〉 무휼(撫恤)을 더하시고 동시에 조부(租賦)의 감면을 명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덕종(德宗) 초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되었고, 정종(靖宗) 2년(1036)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정종〉 6년(1040)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刑部尙書 判御史臺事)로서 죽으니, 왕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사공 상서우복야(司空 尙書右僕射)를 추증하였고, 부의로 쌀과 보리 400석을 내리고, 차와 의복을 하사하였으며, 또 백관들에게 분부하여 장례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주좌는 마음에 품은 생각이 크고 뛰어났으며 몸가짐이 훌륭하여, 벼슬하는 40여 년 동안 대신으로서의 체통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