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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인천 95코스 제4부
능안삼거리-신광사거리-인천여상-신포역-
사동사거리-인천세관역사공원-(구)인천우체국-
신포사거리-인천중부소방서-하버파크호텔-
인천아트플랫폼-1883개항살롱-칠통마당-
한국근대문학관-인천개항박물관-생활사전시관-
차이나타운입구-한중원-해안성당-청관거리터-
북성동원조자장면거리-송월동동화마을-
초한지벽화거리-제3패루선린문-자유공원입구
2024년 8월 14일
1.코스 소개
1)코스개요
- 물길이 열리고 새 문물이 밀려들었던 인천에서 만나는 역사 문화거리를 지나는 코스
- 개항기의 흔적이 남은 다양한 박물관과 이국적 정취가 흐르는 차이나타운에서 인천항이 간직한 옛이야기와 마주하는 코스
2)관광포인트
- 하수처리시설을 지하화하여 그 위에 조성된 갯골을 살린 생태공원 '학익에코테마파크'
- 오래된 창고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한국 근대문학과 관련된 전시를 하는 '한국근대문화관'
- 개항기 인천의 풍경, 철도, 은행 등 자료를 전시한 '인천개항박물관'
- 한국 최초의 짜장면 집인 공화춘을 개조한 박물관 '짜장면박물관'
- 세계 명작 동화가 그려진 벽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
3)여행정보(주의사항)
- 학익에코테마파크는 가을에 갈대숲이 장관을 이룸
- 인천차이나타운은 인천항 개항기에 중국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음
- 시점 :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406-9, 선학역 3번 출입구. 교통편) 인천 1호선 선학역
- 종점 : 인천시 중구 북성동3가 6-9, 선린문 부근. 교통편) 지하철1호선 인천역에서 도보 500m
- 주요 경로 : 선학역3번출입구 2.6Km 문학산 6.9Km 남항그린공원 3.6Km 숭의역 3.9Km 자유공원 입구
- 길이 17.0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어려움
2.인천 개항장거리와 차이나타운을 걷다
제4부 : 하루에 서해랑길 94코스와 95코스 2개 코스를 탐방해 내기가 힘겹다. 이를 감당할 체력이 안 되지만 탐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겨우 버텨 낸다. 마지막 발악을 하듯 고행길을 계속한다. 능안삼거리에서 제물량로를 따라 인천 개항장 거리로 가는 길이 단순하지만 미답의 길을 걷는 탐방객에게는 어렵다. 탐방객의 체력적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자꾸 쉬게 되어서 서해랑길 95코스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신광사거리 앞 신광초등학교를 지나 수인사거리에서 인중로를 따라서 인천여상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인천여상을 지나면 수인분당선 신포역이 나온다. 신포역 남쪽에 인천 내항이 있으며, 내항 제1부두 입구에 인천세관역사공원이 있다. 인천이 1883년 개항하자 조선 정부가 1883년 6월 16일 개항장인 인천에 관세 행정 기구인 인천해관(仁川海關)을 설립하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의 해관 업무는 일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고, 1907년에는 ‘해관’이라는 명칭도 일본식 호칭인 ‘세관’으로 바뀌었다. 명칭은 바뀌었지만 인천해관의 설치는 무관세무역 시대의 종결과 근대적 관세제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의 세관창고를 '인천세관역사관'으로 개조하고 옛 세관창고 부지에 '인천세관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 인천 개항장 거리의 출발은 인천세관역사공원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를 통과한다. 탈진한 몸을 지탱하며 정신을 붙들며 옛 인천우체국 건물 앞을 지난다. 우체국 건물은 현재 리모델링 중이어서 입장할 수 없다. 개항장 중심부로 가는 신포사거리는 제물량로와 신포로가 교차한다. 예전에는 이곳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이 지역의 지명이 '터진 개'라고 한다. 신포 지역은 인천 근대화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서해랑길은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개항장 거리로 이어간다. 개항 이후 근대적 건물들이 남아 있고, 삶의 애환이 서린 인천 개항장 거리를 통과하며, 인천 아트플랫폼, 근대문학관, 인천개항박물관, 대불호텔전시관을 거친다. 집중력이 떨어져 응당 살펴야 할 곳을 살피지 못하고 목적지를 찾아 허걱대고 있다.
차이나타운 거리로 들어갔다. 한중 문화교류 활성화와 관광객 휴식을 위한 차이나타운 한중원(韓中園)을 지나면 해안성당이 솟아 있다. 해안성당은 처음에 중국 화교 신자를 위해 지어진 성당이었는데 화교 신자들이 줄어들자 이제는 한국인 성당으로 바뀌었다. 해안성당을 지나 차이나타운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차이나타운의 중심지 청관거리터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 차이나타운의 휘황찬란한 상가들, 특히 음식점들이 이어지며 복성동 원조 짜장면 거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짜장면의 원조 인천시 중구 북성동, 그래서 인천시 중구에서는 누들플랫폼과 누들테마거리도 조성하였다. 누들의 유래와 역사, 짜장면의 역사와 종류에 대한 상세한 설명안내판은 차이나타운 남쪽 출입구에 세워져 있고, 차이나타운 안에 짜장면박물관도 조성되어 있다.
인천 개항장 거리와 차이나타운을 잘 살피기 위해서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벼야 하는데 고갈된 체력 때문에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차이나타운로와 동화마을길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차이나타운 사방에 세운 패루 중 제4패루 중화문이 보인다. 서해랑길 95코스 종점은 제3패루 선린문이 있는 자유공원 입구이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 개항장으로 들어와 차이나타운을 한 바퀴 돌아가고 있다. 이 사거리에서 동화마을길을 따라 동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동심의 세계명작동를 테마로 하여 색채와 조형물로 조성하였다. 찬찬히 동화마을을 살피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에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탐방객은 몸이 탈진하여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가 되었다. 송월동 동화마을 언덕길로 오른다. 언덕길 위는 응봉산 자유공원이다. 자유공원서로라고 명명되어 있는 언덕길을 따라 차이나타운 초한지벽화거리와 중구청 방향으로 따라간다.
초한지벽화거리로 들어섰다.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와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5년 전쟁의 '초한지(楚漢志)'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모략가 유방에게 천하장사 항우가 몰락하는 이야기는 가슴 아프다. 초패왕의 한나라 군대는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四面楚歌)를 부른다. 항우는 초나라 군사가 모두 항복한 줄 알고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虞美人)과 명마 추(騅)를 향해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함이여 추도 달리지 않누나./ 추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해야 할꼬?(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이 이야기를 벽화로 전시한 초한지벽화거리를 따라가면 제3패루 선린문 앞 응봉산 자유공원 오르는 계단 입구 도로 반사경 기둥에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오! 이렇게 마치는구나. 상세하게 살피지는 못했지만 서해랑길 95코스를 완주하였도다.
서해랑길 96코스 출발지 계단에서 제3패루 선린문을 지나 황제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인천역으로 곧바로 갈 수 있다. 안내트레킹팀 버스는 이미 출발하였다. 탐방객은 인천역에서 전동차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한다. 안내팀 버스가 떠났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계단에 앉아서 캔 맥주를 마셨다. 걸어온 서해랑길 95코스 탐방로가 눈앞에 차례차례 그려진다. 한상억(韓相億, 1915~1992)의 '문학산의 노래'가 울려온다. "이천년 그 머얼리/ 비류 고집부려 씨 뿌리고/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는/ 월미를 치는 파도 소리에 깨이고/ 그 물결따라 문을 열었나니/ 하 많은 선민의 피와 치욕이/ 저 해안을 흘러 갔어도/ 고스란히 지켜 온 갸륵한 뜻과 모습./ 문학의 메는 창공에 푸르러/ 서기 어리고/ 명사에 해당화는 꺾였어도/ 오백년 능허대의 바람은 맑아라."
바람이 맑은 능허대의 풍경이 떠오른다. 인천이 낳은 위대한 미술사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을 기리는 우현로를 거쳐 개항장 거리로 들어왔다. 고유섭은 인천시 중구 용동 출신이다. 그가 쓴 '애상의 청춘일기'(1934)에 묘사된 능허대 풍경도 보인다. "능허대는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가계 된 풍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는 출령대는 물결은 신비와 숭엄과 침울을 가졌다. 편편이 쪼개지는 가을 햇볕은 나의 정신을 맑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사시대 비류백제의 태동지 미추홀 문학산과 고대시대 백제 사신이 중국 동진을 오가던 능허대를 걸어 어디로 왔는가? 근대 개항기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으로 왔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인천상류작전을 성공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있다. 무엇을 하는가? 캔 맥주를 마시면서 인천 지역 2천 년 세월의 바람결을 헤아리며 가슴을 태운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거리 : 17.9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44분
수인분당선 숭의역 앞 능안삼거리에서 제물량로 서쪽 보도를 따라 숭의역 3번 출입구 방향으로 이어간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2동 능안삼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의 화수사거리까지 연결되는 연장 4,370m, 왕복 6차선에 이르는 제물량로는 옛 제물포진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로 제물포의 위치를 전하는 뜻에서 제물량로(濟物梁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2011년 중봉로에서 제물량로로 도로명이 바뀌었다. 제물량로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인천광역시 중구 그리고 인천광역시 동구를 지나는 도로이다. 제물량로 인근에는 노인 복지 회관, 남부역 터 등이 있다. 제물량로의 시작점은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석탄 부두까지 운행하는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로 운행에 있어 화차의 영향을 받는 모습들이 주기적으로 목격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물량로를 따라가다가 신광사거리에서 신광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인중로를 따라간다.
왼쪽의 신광초등학교를 끼고 하나님의교회 앞쪽 인중로를 따라간다. 제물량로는 맞은편으로 이어진다.
중구 신흥동 신광초등학교 정문을 돌아 인중로 남쪽 보도로 이어간다.
바로 앞 인중로와 서해대로가 교차하는 수인사거리에서 서해대로를 건너고 인중로를 건너 인중로 북쪽 보도로 넘어간다.
신광초등학교 정문에서 인중로 남쪽 보도를 따라와서 수인사거리에서 바로 앞 서해대로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수인사거리 인중로 남쪽 보도에서 인중로 횡단보도를 건너 인중로 북쪽 보도로 넘어간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2동 숭의로터리를 기점으로 하고,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 4동 봉수대로 교차점을 종점으로 하는 인중로는 연장 5,120m, 왕복 4차선에서 6차선에 이르는 도로이다. 개항 이후 인천 근대화와 도시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도로임을 반영하여 인중로(仁中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4년부터 사용해 온 경인로에서 2011년 인중로로 도로명을 변경하였다. 인중로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인천광역시 중구 그리고 인천광역시 동구를 경유하는 도로이다. 인중로 인근의 주요 시설로는 인천 세무서 별관, 『기호 일보』, 숭의 공구 상가, 숭의 우체국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중로 북쪽 보도를 따라 차이나타운 2.3km 방향으로 이어간다. 인중로 남쪽에는 풍림아파트 단지가 있다.
서해대로와 인중로가 교차하는 수인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서 인중로 북쪽 보도로 넘어왔다. 연안부두는 서해대로를 따라 남쪽 4.25km 지점에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기둥 위에 붙어 있다.
중구 신흥동에서 신생동으로 넘어왔다. 인중로 남쪽에 풍림아파트 단지와 롯데하이마트와 GS칼텍스 주유소가 자리한다.
신생동(新生洞)은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지역이다. 대부분이 황량한 바닷가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자 인천에는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 언덕부터 바닷가까지 약 7000여 평에 이르는 땅에 자신들의 조계를 세웠다. 개항 당시에는 348명에 불과했지만 청일전쟁 이후 그 수가 크게 늘어 4300여 명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차츰 해안을 매립해 조계를 넓히기 시작했다. 대부분 바다였던 신생동을 비롯해 지금의 해안동, 사동 일대는 일본인들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해 1910년대까지 계속 매립을 해서 새로 생긴 땅이다. 일본인들은 1912년 이곳에 ‘궁정(宮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이곳에 자신들의 신궁(神宮), 곧 신사(神社)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1890년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세워진 이 인천신궁은 일본왕의 조상이라고 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사당으로, 일제시대 내내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지 참배를 해야했던 곳이다. 신궁이 있는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공원을 만들었는데 이를 ‘동공원(東公園)’이라고 불렀다. 그 뒤 광복이 되자 1946년 이곳은 신생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됐으니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이다. 1977년 신생동은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편입됐다. - 인천광역시사
인중로와 인중로144번길 사이에 주차장과 광장공원이 있으며 건너편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건물이 솟아 있다.
인중로144번길을 건너면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입구가 있다. 서해랑길은 인중로 북쪽 보도를 계속 따라간다.
인중로 북쪽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입구가 있다. 인천여상은 1945년에 설립, 개교한 공립 전문계 여자고등학교이다.
인중로 북쪽 보도를 따라가면 GS칼텍스 주유소 앞에 수인분당선 신포역 6번 출입구가 있다.
오른쪽 우현로 횡단보도를 건너 한국천부교 인천교회 왼쪽 인중로 북쪽 보도로 이어간다. 우현로는 고유섭 선생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우현로(又玄路)는 인천광역시 중구 사동에서 인현동까지 이르는도로, 총 연장은 969m이다. 해당 도로명은 용동 출생인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술 사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의 호를 활용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위키백과)
사동(沙洞)은 구한말에 인천부 부내면 지역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섬이었다. 모래가 많은 섬이라 해서 사도(沙島)라 불렸고, 조그만 선착장도 갖추고 있었는데,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이 일대 바다를 매립해 자신들이 사는 거류지를 만들면서 육지가 됐다. 사도는 육지와 연결되기 전 ‘오푼도(五分島)’라 불리기도 했으니, 이는 한동안 이 섬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5푼 짜리 가짜 돈을 만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이름을 바꿀 때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빈정(濱町)’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계속 사용되다가 광복 뒤인 1946년 사동이 됐다. 이는 물론 예전의 이름인 사도와 연관지어 지은 것이다. 1977년에는 인근의 답동, 신생동과 합쳐져 행정동으로 신포동에 들어갔다. - 인천광역시사
천부교(天父敎)는 본래 대한예수교장로회 장로였던 박태선이 1955년에 조직한 종교단체다. 신앙촌은 이 종교와 관련된 공동체이다. 박태선은 천부교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천부교인들은 창교자를 인류 구원을 위해 출현한 구원의 주재자이자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는다. 박태선은 서울 남산 심령 부흥회의 주요 강사로 참여한 직후 독자적인 신앙 부흥협회를 조직하였다. 1980년 7월 26일 전국 신도 대표자회 대집회에서 명칭 변경에 합의하여 1980년 8월 1일 천부교로의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다. 천부교의 상징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상으로 창교자가 이를 제정하며 구원의 표상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의하면 천부교의 교회 수는 250개이고, 교직자는 350명, 신도 수는 40만 7470명이라고 한다. - 위키백과
인중로 북쪽 보도를 따라 알뜰주유소인 부광주유소 앞을 통과한다. 인중로 남쪽에 인천세관역사공원 문자조형물이 보인다.
중구 항동 인중로 남쪽 지역에 인천세관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2021년 11월 인천세관역사관으로 개방된 인천세관 창고가 부실한 내용과 주말 미개방 등으로 시민들에게 외면을 받는다고 한다.(이문일 논설위원, 인천일보 2024.7.7.)
항동(港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동에 속한 해변이었다. 이곳에서 해안동으로 연결돼 있었고, 조선 중기까지 수군 기지 ‘제물진(濟物鎭)’이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로는 조그마한 항구만이 남아 있었다. 그 뒤 구한말 이곳에 새로운 항구가 만들어졌다. 항동이란 이처럼 항구가 있어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도 연안부두와 여객터미널이 있듯이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항구가 있었으니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고, ‘인천항에 속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항동의 상당부분은 1915년 일제가 바다를 메워 육지가 된 곳이다. 일제는 매립이 끝난 뒤 이곳에 자신들이 쓰는 행정구역 ‘정(町)’을 붙여 항정(港町)이라 이름지었고, 이것이 광복 뒤에 그대로 항동이 됐다. - 인천광역시사
인천 내항 1부두에 위치한 옛 세관창고 부지에 '인천세관 역사공원'이 조성됐다. 면적은 4395㎡ 규모다. 인천시(시장 박남춘)는 인천본부세관(세관장 최능하)과 함께 16일 오후 인천 '인천세관 역사공원' 시민개방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박남춘 인천시장을 비롯해 임재현 관세청장, 배준영 국회의원, 인천 시·구의원, 시민대표 등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 기념식수, 역사관 현판 제막식이 진행됐다. 1911년 건립된 세관창고는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69호(인천세관 옛 창고와 부속동)로 지정됐다. 인천항 개항과 근대 세관·관세행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항만유산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아, 2010년 수인선 철도계획을 할 때 철거하지 않고 복원한 곳이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관 문화재 부지를 문화 휴식공간으로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것에 합의한 인천시와 인천본부세관은 지난해 7월, 세관 역사공원 조성 기본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세관은 역사공원 부지(1332평) 개방 및 공원 내 역사관을 마련하고, 인천시는 역사공원을 조성했다. 이번에 조성된 인천세관 역사공원에는 인천세관 역사관, 인천시·세관 상징조형물, 잔디광장, 옛 세관창고를 본뜬 포토존 등 시민을 위한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돼 있다. '인천세관 역사관'은 옛 세관창고 1개동을 활용해 1883년 인천해관의 설립부터 광복 전후까지 근대 개항사의 중심이었던 인천세관 역사를 재조명했다. 수입물품에 대한 징수기관과 더불어 우편, 검역, 기상관측 업무를 담당했던 인천세관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이한기(hanki) 2021.11.16
서해랑길은 인중로 북쪽 보도에서 신포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신포로 서쪽 보도의 (구)인천우체국 앞으로 이어간다.
신포로 서쪽 보도 바로 옆에 (구)인천우체국이 있으며, 서해랑길은 제물량로와 교차하는 신포사거리에서 제물량로를 건넌다.
신포로(新浦路)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6가에서 내동까지 이르는 인천광역시의 도로로, 총 연장은 0.94 km에 이른다. 또한 이 도로는 국도 제42호선, 국도 제46호선, 국도 제77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84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98호선 등의 일부를 이룬다. 도로명 고시가 결정되기 직전에는 이 도로가 개항로, 가름길 등으로 나뉘어 고시하였다. - 위키백과
1923년 건립된 (구)인천우체국은 보존 및 활용을 위해 인천시에서 2023년 6월 취득하여 보수 및 리모델링 준비 중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벽돌조의 인조석 바름으로 마감된 건물로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에 위치한 우체국건물.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인천우체국의 전신은 1884년(고종 21) 11월 17일 개국한 우정총국(郵征總局) 인천분국으로, 개국 당시에는 일본 영사관 관사 1동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1896년 영사관 구내에 신청사를 세웠는데, 한국의 인천우체사(仁川郵遞司)를 흡수한 후에도 이곳을 청사로 사용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후 한국의 통신기관을 점유하려고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 합동운영 협정을 맺고 한국의 통신기관을 일본의 통신기구로 흡수시켰다. 그리하여 인천우체사는 1905년 5월 20일 일본의 인천우편국으로 개편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인천우체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부터 인천중동우체국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우체국 건물도 퇴락하여져 새 청사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는데,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계의 설계로 1922년 12월 1일 착공하여, 이듬해인 1923년 12월 10일 준공하였다. 청사의 규모는 598.86평으로, 도로에 면해 ㄱ자형으로 세워졌는데, 옥상층을 두었고 벽돌조의 2층 건물이지만 외부마감은 하부에 화강암으로 2단을 쌓고 나머지는 인조석 바름하였다. 슬라브는 철근콘크리트를 썼으며, 거리 가각(街角)에 정면을 두고 좌우로 펼쳐지듯 지어 건물이 원래보다 커 보이며, 기둥은 사각으로 돌출시켜 권위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지붕 돌림띠는 수평선을 강조하여 이 건물의 특징이 되고 있는데, 좁고 긴 수직 창문선들과 어울려 나눔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정문 좌우 지붕 위에 올려놓은 두 개의 4각지붕이 디자인의 주요소가 된다. 1950년 6·25 때 지붕이 일부 파괴되어 후에 지금의 형태로 보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근대 우정업무를 시작한 우리 우체국은 뜻깊은 개국 110주년을 맞아 주민 여러분에게 더욱 열심히 봉사하는 참다운 이웃이 될 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웁니다. 1994년 11월 18일 인천우체국장
남북으로 이어지는 신포로와 동서로 이어지는 제물량로가 교차하는 신포사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제물량로 횡단보도를 건너 제물량로 북쪽 보도를 따라 중구청 방향으로 이어간다. 건너편의 설치물은 무엇일까? 오른쪽 뒤는 중구 신포동이다.
재래시장이 있는 신포동(新浦洞)의 원래 이름은 순 우리말로 ‘터진 개’였고, 한자로는 ‘탁포(坼浦)’였다. 지금은 모두 매립돼 옛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원래는 이곳이 바다에서 가까워 바다 쪽으로 터져 있고,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동네는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겼는데,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창동(新昌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원래 이곳은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지계를 넘어 들어와 살기도 했다. 신창동은 1930년대 들어 이름이 바뀌는데, ‘터진 개’를 한자로 바꾼 ‘개포동(開浦洞)’이나 일본식인 ‘화정(花町)’이라고 불렸다. ‘화정’은 ‘유곽촌(遊廓村)’ 곧 사창가를 뜻하는데, 지금의 답동성당 언덕 아래나 인천여상 주변에 일본인 여자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때 ‘신정(新町)’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광복 뒤인 1946년 신포동이 되니, 이는 ‘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1977년에는 시 조례 제1075호로 사동, 신생동, 답동과 신포동을 합해 행정동으로 신포동이 됐다. - 인천광역시사
제물량로가 인천역 방향으로 이어지며 서해랑길은 제물량로 북쪽 보도를 따라간다.
신포사거리의 신포로 서쪽 보도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제물량로 북쪽 보도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제물량로 북쪽 보도를 따라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이어간다.
제물량로 남쪽에 인천중부소방서와 그 서쪽에 인천문화재단이 자리한다.
중앙 뒤 신포사거리에서 인중로 북쪽 보도를 따라 바로 앞 홍예문로를 건너왔다. 홍예문로를 따라가면 홍예문에 이른다.
인중로 북쪽 보도에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전시하는 '벽해상전(碧海桑田)-인천 근현대 풍경'展 알림막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은 제물량로206번길을 가로질러 제물량로 북쪽 보도를 계속 따라간다. 건너편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제물량로 남쪽 오른쪽에 대한건축사협회인천광역시건축사회 건물이 있다. 서해랑길은 인천아트플랫폼 방향으로 이어간다.
제물량로 남쪽에 하버파크호텔&웨딩홀이 있으며, 서해랑길은 제물량로 북쪽의 중구청 방향으로 이어간다.
하버파크호텔&웨딩홀 북쪽 제물량로218번길을 따라간다. 왼쪽에 인천아트플랫폼, 맨 끝에 중구청 건물이 있다.
1883개항살롱은 개항장과 내항의 현장지원센터로 시민들을 위한 소통창구 역할을 수행하는 개항장의 콘트롤타워라고 한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는 1883년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 문화재 및 1930~4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구역은 당시의 근대 건축기술 및 역사적 기록을 지니고 있어 건축적, 조형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구)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한 근대 개항기 건물 및 1930-40년대에 건설된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창작스튜디오, 전시장, 공연장, 인천생활문화센터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되었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이러한 도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최대한 살려 문화적으로 재활용하자는 시민들의 뜻과 인천시의 의지가 합쳐져 탄생하였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을 중심으로 개항장 일대는 과거의 역사를 보존하되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며, 창작플랫폼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의 생활문화 활성화를 위해 인천아트플랫폼 단지 안에 자리 잡은 칠통마당은 모임방 5개, 연습실, 갤러리 등을 갖추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대관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선보이고 있다.(경기일보, 송길호 기자)
2023년 9월 27일, 상설전 인천전시실 '인천의 근대 문학을 읽는다'가 개관하였다. 한국근대문학관 입구 유리벽에 백석의 시 '하답(夏畓)'이 적혀 있다. "짝새가 발부리에서 날은 논두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 구멍을 쑤시다 물큰 하고 배암을 잡은/ 늪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한국근대문학관 상설전시관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창고 건축물로 물류창고, 김치공장 등으로 활용되었습니다. 2년여의 공사를 거쳐 창고건축물은 전시, 교육, 행사 등 한국근대문학과 인문학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은 1899년 미쓰이물산 인천지점으로 사용된 건물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인천문화재단 청사로 사용하다가 리노베이션 공사를 거쳐 2020년 10월 기획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했습니다. - 한국근대문학관 사이트 https://lit.ifac.or.kr/
인천 중구청 아래 제물량로218번길과 신포로23번길이 교차하는 인천개항누리길 중심 지점이 있다. 왼쪽으로 이어간다.
신포로23번길을 따라 인천개항누리길 한 구간을 걸어간다. 왼쪽에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 현 인천개항박물관이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899년 신축된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창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제작방법 : 알루미늄 3D 제작 ●모형크기 : 1/250,000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 :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제1은행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위해 이곳에 근대금융기관으로 출장소를 개설하였다. 1888년 인천 지점으로 승격하였고, 1899년 지금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현재는 개항기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관 상부 처마 아래에 조선은행이라고 적혀 있다.
개항누리길 중심 지점에서 신포로23번길을 따라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을 지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생활사전시관 입구 벽에 걸려 있고, 신포로23번길 곳곳에도 걸려 있다.
인천 제물포개항장에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 :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시 사용. 자주독립국가를 향한 꿈!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인천 제물포 자유공원 언덕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동시에 우리나라 태극기가 최초로 창안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생활사전시관 입구 벽에 1882년 인천 제물포개항장에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걸려 있다.
생활사전시관은 1960~1970년대 인천 중구의 생활사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입니다. 대불호텔 전시관과 중구생활사전시관은 테마 박물관이 밀집한 박물관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 보며 100년 전 개화기의 인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관람권을 구매할 때 5개관 통합 관람권을 구매하면 저렴한 가격에 박물관 투어를 할 수 있습니다. 5개 박물관은 대불호텔 전시관, 한중문화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입니다. - 인천 중구문화관광
신포로23번길에서 제물량로232번길을 가로질러 차이나타운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이 있다.
바로 앞의 제물량로232번길을 가로질러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이어간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4년 이 지역이 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생겨났습니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이 중국 음식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거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내 거주 중국인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2세나 3세들이어서 1세들이 지키고 있었던 전통문화를 많이는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중국의 맛만은 고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일반적으로 면보다는 국수라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뽑아낸 면을 물에 담갔다가 손으로 건진다' 하여 국수라 하기도 하고, '밀가루인 면을 국물에 담가서 먹는다'고 국수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국수는 제조나 조리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빵보다도 역사가 길어 BC 6000~5000년경에 이미 아시아 지방에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문헌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이 쓴 여행기 일종인 '고려도경'을 통해서인데 밀의 생산이 많지 않아 상용음식이 되지는 못하였고 메밀국수나 밀국수 등은 생일, 혼례 등 경사스러운 날의 특별한 음식으로만 활용되었다. 국수의 길게 이어진 모양과 관련하여 생일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혼례에는 서로의 인연이 길기를 원하는 뜻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이후의 문헌에 등장한 전통 국수요리에는 온면(국수장국), 냉면, 칼국수, 콩국수 등 약 60여 종에 이른다. 궁중에서는 백면(白麵: 메밀국수)을 가장 상(上)으로 쳤다고 하며 국물은 꿩고기를 삶은 육수를 썼다고 한다. 여름에는 동치미국과 양지머리 육수를 섞어 식혀서 만든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며 민간에서는 냉면 대신 흰 콩과 흰 깨를 갈아서 만든 콩냉국에 밀국수를 말아서 먹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수를 만들기 위해 통나무를 깍아서 만든 틀에 분통 밑에 구멍이 송송 뚫린 쇠판을 단 국수틀을 사용했다. 메밀가루 등으로 반죽을 하여 국수분통에 알맞은 굵기와 길이로 빚어 넣고, 분채에 달린 분공이를 분통 위에 맞추어 놓고 눌러 쇠판에 뚫은 구멍의 크기에 따라 국수 가락을 가늘고 또는 굵게 뽑아 끓는 물에 받아 익힌 후 찬물로 옮겨 식혀서 사용했다고 한다.
▶칼국수 : 해물칼국수, 수제비칼국수, 팥칼국수, 닭칼국수, 두부칼국수, 열무냉칼국수, 굴칼국수, 들깨칼국수, 바지락칼국수, 손칼국수 등 ▶냉면 :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 회냉면, 국냉면, 멍게냉면, 육회냉면, 물회냉면 등 ▶콩국수 : 검은콩국수, 노란콩국수 등 ▶중식 : 옛날짜장, 간짜장, 유니짜장, 삼선짜장, 쟁반짜장, 사천전파장, 고추짜장, 유슬짜장, 온면, 짬뽕, 황제짬뽕, 해물짬뽕 등 ▶국수류 : 올챙이국수, 막국수, 쫄면, 멸치국수, 메밀국수, 잔치국수, 열무국수 등
◎전세계의 대표 누들
가)중국 ▶울면, 기스면, 초면(볶음면/ 차오면), 탕면, 반면, 담담면, 냉반면, 납면, 이부면, 미센 등
나)일본 ▶라면 : 된장라면, 간장라면, 하카타라면, 나가사키라면, 쿠마모토라면, 도쿄라면,돈코츠라면, 우나기라면 등 ▶소바 : 모리소바, 자루소바, 가키아게소바, 나메코소바, 기쓰네소바, 스키미소바, 가모난반소바, 덴세이로소바, 야끼소바 등 ▶우동 : 가케우동, 자루우동, 기즈네우동, 다누키우동, 카레우동, 덴푸라우동, 니쿠우동, 치카라우동, 미소니코미우동 등
다)태국 ▶쎈렉 - 얇은 쌀국수 : 남양탈레, 팟타이, 팟씨유, 카놈찐 남야, 꾸에이 띠 아오 등 ▶쎈야이 - 넓적한 쌀국수 ▶바미 - 계란국수 : 바미팟, 바미남 ▶운센 - 잡채면 : 얌운센
1.누들의 유래 : BC 6000 ~ BC 5000 아시아 대륙에서 면을 만들기 시작
2.중세의 누들 : 1123 송나라 사신의 여행기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면 기록 발견/ 1451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원년)에 완성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 사대부들이 제사에 국수를 사용/ 1459 산가요록 (요리 농업책, 현존 최고)
3.근세의 누들 : 1600 조선시대 안동의 한 가문의 요리책 '음식디미방' 에서 소개.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요리책
4.근대의 누들 : 1883 인전항 개항, 중국식 면장(첨면장) 유입 시기/ 1905 인천 차이나타운 자장음식문화 개업(공화춘)
5.현대의 누들 : 1920 중국음식점 양성화 과정, 취옹장 발음 전파 단계/ 1935 일본제분 인천공장에서 밀가루 생산을 시작. 1945년 11월 대한제분(주) 개칭/ 1950 한국식 춘장 개발(짜장면의 대중화 시기). 해방 후 취옹장 발음이 춘장으로 변화하며 확산/ 1962 장류협회 설립(자장, 면장과 춘장 등 유통상 용어 혼합 사용시기/ 1967 식품위생법 공포 및 취웅장을 춘장으로 표기 상용화/ 1970 인천 동구 경동에 위치했던 광신제면에서 쫄면 탄생, 춘장 용어 정착기/ 1980 서민들의 외식문화 1순위로 짜장면 정착. '칼레스토랑'이 원조로 튀김이 잔뜩 들어간 칼국수 판매(칼국수집이 모여 용동 칼국수거리로 변한 시기)/ 1990 면장, 자장 사용세대 퇴진(문서, 유통, 상용화에 춘장으로 완전 표기 정착화 단계)/ 1993 '블랙데이'란 용어 첫 등장/ 2002 일본 신주쿠의 '월드컵 맞이 한국문화페스티벌 행사'에서 인천 대표음식으로 쫄면 소개/ 2009 인천세계도시축전 '누들로드관' 운영(세계 80여 개국 누들 소개)/ 2016 인천 중구 누들테마거리 조성
신포로23번길에서 제물량로232번길을 가로질러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왔다. 맞은편 건물은 대불호텔 전시관이다.
대불호텔은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조선 최초의 호텔입니다.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대불호텔의 역사를 알아보고 호텔 객실을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불호텔 전시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해랑길은 차이나타운로59번길을 따라 중국음식점 태림봉 앞을 지나 언덕을 넘어간다.
짜장면의 역사 : 짜장면을 한자로는 작장면(炸醬麵), 중국어로는 '차오장멘'이라고 한다. '중국식 된장을 볶아 국수에 얹는다'는 뜻으로 산동(山東)반도 지역에서 토속 면장을 볶아서 만든 국수가 짜장면의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우리가 먹는 짜장면과는 맛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산동지방의 노동자들이 들어와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었는데 중국인들은 짠맛의 춘장을 많이 넣지 않고 첨가하는 채소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후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면서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춘장에 캐러멜을 섞고 야채와 고기를 넣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짜장면을 개발하였습니다. 특히 1960~70년대 모자라는 쌀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분식장려운동과 함께 '빨리 빨리' 산업화 시대에 걸맞게 짜장면은 폭발적인 전성기를 맞게 되어 입학, 졸업, 이사할 때 등 서민들이 가장 손쉽게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특히, 차이나타운에는 1912년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등록문화재인 '공화춘' 건물을 짜장면의 역사와 조리법 등을 소개하는 '짜장면박물관'으로 조성하여 다양한 중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설명안내판
짜장면의 종류 - 1)간짜장 : 춘장에 육수를 넣지 않고 재료와 짜장만을 볶아 면 위에 따로 부어먹는 짜장면 2)삼선(三鮮)짜장 : 기본 짜장에다 세 가지 재료가 더 들어간다는 뜻으로 식당에 따라 다르지만 해삼, 새우, 죽순, 버섯, 전복 등을 재료로 만든 짜장면 3)사천(四川)짜장 : 고추기름을 넣어 매운 맛이 강한 중국 사천 지방의 짜장면 4)유슬짜장 : 채소나 돼지고기 등 여러 재료를 길쭉하게 채 썰어 넣고 조리한 짜장면 5)유니짜장 : 돼지고기, 양파, 감자 등 들어가는 재료를 모두 잘게 다져서(갈아) 만든 짜장면 6)옛날짜장 : 양배추, 양파, 감자 등을 큼직하게 썰어 넣고 물을 많이 넣어 춘장 맛을 연하게 만든 짜장면 - 설명안내판
차이나타운로59번길 남쪽에 한중 문화교류 활성화와 관광객 휴식을 위한 한중원이 조성되어 있다.
본 한중원은 한·중 문화교류 활성화 및 관광객 휴식을 위해 중국 4대 정원 중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의 시설양식을 주제로 조성한 쉼터로 중국의 전통 수목인 대나무(竹子), 장미(月桂), 모란(牧丹) 등을 식재하여 중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차이나타운로59번길에서 한중원(韓中園)을 다시 바라본다.
차이나타운로59번길 남쪽에 해안성당이 자리한다. 서해랑길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차이나타운로를 따라간다.
해안성당 :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000 여명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 신자들은 답동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 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 17일 학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 9일에 완공된 건물이다. 설립초기에는 중국 화교를 위한 성당이었으나, 초대 고요셉 신부가 노환으로 귀국하고, 중국 화교 신자는 감소하게 되고, 관할구역 내 한국인 신자 수 증가로 한국인 성당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1972년 10월 1일, 해안성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한/중 합동 본당으로 운영되었다. 그 후 화교 신자가 감소함에 따라 한국인 성당이 되었으며, 1981년 2월 최기산 보니파시오 신부(전 인천교구장)가 첫 한국인 사제로 부임하였다. 현재 해안성당은 이 지역에서 치명 당하신 10분의 순교자를 기리는 제물진두 순교성지를 관할하고 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과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집안이 치명한 순교터로서 신앙을 위해 목을 내놓은 1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곳입니다. 1844년 부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부제는, 선박을 구입해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성인 현석문 가를로 외 10명과 함께, 이곳 제물진두를 떠나,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중국 상해로 출발하였던 역사적인 곳입니다.
차이나타운로59번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차이나타운로를 따라 차이나타운 중심가를 통과한다. 왼쪽 만향 마라탕 음식점을 지나 위쪽 중국성 음식점 거리는 청관거리터인 것 같다.
경극(京劇 Peking Opera)의 탈과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베이징[北京]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京劇 Peking Opera)이라고 하며, 서피(西皮)·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皮黃戲)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昆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 설명글
향래객 앞쪽 차이나타운로44번길은 제1패루 중화가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향래객 음식점 오른쪽 위 차이나타운로 북성동 원조자장면거리로 이어간다. 중앙 뒤 연경 음식점 왼쪽에 보이는 황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자유공원 입구에 이른다.
차이나타운 거리에 다다르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중국풍거리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우뚝 솟은 제1패루를 지나 계속 경사진 길을 3백여 미터 걸으면 T자형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뉘고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붉은색 간판과 홍등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진열된 상품들도 중국 일색입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이곳은 차이나타운입니다. - 중구문화관광
차이나타운로 북성동원조자장면거리가 이어진다. 오른쪽 소나무가 있는 왼쪽 계단길은 초한지벽화거리로 이어진다.
차이나타운은 120년 넘는 역사 동안 화교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입은 화교 상인들, 최근 복원된 중국식 근대건축물,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치장된 거리를 볼 수 있고 차이나타운의 대표 음식인 짜장면과 공갈빵, 월병, 중국차도 맛볼 수 있습니다. - 중구문화관광
차이나타운거리 북성동 원조 장장면 거리가 이어진다.
붉은 간판과 홍등으로 물든 중국풍 거리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차이나타운은 개항 당시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며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된 지역입니다. 한국 속의 작은 중국으로 수많은 중국 음식점 외에도 삼국지 및 초한지 벽화거리, 패루, 한중문화관, 청일조계지 계단 등 먹거리만큼이나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입니다. - 중구문화관광
차이나타운로를 따라 차이나타운 거리를 통과하여 송월동 동화마을로 내려간다.
차이나타운로와 동화마을길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 동화마을길을 따라 올라간다. 뒤쪽에 4패루 한중문이 보인다.
제4패루 한중문(韓中門)은 동화마을에서 차이나타운으로 올라오는 초입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통적인 붉은색과 황금색의 조화로 화려함이 돋보이는 패루입니다. 한중문이라는 이름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송월동 동화마을 입구에 제4패루가 완성되면서 차이나타운의 동서남북 모두 제대로 된 패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차이나타운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시작과 끝을 표시하는 경계일 뿐 아니라 각각의 문들에 차이나타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화교들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 중구문화관광
동화마을길을 따라 응봉산 자유공원 아래 자유공원서로까지 올라간다. 송월동 동화마을에는 무지개계단, 흥부와 놀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 예쁜 공주님들, 피노키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송월동은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송월동으로 불린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에는 독일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부촌을 형성하였으나, 수십 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살다 보니 활기를 잃고 침체되었으며, 빈집들은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꽃길을 만들고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담벼락에 색칠을 하여 동화마을로 변화하였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
동화마을길을 따라 송월동 동화마을 언덕으로 올라오다가 송월동 동화마을을 뒤돌아본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2013년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마을 전체에 색을 입히고 조형물을 설치하였습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과 같은 11개의 테마길이 조성되면서 마을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대부분 집이나 건물은 동화 속 장소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전봇대는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거대한 나무로 변했고, 가스계량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이 되었습니다.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우리 전래동화로 꾸민 벽화길이 나오는데, 커다란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줍니다. 벽화길 건너편에 있는 ‘트릭아트 스토리’도 송월동 동화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핫플레이스입니다. 트릭아트 스토리는 2층 규모로 시각적 재미를 주는 39개의 입체그림이 흥미로운 경험을 선물해 줍니다. 평면의 그림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관람객이 그림 속에서 직접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는 전시장입니다. - 중구문화관광
동화마을길을 따라 송월동 동화마을을 통과하여 언덕의 자유공원서로로 올라간다.
자유공원 아래쪽에 있는 송월동(松月洞)은 구한말 다소면 고잔리에 속한 야트막한 구릉지대였다.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던 이곳은 1903년 지금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를 가리키는 당시의 제물포 지역에 이 곳을 통괄하는 부내면이 새로 생기면서 만석리(萬石里)가 됐다. 그러나 191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석리가 나뉘어지면서 이곳은 일본식으로 송판정(松坂町)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고, 1914년에는 송판정 1∼3 정목으로 나뉘어졌다. 송판정은 글자 그대로 ‘소나무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는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과 그 기슭인 이 일대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솔골’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으로도 불렸다. 3개의 구역(정목)으로 나뉘어져 있던 송판정은 광복 직후인 1946년 동네 이름이 송월동으로 바뀌면서 그대로 이어져 송월동 1∼3가(街)가 됐다. 송월동은 이처럼 광복 뒤에 새로 붙인 이름인데 ‘응봉산의 소나무[松] 숲 사이로 달[月]이 밝게 보인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 인천광역시사
동화마을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오면 응봉산 자유공원 아래 언덕을 지나는 자유공원서로와 만난다. 왼쪽은 인천기상대 방향, 서해랑길은 오른쪽 중구청과 차이나타운 초한지벽화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자유공원 아래 자유공원서로에서 걸어온 동화마을길과 송월동 동화마을을 뒤돌아보았다.
응봉산 자유공원 아래 언덕의 자유공원서로를 따라 차이나타운 초한지벽화거리로 이어간다.
자유공원서로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왼쪽 초한지벽화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입구 벽에 하얼빈 의거 사진이 걸려 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은 개항 당시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며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된 지역입니다. 수많은 중국 음식점 외에도 삼국지 및 초한지 벽화거리, 패루, 한중문화관 등 먹거리만큼이나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입니다.
자유공원서로의 초한지벽화거리 입구에 '초한지' 설명안내글 사진이 붙어 있다.
초한지(楚漢志)는 중국 진나라 말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역사를 소재로 삼은 이야기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등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명나라 패 종산거사가 지은 <서한연의>를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작가들이 상상력을 더해 재창작해 왔다.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진나라의 멸망 이후 분열된 제후국들 중 가장 강성했던 초나라 왕 항우와 그에 대립한 한나라 왕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맞서 싸운 5년간의 전쟁이 주된 내용이다. 평민 출신의 유방이 항우에게 제거당할 위기까지 불렸다가 책사 장량과 명장 한신, 재상 소하 등의 도움에 힘입어 세력을 차츰 넓혀가며 항우를 패배시키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여 한제국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서사, 그 반면에서 용맹과 무력에서 그를 당해낼 이가 없던 희대의 영웅 항우가 모든 것을 잃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서사의 뚜렷한 대립 구도 안에 펼쳐지는 인물들의 지략과 모험, 처세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흥미와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 설명글
초한지벽화거리 '초한지' 설명안내글 맞은편에 빌렘 신부의 안중근 의사 면회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설명 :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1910년 3월(9일 또는 10일로 추정) 면회 온 빌렘 신부(가운데 등 보이는 인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만나고 있다. 안 의사의 동생들은 안 의사가 이 자리에서 동양평화론에 대해 얘기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얼빈 의거의 이유 : 나의 (의거)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자유공원서로 삼거리에서 초한지벽화거리로 들어와 걸어오다가 뒤돌아 보았다.
초한지 벽화거리는 초한지의 대표적인 사건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대형벽화가 조성된 거리입니다. 110m 길이의 벽화거리를 거닐며 중국 진나라 말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초한지는 중국 진나라의 멸망 이후 한나라의 천하통일까지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입니다.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항우와 유방이라는 두 명의 대결구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두 영웅의 전쟁을 중심으로 책사, 장군, 미인 등 여러 인물들의 등장으로 재미를 더합니다. 항우에게 유리해 보였던 전쟁이 패배로 끝을 맺으면서 영웅의 비장미를 느끼기도 하고, 평민 출신의 유방이 승리하게 된 것에서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책사간의대결도 흥미로운데요, 장량과 범증의 라이벌 구도와 묘수가 번뜩이는 전술 대결이 재미있게 읽혀집니다. 또한 항우와 우희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애틋한 마음이 일게 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이야기, 시, 경극 등 예술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중구문화관광
자유공원서로에 조성된 초한지벽화거리를 따라간다. 응봉산 자유공원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제3패루 선린문이 있다.
차이나타운의 벽화거리는 초한지 벽화거리와 삼국지 벽화거리 두 곳이 있습니다. 삼국지 벽화거리가 먼저 조성된 후 인기를 끌자 추후에 초한지를 주제로 조성된 곳이 바로 이곳 초한지 벽화거리입니다. 초한지 이야기는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새로운 통일제국 한나라에 황제로 취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초한지 벽화거리의 마지막 벽화는 마치 역사와 이야기는 끝맺음 없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그 이후 한나라의 몰락과 위·촉·오 세나라의 이야기인 삼국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초한지 벽화거리가 끝난 지점에서 전방을 바라보면 삼국지 벽화거리가 보입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삼국지 벽화거리가 펼쳐집니다. 시간 순서대로 초한지와 삼국지 이야기를 감상하고 싶다면 초한지 벽화거리를 감상한 후, 삼국지 벽화거리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 중구문화관광
응봉산 자유공원 오르는 계단의 오른쪽 도로 반사경 기둥에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길고 길었던 서해랑길 95코스와 96코스 탐방을 마친다.
응봉산 자유공원 오르는 계단 앞에 제3패루 선린문이 있다.
제3패루 선린문은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선린문이라는 이름은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은 가까운 이웃으로 잘 어울려 살자는 뜻입니다. - 중구문화관광
제3패루 선리문 북쪽 기둥에 선린문 건립 취지문이 붙어 있다.
선린문(善隣門)은 韓·中間親善紐帶를 通하여 차이나타운의 繁榮을 함께 이루어 가자는 意味로 우리 區民의 뜻을 모아 建立하였습니다. 2003年7月1日 仁川廣域市 中區廳長
차이나타운로에서 선린문에 오르는 계단을 황제의 계단이라 이른다. 황제의 계단 5층 오른쪽에 십이지신상이 조성되어 있다. 황제의 계단은 '1F 왕의 길, 2F 황제의 알현, 3F 무릉도원의 여행, 4F 만리장성의 여정, 5F 도화원의 복숭아'라고 이른다.
황제의 계단 석주 앞에서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를 내려본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국영사관이 설치된 후 중국인 2,000여 명이 현 선린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곳이다."(중구문화관광)
황제의 계단 석주에서 뒤돌아서서 제3패루 선린문을 올려본다 십이지신상이 왼쪽에 도열해 있다.
선린문에서 황제의 계단을 내려와 뒤돌아본다. 황제의 계단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야 멋진 것 같다.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은 차이나타운에서 조성한 관광체험형 계단으로서 중국의 절경을 체험하며 복을 얻어 가는 시민참여형 계단입니다. 1F - 왕의 길, 2F- 황제의 알현, 3F - 무릉도원의 여행, 4F - 만리장성의 여정, 5F - 도화원의 복숭아. 즐거움이 가득한 차이나타운에서 황실의 기운과 복을 얻어가시길 기원합니다. - 설명안내판
황제의 계단을 내려와 차이나타운44번길을 따라 내려오면 제1패루 중화가에 이르며 앞에는 제물량로가 지난다.
차이나타운 제1패루 중화가는 인천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입니다. 중화가라는 이름은 중화사상의 반영으로 세상의 중심에 있는 중국인들의 거리라는 뜻입니다. - 중구문화관광
제물량로 횡단보도를 건너 인천역으로 간다. 인천역 뒤쪽은 월미도가 있다.
제물량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제1패루 중화가를 뒤돌아본다. 차이나타운44번길을 따라 올라가면 차이나타운 중심지에 이른다.
차이나타운으로 향한다면 여기부터 차이나타운임을 알려주는 패루를 볼 수 있습니다. 중화가(中華街), 선린문(善隣門), 인화문(仁華門), 한중문(韓中門), 4개의 패루가 차이나타운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건축물로 예부터 동네 입구에 마을의 대문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붉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탑 모양이고 화려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과 화려한 채색이 시선을 잡아끄는데,여기에는귀신같은부정한것을내쫓고 상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중구문화관광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의 종착역으로 현재 수도권전철 1호선과 수인분당선의 종점이다.
최초의 기관차 모갈1호 석조 모형물이 조성되어 있고, 모형물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에 대한 설명문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하여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역 간(33.8km) 개통된 경인철도이다.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기관차 모갈 1호 : 모갈호는 철도개통시 사용된 첫 열차를 견인한 증기기관차로 미국 브룩스 회사에서 총 4대가 제작된 후, 반제품으로 운송하여 1899년 인천에서 조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