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미와 도미부인에 대한 고찰
도미설화는 국문학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조선 세종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을 ‘삼강행실도’(1432년)에 수록하여 열녀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동사열전’을 비롯, ‘동국통감’ ‘오륜행실’ ‘신속동국행실’ 등에도 한 결 같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도미전을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열녀전으로 꼽아온 셈이다. 이전까지 도미전은 백제 민간에 암암리에 유통되어오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 통일신라기 때 구전 또는 문헌으로 전승되던 것을 고려 시대에 수집·정리하여 ‘구 삼국사기’ 열전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다시 김부식이 ‘삼국사기’ 제 48권 열전 도미전으로 옮긴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취지에서 도미부인 설화에 나오는 도미 부인상을 세우겠다는 안을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앞서서 나서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에 먼저 각 지역에 유포되어 있는 도미와 관련된 전설의 사례들을 모아보고 진위여부를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듯하다.
먼저 삼국사기에 기록된 도미전을 보면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
도미는 백제인이다. 비록 소민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의리에 아주 밝았다. 그의 아내는 예쁘기도 하고 행실에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저의 아내와 같은 여자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 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가장하여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하고, 사람을 보내 미리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가짜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래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데려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라고 하였다.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 室! 吾更衣乃進." 退而雜 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蒜山>之下. <麗>人哀之, 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三國史記卷第四十八.
“그가 마침내 덤벼들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은 망언을 하지 않을 것이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어여쁜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모시게 하였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 들여 억지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이미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목욕을 깨끗이 한 뒤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곧 도망하여 강 어구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널 수가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오자, 그녀는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차스럽게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글로 만 봐서는 1) 도미가 백제 사람이다.
2) 도미는 [편호소민]이다.
3) 도미는 개루왕 시대의 인물이다.
4) 도미는 여종을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다.
5) 도미부인은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인 도미를 다시 만났다.
6) 그들은 고구려의 땅 산산으로 망명을 하였다. 등의 기록이 있을 뿐이지 구체적인 도미의 직업이나 지위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백제의 개루왕 시대의 인물이라는 사실과 궁성 가까이에 사는 것으로 추정될 뿐 구체적으로 그곳이 어디인지조차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도미라는 사람은 백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혀 도미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타난 도미의 신분은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 하였다. ‘편호’는 호적을 말함이니 ‘편호소민’은 ‘호적에 오른 평민’이란 뜻이다. 일부에선 도미가 평민으로 직업은 어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또는 목수라거나 또는 관료(정승)이라거나 하는 다양한 얘기들이 이후 전국에 걸쳐 아류작들이 파생되어 전해져온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미 전설은 여러 고문헌에 등재되어 전하기도 하고, 구전(口傳)으로 전국의 각 지에 유포되어 있기도 하다. 여러 곳에서 구전되고 있다는 도미전설로는
〔전설1〕: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蘇城里)의 전설,
〔전설2〕: 경남 진해시 청안리(晴安里)의 전설,
〔전설3〕: 경기도 하남시 동부면 창우리(倉隅里 속칭 창모루)의 전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전설과 같이 전해오는 이야기는 원래 보령 오천면 소성리에 도미항(道美港)이 있고, 도미부인이 남편을 그리던 상사봉(想思峰)이 있고, 미인도(美人島)가 있다는 등의 근거를 들어 도미부부의 살던 곳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뿐만 아니라 진해시 청안동 산 103번지에는 ‘百濟政丞 都彌의 墓’라 하여 후손들이 관리하는 커다란 墳墓가 있다.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서는 王陵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 분묘와 얽힌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墓碑에는 ‘百濟政丞都彌之碑 配 貞烈夫人’이라고 前面大字를 새겼으며, 이 분묘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정승 도미의 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일치된 견해가 없고 異論이 많다고 한다.
또한 하남시 두미나루와 관련된 주장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를 시작으로 동사열전 동국통감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 '도미부인' 설화의 배경이 되는 도미나루가 하남시 창우동 한강변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띠고 있다며, 아울러 현재 전설로 내려오고 있는 송파의 도미나루설화와 보령시의 도미설화가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채 구전되고 있는 설화에 의존한 반면 하남시 창우동의 도미나루설화가 그에 해당하는 유구와 고지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평야보다 산지가 많으므로 옛날에는 도로교통보다는 하천과 바다를 이용하는 수운교통이 발달하였다. 고려 초기부터 조세를 징수하였으며 조세로서는 미곡을 징수하였다. 이것이 세미(稅米)이다.
각 지방의 세미는 주로 하천을 이용하여 운반하고 하구에는 창고를 설치하여 집하하였다. 고려시대는 남도에 12창(倉)을 설치하여 각 창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그 지방의 세미를 징수하였다. 12창에 모인 세미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서 주운으로 중앙의 경창(京倉: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는 창고)으로 수송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漕運船)은 북한강의 소양강창(춘천)과 남한강변의 가흥창(충주) 그리고 흥원창(원주)에 집하한 세미를 한강을 따라서 서울의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특히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대하천은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하천의 주운은 한일합방 후, 도로와 철도의 발달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 가운데 도미(渡迷)나루는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러 쌀을 운반하던 나루로 도미(渡米)나루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목 동쪽 10리 양근내 대탄 용진’의 하류에 있는 나루를 ‘도미진’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탄’은 ‘한여흘’로, <용비어천가>의 한강 지류를 설명한 곳에 나오는데, 남한강의 이포(배애)를 지나 양근군에 이른 나루다. 북한강 줄기는 가평의 안반여흘을 지나 양근의 선돌나루(입석진)를 거쳐 도미진에 이른다. 두 문헌에서 ‘도미진’은 남·북 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나루로 설명했으므로, ‘도미진’은 팔당 근처가 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도미진’의 다른 이름으로 ‘두미진’이 있었음도 기록했는데, 일반적으로 고구려 말에서 ‘물’을 뜻하는 차자 표기가 ‘매’(買)였음을 고려한다면, ‘두미진’은 ‘두매’가 변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곧 ‘두물’의 다른 표기인 ‘두매’나 ‘두미’가 ‘두미진’으로 바뀌어 굳어진 형태인 셈이다. 지금도 ‘양수리’가 있고, ‘두물머리’도 작은 마을 이름으로 쓰이는데, 이는 나루 기능이 약화되고 물길이 변한 데서 까닭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기에 배알미 마을 또한 배아미[胚芽米]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싶다. 배아미란 방앗간에서 벼를 찧을 때 약간 쓿어서 씨눈이 떨어져 나가지 아니한 쌀을 가리킨다.
도미의 거주지는 당시 백제의 수도인 현재의 서울의 송파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에서 하룻밤 사이에 왕래가 가능한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궁궐이 송파(松波)에 있었고 왕이 도미를 내친 강안 역시 궁궐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나루이었기 때문에 도미의 거주지도 송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