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올림픽공원 [환경지킴이]들이 답사 나들이길에 올랐습니다.
답사 코스는 부여의 <정림사지>와 <궁남지>와 <백제문화재단지>,
백제의 첫 서울인 한성에 사는 사람들답게 백제와의 인연을 찾아 나선 길입니다.
버스가 부여를 향해 출발하자 버스 안에서 '족발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오늘 답사에 참가하지 못한 B선생님이 아쉬운
마음을 전하려고 보내준 족발, 그 고마운 마음이 전해져 아침에 먹는 족발이 그렇게 맛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올림픽공원을 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순회하면서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길안내도 하고 해설도 하고 환경도 지키는 환경지킴이들, 한해 70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올림픽공원은 전국적인 명소, 비록 나이는 노년기에 속하지만 내 작은 힘으로 이 명소를 잘 알리고 지키겠다는 소박한 염원을 가지고 활동에 나선 '꼭 필요한 분들'입니다.
모처럼 답사 나들이에 나선 지킴이들의 웃음소리 드높은 가운데 첫 코스인 정림사지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관람한 <백제불교문화관>에는 384년 침류왕 때 동진의 스님 마라난타가 서해 바다를 건너와 백제에 불교를 전하는 그림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지방마다 서로 다른 무속신앙이 난립하여(?) 왕명[王命] 이 미치지 못할 때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워 왕이 주관하는 불교의식은 지방을 다스리는 왕권 강화의 좋은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림사 같은 불교 사찰의 지붕을 기와로 올려 불교의 신성함과 왕의 권위를 한층 부각시켰을 것입니다.
정림사지는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 배치 구조입니다.
국보 제9호인 오층탑 을 바라보았습니다.
불국사 석가탑을 다들 그렇게 칭찬하듯이, 이 오층탑도 "부드러운 목탑의 맛", "배흘림기법", "둥근 지붕 받침돌", "날아오를 듯한 지붕선" 등등 찬사가 이어지지만, 나는 예술보다는 역사편에 서서 1층 탑신에 새겨진 ‘대당평백제탑비(大唐平百濟塔碑)라는 글자에 더 관심이 갑니다.
백제를 평정한 당나라 소정방, 오층탑을 전승탑으로 탈바꿈 시킨 교만함이 씁쓸하지만,
그 때문에 이 오층탑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한 편으론 다행이라고 억지로 위안해 봅니다. ^^^
궁남지(宮南池)는 이름 그대로 "왕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 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부소산이 나오고, 그 아래 의자왕이 정사(政事)를 보던 왕궁이 있고, 왕궁을 지키기 위한 나성도 나옵니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왕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 그 근처에서 국보 제287호 긍동대향로가 발굴된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입니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서동(薯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신라 향가 서동요, 하면 우리나라의 자칭 국보(國寶)이자 향가 연구의 독보적 존재였던 양주동교수님이 떠오릅니다.
국문학 강의 시간, " 얼어 두고의 얼어는 혼인을 했다는 뜻이야. 짝짓기를 했다는 건데,
남 몰래 했으니까 얼마나 뜨거웠겠어. 그러니까 밤에 몰래 안고 간다가 뜨거운 러브씬이 되는 거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치듯 우리들을 바라보시던 선생님,
아마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무왕을 질투한 것은 아니셨을까? 새삼 궁금해집니다.^^^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떨어진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하는 궁남지는 물을 왕실의 무덤들이 있는 능산리 산골짜기에서 끌어왔습니다.
어느 봄날 무왕이 사랑하는 왕비와 함께 큰 연못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사서가 전하니,
무왕인 서동과 선화공주의 뜨거운 러브씬은 이 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듯싶습니다.
사랑에 감염된 선생님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연못에 비친 모습을 보며 젊은 날의 로맨스를 떠올리기도 하며,
시들어버린 국화꽃과 연꽃처럼 나도 그렇게 시들었구나, 인생무상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 ^^^
궁남지를 떠나는 지킴이들의 뒷모습이 지금 늦가을만큼이나 쓸쓸한데,
이럴 때는 뜨거운 소고기전골에 소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면 제격입니다. 날씨도 흐리고, 꽃들도 다 졌고,
서동과 선화공주도 못 만났고, 핑계도 많으니 한 잔 두 잔 애꿎은 '아침이슬'만 수난을 당합니다. ^^^
금강을 오른쪽에 두고 차를 달려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백제문화대단지]에 도착했습니다.
사비성과 위례성을 재현한 이 곳을 둘러보면 한성백제와 사비백제의 위상이 뒤바뀐 것같아 씁쓸합니다.
500년간의 역사와 21명의 왕과,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가야를 정복한 근초고왕의 한성백제와,
120년간의 역사와, 5명의 왕과, 한성을 되찾았다가 신라에게 빼앗긴 성왕의 사비백제.
그런데 위례성은 짚으로만 지은 궁과 움집과 망루뿐이고, 사비성은 기와를 올린 웅장한 기와궁궐들로 위풍당당.
마음을 돌이키면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와 황산벌, 백마강 아래로 치마를 둘러쓴 삼천 궁녀가 꽃이 되어 떨어진 낙화암,
해동증자로 칭송 받다가 망국의 왕으로 전락한 의자왕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부여와,
이제 겨우 17년전,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지 않을까 라는 학설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는 저간의 경위를 살펴보면
눈 앞에 벌어진 격차의 현실이 어느 정도 납득은 됩니다.
누가 형이건 아우이건 우리는 모두 부여의 후손인 백제인.
약 100만평 대지에 20년 넘게 7천억원의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간 [백제문화대단지]에는 사비성과 능사와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과 우리의 하남 위례성을 재현하여 2010년 9월에 개관하였습니다.
사비성의 정문인 정양문을 들어서서 너른 마당 한가운데 길을 지나면 사비궁의 정문인 천정문,
천정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왕이 정사를 보던 천정전이 우리 지킴이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른쪽 동궁에는 왕이 문관에 관한 집무를 보는 문사전과, 그 뒤편으로 문신들이 집무를 보는 연영전이 있고,
왼쪽 서궁에는 왕이 무관에 관한 집무를 보던 무덕전과, 그 뒤편으로 무신들이 집무를 보던 인덕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비궁 맨오른쪽에 성왕의 명복을 비는 능사가 있는데,
능사 앞에는 높이 38m의 5층목탑이 하늘 높이 솟아 아들 창왕의 기원을 드러내는 명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남 위례성은 사비궁의 왼쪽 뒤편 끝머리에 시골집처럼 촌스럽게 자리잡고 있어서 처음 받은 인상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움집처럼 온통 짚과 나무로 지어져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같았습니다.
푸대접에 화가 난 근초고왕, 황색 깃발 등 뒤에 꽂고 적토마 올라탄 관운장처럼 둥근고리칼 휘두르며,
"이놈들 !!!" 여기 부여로 호통 치며 달려오는 환상에 빠졌습니다.^^^
역사 왜곡(?) 시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 능사의 5층목탑을 한참 올려다보자니 목이 아팠습니다.
불심 깊은 지킴이 몇 분은 신발 벗고 금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합장배례하고,
불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부처님 마음 속에 모시려고 카메라 찰칵찰칵, 부여 답사 마무리가 훌륭합니다.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우뚝 서 있는 풍납토성, 하남 위례성 성벽은 밑변 43m, 높이 11m, 둘레 3,5 km.
연인원 200만 명이 동원되어 몇 년 쌓아야 하는 성벽의 규모를 보면,
언젠가 서울에 재현할 위례성은 어떤 구조와 규모가 되야 할까, 한참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참 쉬웠습니다.
"백제문화단지의 사비성보다 최소한 4배 이상은 되어야 할 꺼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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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재 지킴이께서 애써 제작한 동영상을 올립니다. 수고 참 많이 하셨군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