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완성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곧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와 같은 믿음으로 산 증인들의 이야기인 히11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히10장까지의 강해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믿음으로 살다간 분들의
증언이고 히12장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반드시 징계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교훈인 히13장으로 연결됩니다.
수학에 공식이 있어야 정답을 얻듯 원리가 있어야 말씀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도 1-11장까지는 교리, 12장부터는 교훈입니다. 에베소서 또한
1-3장까지는 교리이며 4장부터는 ‘그러므로’ 하면서 교훈의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과 행함의 함수를 교육학적인 수사로 풀어보려는 억지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업적을 따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나아가면 믿음이 실상이 되어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신론적인 인본주의 곧 인문학적인 설교를 하는 겁니다.
1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를 통해서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이 실상을 따라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히11장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릴 것은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일반적인 표현으로
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은 율법이 있든지 없든지 그 그림자를 통해 실상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히11:1)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율법이 없을 때도 믿음으로, 율법이 있을 때도
믿음으로입니다. 곧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실상을 본 선진들이 바로 노아 에녹 모세
등등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어 믿음으로 성공한 증인들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강조하면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거늘
너는 폭신폭신한 침대에서 자면서 새벽기도도 안 나오는구나’ 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행위를 강조하는 새로운 율법의 강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법 정신으로 교육하는 설교자들이 엄청 많습니다.
모세가 율법의 대표이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실상을 보았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금은보화를 거절한 것입니다. 장차 올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거절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선지자들이
그들 속에 있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으실 것과 고난 받으신 후의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계시로 상고했다고 진술합니다(벧전1:10-12)
그게 믿음의 실상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히12장 1-2절은 허다한 증인들이 구름 같이 있다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한 사람들이 구름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겠다는 것이 히12장의 내용입니다. 징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꾸지람인데 이 징계를 여러분이 꼭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히11장, 12장, 13장 강해를 못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한 번 정리하고 갑시다.
많은 신자들이 징계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맞았다,
나 징계 받았다’ 는 식으로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막 흔들어
깨우시면서 ‘너 내 말 들을래? 안 들을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조치를 취하는 모든 사건을 징계라고 합니다. 왜 징계를 주시느냐 하면
그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함에 참예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거룩한 길을 가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리고 연단한 다음에
평강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먼저 믿음의 증인들을 쭉 세워놓고 ‘봐라 그 사람들도 다 그리스도를 보고 믿었는데
왜 너희들은 안 되느냐 믿음의 경주를 왜 안하고 있느냐 무거운 죄의 짐을 왜 벗어
버리지 않느냐 너희들이 안하니까 손을 좀 봐야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거나 쓴 뿌리가 있어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경우나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에서처럼 세상에 한 발 걸쳐 놓으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히12장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말씀이고 히13장은 ‘이제 제대로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라’ 하는 식으로 히브리서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그림자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를 보고 장차 올 실상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 모세 등등의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지도입니다. 그런데 보물섬을 찾는 지도가 값이 있기는
하지만 보물하고 같은 값은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신령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와 값을 비교해 보면
형편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제사는 그림자이므로 인간의 죄를 온전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동안 유예는 시켜놓을 수 있어도 온전하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상 깨끗하게 할 수 없다(히9:9)고 말씀했습니다.
에덴동산부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란 X레이를 찍어 죄인이라고 판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들키면 일단 도망을 가 버립니다.
그 증거가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니까 죄 지은 아담이 얼른 숨는 겁니다.
숨어도 거기가 거긴데 일단은 도망을 가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은 교회 안 나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좀 풀리면
‘목사님 기도 좀 해 주세요’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좀 나아졌다고 해도 자기
마음의 중심은 절대로 주님 앞에 드리지 않고 돈 몇 푼 헌금하고 끝내 버립니다.
그 만큼 우리 인간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란 X-레이를 찍어 ‘너 예수 그리스도께 안 가면 영영히 죽었다’
이렇게 하지 않는 한 ‘너 죽었다’ 해도 ‘난 안 죽었다 내가 왜 죽어’ 하는 존재들입니다.
기어코 스스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크게 부흥하는 종교가 자기 숭배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등의 말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분을 위하여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크게 성공하라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한 형상을 입은
인간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거듭난 자로 새로 창조되어야 하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안에서 그 보좌에 앉히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지 말고 아담이 가죽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의 죽으심과 하나 됨에 믿음으로 참예하고 그의 살으심에
참예하여 부활과 생명과 하나가 되어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얻어 입어야 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믿음이 실상이 되게 하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