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셀 교회 개발 컨퍼런스의 마지막날 이금하 전도사님의 강의를 문자화한 것입니다.
2000년 7월 19일 (마지막 오전강의)
저는 저희 목회지가 캠퍼스 사역이고 또, 보스턴이고 세계적인 대학들이 있는 곳이라 자주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곳은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있는 곳이기에 셀목회가 성공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목회지와 바꾸시지요! 아마 목사님들께서 제가 저희 교회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아신다면 그런 오해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 나이가 오십인데 이렇게 젊게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오해 때문에 많이 힘듭니다.
때로는 오픈셀과 폐쇄셀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스탶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스탶이 되려면 대단한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하감이 생기기에 스탶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셀 구성원가운데 그냥 있는 사람도 있고 스탶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한번 오케스트라 비유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교향악단이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우린 모두 오케스트라입니다. 지휘자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은 악기입니다. 한 두번 짱하는 심벌즈도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지 아차 하면 놓치게 됩니다. 각 교회의 사정은 모두 악기의 종류가 여러 가지 이듯 어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듯이 그리스도로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마음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신 그 은사에 자신을 헌신하여 각자 맡은 부분에서 자기가 맡은 선교지에서 열심히 할 때 전체 화음이 어우러져 이 땅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저는 목회지를 바꾸고 싶습니다. 제일 목회가 안 되는 곳이 보스톤입니다. 자신들이 지성인이라는 교만함 때문에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겉만 지성인들이지요 좌절과 실패, 시행착오가 무지 많았습니다. 30-40%가 외국학생들입니다. 교포 2세들이 얼마나 죄악된 환경에 있는지 아십니까? 겉으로 A학점 받고 근사한 학교에 다니지만 빛 좋은 개살구 경우가 많습니다. 겉은 빨간 사과이고 속은 모두 상했습니다. 자기의 죄로 남의 죄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아십니까? 그 하나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몇 년의 치유과정이 필요합니다. 같이 울고 ...제가 그 현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목사님들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이야기해야지 왜 자꾸 열매만 이야기하느냐고 하시면서, 끝나고 가면 영성이 없기에 아무리 이런 세미나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깊고 너무나 시간이 걸려서 이야기 해야 되는 것이기에 이런 컨퍼런스에는 이미 영성이 되있는 분들만 오셨다고 봅니다. 이것은 부흥회도, 성경공부시간도 아니기에 많이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증과 세미나를 통해서 힌트를 받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공동체>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손으로 비유해 본다면 손바닥은 그리스도요 주변은 말씀, 기도,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에는 셀이 완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 중요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인간적인 교재로 끝나면 안됩니다. 저의 아들이 13세이고 29세 사촌누나가 집에 전화했습니다. 목사님에게 주례를 부탁하려고 전화를 했다가 출장중이라 그냥 끊으려 하자 아들이 29세 누나에게 할머니가 계신데 왜 인사하지 않느냐고 어떻게 소홀히 여길 수 있느냐고 충고를 했습니다. 29세 누나가 13세에게 완전히 혼나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머니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십니다. 키운 보람이 있다고....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발견합니다. 아들에게 인사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워낙 할머니 중심적인 생활을 합니다. 완전히 가족의 센터에 할머니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고 일일이 인사드리고 말씀드리고 합니다. 그러니까 13년동안 가장 중요한 분이 할머니이고 그분과 같이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예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학교에 제출하는 수필에서 가장 으뜸 되는 분을 할머니로 묘사할 정도로 효도가 몸에 배였습니다. 평소에 보고 배운 것이 익혀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29세 누나에게 도전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봅니다. (29세 누나 같은 경우) 나에게는 생명 걸고 모시는 예수님이라며! 그리스도인이라며! 가족! 자녀라며! 어떻게 소홀히 여길 수 있습니까? 이렇게 대단히 여기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몸으로 여겨야지 소홀히 여기면서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중심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면 힘듭니다. 이것은 역할 모델이 있고, 모본이 있어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가장 중심으로 모신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면 그것을 체험하고 증험되고, 터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셀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리고 공동체는 한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셀을 하려는 분들 가운데 실패하는 이유는 가족공동체를 근본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기 때문이며 이런 분들이 방법론적으로 셀 조직을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셀 영성은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제가 중앙아시아에 가서 2년 전에 수련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14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마을 사람들을 참으로 정성으로 돌보는 자매였는데 이 작은 깡촌에 사는 자매의 질문이 심오하고 깊었습니다
하버드대 학생과 비교도 안됩니다. 교회와 구원은 하나이다 라고 수양회 때 설명했고 피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14세 소녀였습니다. 이 소녀가 지하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70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는 무엇입니까? 적어도 3가지를 생각합니다.
1. 죄사함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죄사함을 위해 드린 제사, 이 제사는 매년 속죄 일에 드려야하는 한계성 있습니다. 침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준비하신 영원하신 속죄제물인 예수님으로부터의 효과는 영원하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 몸
혈액이 순환됨으로써 몸이 생명이 지탱된다.
3. 혈연관계, 혈육
적어도 이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2:19, 딤전 3:15.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관이 먼저 바뀌어야 셀을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먼저 외치지 마세요. 하나님의 가족, 권속, 식구가 바로 교회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이것에 대해서 패러다임 쉬프트를 가져야 합니다. 막 3:34,35 30년동안 목수일하던 요셉을 대신해서 집안 일을 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돌아다니시는 예수님에게 가족들이 찾아오자 나를 중심으로 십자가의 피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자들이 나의 참 가족들이지 육신의 피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7가지 표적가운데 가장 먼저 한 것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도록 한 것인데, 여기서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하시며 귀부인이시여 라는 존칭어를 썼습니다. 하지만 어머니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만큼 공생애 시작에 앞서서 혈연관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마리아와 요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이해한 요한과 또,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며 결국 마지막에 가상칠언중 하나인 요한에게 마리아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나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인 것을 선포하면서 돌아가신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짜 맞추어 지면서 교회관이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며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안돼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 분들 가운데도 아직까지도 교회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습니다. "가족 같은"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가족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THE FAMILY OF GOD 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이 God에다 초점을 두겠습니다. 그러나 The Family of man이라고 하면 사람의 가족이 되는데 이러한 사상이 가족을 멍들게 합니다. 저는 수많은 멍들은 가정을 봅니다. 가장이 엉망이니까 가족들이 수 없이 깨지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21세기에는 90%이상의 가정이 깨지고 가정의 경계선이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불안전한 죄인이 다스리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가정은 흔들리지 않고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무한합니다. 시51편에 다윗이 말한바 하나님은 영원히 혼자 의로우십니다. 갈 3;28에서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이 교회의 본질을 모르면서 어떻게 교회 일을 하시겠습니까? 인간의 근본 불행의 원인을 3가지로 말하자면 갈 3:28 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1. 인종차별 2.성차별 3. 계급차별 이 세 가지를 나타냅니다. 허준을 보면서 양반과 상민의 너무나 기가 막인 비인권적인 계급차별을 보면서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완전히 깨고 세상에 도전해야된다고 믿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설교를 하는데
동양인으로 미국에서 얼마나 인종차별을 당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모든 일본인들이 분개하다가 갈라디아서의 성차별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일본 남자들의 고개가 숙입니다. 인종차별에는 분개를 느끼면서 그 사람들 자체가 성차별, 계급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사람들 인종차별로 분개하면서 흑인들을 멸시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은 죄인입니까? 뜯어고칠려면 완전히 기초를 허물어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마음속에 모셨더니 제 자신을 다 허물고 깨부수고 너무나 괴롭습니다. 괜히 모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주님은 "애야 난 왕이란다 그것도 왕 중왕이란다. 왕은 궁전에 살아야한다. 내가 들어와보니 너는 학고방인데 학고방과 궁전은 기초부터 다르단다. 그래서 너의 인생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 깨어 부순단다. 기초를 깊고 넓게 궁성을 지을 만하도록! 네가 나를 왕으로 모셨다면 너의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서 나에게 순복하라. 왕으로 모셨다면서 어찌 나를 학고방에 두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기초부터 완전히 갈아엎는 그리스도를 터로한 (고전 3장) 인생의 터를 갈아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갈 2;20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이 말씀의 한국어 번역이 틀렸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는데 뒤 번역은 다시 살은 느낌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 아들을 믿는 믿음의 주체가 아직도 있다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그 믿음이 알량하다는 것입니다.
원어 적으로 볼 때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내속에 들어와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큰 믿음으로 매일 살아야 합니다. 고전15:31을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 위에서 죽노라! 빌 3:8-10에서 죽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부활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내 속에 계신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번역도 갈 2;20이 틀립니다. by faith in the son of God이라고 되어있는데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전치사를 바꾸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공동체의 개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 자매, 가족인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신 것도 공동체를 위합니다.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인 것으로 말입니다. 성경에 쓰여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이 말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공동체를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교회서 우리라는 개념아래 공동체를 잘 이루는 것입니다.
<훈련>
저희 교회에서는 순종훈련을 잘 시킵니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보면 남의 집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고,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해서 몸 속에서 동전을 가이사의 세금으로 내라고 하시는 등 말도 안돼는 순종훈련을 잘 시키셨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결과를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서 시키시는 것에 순종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라면 내가 순종할텐데 만약에 눈에 보이는 리더가 남의 차를 끌고 오라고 시키면 어떻게 따라갑니까"
그러면 거꾸로 뒤집어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눈에 보이는 리더에게 순종 못하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눈에 보이는 리더에게 순종을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을 못하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요한 1서에서도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도 사랑치 않고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달팽이 신자들이 현재 교회는 너무 많습니다. 관계성은 완전 빵점인 .... 자기혼자 평화 기쁨을 외치는 ...이것을 저는 가인 증후군이라 말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입니다. 히13:17에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너의 유익을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데생을 그리는데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그려야지 그렇지 않고 멋대로 그리면 이상한 모습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도 순종치 않으면 터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가족개념도 없고, 성서적으로 교회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목회의 황혼녁에 서실 때, 은퇴할 때에 너의 가장 위대한 재산은 여러분의 가족임을 기억하십시오. "왜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능력이 없느냐'의 문제는 곰곰히 생각해 볼일입니다.
<책임성>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고전 4;11-17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고전 5장에서 바울이 엄하게 야단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아비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가운데 결혼 반대 시에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이라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생끝날까지 라는 의미로 여기서 저는 진한 책임지는 사랑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죽기까지 너를 책임지겠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 같은 책임 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2000년 7월 19일 (마지막 오후강의)
<질문과 응답>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나름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목자가 가정을 오픈할 때는 목자와 거의 같은 분량의 헌신이 배우자에게도 요구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부분이 합의되고 일치되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해결해 나가셨는지요?"
저희 부부의 경우는 둘다 사역자들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분량이 같지 않아서 힘든 부부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다할 지침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끝임없이 기도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 즉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된 것입니다.
다음질문입니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목회자 가정인데 목사님은 믿음의 분량과 헌신의 분량이 같지 않은 사모가 따라오지 않아 고민이고, 또한, 사모들의 불만들은 교회에 못 나서도록 막거나 반면, 은사도 없는데 셀을 리더해야하고 성경공부를 시키는데 따르는 어려움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 하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각자의 소원대로 주셨기 때문에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도 말고 나에게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은사를 잘 알아야 한다.
꼭 셀을 리더하지 않더라도 더 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의 사역입니다.
엡 6:10-17까지 보지 말고 18절을 보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의 추진력, 이것이 셀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기에 가르치고 섬기는 것이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목사님 사모님들은 자매들의 총 목자로 목사님들은 형제들의 총목자로 서야 가장 알맞으며 가장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체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야는 기도사역입니다. 즉 셀교회는 기도사역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중보사역 미니스트리의 중심은 사모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파워를 가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사역자는 셀리더를 세우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중보 사역자로 함께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 있고, 영력 있고, 입이 무겁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주권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을 기도 부대로 세워야 합니다.
여기까지 질문에 답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책임지는 사랑>
예수그리스도께 전폭적으로 바친 삶을 낭비라고 보는 사람인 가롯유다형과 또는 복음을 체험 한 후 모든 것을 바친 옥합을 깨뜨린 여인형 중 여러분은 어느 형입니까? 어느 가치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한국기독교계에 기현상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좀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변하는 것 같습니다. )
1. 한국을 대표하는 평신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권위보다도 더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인 사장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목사님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교인들을 좌지우지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2. 전문시대에 전문가가 교회에 드물다는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교수나 교수를 하면서 사이드로 목회 하는 신학교수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의 말이 목회자보다 더 중시되는 경향이 큽니다. 목사는 목회에만 전문적으로 전념을 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을 능가하며 더 존경받는 교수들과 기업인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 책임성의 결여현상이 있습니다.
롬 16;3-4 사도바울의 인사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비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함은 바울의 책임지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4. 지도력이 부족합니다.
인본주의를 배제해야 합니다. 갈 2;10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예수님은 수천명 중 12명을 뽑고 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명을 고르셨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뽑으셨습니다. 오늘날 이런 방법으로 교회 리더를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뽑으시기 직전에 밤에 새벽에 올라가셔서 기도한 후 뽑으셨습니다. 그렇듯이 셀 리더도 이렇게 기도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베드로의 리더십에 10사도가 순종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으며 열매 맺게 된 것입니다.
5. 전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교인들은 전도할 때 찍어서 데리고 옵니다. 전도는 자기의 문화권 안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구령사업 이며, 선교는 자기의 문화권 밖에서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분 없이 행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 13:34-35를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최대의 분량까지 사랑하심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끼리 서로 사랑할 때 세상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과 지상명령은 같은 것입니다. 창1:28 마 23;19-20 행 1;8의 동심원 명령은 진정한 땅의 명령입니다. 1명의 중국유학생이온 후 12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와서 3개월 6개월 1년안에 다 변화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도 배가운동을 하지 않아도 토양작업만 하면 전도의 부흥 즉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 사를 맛보게 됩니다. 전도는 절대 결과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이 유학생들이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선교는 성공되는 것이다. 한 영혼을 통해서 전도의 열매는 크게 맺게 됩니다.
저는 일본선교를 위해 영어학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첫 등록자가 76세 할아버지였지만 하나님께 보내신 한 영혼이었다. 할아버지라 실망했는데 알고 보니 예비된 큰 인물이었다. 돈 많은 재력가에 엘리트였고, 아들이 하버드대학을 나왔기에 하버드 출신 강사가 있다고 해서 한번 왔다가 학생들이 아무도 없어서 6개월치 수강료를 한꺼번에 내었습니다. 그후 할머니도 함께 등록시켜서 함께 배우고 손주들도 함께 등록시켰습니다. 알고 보니 나까소네를 수상으로 만든 정치가였고, 큰 기업의 회장이었고, 30여년전 일본정부의 미국과의 긴장관계를 위해 파송된 통역가였습니다. 또한 아들은 일본재무성에서 3번째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할아버지는 동경대의 대부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동경대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60여년 동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바로 이 한 영혼을 위해 영어학원을 세우게 하셨고 파송시키신 것입니다.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기 굉장히 어려운데 이 할아버지를 통해 선교가 쉽게 될 수 있도록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초청 받고 일본으로 가서 식사를 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회개할 것이 너무 많다는 할아버지에게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 이야기를 하면서 회개를 일생에 한번 하는 목욕과 매일 씻어야 하는 발로 비유해서 전했습니다. 그후 미국에 들어와서 학원의 윌리암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76세 할아버지를 통해 캠퍼스 미니스트리가 시작되는 놀라운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강조하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지상명령 내리기 전에 먼저 말씀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끼리 먼저 사랑하면 저절로 세상사람들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신다.
그리고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비전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으신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약해져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선 순종, 후 체험을 하게 됩니다. 12사도중 첫순교자는 야고보, 가장 늦게 순교한 자는 요한, 계승자는 베드로를 세우신 예수님이십니다. 특권이 있는 자는 책임이 그만큼 큰 것입니다. 달란트를 얼마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받은 만큼 책임과 사명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그리고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비전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으신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약해져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실상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다.
요셉의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요셉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큰 비전을 받고 자만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비전을 죽이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시련과 시험 중에서도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어떠한 환경, 사건, 사람도 나를 좌우할 수 없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기에 심지어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도 모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입고 요셉은 결국 성공하게 됩니다. 이런 요셉의 인생을 보고 비전의 3가지 단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비전의 탄생 2. 비전의 죽음 3.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반드시 비전의 성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