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입법의회와 국민공회(3)
3. 공화정의 수립과 왕의 처형
국민공회 의원들은 극소수의 귀족과 몇 명의 노동자 말고는 법조인, 상공인, 전문직, 문필가 등 중산층 부르주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의원 중에는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왕족 오를레앙 공과 미국 독립 전쟁의 유공자인 영국인 페인(Thomas Paine) 같은 특이한 인물들도 끼어 있었다. 의원 중 3분의 1은 제헌의회와 입법의회의 의원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개원 첫날 지롱드파의 페티옹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지롱드파의 우세는 그후 분과 위원회의 선출에서도 나타났다. 앞으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문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롱드파의 우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국민공회의 일치된 두 가지 목표는 국토 방위와 혁명 방위였다. 국토 방위는 발미의 승리와 함께 앞으로 확보될 전망이 보였다. 혁명 방위는 공화정의 수립을 의미하였다. 개원 다음 날 공회는 왕정의 폐지와 공화국의 선포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왕조란 인민의 피를 탐내 마시는 폭음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왕궁은 범죄의 공장, 부패의 중심, 폭군의 동굴이고, 왕들의 역사란 국민의 희생자 명단이라는 것이었다.
왕과 왕정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공화국의 국민공회가 왕이 임명한 관리들을 그대로 둘 까닭이 없었다. 22일에는 8월 10일 이후 특별히 임명된 공무원 이외의 전원을 모든 행정 관서와 사법부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공화주의자로 채우기로 하였다. 왕당파가 일체의 공직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25일에는 프랑스 공화국은 하나이며 분할될 수 없다고 결의하여, 아메리카 합중국의 연방 제도를 따르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 동시에, 혁명적인 파리를 따돌리고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서 혁명을 약화시키려는 연방제의 음모를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공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관한 몇 가지 결의에 보조를 맞추었으나 곧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로 분열하였다. 혁명을 왕당파로부터 지키려는 9월의 목표가 완전히 성취되자 10월 10일 자코뱅 클럽은 지롱드파를 제명하였다. 두 파는 사실상 분열하고 있었으나 형식상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명분도 없었다. 자코뱅 클럽은 지롱드파를 제외한 좌파 일색의 클럽이 되었다. 자코뱅 클럽은 낮에 공개 회의를 열었고, 지롱드파는 밤에 비싼 비밀 살롱에서 모였다. 두 파의 계급적, 정신적 차이가 거기에 잘 나타나 있었다. 자코뱅은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지롱드는 돈의 특권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롱드가 돈의 특권을 지키려고 할 때 돈 없는 민중이 그 특권에 도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가난한 민중은 고립무원이 아니라 무장한 파리 코뮌을 기반으로 하는 자코뱅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자코뱅이 지롱드의 돈의 특권에 도전한다면 지롱드가 과연 그 특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누구에게 청원을 구할 것인가? 지롱드가 8월 10일 사건 이후에 창설한 특별 재판소를 폐지하자는 안을 들고나왔을 때 그것은 어제의 푀양에 대한 추파였다. 반혁명 탄압 기관의 폐지는 곧 혁명의 무장해제나 다름없었다. 지롱드는 이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혁명을 더 진전시키려는 것은 쓸데 없는 질서의 파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지롱드가 질서를 수호하려는 당임을 숨기려 하지 않고 혁명의 전진을 멈추려 할 때 파리 코뮌의 감시 위원회가 왕실비 관리인의 서류를 세상에 공개했다. 그 서류에 의하면, 루이 16세는 독일로 도망간 근위병에게 계속 봉급을 지불하였고, 8월 10일 사건 직전에 혁명파를 매수하기 위하여 100만 리브르 이상을 뿌렸으며, 반혁명 신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였다. 반왕파의 눈에 왕은 처음부터 혁명의 적들과 연합한 반역자이고 내란을 꾸민 자이고 선량한 국민을 죽인 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그 심증을 증명해 주는 물적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왕은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롱드파는 1791년 헌법에 의하면 왕은 불가침이므로 왕실비 지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왕의 재판을 반대한 것이다. 11월 7일 의회는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왕을 국민공회가 재판해야 한다는 자코뱅파의 주장은 이러하였다. 8월 10일 이후로 왕은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형법의 적용을 받는 한 시민에 불과하다. 헌법상 보장된 왕의 불가침권은 국민 전체에 대한 권리였으므로 권리의 소멸도 국민 전체에 대하여 소멸한다. 따라서 루이라는 프랑스 시민은 일반 시민과는 달리 보통 재판소에서는 재판할 수 없고 그를 재판할 수 있는 기관은 오직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국민공회뿐이다. 전체 국민만이 루이를 고소하고 재판할 수 있다. 국민공회는 루이에 대하여 원고인 동시에 재판관이다.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지롱드파는 왕에 대한 재판 규정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재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왕의 처형은 오히려 반혁명을 강화할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11월 13일 생쥐스트(Louis Antoine Leon de Saint-Just)는 의회에서 법적 입장에서는 왕의 재판이 불가할지 모르나 우리는 재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왕은 프랑스 국민의 피고가 아니라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루이는 인민과 싸우다 패한 전쟁 포로이다. 우리는 그가 반역을 꾀했던 작전 계획과 군대를 우리 눈으로 보았다. 그는 바스티유, 낭시, 샹 드 마르스, 튈르리 궁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의 살인범이다. 어떤 적이, 어떤 외국인이 그 이상 더 나쁜 일을 여러분에게 자행했던가!“
왕의 재판 문제로 자코뱅파와 지롱드파가 팽팽히 맞서 있을 때 지롱드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일이 일어났다. 11월 20일 튈르리 궁에서 비밀 벽장 안에 숨겨둔 비밀문서 상자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문서들은 왕이 미라보, 비밀경찰, 종교 담당 주교, 뒤무리에 장군, 라파예트, 탈레랑 등의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문서였다. 이 문서들은 왕과 이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공모하여 국민을 속이고 내란을 꾸미고 선량한 시민을 죽이고 적군과 내통하고 혁명을 반역하였는가를 낱낱이 밝혀주었다. 의회는 곧 그 비밀문서를 정리하여 의회에 보고할 임무를 부여한 12인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왕의 재판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제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인기와 권력도 그만큼 잃어가고 있었다. 파리 코뮌은 지롱드파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코뮌은 점점 더 산악파로 기울어져 갔다. 지롱드파는 무력으로 산악파를 누르려고 지방의 연맹병을 파리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연맹병은 오히려 코뮌 쪽으로 기울어져서 12월 말에는 자코뱅을 지지하는 전국 연맹병 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지롱드의 인기는 원외에서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원내에서도 많은 의원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는 11월 15일의 의장 선거에서 패하였다. 의장의 임기는 4주였는데, 개원 후 두 번 선거에서 두 번 모두 지롱드파가 이겼으나, 이번에는 졌다. 국민공회 안에 자코뱅과 지롱드의 중간 세력이 제3당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는 공회를 더는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지롱드의 애국심과 공화주의가 의원들과 국민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왕의 재판에ㅣ 대한 태도이ㅔ서 그러한 의심을 받았다.
어쨌든 왕의 재판 문제를 지켜보고 있던 파리의 민중은 드디어 12월 2일 48개 구 대표자 회의의 형식으로 의회의 국왕 재판 지연에 항의하였다. 의회가 움직이지 않으면 상퀼로트가 직접 행동하겠다는 신호였다. 이틑날 의회는 ”누구든지 프랑스에서 왕정의 재건을 제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결의하여 왕정복고의 길을 막은 다음, 6일에는 12인 위원회에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루이의 고소장을 의회에 제출할 것을 촉구하고, 왕의 재판에 관한 모든 투표는 지명 점호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의회가 민중의 압력 앞에 굴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12월 10일 루이의 범죄가 의회에 보고되었다. 그 보고는 혁명이 시작된 이래 있었던 모든 위기에 왕이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이튿날 왕은 피고로서 의회 앞에 섰다. 왕은 모든 고발 사실을 대신들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거나 기억이 없다고 회피하였고, 자신의 서명이나 비밀 문서 상자와 같은 확실한 증거마저도 부인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왕이 선의와 성실성이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으로, 왕을 한층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한편 지롱드파는 왕을 구하려고 온갖 방책을 강구하였다. 특히 재판을 방해하기 위하여 오를레앙 공을 포함한 왕족 전부를 재판하자느니 왕비를 재판하자느니 국민투표에 부치자느니 갖은 방안을 제의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지롱드파는 루이의 사형은 유럽 전체를 봉기하게 만들 것이므로 혁명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사형만은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하듯 정확한 판단이기는 했으나 설득력이 없었다. 설득력이 없었던 이유는 지난 4월 전쟁을 시작할 때 지롱드파는 전쟁이 유럽 여러 나라로 번지기만 하면 그곳 국민이 혁명 사상에 자극을 받아서 전제주의 타도의 봉기를 일으킨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롱드파의 주장은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다.
12월 26일 왕은 다시 한 번 더 공회에 출두하여 변호의 기회를 가졌다. 이듬해 1월 14일 공회는 왕의 재판을 표결에 부쳤다. 지명 점호 투표제에 따라 모든 의원은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왕이 유죄나 무죄냐를 구두로 밝히고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지명 점호제는 의원의 행동을 국민에게 숨겨서는 안 된다는 주권재민의 원리에 충실한 투표제이다. 비밀투표라면 왕의 무죄에 투표할 의원도 호명 투표에서는 국민의 눈이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투표 결과는 몇 명의 기권을 제외하고 전원 유죄였다. 왕의 유죄가 아무런 이의없이 확정되었다. 다음에는 이 유죄 판결에 대하여 피고는 국민에게 상소할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표결에 부쳐졌다. 278대 426으로 부결되었다. 이것은 지롱드파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세 번째 표결은 형량이었다. 집행유예를 조건으로 사형에 찬성한 26표를 합하여 387대 334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집행유예에 관한 표결은 380대 310으로 부결되었다. 14일에 시작된 투표는 지명 점호에 시간이 많이 걸린 탓으로 18일에야 끝났다.
20일 오후 법무 장관 명의의 사형선고 통지가 루이에게 전달되었다. 이튿날 아침, 오늘날의 콩코드르 광장-당시에는 혁명 광장이라고 불렀고 혁명 전에는 루이 15세 광장이라고 불렀다-에서 루이 16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루이가 단두대 앞에서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나의 원수들을 용서한다. 바라건대 나의 피가 프랑스인의 행복을 공고히 하고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기를“하고 외칠 때 국민 방위대의 북소리가 울리고 곧 그의 목이 떨어졌다. 오전 10시 10분, 사형집행인이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왕의 머리를 들어 보이자 광장을 메운 군중이 환성을 질렀다. 그의 시체를 마차가 무덤으로 운반할 때 많은 여인들이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며 울었다. 그리고 지롱드파의 부르주아지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왕의 사형에 찬성한 국민공회 의원들은 앞으로 시해파(regicides)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배수의 진을 친 이상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오로지 혁명을 향하여 돌진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후퇴는 죽음을 의미하였다.
국왕의 죽음에 프랑스는 깊은 감회에 잠겼고 전 유럽은 망연자실하였다. 루이의 처형은 왕권이라는 전통적이고 신비적인 위광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앞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후 부르봉 왕가가 복고하더라도 국민의 마음속에는 이미 왕권의 신성한 후광은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프랑스 국민에게는 이제 왕도 보통 인간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