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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잠언서 강해 (48) / "주님 일꾼의 태도와 자세"
+ 본 문 : 잠 언 25장 1절 - 7절(구약성경 p.939)
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4.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아멘!
+ 서로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
+ 찬양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남양주의 이름 있는 카페를 검색하면, ‘로우키’ 라는 카페가 검색이 될 것입니다.
로우키라는 이름의 카페는, 카페 건물이 창고로 쓰던 것인지라 허접해 보였습니다.
전혀 카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안은 더했습니다. 인테리어는 고사하고 창고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안쪽에 커피 볶는 장치와 커피 내리는,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스타 몇 사람이 커피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나 테이블도 중고시장에서 구입해, 대충 막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카페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을 정도였습니다.
커피를 주문해서 맛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먹어본,
커피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빵도 파는데 역시 맛의 클래스가 달랐답니다.
저는 까페 이름 “로우키 - lowkey” 라는 뜻이 무엇인가를 검색해 봤더니,
“로우키“ 라는 말은 “많은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절제된”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말은 주로 조명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인데, 은은하게 빛을 비춰서,
주변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카페의 조명이,
다른 카페와 달리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이나 장식들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커피에 집중하게 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카페는 간판이 없었습니다.
문 앞에 작은 글씨로 ‘로우키’ 라고만 써 있었습니다. 카페 이름이나 인테리어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은 커피 맛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것 같았습니다.
요사이는 “하이키 - highkey” 시대입니다. 자기를 부각시키고 돋보이게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그래서 자기를 내세우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렇게 로우키 - 카페 이름이나 인테리어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은 오직 커피 맛으로만 승부를 보겠다고 고집하는 카페가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감추면서도 카페가 잘 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역설적이지만, 그 카패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카페 이름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일꾼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 역시 “하이키” 가 아닌 “로우키” 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이 “로우키” 일 때, 주님만 부각되고 두드러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카페가 다른 모든 것을 감출 때, 커피 맛이 제대로 부각된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주님의 일꾼들이 “하이키” 여서 자기들을 드러내려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작 주님께서는 드러나지 않고 묻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주님이 아닌, 주님의 일꾼들이 가로채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유명한 브랜드에,
최고급의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가, 정작 커피 맛은 별로인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이 스스로 유명해지고,
높아지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기업 홍보하듯이 이름 알리려 힘쓰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프랜차이즈처럼 지 교회를 세우고, 브랜드화 하려는 교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도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회자들과 교회마저도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고, 사회를 향한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아닌, 오직 주님만 드러내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우선 하나님께서는 일을 숨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일을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숨기신다는 것 보다는,
우리 인간 편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서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바울이 이렇게 우리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우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당장 알 수 없어서 마치 숨기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고, 고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왕은 일을 살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일꾼을 대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왕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숨기신 것 같은 일을 탐구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17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귀한 집안의 사랑 받는 아들이, 남의 나라에 종으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또 힘이 들었을까요? 무엇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종으로 팔려가서 성실히 일했습니다. 주인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인내하면서 그 뜻을 찾으려고 힘썼습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 뒤에 하나님의 크고,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의 족속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출애급 계획,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뜻을 알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결코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진실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실망할까요?
우리 뜻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만 원망할까요?
내 뜻이 무산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고집을 부릴까요? 우리 뜻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우리가 내 뜻을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을 고집하려고 아웅다웅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와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아멘!
이 말씀은 은세공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장인이 은으로 어떤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 때, 먼저 하는 일은 불로 은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부터 합니다.
이렇게 해서 순도가 아주 높아진 은으로 만든, 세공품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2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집에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에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어떤 태도로,
주를 섬겨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릇은 그저 음식을 담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그 안에 허접한 음식이 담긴다면, 그 그릇은 주목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빚은 값싼 그릇이라도 그 안에 메인 요리가 담긴다면, 주목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릇일 뿐입니다. 복음을 맡은 자요,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담당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기 보다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복음을 드러내려 해야 하고,
자기 꿈을 이루려 하기 보다는, 오직 주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깨끗해 지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릇이 더러우면 그 안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급요리라고 해도 더러운 그릇에 담기면,
결국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리사들은 설거지하는 일에,
철저합니다. 행여라도 음식 담을 그릇에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정말로 힘써야 합니다.
자신의 더러움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사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친 진영논리에 의한 양극화입니다. 정치에는 늘 여와 야, 그리고 진보와 보수,
이 두 진영 사이의 건설적인 경쟁과 힘겨루기가 끊임없이 계속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권력을 견제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사회 발전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여기에 분노와 증오가 덧씌워졌습니다. 여와 야가 경쟁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적이고, 심지어 제거해야 할 원수로 여깁니다. 토론과 건설적인,
논쟁이 아니라 프레임을 씌워서 상대를 악마화 하고, 서로 막장 싸움을 벌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양극화에, 국민들이 어느 편엔가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진영을 만들고, 언론은 이것을 부추기고, 그리고 국민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 진영에 가담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먼저 그 사람이 어느 진영인가?
그리고 자기 진영이면 그 말을 진지하게 듣고, 다른 진영이면 듣지도 않고 거부합니다.
제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편 가르기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노골적으로 어느 편에 서서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편에 선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색안경을 끼고, 외면합니다. 심지어 진영과 관계없는 순수한 목회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예언적 사명감으로, 잘못된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들을 지적할 때,
교인들 가운데 그 정치인이 자기 진영에 속한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상대진영으로 몰아세우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은에 찌꺼기가 끼어있는 것처럼, 교인들의 심령이 세상 이념으로 오염된 것입니다.
교회가 진영논리로 더럽혀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정치 진영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그가 누구든지 잘한 것은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못한 것은 역시 그가 누구든지,
지적하고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복음을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하나님의 일꾼들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왜 이 말씀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꾼들 역시 스스로 높아지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높아지려는 본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 일꾼들이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식사 끝 무렵에,
예고 없이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놀랐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하고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거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거절에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리고는 하나씩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제자들 모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 답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님 자신이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질 생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왕 같은 메시야로 등극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자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더 높은 어떤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놓고, 마음속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여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노골적인,
청탁을 합니다. 당연히 다른 제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공동체가,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가 동역자가 아니라 경쟁자요 적이 되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교회 안에 일꾼을,
세우다 보면, 안타깝게도 교회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 늘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임직투표 때, 자기가 기대했던 만큼 표를 받지 못해 임직로 당선되지 못했다든지,
그래서 자기가 기대했던 자리에, 임명이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심지어 임직투표에서 탈락한 사람들 가운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납니다.
높아지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툼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높여주고, 서로 섬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의 일을 하이키로 하지 말고, 로우키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자세,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하나님 일꾼임을 잊지 말고, 높아지려는,
마음을 제어하고 자신을 낮추려고 힘쓰고,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면류관 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