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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체계를 바꿔라 2011, 2, 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1- 2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네 믿음대로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일진데- 내가 믿고 있는 그것이- 곧,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내 마음에 있으면, 결국, 그 신념이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체계는 중요한 것입니다.
신념체계란 우리의 사고의 틀을 말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어떤 이념이자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관장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해 주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념체계는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신념체계는 진실과 무관할 수도 있고- 어쩌면 거짓 것을 진실로 믿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념은 우리들 각자가 나름대로 옳다고 믿고 있는- 사고의 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념은 외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 혼의 생각이라면- 믿음은, 우리 내면에 하나님이 친히 계시하신 말씀으로 주어진 영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서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용어로 말하면-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7,8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잇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생각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갓 태어났을 때, 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감을 가진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부모의 말과 태도를 보고, 듣고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말하는 법, 걷는 법, 숟가락 잡는 법 등.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모와 주변 환경으로부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알게 모르게- 그것들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의 신념체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부모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라고 믿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이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혹은, 무가치한 존재로 믿게 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은 예쁘다! 혹은 못생겼다라고 믿게 할 수도 있는- 지대한 영향력이 바로 부모에게 있다는 겁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부모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TV 이나 인터넷이나 연예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외부 요인들로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신념체계가 굳혀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경험한 부정적인 사건들은- 우리의 신념은 더욱 단단하게 굳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 분이- 결혼 정년이 되었는데도- “난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를 보면- 그 배후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움으로서-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었던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그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괜히 불안해지고, 두려운 선입견이 작용하여서- 사실 멀쩡한 사람도, 괜히 의심하고 거절해 버리는 잘못된 신념체계가 만들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이 경험한 외부 환경과 그 문화에 따라서 각기 다른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신념체계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는 겁니다. 편견으로 가득 찬 부모의 말과 태도가- 고스란히 자기 아이들에게 물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말과 태도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잘못된 습관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전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것은 욕하면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술주정하는 악습이, 외도하는 패륜이 세대를 이어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사고 패턴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23:7)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투나- 옷 입는 스타일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그리고 어떤 것을 결정하는 방식 등은- 사실, 우리의 잠재의식에 내재된, 우리들의 신념체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다음 카페에서- 복권에 당첨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었습니다. 98억 달러의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고도- 2년이 되지 못해- 다시금 가난해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심지어 4차례나 복권에 당첨된 그 행운의 사람이 마약과 도박과 술에 찌들어서- 그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불행해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누가 그들의 돈을 강제로 빼앗아 갔거나- 강제로 어떤 물건을 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돈을 어떻게 했기에- 2년도 되지 않아서- 다시 가난해졌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저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겁니다. 생각은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신념체계 속에 사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은 결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념체제가 건전하게 바뀌지 않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보려고-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책을 보고, 좋은 생각들을 하려고 무수히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지만- 어떻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신념체계가 하룻밤 사이에 바꿔질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우리 주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그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을 보시면-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는 ‘마음’이- 영어성경으로 보면- <heart>가 아닌 <mind>로 되어 있음을 봅니다. <heart>는 마음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mind는 지성을 강조한 <생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heart>는 우리 마음 중심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라면-<mind>는 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이 말씀의 진의(眞意)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우리의 잘못된 신념의 체계를 바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사람의 본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사람의 영과 혼과 육체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부분과 혼적인 부분, 그리고 육체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고 보는데- 저는 케네스 헤긴의 분별이 더 옳다고 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며, 혼을 가지고 있고, 육체 안에 살고 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분별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사람은 영적 존재인데- 그가 지성과 감성과 의지인 혼을 가지고 살며, 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보면-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을 구분해서 말씀한 것을 보면- 이 셋은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는 말씀을 보아도- 영과 혼과 몸을 서로 구분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구별해서 분별하고 있는데- 사람의 혼과 육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혼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밝히 아는 것이-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구분하면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영적인 영역을 접촉하는 것이고- 우리의 혼은 지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을 접촉하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몸은 육체적인 영역을 접촉하는 것으로 알면 그 구분이 쉽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을 보시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구절을 보시면- 여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것은- 우리의 어느 부분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까? 분명 우리 몸은 아니지요? 우리의 혼도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도 우리의 지성과 감성은 죽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 존재는 우리의 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영’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라고 말한 것입니까? 우리의 영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내가 다시 태어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말씀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바로 나의 영인 것입니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내 영이 곧, 참 된 “나”인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몸이나 혼은 아직 그 어떤 것도 구원받았거나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몸이나 혼은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것은 단지 우리의 영뿐입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을 (킹 제임스 번역본)보시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을 보시면- 우리 말, 성경에는 ‘영혼’으로 번역이 되어있지만- 영어 성경은 분명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재창조 되었지만- 우리의 혼은 말씀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의 혼은 더러움과 넘치는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아직은 세상의 사고방식에 더럽혀져 있고, 악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더러움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우리의 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접붙여진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접붙여진 말씀>이란 무슨 의미합니까? 접붙여졌다는 것은- 생명을 이식하는 것처럼- 말씀을 우리 심령에 심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는 <마음에 심긴 도>라고 말씀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혼이 접붙여진 말씀으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좌우에 날선 애리한 검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혼을 찔러 쫒게 줌으로- 옛 사고방식이 쪼개져 나가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씨로 심겨지는- 우리의 신념체제가 바꿔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렇게 우리의 혼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듭났다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서 왜 그리도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지- 늘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무척 고민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겨우 이정도뿐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의 혼이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신념체계가 바꿔져야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헬라어로 <소조(SOZO)>입니다. ‘해방시키다’ ‘치유하다’ ‘돌보다’ ‘온전케 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방’시켜 주어야 하고, ‘치유’되어야 하고 ‘돌봐주고’ ‘온전케’해 줌으로서- 우리의 혼은 구원받아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우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이 성령의 계시로 먼저 빛 비춤을 받아야 합니다. 곧 성령의 빛 비춰주는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영과 혼을 찔려 쫒게 주는-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심령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이점을 저는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혼을 구원해 주는 길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영으로 깨닫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혼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여기서 머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으로 말씀을 받았으면, 이제 그 깨달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만- 비로소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 22절로 나아가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의 깨달음을 통해- 혼이 구원받고, 변화를 받으려면- 그 몸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인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을 (킹 제임스 번역본)보시면-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한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성령의 깨달음>을 통해 진리에 순종하는 곳으로 나아갈 때, 여기서 비로소 우리 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혼의 구원이 이뤄져야 비로소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전인적인 구원의 열매가 매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혼이 말씀을 순종할 때, 우리가 비로소 거짓되고 세속적인 사고의 틀에서- 해방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되는 혼의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 곧, 혼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적극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그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영의 깨달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고, 우리의 감성을 고무시키며, 우리의 의지를 드려서- 우리가 말씀을 고백하고 암송하고 찬양을 드림으로서 그 깨달음의 빛이 우리의 혼에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우리가 무언가를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실제를 여러 번 읽어 보고- 또, 거기 나온 기도문을 반복해서 고백해 보고- 이 깨달음대로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함으로서- 나의 혼이 소생되어지고, 나의 잔을 넘치게 되도록 무언가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8절을 보시면-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막힌 것이 없이 나의 가는 길이 평탄케 되고, 형통케 되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해 줍니까? 그것은 말씀 묵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우리의 입에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과 함께- 말씀대로 행동한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과 승리는 보장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혼이 말씀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도리어 우리의 겉 사람이 우리의 혼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다스리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IS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가나안의 다른 족속이 더 강해져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그 성전을 훼파하는 역사가 거듭되었던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을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묵상함으로서 우리의 혼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나인- 나의 영이- 혼을 통하여 나의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의 속사람인- 우리의 영이 혼의 순종을 통해 우리의 몸까지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들려질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령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드려 의의 병기로까지 사용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통제가 필요한 지체입니다. 그 정욕대로 내버려두면 단밖에 불의의 병기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은 오랫동안 우리의 옛 사람에 의해서 길들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혼은 우리의 몸과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영을 대적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3-14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분면 우리가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우리가 통제하지 않으면 그 책임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했는데- 성도의 기업을 얻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몸을 드려 순종했느냐가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을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 반대로 성도의 기업을 얻지 못하는 분들은 누구냐 하면- 그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0절과 갈라디아서 5장 21절 그리고 에베소서 5장 5절 등에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결말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린도전서 5장 5절을 보시면-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말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 사람의 영은 구원을 받지만, 그는 몸이 영화롭게 되는 첫째 부활에는 참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승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 우리 몸이 홀연히 변화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울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잠시만 자기를 부인하고,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을 했더라면 그 영광의 자리에 참예할 수 있었을 턴데- 아주 잠깐 동안을 참지 못하고 육체로 살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셔야 하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시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의 영이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수고나 선한 행실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단지 믿음 하나로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혼의 구원은 우리 쪽의 순종과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이 구원도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친히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 쪽에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보시면-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혼의 구원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합니다. 이 구원의 시작은 항상 우리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계시됩니다. 이 때, 우리가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몸을 드리는 헌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혼의 구원이 이뤄집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다보면- 원망과 시비가 들어나게 되는데- 거기서 우리의 자아가 곧, 우리의 혼이 깨어지고, 성화되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을 통하여- 이 거슬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나타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에 우리의 온 영과 혼과 우리의 몸까지도 온전하게 보전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날에 첫째 부활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날에 우리 모두가 함께 왕 노릇할 그 영광의 소망을 피력한 것입니다. 우리가 흠 없는 자녀로 나타나서- 그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 날,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우리로 자랑할 것이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얼마나 혼의 구원을 이루었는가에 따라 그 희비가 엇갈릴 것입니다. 우리의 혼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거짓되고 부패한 생각들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순전한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아직도 자아를 벗어나지 못한 자기중심적인 옛 사람의 사고 패턴을 벗어버리고- 이제 순전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경건하고 정결하며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인격으로 성화되어지는 나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