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
175. 옥포읍 본리리 효자 김형규 정려각,‘정효각’
프롤로그
지난주 옥포읍 기세리 진주강씨 모열각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열각은 일제에 의해 조선이란 나라가 사라진 뒤에 세워진 효부 비각이다. 그래서 모열각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려각은 아니다. 다만 오륜행실중간소라는 유림단체의 공인을 얻었기에 나름 정려각에 상응하는 정도의 위상은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모열각은 본래 정려(각)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정려를 증명할 수 있는 증표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손들이 남아 있는 자료를 수집·보완한 뒤, 오륜행실중간소의 공의를 얻어 지금의 모열각을 다시 세웠다. 정려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이번에는 기세리 인근 마을인 옥포읍 본리리에 있는 김형규 정효각에 대한 이야기다.
효자 김형규와 정효각
달성군 옥포읍 본리2리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국도변에 정려각이 한 동 있다. 조선후기 이곳 옥포 출신으로 참봉에 제수된 김형규(金炯奎)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 정려각 ‘정효각(旌孝閣)’이다. 김형규는 본관이 김녕, 호는 원모재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칠신(死七臣) 중 한 분인 백촌 김문기 선생의 후손이다. 조선후기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김병억이 지은 ‘효자 참봉 김형규 정려기’에 소개된 그의 효행은 대략 이렇다.
효자 김형규는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나설 때면 항상 어머니께 그 출처와 사유를 알렸고, 귀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어린 나이에 현풍과 창녕 고을을 다녀오다가 기이한 경험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 한참동안 길을 찾아 헤매는 중에 난데없이 거인이 나타나 길을 인도해주었는데, 마을 입구에 이르자 거인은 홀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한 번은 병중에 있던 어머니가 홍시를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때가 일러 홍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감나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가지 사이로 몇 개의 홍시가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그 홍시를 먹고 병이 나았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어머니의 묘가 집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5일마다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곡을 했다. 당시 그가 무릎을 꿇고 곡을 하던 자리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이 고을을 넘어 임금에까지 알려져 정릉참봉에 제수되고 효자로 정려를 받았다.
옛 사람들은 서로 만남이 없어도 상대방의 호만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거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한 두 글자에 불과한 호지만 스스로 짓는 까닭에 그 사람의 철학이나 삶의 지향점이 호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형규의 호는 원모재(遠慕齋)다. ‘원모’는 선조를 기리는 재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글자다. ‘먼 조상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효를 상징하는 단어다.
정려(각)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반적으로 정려각은 규모가 크지 않다. 간혹 2-3개 정려를 한 곳에 모은 다칸형 정려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정려각은 정면·측면 각 1칸 정도로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려각은 하나같이 큰길가, 마을 입구나 중심, 서원이나 재실 옆처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정려각은 기본적으로 사람들 눈에 잘 띄어야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과거 왕조국가시절 충신·효자·열녀를 장려하기 위한 국가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려정책이다. 정려(각)는 극소수의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세워졌다. 요즘으로 치면 홍보가 필요한 국가정책을 국민들에게 효율적으로 알리기 위해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지 주요 도로변에 홍보물을 설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때 홍보물은 입지가 좋아야 하고 디자인이 좋아야 한다. 다시 말해 ‘목’ 좋은 장소에다 설치하되 ‘가시성’ 또한 좋아야 한다는 것. 정려각이 그렇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당시로서는 최상급 건축양식을 적용한 것이 바로 정려각이기 때문이다.
정려각 건축 특징
정려각은 멀리서 봐도 눈에 잘 띈다. 지금처럼 고층건물이 없었던 시절에는 더욱 그랬다. 주로 길가에 세워진 탓에 정려각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지막한 흙돌담 안에 불쑥 시커먼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는 정려각.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정려각 본체를 둘러싼 흙돌담에 기와를 얹었다. 웬만해서는 엄두도 못 냈을 기와를 본체는 물론 담장에도 얹었던 것이다. 정려각 본체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비록 본체 규모는 작지만 지붕은 본체에 비해 과하다 할 정도로 큰 기와지붕을 얹었다. 마치 가분수마냥. 처마도 마찬가지다. 서까래가 한 층인 홑처마도 있지만 대체로 2층으로 된 겹처마가 많다. 본체 벽면도 일반 건물 벽면과는 다르다. 흙벽으로 된 것이 아니라 홍살벽으로 되어 있다. 홍살벽은 붉은 칠이 된 화살대처럼 생긴 나무막대를 수직방향으로 촘촘하게 꽃아 둔 벽이다. 4면이 모두 홍살벽인 것도 있고, 일부만 홍살벽인 것도 있다.
또 정려각은 건물 전체에 단청이 칠해져 있다. 유교건축물은 불교건축물과는 달리 의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불교건축물이 종교적 이유로 화려한 장엄미에 비중을 두었다면, 유교건축물은 유교의 미덕인 검소·절약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서원같이 큰 규모의 유교건축물도 대부분 단청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려각에는 단청을 입혔다. 그것도 단순한 ‘가칠단청’ 정도가 아니라 모로단청·금단청·금모로단청처럼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단청 가운데 ‘용·봉황·학·산수화·사군자·호랑이’ 등 ‘별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붕과 기둥이 만나는 지점에 설치하는 공포라는 부재도 일반 건축물과는 달랐다. 익공식·주심포식·다포식 같은 고급 공포를 적용했다. 이처럼 정려각 건축에 최상급 건축양식을 적용한 것은 가시성을 높임과 동시에 임금의 명이 봉안된 곳인 만큼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에필로그
손님들을 모시고 답사를 다니다보면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정려각은 하나 같이 출입문이 작아요?”, “조금만 더 크게 만들어도 출입하는데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실제로 그렇다. 정려각은 출입문이 형편없이 작다. 높이도 낮고 폭도 턱없이 좁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정려각은 임금의 명으로 내려온 정려를 봉안한 시설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정려각 뜰에 들어오려면 고개를 숙이고 출입문을 통과해야 한다. 머리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하고, 좌우 옷자락이 문설주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도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아야 한다. 이처럼 비록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정려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