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연희(演戱) 장소에서 희곡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관객 앞에서 몸짓과 대사로써 만들어내는 예술.
연극은 음악 ·무용과 같이 공연(公演)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공연예술 또는 무대예술이라고 한다.
연극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서 흔히 배우 ·무대 ·관객, 그리고 희곡의 4가지를 든다. 배우는 연기자로서 연극의 핵심이고 연극이 ‘살아 있는 예술’임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러나 배우를 대신해서 인형(꼭두각시)이 대신하는 경우가 있고 가면(탈)을 씀으로써 인물을 가장하기도 한다. 무대는 연희하는 장소로서 옥외(屋外)의 놀이판, 굿판에서 현대식 극장무대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이나 연희하는 장소로서의 개념은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다.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에서 연극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하며 무대와 객석의 호흡은 공연의 성과를 언제나 좌우한다. 희곡 또한 즉흥적, 유동적 성격의 단순한 줄거리 정도에서부터 고도의 문학적 표현을 담은 극문학(劇文學)에 이르기까지 성격이 다양하나, ‘드라마’에는 사람(등장인물)을 중심에 두고서, 그들 사이의 관계(대립 ·갈등)가 꾸며내는 일정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희곡 또는 극본(劇本)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상의 4가지를 연극의 기본요소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연극에는 많은 부수적 구성요인이 따른다. 무대장치(미술) ·조명 ·음향효과 ·춤이 따를 경우의 안무, 음악 등 연극은 인접하는 미술 ·무용 ·음악 등 여러 예술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연극을 두고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요인을 잡다하게 끌어들여서 연극이라는 하나의 예술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극의 종합성은 필수적으로 그것을 보완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기능이 현대 유럽 연극에서 연출(演出)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전체를 통괄하는 것이 그의 기능이나, 연출의 기능 자체는 예부터 있어서 연기자 가운데 책임 있는 한 사람이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시대적 발전에 따라 연출의 기능은 점차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미술가 ·음악가 또는 안무가가 연극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각자의 독립적 기여(寄與)가 아니라 연출자의 면밀한 검토의 바탕 위에서 창조적으로 참여한다는 형식을 취한다. 연출자는 때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나 희곡을 제공하는 극작가와의 관계는 보다 미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희곡이란 원래 상연대본적(上演臺本的) 성격을 강조하는 연극적 측면과 독립된 문학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측면을 아울러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 양면성(兩面性)에서 오는 형식상의 제약과 동시에 문학적 표현의 깊이를 배우의 신체를 통해 구체화시킬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즉, 희곡은 연출의 기본적 텍스트로서 숙명적인 한계를 지니는 동시에 그 한계를 뚫고 배우와 관객이 다같이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도약대(跳躍臺)의 구실도 한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에 ‘매일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일회성(一回性)을 지닌다. 따라서 연극의 생명은 언제나 새롭다는 데 있고 공연이 아무리 되풀이된다 해도 동일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예컨대, 영화같이 영상(映像)에 바탕을 둔 복제예술(複製藝術)과는 성격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바로 여기에 배우(무대)와 관객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연극이 주는 감동은 아무리 판에 박힌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이며 무대와 객석 사이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기 때문에 연극은 흔히 정서를 과잉방출하여 배우나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의 절제를 잃게 하고 지성과 판단의 객관적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통속연극(通俗演劇)이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하며 싸구려 소일거리의 구실밖에 못한다는 말도 듣는다. 반면에 연극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 깊숙이 파고 들어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원형적(原型的) 표출에도 특출한 솜씨를 보여준다.
더구나 연극은 그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위대한 극작가에 의한 뛰어난 비극 ·희극 등의 작품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공연예술과는 달리 지적(知的) ·사상적 ·사회적 내용을 담을 수 있었고, 인간을 변하지 않는 근원적 모습에서 뿐만 아니라 변전(變轉)하는 역사의 양상(樣相)에서 포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1. 연극의 기원
연극은 인간의 삶의 근원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흔히 원시연극(原始演劇)이라고 하여 우리는 연극의 원초적(原初的) 형태를 이렇게 생각해본다. 즉, 문명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이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자연을 초자연화(超自然化)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 결과 인간 사이에는 거대한 감응(感應)의 체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시심성(原始心性)이란 모든 생물 및 무생물에 대하여 정령(精靈)을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공감과 조응(照應)의 세계를 확대해나갈 수 있었고, 상징으로서의 물체가 생명과 활력을 얻게 됨에 따라 굿과 주술(呪術)의 영검이 현실화되기를 바랐다.
여기에는 물론 인간 고유의 원시연극模倣本能)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나, 인간은 자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가지 모방의식을 만들어냈다. 여기에서 제의(祭儀) ·굿 ·놀이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시적 경험의 축적 ·발전이 문화를 형성했고 거기에서부터 종교 ·과학 ·예능 등 여러 문화형태가 분화되어 나갔으며 연극 또한 음악 ·무용과 함께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원시사회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수렵(狩獵) 또는 농경(農耕)의식에서 입사식(入社式) ·토테미즘 ·샤머니즘에 이르는 광범위한 제의적 형태에는 언제나 신비로운 힘을 부여받은 자가 제사장(祭司長)으로서의 특유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아마도 이 제사장은 근원적 의미의 배우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연극이 원시충동 깊숙이 자리잡은 신비적 경험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은 연극의 본질인 ‘생생한 감동’의 성질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제의에서 춤과 몸짓은 본질적 요소를 이루었고 주문(呪文)이 단순한 소리에서 꽤 복잡한 내용의 이야기를 꾸며가면서 극적인 꾸밈새를 갖추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내용은 제의가 갖는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때문에 집단이나 종족이 공유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했고, 그들의 집단적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라야 했다. 여기에서 신화(神話)가 발생했고, 신화는 연극이 가장 먼저 얻게 된 드라마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연극 발생의 틀은 세계 어느 곳의 연극에서나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국중대회(國中大會)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 기록에 나타나 있는 여러 고대 제의는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演行)하였다고 전해지며 연극과 무용, 또는 음악의 기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말의 ‘굿’의 뜻이 무당의 노래나 춤으로 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는 제의로서의 의미와 아울러 여러 사람이 모여서 보는 구경거리, 즉 연극의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음은 굿거리에서 원시신앙의 체계는 물론 연극 ·무용(원래는 분리되지 않은 형태였다)이 싹텄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연극의 기원은 동양 여러 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경우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그리스 고전연극의 성립과정(BC 6세기∼BC 5세기)을 보면 디오니소스신전의 제의에서 연극이 분화되어 나온 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2. 연극의 종류
연극은 그 본래의 성격과 발전해 나온 역사적 ·지역적 요인으로 매우 뚜렷한 형식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여러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지역적으로 나눈다면 동양연극 ·서양연극 ·아프리카연극 등 지역 ·인종 ·사회 ·문화 등 각기 다른 조건 아래 발생한 형태로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단순히 지역적인 것뿐만 아니라 연극이 뛰어나게 그것을 낳은 사회나 풍토의 제약을 받으면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서양연극을 다루는 척도(尺度)를 가지고 동양연극을 다루려고 한다면 이해에 큰 지장을 준다. 왜냐 하면 서양연극의 바탕을 이루는 서구문명이 질서 정연한 역사의식에 의거해서 시대에 따라 명확한 계기(繼起)를 기록할 수 있는 통시적(通時的)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데 반해서 동양연극은 공시적(共時的) 문화현상으로 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동양연극은 서양의 경우처럼 역사진행 과정에서의 뒤에 오는 것에 의한 앞서 간 것의 교체(交替)나 극복(克服)이 아니라,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이 굳이 상호 배제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제시하는 유파(流派)에 따르거나 형태에 따르는 분류법도 연극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그대로 동양연극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시대 또는 유파에 의한 분류로는 서양연극의 경우 고전극(古典劇) ·중세극 ·근세극 ·근대극(현대극) 등 서양역사의 시대구분에 따른 연극 종류의 특성이 비교적 뚜렷하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의 연극으로 나누거나 서사극 ·부조리극(不條理劇) 등으로 분류하는 것도 근대 이후의 서구 연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에 의해서 연극을 비극 ·희극 ·희비극(喜悲劇) ·소극(笑劇) ·멜로드라마 등으로 분류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극 형식이 갖는 형태상의 구별은 물론 극구성(劇構成)의 특성, 무대와 관객 사이의 관행(慣行) 또는 약속(영어에서 말하는 convention), 극을 지배하는 전체적 분위기 또는 관객의 정서적 방향의 설정 등 전달의 기본 틀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연극하는 장소에 따라 옥내극 ·야외극 ·마당극 ·원형연극 ·거리연극 등의 분류가 가능하고, 대사가 없는 팬터마임, 노래와 춤이 주가 되는 뮤지컬, 무용극, 인형에 의한 인형극, 탈을 쓰고 나오는 가면극 등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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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멜로드라마 [ melo drama ]
주로 연애를 주제로 한 통속적이고 감상적인 극.
그리스어의 멜로스(melos:노래)와 드라마(drama:극)가 결합된 말이다. 예전에는 주요인물의 등장 ·퇴장을 알리기 위하여 대사를 중단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연극형식을 가리켰다. 이것은 J.J.루소가 그의 《피그말리온 Pygmalion》에서 말과 말 사이에 음악을 넣은 데서 시작되었다. 또한 무대 위 인물의 대사에 맞추어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 자체를 가리킬 때도 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의 대두가 현저하여 고전주의 예술을 부정하는 풍조가 나타났는데, 그 결과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한편으로 멜로드라마가 발생하였다.
혁명이 좌절된 후, 점차 오락성이 강해진 이 극형식에 민중의 욕구가 그 돌파구를 찾게 되어 제정시대 ·왕정복고시대의 프랑스는 멜로드라마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중세 이래 거리의 흥행물에서 발전한 이 극형식은 곧 영국 ·독일에도 파급되었으나 그 내용은 두서가 없고 요점이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고, 작가는 즐겨 복잡한 무대조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대로 극작법의 정식(定式)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랑이 있고 다음에는 불행, 마지막에는 선한 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구성인물로는 악한, 불행한 미녀, 관객을 웃기는 익살꾼이 있다. 양식은 셰익스피어나 황금시대 에스파냐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었다. 멜로드라마는 원래 음악을 반주로 사용한 오락적인 서민연극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음악의 유무에 관계없이 줄거리에 변화가 많고 통속적인 정의감이 들어 있는 오락본위의 연극 ·영화 ·방송극을 말하며, 특히 감상적인 애정극을 가리킨다.
2)팬터마임 [ pantomime ]
대사 없이 몸짓표현만으로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연극적 형식, 또는 그 연기자.
무언극 ·묵극(默劇)이라고도 한다. 어의(語意)는 그리스어 판토(panto:모든 것)와, 미모스(mimos:흉내내는 사람)에서 유래하며 인도 ·이집트 ·그리스 등지에서 싹트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명배우 테레스가 손가락과 몸짓으로 표현법을 완성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것이 명확하게 연극적 형태를 갖추고 성행하게 된 것은 로마 제정시대부터이다. 당시 미메(mime) ·미무스(mimus)라는 흉내내기 본위의 연극이 있었으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무언의 흉내내기 극에 주어진 이름이 팬터마임이었다. 여러 종류의 악기와 코러스를 반주로 하는 비속하고 호색적인 내용의 오락연회였다.
로마의 팬터마임은 그 뒤 르네상스기를 거쳐 근대 유럽 제국의 각종 무대예술 속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전통이 전해진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즉흥희극 콤메디아델라르테는 아를레키노 ·판탈로네 등 많은 유형적 배역을 지어냈는데 이들이 나중에 팬터마임의 전형적 인물이 되고, 특히 페트로에이노에서 나온 피에로는 그 중심적 인물이 되어 ‘피에로 무언극’으로서 전유럽에 널리 퍼졌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본격적 희곡의 상연을 2개의 면허극장에 한정시키고 다른 극장은 대사조차 쓰지 못하도록 금했으므로 자연히 팬터마임이 융성하였다. 20세기 팬터마임 연기자로 채플린, 장 루이, 바로, 마르셀 마르소 등이 유명하다. 특히 바로는 그의 저서에서 재래의 것을 ‘벙어리의 연기’, 새로운 것을 ‘침묵의 연기’라고 하여 몸짓이 단순한 언어의 대변자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팬터마임 예술의 존재방향을 풀이하였다. 또한 마르소는 1947년 묵극전문 극단을 결성,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1994년 두번째 내한(來韓)하여 명쾌한 그의 연기 ‘양식(樣式)의 마임’을 보여주었다.
3) 뮤지컬 [ musical ]
음악과 춤이 극의 플롯 전개에 긴밀하게 짜맞추어진 연극.
3. 서양연극의 발전
1) 그리스모로마의 고전극
서양연극의 시작은 기원전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농경신(農耕神)으로서 소(小)아시아 지방에서 그리스로 건너와 포도와 포도주의 신이 된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디티람보스[神頌歌舞]에서 출발하였다는 그리스극은 BC 5세기경에 연극형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고,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디오니소스 제전을 봄에 연 것이 비극으로, 겨울에 연 것이 희극으로 발전되었다. 전자가 장대(壯大)하고 엄숙한 신화적 주제를 다루었고, 후자가 골계(滑稽)와 익살을 주로 한 토속적 내용을 담은 것이 매우 대조적이며, 이 두 가지가 서양연극의 기본형태로 굳어진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연희방식이 야외의 원형극장을 사용했고 연중 일정한 시기에 한해서 공연되는 제전적 성격을 띠었으며, 작가에서 배우 ·합창단(코러스)에 이르는 일체의 관리를 도시국가(공동체) 자체가 맡았고 연극에 가무적(歌舞的) 요소가 농후했다는 것 등 그리스 고전극의 주요한 특성은 연극이 제의에 바탕을 둔 공공적(公共的) 행사였음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그리스극이 뛰어난 비극시인과 희극작가를 배출시켰다는 사실이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인의 비극작가는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리스 비극을 집대성하였으며 그 고양된 격조(格調)와 엄숙한 주제, 균형잡힌 극의 구성 등으로 시극(詩劇)의 최고봉이며, 호메로스의 서사시(敍事詩)와 더불어 고전 중의 고전임을 자랑한다.
한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날카로운 기지(機智)와 호탕한 웃음, 그리고 뛰어난 비판정신으로 당대의 고발자(告發者)임을 나타내주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을 통해 행위 모방으로서의 극의 본질, 공포와 연민을 통한 비극의 카타르시스 작용 등 중요한 연극이론을 전개하였다.
로마연극은 그리스극을 이어받았으나 그 엄숙함과 격조, 치열한 비판정신을 상실했고 대신에 현세적 ·오락적인 구경거리로서의 연극을 발전시켰다. 우선 야외극장이 대형화되거나 장식적 요소를 가미시켰으며 투기장(鬪技場)으로 변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 고전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중연예의 여러 형태, 즉 소극(笑劇) ·미모스 ·곡예 ·무언극(팬터미모스) ·가면극이 성했으며 이에 따라 배우의 직업화, 역(役)의 유형화, 소재의 세속화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것은 이 시기의 유일한 비극작가 세네카와 희극작가인 플라우투스 및 테렌티우스 등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부흥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사람과 더불어 근세 이후 서양연극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 중세연극
서양의 중세기는 암흑기로서 고전과 고대문화의 전통이 말살되었고,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회는 모든 연희(演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10세기까지 연극은 거의 흔적조차 없었으나 그 뒤 교회의 미사행사에서 싹텄다고 보이는 종교극이 발전해 중세연극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처음 교회 내부에서 시작된 종교극은 점차 세속화되면서 신 ·구약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한 신비극(神劇),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수난극(受難劇), 성자의 행적을 다룬 비적극(蹟劇) 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우의적(寓意的) 교훈극인 도덕극 등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게 되었다. 공연방식도 발달하여 이동(移動) 연극형의 패전트 방식, 복수 동시상연형의 맨션 방식 등 고전 그리스 극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했고 극작가의 독립성은 배제되었으며 성스러운 종교극에서 ‘악마’ 또는 ‘악덕’이라는 이름의 익살꾼 어릿광대역이 발생한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종교극 이외에도 미모스 계통의 민간연희는 지속되었으며 프랑스의 파르스(소극) 또는 소티, 독일의 사육제극(謝肉祭劇) 같은 것이 세속적이며 서민적인 성격이 강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3) 근세연극
근세연극은 중세의 종말과 더불어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가 의미하는 내용인 그리스 ·로마의 학문 ·예술의 부흥은 로마시대의 극작가 세네카와 플라우투스 및 테렌티우스의 재발견을 위시해서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의 도입과 새로운 원근법(遠近法)의 발견에 의거한 르네상스식 극장건축의 촉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희곡법칙의 규정 등 근세연극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로마희극은 근세 이후의 서양희극의 모태가 되었고, 르네상스식 극장 건물은 16세기 후반 이후 약간씩 수정되면서 근세 이후 서양 극장의 주종(主宗)을 이루는 프로시니엄 스테이지[額子舞臺]로 굳혀졌다.
이탈리아가 중심이 된 이와 같은 연극의 새로운 풍조는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나 중세가 종결되는 것과 더불어 유럽 일원의 통합문명이 국가별 분화를 일으키는 추세에 힘입어 연극에서도 고전문물과 토착전통의 융합에 의한 새로운 국민연극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나라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영국과 에스파냐로서,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는 독자적인 연극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중심을 이루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연극은 중세 종교극에서 파생된 세속적 토착연극의 전통이 때마침 밀어닥친 르네상스의 고전적 유산의 자극을 받아 그리스 고전극에 견주어질 만한 연극전성시대를 개화(開花)시켰고, 같은 시기의 에스파냐 역시 ‘황금세기(黃金世紀)’를 맞아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의 대표적 극작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다같이 르네상스 이탈리아가 완성시킨 극작법이나, 무대 형태를 답습하지 않았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만 17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가 루이왕조 전성기에 위대한 연극의 시대를 열면서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 뛰어난 희 ·비극 작가를 배출했을 때 고전주의적 연극이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본격적 전개를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연극 이후의 서민연극 계보를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철저한 배우 중심 즉흥연극인 ‘콤메디아 델 라르테’와 연극과 음악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탈리아 특유의 산물 ‘오페라’가 프랑스에 쉽사리 전파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16세기의 영국이나 에스파냐, 그리고 17세기의 프랑스가 한결같이 국력이 최성기(最盛期)에 다다랐을 때 연극의 꽃을 피웠다는 사실인데, 아테네 최성기에 그리스 고전극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연극의 성쇠(盛衰)가 국력에 좌우되는 뚜렷한 징후를 볼 수 있다.
이처럼 근세 이후의 유럽에서는 국민연극이 각국에서 왕성한 발전을 보였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이들 나라보다 뒤늦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극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왕조(王朝)가 성기(盛期)를 맞이한 오스트리아,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국민연극을 수립하게 된 독일은 유럽의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에야 연극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곧 근세국가 형성의 지각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레싱에서 시작하여 괴테, 실러로 이어지는 18세기 후반의 독일연극은 그 개안(開眼)이 뒤늦은 대신 근대 시민연극에로의 이행에 있어서 매우 빠른 진전을 보였다.
4. 근현대 연극
근대연극의 주류는 시민극이 주도했고 거기에 낭만주의가 가세함으로써 연극의 급격한 근대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근대 시민사회의 태동은 연극에도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을 선도한 계몽주의 사조와 더불어 특권층도 서민도 아닌 제3계급, 즉 시민을 위한 새로운 연극 형식이 모색되어 왔고, 영국도 초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에 흥미를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변화에 부응하여 연극형태가 굳어지기에는 시대적 ·사회적 변천이 지나치게 급격했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굳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연극이 그 전형적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 사조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극작가를 낳지 못했고, 오히려 형성기의 새 사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서 낭만적 사극(史劇)과 병행하여 대중적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 중엽에 유럽 연극계를 휩쓴 ‘잘 꾸며진 연극’은 시민생활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꾸며놓은 극진행 방식을 통해 정서의 인위적 소모를 유도하는 데 능했고 연극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을 연극에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연극의 사회적 타락을 자초한 상황 속에서 진실로 시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연극의 출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연극은 무엇보다도 낡은 형식과 관행(慣行)의 전적인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첫 신호가 1887년 파리에서 생겨난 ‘자유극장’이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운동으로 번져 89년에 베를린에서 ‘자유민중무대’로, 91년에 런던에서 ‘독립극장’으로, 98년에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예술극장’으로, 1904년에 아일랜드에서 ‘애비 극장’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그 여파가 뉴욕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1920년대에는 서울에까지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극장운동’ 또는 ‘멜로드라마’이라고 불리는 현대극의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19세기 후반의 시대정신, 즉 사실주의에서 자연주의로 이어지는 과학주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정신의 반영이며, 연극이 시대적 현실의 솔직하고도 비판적인 반영(反映)의 한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연극에 대한 기성관념을 타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연극의 스타 중심적 상업주의, 과장된 연기술, 비현실적 장치 등에 대신하여 연출기능의 독립, 사실적 무대장치, 새로운 연기 앙상블의 확립 등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변혁은 뒤에 가서 현대연극의 다양한 무대미학(舞臺美學)의 탐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현대극이 진실로 변혁을 이룩하기에는 ‘자유극장운동’ 이외에 새로운 극작가의 출현이 필요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H.입센을 필두로 한 스트린드베리, 체호프 등 현대연극의 초기 거장(巨匠)이 출현하게 되었다. 입센이 《인형의 집》(1879) 《유령》(81) 등 그의 대표적 현대극을 쓴 시기를 보면 신극운동이 ‘새 부대에 새 술’이라는 원리를 효과적으로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입센은 근대시민극의 최종주자(最終走者)로서 이를 완성시킨 극작가로 현대극의 한 가지 전형(典型)을 제시했고, 스트린드베리는 자연주의적 시대성(時代性)에 인간의 투쟁의 영원한 모습을 투영시켰으며, 체호프는 리얼리즘에 민족성을 부여하고 종래 비연극적이라고 생각되어온 인물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시대조류가 형성시킨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환각주의(幻覺主義)연극’, 즉 일상현실의 재현(再現)으로서의 연극이 기조(基調)이기는 하지만 20세기 유럽연극은 그 기조를 수정 ·보완하거나 거기에서 탈피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특징이다. 따라서 현대극은 획일성(畵一性)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에 항거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동시대적(同時代的) 문제의식에 민감하고 유럽 문명의 위기감을 재빨리 반영시키는 데 있어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형태보다도 민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감성은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를 비롯한 많은 연극지도자들로 하여금 연극을 ‘동시대적 인식의 표상(表象)’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표현파(表現派) 연극이나 브레히트가 실천한 서사연극(敍事演劇),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부조리 연극이 모두 현대를 첨예하게 인식한 끝에 나온 연극의 자기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G.B.쇼, 미국의 E.오닐, 이탈리아의 피란델로, 독일의 브레히트, 프랑스의 S.베케트 등은 모두가 ‘사상가로서의 극작가’이고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 메이예르홀트, 독일의 라인하르트, 프랑스의 아르토, 영국의 크레이그 등은 연기나 연출 또는 무대미술의 대가인 동시에 연극 그 자체에 대변혁을 가져온 예지자(豫知者)들이기도 했다.
현대에 가장 깊이 절망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 바로 현대의 서양연극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전통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내는 데 여념이 없다.
5. 동양의 연극
동양연극 역시 원시 신앙체계에 바탕을 둔 제의적 연희(祭儀的演戱)에서 출발한 것은 서양연극과 다를 바 없다. 뿐만 아니라 그 흔적이 역사 진행에도 불구하고 농후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특색을 이룬다. 그리고 서양연극이 극문학(劇文學) ·연극양식 ·무대형태 등 모든 면에서 신구(新舊)의 교체에 의한 발전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데 반하여 동양연극은 제의적 또는 민속극적(民俗劇的) 형태를 온존(溫存)하거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양식의 변천을 각 시대별로 구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같은 동양이라 해도 지역 ·풍토 ·종교 ·사회 ·문화 등 여러 요인의 차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공통된 특색은 있으나 상호간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연극사의 맥락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양연극의 특성을 요약하면, 첫째, 극문학이 독립되어 있다기보다 서사성(敍事性)이 강한 신화 ·전설 ·민담 등 구비문학(口碑文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화극(話劇)이라기보다 가무(歌舞)를 주로 하는 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동작이나 소리의 정형화 ·양식화의 특징이 농후하다. 셋째, 민속극적 무형식 또는 즉흥적 성격이 많이 엿보이며 연희자와 관객의 사이가 미분화(未分化)된 상태에서 연극의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넷째, 다양한 연희종목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가면극(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타이), 인형극(한국 ·일본 ·중국), 그림자 인형극(인도네시아 및 동남아시아 일대), 가무극(일본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서양연극과는 판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연희 장소가 옥내뿐 아니라 마을의 광장 ·장터 ·왕궁 또는 사원의 경내, 사가(私家)의 사랑방 또는 정원 등 무대가 고정되지 않아 이동 ·적응성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끝으로 매우 중요한 공통성은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유입과 함께 어느 나라에서나 전통연극이 단절되고 서구적 모방에 의한 새로운 근대극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근대화는 토착적 전통문화의 거부, 묵살에서 적대시 또는 파괴라는 극단적 반응을 보였으며 연극 또한 그 예외가 아니었다.
이로써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는 신극(新劇)은 사회변혁을 직접 반영하고 고민하는 후진국의 현실을 그려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연극의 저속한 상업화도 촉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통에 뿌리박지 못한 연극문화가 민족과 역사의 진정한 표현양식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고조되면서 근래에 와서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작업(架橋作業)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또 여기에는 동양연극에 대한 서양연극의 재인식 기운이 크게 보탬이 되기도 했다.
6. 한국의 연극
한국 연극의 기원을 고대의 제의(祭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연극의 기원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대연극은 서역악(西域樂)의 영향 아래 발전한 고구려악(高句麗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 및 오기(五伎) 등이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통합한 것으로서 음악 ·무용 및 연극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연희로서 대표될 수 있고, 이미 거기에는 대륙 전래(傳來)의 요소와 토착적 요소의 상호교섭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전승(傳承)이 옳지 못했던 탓이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그 원형을 짐작케 하는 것은 가면무극(假面舞劇)으로서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에 연희된 처용무뿐이다.
고려시대의 연극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 행사에서 연원하여 의식과 오락의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된 산디놀음과 백희(百戱)를 들 수 있는데, 산디란 상당한 규모의 장식적인 무대를 지칭한다. 한편, 탈(가면)을 쓰고 주문을 외면서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행사인 나례 역시 연극과 깊이 관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다 화극적(話劇的) 요소인 조희(調戱)까지 생각해 본다면 고려연극의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재인(才人) ·광대(廣大) 등 전통적으로 배우와 그 부류를 지칭하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산디놀음과 나례는 성행하였고 조정에는 사신 영접과 공의(公儀) 등을 위한 산대도감(山臺都監)까지 둔 일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 폐지되었으며 현존하는 산디놀음 계통의 연희는 그것이 서민들에게 넘어간 이후의 가면극들이다.
즉, 그것은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봉산(鳳山)탈춤, 경남 일대의 오광대(五廣大) ·야류(野遊) 등 민속적인 가면극의 여러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는 산디로 간 계통과 별개로 농경의례 ·무속(巫俗)놀이 ·서낭제 등 순수한 민속적 성격의 전승요소가 짙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나 그 경로는 어느 것이든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슷하게 연극적 요소(특히 서사적 성격)가 많은 판소리도 그 성립 경위는 뚜렷하지 않다. 이 밖에 사당패 등 유랑예인(流浪藝人) 집단에 의한 꼭두각시놀음(인형극)이 명맥을 유지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통연극의 여러 형태는 조선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문화의 도입과 함께 신연극(新演劇)이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1908년의 원각사(圓覺社) 개설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신연극이 서구 근대극의 영향 아래 어느만큼 정착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다. 신연극의 형식을 일본에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신파(新派)’라는 대중적 전시대(前時代) 연극이 먼저 자리를 잡고(1910년대), 그 뒤에야 비로소 ‘신극(新劇)’이 도입될 수 있었다. 그 시기를 대체로 토월회(土月會) 창설(1923)로 보며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의 발족(31) 이후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한 통설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직업적 대중극단이 ‘고등신파(高等新派)’라는 이름 아래 연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힌 것은 신극운동의 실천가가 주로 서구극 도입을 통해 연극의식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데 열중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가혹한 문화탄압은 연극을 어용화(御用化)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8 ·15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한국연극은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연극은 6 ·25전쟁까지의 좌우대립에서 빚어진 혼란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50년대에 겨우 발전의 실마리를 잡고 극단 ‘신협(新協)’이 중심이 된 재건 ·정비기를 맞이하였다. 60년 이후 재능 있는 신인들의 참여를 얻어 세대교체를 실현한 한국연극은 극단활동 ·극장시설 ·극작가 배출 ·비평활동 ·인재양성 등 여러 면에서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