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신부의 순교 혼이 살아 숨 쉬는 영동 지방 믿음의 고향
양양 성당에는 6·25 전쟁 때 순교한 이광재(李光在, 1909~1950, 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과 기념비가 있다. “마지막 순교 길에도 목마른 수감자에게 물을 떠다 준 가톨릭 사제의 희생은 한줄기 빛처럼 위대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8일 천주교 박해로 원산 형무소에서 순교한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한중경 목사의 증언이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방 신앙의 모태 같은 믿음의 고향이다. 영동 지방은 백두 대간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지형 탓에 타지방에 비해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되었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은 백두 대간을 넘었다. 그때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재(속초)’ 등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 설립된 성당이 양양 성당이다. 인근 홍천군에 5개, 인제군에 4개 성당이 있지만 양양군에는 아직까지도 양양 성당이 유일하다.
양양은 지금도 모든 면에서 외진 곳이다. 또한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함께한 성당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본군이 성당을 빼앗는 바람에 신부와 몇몇 성당 식구들은 성당에 붙어 있는 쪽방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이 들어와서 성당을 또 짓밟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 두고 미사를 드리다가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 부속 건물로 쫓겨났다. 소련군이 물러가서 성당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또 인민군이 들어와서 성당은 물론 부속 건물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공산 정부를 수립한 북한 공산당의 종교 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을 결심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38선과 가장 가까운 양양 성당으로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연길, 함흥, 원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목자들이었다. 삼엄한 감시를 따돌리고 이들을 남으로 내려 보내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신부는 끝까지 남아 성당을 지키다 6·25 전쟁 발발 하루 전날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밤 움푹 패인 방공호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엉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아비규환의 집단 살육 현장에서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을 찾자 시체 더미 속에서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지요……. 내가 가지요…….”라는 신음 섞인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24시간 이상 숨이 붙어 있던 이 신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집단 처형 상황과 이 신부의 최후 순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한 한준명 목사와 권혁기 라파엘 씨가 생생한 증언으로 남겨 놓았다.
■ 20세기 초 순교자와 6ㆍ25전쟁중 시복시성추진(평화신문, 2010. 6. 13)
1950년 10월 8일. 북진한 국군에 밀린 공산군은 당시 원산형무소(교도소)에 갇혀 있던 300여 명을 형무소 내 방공호에서 학살한다. 그 안에 당시 양양본당 주임이던 이광재(디모테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 성직수사 김봉식(마오로) 신부가 포함돼 있었다. 원산본당 청년들은 공산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이 신부와 김 신부 유해를 방공호 뒷산에서 찾아내 원산본당 사제관 뒤 성직자 묘지에 안장한다.
이처럼 숱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6ㆍ25전쟁 광풍 속에서 희생됐다. 그리스도를 따라 '뼛속까지 진정한 사제이자 목자로' 산 장한 순교 사제들은 이제 가고 없지만, 그 순교 얼은 살아남아 한국천주교회를 지킨다.
이같은 순교의 얼을 기리고 그 순교신심을 내면화함으로써 실천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국천주교회는 지난해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 결정에 따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를 통해 이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 순교자
◆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1909.6.9∼1950.10.8)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1909년 6월 9일 아버지 이 가브리엘, 어머니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강원도 이천군 냉골에서 태어나, 1923년 용산신학교에 입학 1936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풍수원 성당 보좌신부로 3년을 보낸 후 1939년 7월 25일 양양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몇 년간은 일제의 탄압시기였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는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도 빼앗겨 가정집에서 미사를 드렸고, 소련군이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을 추방하여 북쪽의 성당들이 비어 있어 이광재 신부의 사목 활동 범위는 평강, 원산까지 이르렀다.
이 신부는 함흥교구와 연길에 있던 수녀원의 폐쇄로 피난하는 수녀들과 덕원신학교의 신학생, 신부들과 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도록 도와주었다. 양양 성당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이므로 38선을 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주변에서 피신을 권하였지만 "내가 돌보아야 할 신자가 38선 이북에 하나도 없을 때 가겠다"며 거절하였다.
1950년 5월 초순경 평강 본당 백응만 신부가 피납되자 이 신부는 그곳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성모 몽소승천 축일 전에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북으로 떠난 후 평강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별 감방에 3개월간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진군으로 후퇴하던 공산당은 10월 8일 콩비지를 특별 저녁 식사로 제공한 후 밤 11시에 포로들을 한데 묶어서 산 중턱 방공호로 끌고 갔다. 방공호 속에는 촛불과 총을 든 공산당들이 있었고, 그들의 발밑에는 방금 숨진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신부와 포로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업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바로 총탄이 쏟아졌다.
총을 맞은 사람들의 "살려 달라! 물을 달라!" 아우성 속에 "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광재 신부였다. 자신도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광재 신부의 목소리였다고, 같이 업드렸으나 총을 맞지 않고 살아나온 한준명 목사와 평강고교 학생이었던 권혁기 군이 증언했다.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을 본 목사는 "가톨릭 신부는 위대하다."고 증언했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방공호에서 시체를 찾은 미 해병대 월거 신부와 머디 신부가 이광재 신부와 김봉식 신부의 장례 미사를 드린 후 원산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했다. 이광재 신부는 41세의 짧은 생애 동안 시대의 어려움과 가난함과 자신의 열등한 외모와 사제로서 언변이 부족한 어려움을 안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위해 자기를 내놓은 착한 목자의 표상이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 북녘 교회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